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시 | 심사평

 

모험인가, 안정인가.

이 진부한 질문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심사자들의 고충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들을 거듭 읽으며 느끼는 난감함은 대개 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안전하지만 신선함과 힘이 아쉽거나, 매력적인 시적 에너지를 갖고 있으나 세공능력이나 집중력 차원에서 불안한 경우가 많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응모자들이 세계를 시적 주관성의 지평으로 끌어들여 안전한 깨달음을 부여하는 관습적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창조적 위태로움의 기미가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는, 어째서 시의 언어가 사물과 대상의 현존을 더 깊이 통과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해 보이는 시편들이 있었다. 상상력이란 사물성과 실재의 배제가 아니라 그것과의 고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심사자들은 605명의 응모자가 보낸 작품을 한달간 나누어 읽고 대상작들을 선별했다. 그 결과 열한분의 작품이 일차로 선택되었다. 모두들 나름대로의 시선과 호흡을 갖춘 분들이지만, 심사자들을 공히 매료시킬 한 사람의 작품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호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주었던 몇몇 이름을 기록해둔다.

김해준은 정교한 상상력과 언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일부 작품에서 정서적, 문법적 과부하가 느껴졌으며 특정 기성시인의 영향도 감지되었다. 이기린의 이미지 구사능력은 「정물화」나 「스웨터」 같은 작품에서 화려하게 발현되지만, 그의 화자들은 불안의 핵심에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전형주에게는 「밀입국」 같은 매력적인 작품들이 있었으나 다른 시편들과의 편차가 생각보다 컸다. 그외에도 김복희, 이현미, 임요희, 장예준, 최호빈 등의 작품들은 곱씹어볼 만한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선택된 열한분 중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오병량, 하기정, 김재근의 투고작이었다.

오병량의 작품은 고르게 풍요로운 시적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의 내면이 스며든 문장들은 쉽게 결론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구절을 이룰 줄 알았다. 삶의 아스라한 안타까움이 유려한 서정성을 얻고 있는 점도 장점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상작으로 삼기에는 다소 무난한 느낌이었는데, 작품 전반의 회고적 감성이라든가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어조와 시선 등이 이유일 것이다. 때로 산문적으로 느껴지는 구절이 있으며, 행갈이와 문장의 호흡 등에서도 일부 문제가 느껴졌다. 시의 용량에 비해 시가 대체로 길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도 숙고해보았으면 한다.

하기정의 작품은 새와 나무의 상상력이라 할 만하다. 이 새와 나무 들이 현대적 감성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서식한다는 점이 이 응모자의 매력이었다. 투고된 몇몇 작품에서 보이는 활달한 상상력은 전통적 소재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저녁의 이사」 같은 작품에서는 단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모범적이며 안정된 시작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표준적 시작법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으며, 상대적으로 경쾌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문장이나 이미지 전개가 걸림돌이었다.

김재근에게는 연륜과 패기가 공존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자아의 힘을 바탕으로 유려하면서도 압도적인 언어를 생산하는 지점이야말로 이 응모자의 매력이었다. 다른 많은 응모자들이 다소 규격화된 해석의 지평에 머물러 있다면, 이 신인은 구체적 사물과 타자로부터 발원한 정념의 언어로 상상력의 진폭을 거침없이 확장하고 있었다. 무한을 바라보는 시선을 삶의 불우와 비루함에 겹쳐놓으며 자신의 문장에 닿고자 하는 직선적 열정과 고투가 느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흡을 규율하는 리듬감각과 함께, 때로는 제어가 필요하다 싶을 만큼 거칠게 느껴지는 감성이 공존하면서 시적 발화점을 마련하는 점도 호감을 샀다.

그러나 불안요소 역시 많았음을 적어두어야겠다. 시의 핵심에 육박해가는 집중력이 약해 다소 산만하게 읽힌다는 점, 일부 작품에서 시의 현실감이 빈약해 보인다는 점, 작품들 사이에 질적 편차가 있다는 점, 세공과 편집 차원에서의 미흡함 등은 심사자들을 마지막까지 괴롭혔다.

고심 끝에, 심사자들은 안정보다 모험을 택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안전한 완성태보다 위태로운 가능성 쪽을 지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결정이 ‘모험’이 아니라 우리 시의 풍요로움을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앞으로의 작품으로 확인시켜주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상쇄하는 어렵고도 달콤한 과제가 신인의 앞에 놓여 있다. 진심어린 축하를 보낸다.

나희덕 박후기 이장욱

 

 

 

시 |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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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1967년생. 부경대 토목과 졸업.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축하한다와 감사합니다만 반복하다 전화를 끊은 것 같습니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유등(流燈) 남강물결이 환합니다.

동굴 속 유배자 같았습니다. 토목과를 나온 ‘덕분’에 팍팍한 건설현장은 시와는 극과 극이었습니다. 주위에 책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캄캄한 막장에서 살기 위해 뭐라도 주워 먹듯 그렇게 글을 썼습니다.

이게 시일까, 시가 될까?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닿을지, 글이 흐르는 대로 무작정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는 스스로 진화(?)했고 저는 갈 데까지 언어를 자유롭게 풀어주었습니다. 이제, 더욱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시라는 멋있고 거친 붉은 바다를 헤쳐갈 튼튼한 노 하나를 쥐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창비의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시의 회초리로 저를 때리신 김양헌 선생님께, 부족한 저를 아직까지 걱정해주시는 문충성 선생님의 쾌유를 기원하며 이 영광 모두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 심사평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아래, 문학마저도 상업주의 경쟁에 발목을 잡혀 예외적으로 비껴갈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현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가를 꿈꾸는 문청들의 뜨거운 열정은 전혀 사그라질 줄 모르고, 문학 본연의 모습에 대한 탐구를 이번 창비신인소설상 응모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뭔가 아이러니한 상황임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주제 면에서 이번 응모작들의 주된 흐름을 돌아보면, 낯선 형식의 시도나 몇년간 유행처럼 번졌던 문화코드를 소재로 한 칙릿, 판타지 및 SF 같은 장르와의 연결이 조금은 느슨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대로 가족서사, 비정규직이나 청년실업 등 사회현실과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 작가의 스타일이나 유행에 경도된 작품이 줄어들고, 자신만의 색깔과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색이 반영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분명하다. 진정한 소설의 위력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인 풍경 안에 있음을, 새롭고 특이한 스타일의 유형에 있지 않음을 확신할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올해로 13회째를 맞은 창비신인소설상에는 437명의 응모자들이 910편의 작품을 보내주었다. 심사자들은 응모작을 한달간 나누어 읽고 집중적으로 논의할 대상작을 선별했다. 그후 선택된 10인의 작품 21편을 돌려 읽고 수상자를 가릴 회의를 진행했다. 최종까지 남아 논의된 응모작은 이중섭의 「숨은 벽」, 정세랑의 「영원히 66사이즈」, 최민석의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황성윤의 「아내가 상어에게 물렸습니다」 이상 네편이다.

이중섭의 「숨은 벽」은 세밀한 묘사를 중심으로 한 탄탄한 문장력과 주제의식이 장점으로 읽혔다. 장례식장 풍경을 정밀하고 찬찬하게 그려나간 묘사력이 부각되었지만, 그것을 풀어내고 주제를 승화시키는 방식의 진부함이 아쉬웠다. 황성윤의 「아내가 상어에게 물렸습니다」는 사소한 소재를 개성적으로 변주하는 힘이 있으며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다소 힘에 부치는 듯 서사 장악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 흠으로 남았다.

정세랑의 「영원히 66사이즈」와 최민석의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놓고 수상작을 가릴 심도 깊은 토론이 길게 이어졌다. 두 작품 모두 진지하고 내밀한 현실의 주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으며, 자신만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작품 장악력과 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두 개성 사이에서 심사자들은 심사숙고해야 했다.

「영원히 66사이즈」는 유쾌한 흡혈서사라는 기발함과 소설의 짜임새에서 후한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장르적 기법이 소재적인 활용에 그치지 않는가라는 우려와 더불어 함께 응모한 작품의 고르지 못한 완성도도 흠으로 작용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건필을 바라기로 했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는 서사적 활력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이 다루는 이주노동자의 소외된 삶은 익숙하고 진부한 소재다. 그럼에도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화법으로 끝까지 읽게 만드는 필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애틋함과 따스함은 이 소설이 인물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세상과 막연히 화해하지도 않으면서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보여주었다. 화자의 시선이나 화법 등에서 이 작가가 이미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수상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축하하며 좋은 작가가 되길 바란다.

김영찬 백가흠 백지연 임규찬 편혜영

 

 

 

소설 |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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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1977년생.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업.

 

 

 

당선이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몸에서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곳은 십이지장이었다. 당선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음식물을 태연하게 소화시키기에는 십이지장부터 짐짓 놀란 눈치였다.

나는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를 응모한 후, 이 작품은 절대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쓸 때는 뭔가에 홀린 듯 약 세시간 동안 미친 듯이 초고를 완성했고, 며칠에 걸쳐 퇴고했다. 그러나 정작 응모한 후 차분히 읽어보니, 스스로 만족할 만한 글이라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 소설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한평생 겸손하게 살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그리고 공교롭게 나는 창비로부터 ‘당신, 앞으로 쭉 겸손하게 사십시오’라는 뜻이 담긴 전화를 받았다. 나는 문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문학에 큰 뜻을 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즐겨 읽어왔던 수준 높은 독자도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쓴 후에도 단편소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해, 기존 작가들의 단편 몇편을 읽고 나서 아연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내가 끼적거렸던 몇편의 단편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이었다. 나는 격하게 말하자면 몇개월 동안 꽤나 꾸준하게 체계적인 ‘삽질’을 해왔던 것이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파악한 기성 작가 혹은 신인상 수상자의 단편소설이란 요컨대 1) 작은 주제를 택해야 하고 2) 그 주제를 천착하여 작은 스토리를 쭉 밀어붙어야 하고 3) 인물간의 대사를 절제해야 하고 4) 열린 결말로 끝을 맺어 무엇을 읽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쓴 단편들은 대부분 매우 거시적인 주제들이었고, 스토리가 복잡했고, 대사가 난무했고(마치 희곡처럼), 결말이란 폐쇄적일 정도로 닫혀버린 것들이었다. 그나마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가 이러한 나의 문제점들을 약간이나마 벗어나긴 했지만, 큰 맥락에서 보자면 비슷한 문제점들을 답습하고 있었다. 고로, 나는 이 작품의 수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은 내 인생 세번째의 단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발견한 문제점들을 고치며 꾸준히 써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던 차에 수상작 결정 소식을 들었다. 고로, 현재로서는 앞으로 써야 할 방향이 약간 헷갈려져버렸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내가 지향하는 문학은 바로 ‘항문 발모형 문학’이다. 어릴 때 그랬다.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난다”고. 나는 무엇이 맞는 문학의 방향인지, 소설의 요체가 어떤 것인지, 문체의 요강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지난 몇개월 동안 체득해온 글쓰기의 습관을 꾸준히 실천할 요량이다.

해가 뜨면 눈을 뜬다. 한시간 동안 명상을 하며 글쓰기의 감을 충전하고, 아침이 주는 맑은 이성을 동원하여 글을 쓴다. 오후에는 달리고, 해가 떨어지면 절대 일을 하지 않는다. 언제 포기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난 8개월간 지켜온 원칙이고, 앞으로도 이 원칙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끝으로 당선을 결정해준 심사위원들과 문학청년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준 창비와, 나를 키워준 부모님과 선생님들, 백수청년을 격려해준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가장 큰 영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린다.

 
 

  

평론 | 심사평

 

올해 신인평론상 응모작은 예년과 엇비슷하게 모두 20편이었다. 시 비평이 강세를 보인 가운데, 소설론인 선주원의 김중혁론은 작품에 대한 차분하고 꼼꼼한 설명이 눈에 띄었다. 김중혁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감하면서 타자 지향의 서사를 다양한 맥락으로 읽어낸 점도 높이 살 만했다. 하지만 판단과 평가에 기투(企投)하는 비평의 패기와 엄밀함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비평이 ‘해설’을 도외시해서는 물론 안되지만 텍스트의 올을 푸는 것으로 시종하는 읽기만으로는 비평이 독자와의 공감대를 넓히기 힘들 것이다.

시 비평들은 한결 활력이 있었다. 황동규론인 김영범의 「‘자가 치유’의 시학, ‘흔들림’의 연대기」와 김경주론인 허준행의 「감각적 경계인의 정치적 사색」은 모두 나름의 비평적 미덕을 갖춘 평문이었다. 황동규의 시세계에서 난세의 떠돎이라는 모티브를 추출해 그 떠돎의 시적 맥락을 다각도로 분석한 김영범의 경우 문체의 유려함과 성실한 읽기가 돋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 분석대상과의 비평적 거리를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시에 박힌 ‘무늬’를 따라읽는 데 치중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허준행은 시적 위반과 탈주를 시인의 양식상의 실험과도 연관지으면서 김경주의 전위성을 천착한 평문이다. 재기발랄한 화법은 주목할 만했고 나름의 문제의식도 뚜렷했으나 무리한 논리전개와 추상적인 분석이 흠으로 남았다. 논자의 ‘지식’이 텍스트를 짓누르는 양상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겨졌다.

끝까지 남아 심사위원들이 숙고한 응모작은 문성욱의 「고통의 서정—정재학론」과 윤인로의 「꼬뮌의 조건—버추얼리즘의 문학을 앓기」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정재학의 시세계에 돌입한 문성욱은 시에 대한 세심한 해석을 선보였다. 난해하면서도 기괴해 보이는 시세계에 대한 탐침이 끈질긴 물음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가 과연 기존의 ‘독법’을 모두 회의하게 만들 만큼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일까 하는, 어쩌면 평문의 기본이 되는 의문이 빠진 것은 문제로 남았다. 또한 정재학의 시가 일부러 찢고 뒤틀고 변형시켜놓은 이미지들을 어느 대목에서는 너무 정합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고한 김현의 문제의식을 살려 오늘의 작품에 직핍하고자 하는 윤인로의 응모작은 척도 및 단언으로서의 비평과 거리를 두고 비판의 균형점을 곡진하게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삼을 만했다. 자신이 설정한 논제의 핵심에 들어가기까지 ‘사설’이 길고 그의 의도와는 달리 김현이라는 이름이 비평의 또다른 절대적 척도로 사용되고—실제 김현보다 더 큰 ‘김현’을 만들어내고—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감상(感傷)에 가까운 수사도 걸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을 앞에 두고 ‘물음을 앓는’ 자세는 그런 한계를 상당 부분 상쇄해주었다. 특히 박영근 시인의 작품을 단언하는 비평에 대한 반박이 인상적이었다.

요즈음 한국평단도 풍요 속의 빈곤이 적지 않다.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은 ‘구도(求道)’로서의 비평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 구도의 길을 정신의 자유로움으로 감당하는 것도 비평의 본분임을 되새기며 수상자에게는 축하인사를 건네고 응모자 여러분들의 분발도 아울러 기원한다.

임홍배 유희석

 

 

 

평론 | 수상소감

 

6344

윤인로

1978년생. 동아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제 글은 최선을 다해 쓴 것이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때때로 어떤 비참함을 느낍니다. 최선을 다한 화장이 여중생의 화장술이라는 걸 알아차릴 때처럼, 애써 골라 입은 양복이 앳된 남학생의 걸맞지 않은 옷차림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될 때처럼, 저의 글은 그렇게 알아차린 이들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여중생이며 남학생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 여학생의 화장술은 날로 나아질 것이며, 남학생의 외출은 잦아질 것입니다. 저도 더디게나마 그렇게 쓰게 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화장과 옷차림처럼 제 글이 그렇게 나아지리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좀 비극적이지만, 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그 비극 속에서 ‘꼬뮌의 조건’이라는 제목의 연작비평을 써나가려 합니다. 꼬뮌주의자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그 곁을 지키는 ‘좋은 동반자’가 되고 싶어 그런 글쓰기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몇몇 이유로 그들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우정의 인사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과 뜨겁게 만나려고 노력할 것이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또다시 어떤 낭패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위의 단락은 독자를 정하지 못하고 쓴 것입니다. 지금 쓰는 이 단락은 독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재미없는 글을 거듭해 읽으셨을 심사위원 두분께. 물음을 앓는 비평의 태도를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그것은 드문 격려였습니다. 언제나 나를 갈구(하)는 선배, 전성욱에게. 근래에 나를 힘들게 했던 질문 하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형이 나를 위해 흘린 눈물에 대해, 그 마음의 깊은 운동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을 여기 이렇게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에게 하나의 작은 응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 질문은 새로운 질문이 아니라 오래된 질문이었으며, 동시에 형과 내가 서로에게 던질 미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 질문하기 위해 형이 술을 좀 줄였으면 합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내 유일한 친구였던 민재에게. 너를 떠올리는 지금, 또다시 눈물짓는다. 너의 고통을 섬세히 듣지 못한 나는 무뎠고 모질었다. 그런 나는 어쩌면 고통이라는 단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걸 자각하도록 이끈 게 너다. 고맙고, 미안하다. 모든 응어리로부터 이제는 놓여났기를, 이미 영원한 평온 속에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