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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테리 이글턴 『이론 이후』, 길 2010
문화이론은 윤리를 발명할 수 있는가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shkim@swu.ac.kr
이글턴(T. Eagleton)은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독재정권과의 싸움과 민주주의제도의 안착에 진보적 주체의 동력이 집중됐던 1980년대와 90년대 초의 한국사회에서 맑스주의 비평가 이글턴의 자리는 초라했다. 현장의 무기로 이용되기에 그의 개념들은 서구의 후기근대적 현실에 (비판의 형태로) 밀착되어 있었다. 역사의 진보를 옹호해줄 사상을 찾던 사람들은 이글턴 같은 신좌파보다 차라리 청년 맑스나 레닌과 그 주변의 공산주의자들, 쏘비에뜨 러시아의 유물변증법, 혹은 해방신학에 눈을 돌렸다. 문학을 인간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하던 사람들은 문학을 실천적 주체가 탄생하는 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혹은 ‘문학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는 이글턴을 미심쩍게 바라보았고 그를 레이먼드 윌리엄즈로부터의 후퇴 또는 알뛰쎄르의 아류 정도로 간주했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도 그에게 할당된 초라한 자리는 그대로였다. 여기에는 『이론 이후』(After Theory)의 번역자 이재원(李在原)이 자상하게 소개하는 국내외 좌파 문화연구의 내부사정도 한몫을 하지만(309~35면), 근본 원인은 그의 담론이 급격히 변화한 한국사회 전반의 지적 풍토와 또다시 엇나간 데 있을 것이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원전(原典)’의 성스러운 아우라를 지녔던 맑스와 레닌의 저작을 내려놓고 푸꼬, 데리다, 들뢰즈, 라깡, 버틀러, 스피박 등이 주 메뉴로 올라온 ‘이론의 뷔페’를 즐기기 시작한 새 시대의 독자에게, 여전히(!) 이데올로기론을 설파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을 아이러니의 논조로 꼬집는 이글턴은 눈길은 한번 줄 만하지만 구미가 썩 당기지는 않는 대상이었다. 90년대 이후 프레드릭 제임슨이나 지젝, 네그리 같은 이론가들이 국내에서 누려온 폭넓은 관심을 고려하건대 이글턴의 상대적 ‘부진’은 단지 한국의 지식인이나 시장이 좌파를 외면한다는 데서 비롯된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 ‘여전함,’ 그러니까 포스트모던 계열로 분류되는 사상들과의 어떤 접속이나 연대도 거부하는 한편, 맑스주의의 갱신을 꾀하기보다 그 전통을 방어하는 데 진력하는 이글턴의 이론적 충절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충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배반해야만 합니다”(『이론 이후 삶』, 민음사 2007, 25면)라는 데리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아니었다.
『이론 이후』는 이러한 이글턴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시도가 제대로 결실을 맺을 경우 그가 한국의 지식사회와 맺는 관계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책이다. 한국의 독자를 위해 따로 쓴 서문에서 이글턴은 두가지 관심사를 드러낸다. 하나는 “이론의 손익계산서를 작성”(8면)하는 것으로, 60년대의 급진적 문화이론이 80년대의 대중문화이론으로 탈바꿈하면서 문화가 정치를 대체하게 된 과정을 돌아보고 문화이론의 공과를 따지는 작업이다. 이는 저자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논리를 다시 한번 조목조목 반박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 하나의 관심사는 “기존의 이론이 풀지 〔못한〕 문제”(7면, 이하 〔 〕 안은 평자가 인용의 편의를 위해 수정한 부분)를 다루는 것으로, 덕과 도덕, 사랑, 죽음, 비존재 같은 윤리적 주제를 문화이론의 새로운 대상으로 제기하는 작업이다. 『이론 이후』는 번역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글턴의 “윤리적 전회(轉回)”(339면)를 알린 첫번째 책이다. 여기에는 『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 2007), 『이성, 믿음, 혁명: 신에 대한 논쟁에 관한 고찰』(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2009; 국내에는 『신을 옹호하다』라는 제목으로 2010년에 소개됨), 『악에 대하여』(On Evil, 2010) 등 이어지는 저작에서 전개될 이글턴의 ‘윤리론’이 압축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론 이후』의 두가지 관심사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여덟개의 장을 반씩 분점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1~4장에서 낯익은 이글턴(맑스주의 문화이론가)을, 5~8장에서 다소 낯선 이글턴(윤리학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낯선 것은 물론 이글턴과 윤리적 주제의 결합이지 덕이나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아니다. 다른 데서 들을 수 있는 윤리 강의를 굳이 이글턴에게서 들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책이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되느냐 마느냐는 이글턴의 두 분신이 과연 온전히 ‘합체’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덕, 사랑, 죽음 등의 문제는 과연 맑스주의 문화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이 공동체의 운명과 자연스럽게 연관되고, 보편적인 것이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 되며, 윤리가 곧 정치가 될 수 있는가? 요컨대 문화이론은 윤리를 발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지식사회의 맥락에서도 절실하다. 우리의 근대화 과정이 그랬듯이, 80년대 민주화투쟁의 막바지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식사회가 서구의 문화이론을 받아들인 과정은 대단히 급격하고 혼란스러웠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각종 이론은 양질전화의 법칙에 따라 어느 순간 육체를 이탈한 정신이 되었고 학계는 사회와 격리되었다. 소화되지 않은 이론의 잔해가 쌓여갔고 그 가운데는 정치적이지 않은 윤리, 윤리적이지 않은 정치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우리로서도 이제 “이론의 손익계산서를 작성”(8면)해볼 시점에 와 있다. 그런데 ‘손익’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 문제다. 이글턴의 경우는 기준이 비교적 명확하다. (경쾌한 아이러니의 문체는 그 명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도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꺾고,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린 것은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이다”라든가, “정체성의 불안정성이 ‘전복적’이라…… 사회에서 내쳐지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을 시험해보면 정말 흥미로울 것이다”(32, 33면)라고 말할 때 그 기준은 현실의 경험이다. 한편 “우리는 정치계의 우파들이 전지구적으로 활동하고 포스트모던한 좌파들이 지역적으로 사유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109면)면서 ‘거대서사’의 악마화를 비판할 때는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현실, 즉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와의 대면이 관건이다. 이런 촌철살인의 비판을 이글턴의 책에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데리다의 ‘해체’나 탈식민주의를 포함하는 기존 문화이론의 ‘손익’을 이런 기준으로만 따질 때 일체의 ‘포스트모던’한 사유를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환원하는 길이 열린다. “반본질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옹호자들과 마찬가지로 본성 개념을 경계한다”(166면). 이런 유비(類比)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본질을 싫어하며 “혼합과 다원성을 사랑”(168면)한다는 말은 (특히 세계화의 단계에서는)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질주의자가 언제나 자본주의에 적대적이지는 않듯이, 반본질주의자가 꼭 자본주의의 옹호자들과 ‘마찬가지’의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글턴이 이 점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유연한 본질주의—“본질주의가 전적으로 옳”지만(263면) “본성이 영원히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168면)—가 어떤 반본질주의자(가령 데리다)의 명제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태세는 아니다.
이론적 ‘손익’의 기준이 모두가 동의할 어떤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미리 준비된 공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론(그리고 그 기초가 된 철학적・문학적 전통)의 성취에 눈감지 않으면서 새로운 보편적 담론을 세워가는 과정 속에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모든 이론을 통합한 보편이론을 만들자는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맑스주의자라면 그에 걸맞게 맑스주의의 근본전제들을 새로운 현실과 다른 이론들에 비추어 다시 점검하는 가운데 이제껏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해석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리에 대한 이글턴의 새로운 관심은 반길 일이다. 단지 ‘전회’로서가 아니라 맑스주의를 더욱 적실하고도 풍요로운 이론으로 재탄생시킬 ‘기회’로서 말이다. 그러나 『이론 이후』만 두고 보면 아직은 이런 면의 성취를 논하기 어렵고 이는 이후의 ‘윤리론’ 텍스트들을 같이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글턴의 윤리 담론에 맑스주의 문화이론과의 접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담론이 맑스주의 고유의 장점을 드러낸다든지 맑스주의 문화이론의 영역을 넓혔다고 말하기는 무리다.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있”으며(168면) “기능적이지 않음이 우리의 기능”(169면)이라는 말은 맑스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이글턴이 낭만주의자의 후예로 즐겨 언급하는 D.H. 로런스에게서 들었어도 놀랍지 않을 말이다. 우리가 “서로의 자기실현을 위한 계기”가 되는 “정치화된 사랑” 또는 “총체적인 호혜성”(172면)의 원리는 사회주의 윤리의 핵심일 수 있지만 독일 낭만주의 신학자로서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비난에 시달렸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공동체주의도—그의 종교적 언어를 세속화해보면—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육체의 회복과 부의 급진적인 재분배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251면)는 주장은 이 책의 ‘윤리론’에서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우리의 육체는 “종의 육체”(species-body, 227면)며,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처럼 부의 과잉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육체를 다시 발견하면 타인의 비참함을 느끼게 되고 그들과의 정치적 연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비참한 처지에 빠졌을 때 연대의식이 저절로 따라오는지, “재산의 과잉”과 “턱없이 부족한 재산”(252면) 사이의 적정선은 어디인지, 타인의 비참함에 공감하는 일과 “삶 자체를 온전히 실현〔하는〕 삶”(165면)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여전히 해명되어야 할 물음에 속한다.
물론 물음을 남기지 않는 책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다. 이글턴은 『이론 이후』가 한국에서 “논쟁을 자극”(8면)하기를 기대한다. 각종 포스트주의의 횡포에 넌더리난 독자가 이 책을 무기로 반격에 나설 수도 있고,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저자의 담론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취해 자기 나름의 윤리론을 펼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책에 대한 더 좋은 대접은 저자가 하지 않은 말, 즉 책이 남기는 물음들을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아닐까. “급진적인 문화이론이 일부러 모호해지려고 하는 것은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116면)이라는 소신을 완벽하게 실천에 옮긴 저자, 그리고 성실한 각주로 의도되지 않은 모호함을 최소화한 옮긴이 덕분에 문장 이해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의를 건너뛸 수 있다는 점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