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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완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새봄 살구꽃이 필 때마다, 박완서 선생님

 

 

윤영수 尹英秀

소설가 yeongsuyoon@hanmail.net

 

 

7281박완서(朴婉緖) 선생이 돌아가셨다.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선생이 묶으신 마지막 책이 되었다. 선생의 작품 제목들이야 산뜻하면서도 함축미가 있지만 이번 산문집 제목은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선생께서 마치 우리 곁을 떠나시려고 마음의 채비를 끝내신 것 같기도 하다.

기실 선생의 ‘못 가본 길’은 학문의 길, 대학에 입학하던 1950년에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학자로서의 길이다. “일생 중 가장 빛나는 시기에, 가장 향기로운 시기에” 가족의 끔찍한 죽음을 겪어야 했고, “원통해서, 남 안 듣는 곳에서 실컷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으로” 글을 써서 소설가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소회를 밝히셨다. 내가 보기에 선생은 학자가 되었어도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으리라.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당차고, 한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는, 선생의 표현으로 ‘집요하고 고약한 성미’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내 생애의 밑줄’ ‘책들을 위하여’ ‘그리움을 위하여’의 3부로 나뉜 책 내용 중 특히 1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잔디밭에 누우면 부드럽고 편안한 흙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꼼지락대는 듯한 탄력이 느껴진다. 씨를 품은 흙의 기척은 부드럽고 따숩다. 내 몸이 그 안으로 스밀 생각을 하면 죽음조차 무섭지 않아진다”(「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라든지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내 식의 귀향」) 등 솔직하면서도 우아한 노년의 관조가 풍요롭다.

물론 이 산문집에도 당신의 혈육과 젊은날을 송두리째 앗아간 전쟁의 참상과 상흔은 여전하다. “가슴 속의 상처가 아물까봐 딱지를 쥐어뜯어가면서도 싱싱한 피를 흐르게 한다” 하던 선생의 결연한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평생 나태해질까 경계한 치열한 작가정신 또한 그대로 살아 있다. “인간의 참다움은 보통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이지 잘난 사람들이 함부로 코에 걸고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진실인가. 말로 표현된 것의 자유와 한계, 읽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조작한 이미지, 경박한 과장, 분식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유년의 뜰」), “신이 나를 솎아낼 때까지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정신의 탄력을 잃고 싶지 않다”(「내 생애의 밑줄」), “책 팔아 돈푼도 만지고 길에서 사인해달라는 독자도 생기게 되니, 대가라도 된 양 자족하는 나 자신에 대해 욕지기가 난다”(「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라고도 말씀하신다. “이청준의 문장이 작가의 감정과 느낌을 절제하여 독자들에게 작가 개입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의도로 치밀하게 쓰인 반면, 나는 작중인물에 감정적 개입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쓰는 작가였다”(「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라고 당신의 글쓰기를 돌아보기도 하신다.

개인적으로 선생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있었지만 사실 나는 선생께 다가서지 못했다. 내 작품집에 대해 칭찬과 격려를 해주셨음에도 나는 선생이 어려웠다. 투명하면서도 견고한 갑옷을 두른, 누구의 어떤 작은 공격도 용납하지 않으실 듯한 눈빛과 기세,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선생이 두렵기까지 했다. 선생과 가깝게 지내는 문인들을 보면 도리어 그분들이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얌전하고 나약해 뵈는 선생의 겉모습과는 반대로 작품 속에 날카롭게 벼려진 선생의 실체가 너무나 거침없어서, 그리하여 어느 순간 선생께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작품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이어서 아마 나는 겁이 났으리라.

“소설은 다만 이야기일 뿐”이라는 선생의 소설에 대한 정의도 내게는 다소 불만이었다. “남들은 잘도 잊고 잘도 용서하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상처도 감쪽같이 아물리고 잘 사는데 유독 억울하게 당한 것 어리석게 속은 걸 잊지 못하고 어떡하든 진상을 규명해보려는 집요하고 고약한 내 성미가 훗날 글을 쓰게 했고 내 문학정신의 뼈대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경험제일주의도 나로서는 흡족하지 않았다. 소설 행위란 적어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지적(知的) 행동’이라든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진리의 한조각을 발굴해내는 행위’, 뭐 그쯤은 되어야 하지 않나, 꾹꾹 속으로 삼키고는 혼자 배탈이 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일련의 불만은 선생의 당당한 작품활동에 기죽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방편, 주문(呪文) 비슷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은 다만 이야기일 뿐’이라는 선생의 말씀은 서두에 지나지 않았다. 그뒤에 이어지는 말씀, “나는 내 이야기에 우리 어머니가 당신 옛날이야기에 거셨던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건다”가 본론이었다.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설을 대하는 독자들의 정신적 치유다. 선생의 ‘다양한 효능’이야말로 소설의 의미이자 존재이유 아닌가.

끝없이 속으로 볶이면서도 나는 박완서 선생의 글을 대할 때마다 감탄을 거듭했다. 수십 수백번 되풀이된 전쟁의 참혹함, 그 억울함을 또 지치지 않고 늘어놓으시는데도 나는 어느새 선생의 소설에 빠져들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야기를 꾸려가는 천부적 재능, 선생의 명료하고 현대적인 문장의 매력은 정말 대단하다. 아름답게 꾸며진 말들, 감정들을 선생은 가차없이 ‘밍크 목도리’라고 규정하신다. “그 자신 생명도 없으면서, 죽었으면서, 요염하고 오만한 밍크의 허위.” 얼마나 정확하고 예리한가. 또한 인간으로서 결코 쉽지 않았을 시련들을 겪으면서도 “참혹한 불행 속에서도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마디로 잘라버리는 당신의 오기와 깔끔함, “아물었으되 아직 피 흘리고 있음을, 잘 차려입었으되 헐벗었음을, 춤추고 있되 몸부림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는 진솔함을 두고 어떻게 선생의 책을 중도에서 덮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박완서 선생을 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내신,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 깔끔함을 존경한다. 결코 강건하지 못했던 육신과 평생 타협하면서 끝내 글쓰기를 놓지 않으신 그 불굴의 정신력을 존경한다. 금속의 갑옷을 두른 듯 차가우신 선생, 스스로를 담금질하여 글 속에 녹이던 그 뜨거우신 선생, 당신이 겪으셨던 인간으로서의 가혹한 운명까지 나는 존경한다. 선생이 그렇게 끝끝내 당신의 삶을 거머쥐셨기에 선생은 아름답다. 그리하여 그 딱딱한 가지를 뚫고 의연히 꽃망울을 틔우는, 당신이 즐기던 살구나무의 꽃 한송이가 되셨다. 새봄, 연한 붉은색의 살구꽃이 필 때마다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선생을 떠올리고 눈시울을 붉히리라.

이제 글쓰기로부터 놓여난 선생은 환히 웃고 계실까.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내 할 일은 백프로 다 하고 왔어요. 저 밑 세상을 한번 내려다보시라고요. 내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먼저 떠난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안겨 지금쯤 선생은 응석이라도 부리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