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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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강

1971년 대전 출생. 상명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kkori71@naver.com

 

 

제6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푸른 꽃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이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호텔 캘리포니아

 

 

오늘밤 당신은 자전거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빠

첫사랑의 둥지가 머나먼 기억으로 실족되어 떨어진, 그 남자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자막처럼 흘러서 내리는 밤이니까요

 

불충분한 가난과 설익은 연애 때문에 난 어쩌면 시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헤프게 첫인상 흘리며 다 닳아빠진 절개로 활활 접속하고 싶은 서정도 있었지만 서정시보다 더 빨리 부패하는 건 없다고 내 안의 박테리아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요 그러니 사랑이여,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시적’인 거리감을 위해, 이혼해드릴까요

 

오늘밤 나는, 차라리 혀를 꽉 깨물고 싶었던 첫키스의, 찢어진 청바지의, 노랑브리지의 호텔 캘리포니아

 

혹시라도 쓸쓸한 그대, 측은측은 어둠으로 젖어드는 이 거리의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뒷문 열면 보이는 당신의 구멍가게처럼 나는 있어요 한 남자의 생에 투숙해 살면서 세상에 도청당하는 여자들이 그물처럼 떠다니는 황혼의 거리에서 365일 영화는 상영하지요 주홍글자는 불황이 없어요

 

그러니 그대,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오늘밤 당신은 아빠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자전거

 

 

 

여행

 

 

나는 지금 발칸반도 같은 너의 몸을 더듬고 있어

너무 추워 자꾸만 필터를 껴입고 무너져내리는 가슴으로 한풍은 날아들고 나는 장송곡처럼 나부낀다

 

시청률이 높은 채널을 향해서만 배고픈 부리를 쪼아대는 여기는 북위 37도, 정치면 사회면 고급주의 침 튀기며 하루해가 시끄럽다 하늘 위엔 냉소의 벽에 환조처럼 묶여서 이주민처럼 흘러다니는 구름들, 박제된 새처럼 자유롭고 바람은, 체지방처럼 무겁게 흘러내리는 삶의 이목구비를 지나 삐걱삐걱 이가 뒤틀린 생의 토대 위로 속보처럼 달아나버린다

 

논문처럼 잘 재단된 생의 어디쯤에서 전복된 나는, 파란불이 아니면 삶을 가로지를 수 없는 내 애증의 강 같은 너를 거룻배로 흘러서 간다 관계는 존재, 존재는 때로 슬픔, 그 슬픔을 딛고 찬란히 일어서는 협곡의 밤들 다 건너면 폐병환자처럼 검고 메마른 호흡의 절벽

 

나는 지금 입구가 없는 시간의 거리에 서 있어

발칸반도 같은 네 허리토막을 끌어안고 아주 두껍고 예민한 허기가 되어버린, 이 진화의 힘으로

 

 

 

착시

 

 

가령 우리는

연애시보다 더 간절했지만

정말 꽃이 아름다운 건지

상투적으로 피고 지는 일에

너무 많은 감탄사를 허비해서

서른도 채 되기 전에 주머니가 털린

허무처럼,

뽀개면 줄줄 쏟아졌다

잡음뿐인 턴테이블 위에서

우물쭈물 한쪽 발을 빠뜨린 채

휑하니, 한소절은 돌아가고 돌아오고

휘파람 부르며 즐겨찾기로

아무튼 사랑했지만

가령, 아무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씰크絲 화려한 내 이불 속의 남자들과

연극적으로 부둥켜안고

눈꺼풀에 푸른 성에를 덮은 채

토실토실 부어오른 낭만적 엉덩이를

한껏 흔들어대면서

오기처럼 시야를 벗겨먹던

구불구불 공복의 시간

 

 

 

시구문(屍口門)

 

 

이 세상과 딱 한번 연애를 하고 그녀는 죽었다 검색창 앞에서 끊임없이 고문당하고 영락없는 지도 속의 사물처럼, 빵빵 플래시 터지는 피사체 안에서 분명하게 사진 찍혀 현재가 죽고 유년이 죽고, 잉태 직전의 그 모든 것들은 얼굴이 벗겨진 채 태반을 떨구며 죽어나갔다. 허묘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톱에 수런수런 뜯겨나가는 살점, 살점의 유전자를 타고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오천년의 뼈대가 가루가 되어 까맣게 재를 날린다 기억이 추상으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이건 리얼리즘이야!

 

랜을 타고 날아다니는 동물적 감각은 데시벨이 끝내주게 높다 자, 오늘은 누구를 화형시킬까 킁킁거리며 시구문을 달리는 초고속의 사회적 떼거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