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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세계문학, 동아시아문학, 한국문학
백지운 白池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다.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평론집 『떠도는 목소리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다.
이현우李玄雨
한림대 연구교수, 러시아문학. 저서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책을 읽을 자유』 등이 있다.
김영희金英姬
문학평론가. KAIST 교수, 영문학. 저서로 『비평의 객관성과 실천적 지평』 『세계문학론』(공저) 등이 있다.
김영희 (사회) 반갑습니다. 오늘 대화의 주제는 지금의 세계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입니다.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개념도 복잡하고 폭넓은 주제지만, 전공이 다른 네 사람이 서로 보완해가면서, 이론적인 문제도 짚어보고 비교적 최근에 발표되거나 소개된 작품들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좌담의 규모상 작품은 동아시아, 그중에서도 한・중・일의 몇몇 소설에 국한하기로 했는데, 일본문학 전문가를 모시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만, 작품을 선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분들의 도움도 구했었지요.
지난 2007년 『창비』 겨울호에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는데, 윤지관(尹志寬) 임홍배(林洪培) 두분의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에서 이 문제에 관련된 주제를 두루 다룬 바 있습니다. 그후 창비에서는 이 특집을 발판으로 얼마 전 『세계문학론』(창비담론총서 4)이라는 단행본도 냈는데, 저와 이현우 선생님이 여기 참여했죠. 그밖에도 영미문학 학술지 『안과밖』의 작년 하반기 특집 ‘세계문학을 다시 묻는다’와 각종 학술대회 및 국제문학인회의 등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심진경 선생님이 편집위원으로 계시는 『자음과모음』이나 『세계의 문학』에서 중국 및 일본과 작품 교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을 염두에 두면서 논의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발전시켜보자는 것이 오늘 대화의 주된 취지입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세계문학담론이 부각되는 현상과 그 배경에서 대해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세계문학담론의 부상
심진경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세계문학론의 출발점이 결국 ‘한국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한국문학을 단지 자국 내에 제한된 국지적 차원의 문학이 아니라 좀더 넓은 지평에서 사유해보자, 기존의 문제제기를 새롭게 구성해보자라는 것으로요. 그런데 왜 굳이 세계문학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창비에서 나온 『세계문학론』에 실린 여러 글을 보면 세계문학은 고정불변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민족문학의 개입에 따라 그 판단기준이나 보편성의 의미가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개념이고, 그런 차원에서 운동이나 실천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요. 과거 민족문학론이 창비의 주요 문학담론으로서 활기를 띠었는데, 그것이 시대 변화에 적응하면서 지구화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한 방법론으로 세계문학론을 제기하고 자기갱신을 시도한다라는 느낌도 받거든요.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학 자체가 아니라 한국문학의 현실인 것 같아요. 지금 한국문학의 현실에서 출발하지 않는 세계문학론이라면 허구적인 이론적 구성물에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그런 거대한 틀을 들이댔을 때 한국문학이 제대로 논의될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듭니다.
이현우 저도 한국문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한데, 이념이나 담론으로서의 세계문학은 보편적인 문제제기라기보다 굉장히 독특한, 한국적인 시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러시아나 여러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세계문학이란 용어가 세계문학론으로서 구체화된 사례는 아주 드문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도 러시아문학과 외국문학을 합쳐서 세계문학이라고 개념을 잡고 있거든요. 백낙청(白樂晴) 선생이 쓰신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는 것은 상당히 새로운 관점이에요. 아마 그런 용어를 처음 만들어내신 게 백낙청 선생이 아닐까 싶어요. 서구에서 세계문학을 보는 시각과 우리의 시각이 다른데, 그건 단적으로 한국어가 마이너 언어이기 때문에 갖는 문제의식이거든요.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우리보다는 그런 부담이 덜하지 않나 생각해요. 우리가 세계문학에서 지분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의식이 있는 듯싶어요. 그 경우에 우리가 세계문학에 참여한다면 어떤 언어로 참여할 것인지도 문제입니다. 물론 한국어로 참여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영어나 불어, 독어 등 서구언어로 번역된 작품으로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단기준이 된다면, 세계문학담론의 구성 자체에 우리의 상대적인 콤플렉스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백지운 세계문학론의 제안이 한국문학에 대한 고민과 관련되어 있다는 두분 말씀에 저도 동감이에요. 문제는 한국문학을 새롭게 보는 틀이 왜 세계문학이냐인데, 최근 창비 바깥에서도 세계문학에 대한 제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신승엽 선생이 민족문학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적 대안으로 제기한 게 있지요. 과거 주류담론으로 자리했던 민족문학론이 더이상 한국문학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동질화라는 새로운 현실이 세계문학이라는 시야를 요청한다는 것이죠.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에는 60년대 백낙청 선생이 제기했던 시민문학으로 되돌아가자는 논의도 있었어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 문제의식의 출발점엔 동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족문학론의 시의성이 사라진 건 분명한데 민족문학에 대한 각 층위의 대항담론들까지 함께 사라지면서 한국문학계는 오랫동안 담론의 진공상태였거든요. 이 진공상태를 돌파하려면 역시 민족문학론의 하강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지요. 아무튼, 우리 삶의 현실, 우리 문학의 현실을 어떤 틀로 이론화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고, 그것을 돌파하려고 모색하던 중에 세계문학론이 나오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희 담론이 나온 배경을 주로 말씀하셨는데, 근래 세계문학이라는 문제틀이 부각된 데는 해외문학과 한국문학의 소통이 쌍방향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적인 상황도 중요할 듯합니다.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이라는 과제가 부각되고 그와 관련된 논의들도 꽤 있었지요. 이번 책도 그 일환이지만, 창비에서는 이 문제를 더 포괄적으로 보자, 세계문학 자체도 지구화 국면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 아래, 한국문학의 갱신과 서구 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의 개입을 함께 고민해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문학론이라 는 것이 민족문학론의 공백을 메운다기보다, 민족문학론의 출발부터 함께했던 세계문학적 시야를 달라진 조건에 맞게 확대하고 구체화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괴테-맑스적 기획’에 대한 깊은 관심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 텐데, 둘을 묶어 부를 때는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라는 객관적 현실인식과 그에 제대로 대응하는 세계문학을 앞당기자는 실천적 문제의식이 함께 강조되는 잇점이 있겠지요. 괴테와 맑스의 발상이 서로 상통한다는 인식 자체는 일부 서구 논자들도 내세우는만큼 한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겠고, 굳이 우리 논의의 특성을 말한다면, 세계문학을 국민문학/민족문학과 별개라고 여기거나 대립되는 실체로 보는 게 아니라 튼실한 세계문학을 일궈나가기 위해서도 국민문학적 성취들이 핵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정도랄까요. 아무튼, 괴테든 맑스든 실천적 기획으로서 세계문학을 이야기했다면,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세계문학에 대한 가장 흔한 상(像)은 아직도 세계문학전집 식의 것일 테니까요. 세계문학이라는 말의 용법 자체가 한가지가 아닌 셈인데, 이쯤에서 개념 정리를 좀 하고 지나가면 어떨까 싶네요.
세계문학의 몇가지 개념
이현우 세계문학이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혼용되는데 대략 이렇게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로는, 외국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foreign literature)이 있고 둘째, 서구문학의 정전(正典)이지만 구색 맞추기로 아시아권 작품을 끼워넣는 식의 세계문학전집에 해당하는 세계문학(world classics)이 있습니다. 셋째, 괴테가 발명해낸 고유한 개념인 세계문학(Weltliteratur, world literature)이 있고 넷째, 지구문학(global literature)이라고 할 만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문학이 있겠고요. 세계적 규모의 문학시장이 형성되면서 꼬엘류(P. Coelho)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같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나타났는데, 이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거죠. 과거 국민문학의 거장들은 자국 내에서 유통되었죠. 셰익스피어만 하더라도 나중에 가서야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것이잖아요. 지금은 마치 영화가 동시개봉되듯이 문학작품도 전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번역 출간되고 수백만부가 팔리는 현상이 나타나죠. 이 모든 걸 통칭해서 세계문학이라고 부르다 보니 개념의 혼란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제 작품을 볼 때 지향점이나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과 ‘세계의 문학’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진경 기본적으로 세계문학이라고 하면 넷째의 지구문학을 제외하고 둘째, 셋째 개념이 일종의 ‘좋은 문학’, 상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문학적 기준을 성취하면서도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문학을 가리키겠지요. 괴테 식의 개념도 국민문학이면서 세계수준의 성취를 이룬 문학이라는 점에서 좋은 문학이지만, 좋은 문학이 다 세계문학이 되지는 않죠. 번역 문제도 있고, 자국 내에서는 뛰어난 평가를 받았어도 보편적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을 세계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무엇이 세계문학인가라는 규정보다는 세계문학의 개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충돌 자체를 주목하면서 거기서 생산되는 담론으로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백지운 월드 클래식이란 건 지금도 통용되지만, 괴테가 살던 시절과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일국 내에서 성취를 이룬 작품이 오랜 시간 뒤 세계문학으로 평가받는 게 과거의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내가 동시에 같은 작품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마련됐다는 것이 큰 차이지요. 전혀 다른 장소에 사는 다른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죠. 괴테나 맑스 시대에는 세계문학이 이념형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것이 현실로 육박하고 있어요. 오히려 세계문학의 물적 토대는 있는데 이념은 없는,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희 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념’ 내지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 개념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그럴 때 세계문학에 대한 고민이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겠죠. 그렇지만 다른 개념들에도 각각 특정한 실천적 과제를 부각하는 잠재력이 있고, 그런 점에서는 이들을 함께 사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계문학’이라면 대체로 세계에서 산출된 문학의 총화, 세계의 모든 문학을 지칭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탁월한 문학 즉 ‘세계문학 정전(正典)’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전자와 같은 중립적인 용법과 후자의 가치판단적인 용법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들여다보면 서구중심적인 현재의 세계문학질서의 문제성이 더 부각될 수 있지요.
또 하나의 용법은 전세계에서 읽힌다는 의미에서의 ‘지구적’ 문학일 텐데, 과거에는 어떤 식으로든 비평적 평가를 거친 ‘세계문학 정전’이 그 주축을 이루었다면 이런 점검작업과는 비교적 독립되어 다국 독자를 염두에 두고 집필 혹은 출간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재 세계문학 지형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겠지요.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후자를 ‘세계문학’과 별도의 범주로서 ‘지구문학’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세계문학의 이념이 추상적 혹은 당위적인 데 그치지 않으려면 세계적 소통에 대한 관심이 더해져야겠지만, ‘지구적’ 문학의 약진은 세계적 소통이 과연 세계문학의 필요충분조건인가, 오히려 이런 현상이야말로 세계문학의 위기의 징후이자 촉매는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하루끼를 논의하면서 더 짚어지겠지만요.
이현우 정전으로서의 세계문학과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세계문학론에 실린 글에서 백낙청 선생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예로 들었는데, 사실 사회주의리얼리즘은 반(反)정전주의거든요. 정전이라 할 만한 것도 거의 남아 있지 않죠. 정전이라고 할 때 과연 누구의 시점에서 보는 정전인지도 문제고요. 괴테-맑스적 기획이라고 할 때 보통 맑스에 방점을 두는 듯해요. 이때는 이념적 지향성을 분명히 갖는 거고, 무색무취하게 작품의 완성도에 주목해 정전을 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 아닌가 해요.
김영희 저는 괴테의 경우에도 이념적 지향성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는 편이고, 따라서 사회주의리얼리즘과 이런 식으로 연결짓는 것이라면 좀 갸우뚱해지는데, 괴테든 맑스든, 아니면 이들의 발상을 활용한 우리의 논의든 그 이념적 지향성에 대해서는 좀더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저 좋은 문학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물론 ‘좋은 문학’도 정의하기 나름이겠습니다만.
근대극복이라는 지향성
이현우 이를테면 백낙청 선생 글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과 비판, 체제극복을 위한 창조적 노력을 보여주는 전범이 될 수 있는 문학이라고 했는데, 이를 그대로 옮겨오면, 지금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제시하면서 극복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방향성인 거죠. 아마 사회주의리얼리즘 얘기가 나온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아요.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일국적 자본주의가 아니니까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에도 세계적인 안목이 필요한 것이죠. 그 지향점은 세계문학과 다 연동되어 있을 텐데, 정치적 체계로서 세계국가, 유럽연합 같은 세계공동체적 정치체제가 이념적 지향점으로 염두에 둘 수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만약 세계문학이 어떤 지향점을 갖는다면, 또한 특정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런 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진경 그런데 세계문학이 바람직한 정치적 체계이자 평화적인 체제로서 지구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그 자체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는데, 한편으론 세계체제와 세계문학의 관계가 너무 무매개적으로 설정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합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세계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것과 문화적인 차원에서 세계문학을 성취하는 것은 층위가 다른 이야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적인 권력관계와는 다른 차원에서 문학자치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백지운 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김영하(金英夏)의 『빛의 제국』 같은 작품이 왜 미국에서 주목받았나 생각해보면, 예전엔 남북한의 문제가 한반도 사는 사람들만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세계인의 문제가 됐기 때문 같아요. 그만큼 한반도의 위상이 커진 것도 있고, 다른 나라나 지역과 체감적 거리가 좁아지면서 일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의 동시성이 한층 실감을 획득했다고 할까요. 사실 과거 민족문학론에서도 민족문학은 세계문학과 쌍으로 논의되었잖아요. 그때 양자를 매개하는 이념적 중간항이 ‘제3세계적 시야’였는데, 민족문학이 서구의 중심부를 비판하는 제3세계적 시야를 가짐으로써 세계문학의 일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돌아보면 민족문학론이 세계문학과 지속적으로 대결하면서 이론화하려는 노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게 아쉽지만, 그때의 문제의식만큼은 아주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특히 세계문학이 현실로 압도해오는 지금, 당시의 ‘제3세계적 시야’ 같은 이념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비평가 까자노바(P. Casanova)가 말한 반(半) 주변성, 주변성 같은 개념이 앞서 제3세계적 시야의 연장선상에 있을 텐데, 한국문학이 어떤 ‘주변성’을 확보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겨냥할 수 있는지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논하는 관건일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문학론에서 지구공동체를 상정하는 세계공화국 논의는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만.
이현우 저는 세계어라는 문제의식, 세계문학, 세계주의가 서로 연계된 지향점을 갖는다고 생각해요. 단일한 공동체의 폐쇄성을 지양하고자 하는 운동이 있는 거죠. 우리가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 개념의 운동성을 고려하자면 그런 이념형을 상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심진경 그런 점에서 세계문학은 도달해야 할 가상적 지향점으로서 세계공화국이라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세계문학의 지향성, 즉 주변성으로 중심을 돌파하자는 주장은 한편으로는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맞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시공간이 자본주의적으로 재배치되면서 전지구적으로 동일한 경험체계로 들어가 있거든요. 예를 들어 하루끼 소설을 지구 반대편 사람도 전혀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상황이죠. 여기서 도출되는 세계문학이라는 것은 물적 토대가 이미 동일해진 상황에서, 세계 각지에서 한 작품이 동시에 수용될 수 있는 씨스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때 주변성이 얼마나 생산력과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히려 주변성에 대한 강박이 지나치다보면 자국의 문학적 특성을 토속적・향토적인 것으로 만들어 중심에 흡수되고 맙니다. 쑤퉁(蘇童)의 원작을 각색한 장 이머우(張藝謀)의 영화 「홍등」이 그 지역성 때문에 오히려 미국에서 받아들여진 것처럼요.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작가들이 한국적 현실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죠. 예를 들어서, 분단상황을 과연 말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좀 다른 얘기지만, 얼마전 발표된 박민규(朴玟奎)의 단편 「코작」(문학동네 2010년 겨울호)을 보면, 미국의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자본과 폭력이 황무지를 한순간 가치있는 땅으로 만들었다가 결국 그 모든 일이 무화되는 얘기거든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용산 개발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폭력이 연상됐어요. 그렇다면 ‘코작’은 용산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도 있겠죠. 용산참사라는 한국적 현실은 작가들에게 그런 식으로 재현되는 상황이라는 거죠. 황정은(黃貞殷)의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도 청계천을 둘러싼 폭력적 개발이라는 한국적 현실을 그야말로 은유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재현했고요. 그렇게 한국의 주변부적 경험이 문학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을 봤을 때, 만약 그것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읽힌다면 그 주변성 혹은 특수성이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한국적 경험의 특수성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테고 또 그만큼 주변성의 돌파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주변성이 중심의 돌파가 아니라 반대로 중심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염려되고요.
백지운 남미문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죠. 마술적 리얼리즘이 서구의 이성적 리얼리즘이 구축한 성(城)에 균열을 낸 것으로 평가받았고 파급력도 컸는데, 돌이켜보면 중심/주변의 위계를 더 명확히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중심의 재생산이 되어버린 면도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말한 ‘주변성’은 국가나 지역의 특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거론하신 박민규의 소설에는 중산층이 못 되면서 중산층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죠. 인간의 삶은 점점 규격화되고 모두들 평준화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거기서 낙오자는 반드시 나오게 돼 있어요.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고, 혹은 낙오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버둥대는 인간상이 코믹하게 그려지죠. 그런데 중국작가 비페이위(畢飛宇)의 「사랑하던 날들」(『세계의 문학』 2009년 가을호) 같은 단편에도 비슷한 현실이 나와요. 그냥 시골에 남았다면 중간 정도는 살 수 있었을 사람들이 중산층이 돼보겠다고 도시로 올라와 어렵게 대학까지 나오지만 결국은 사회 밑바닥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이게 오늘날 세계강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단면이거든요. 자본주의가 낳은 중산층이라는 허울에 매달려 살아가는 군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죠. 제가 ‘주변성’을 언급한 건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사회환경도 다르고 자본주의 진행속도도 다르지만, 각자 자기의 현실을 해부해 들어가다보면 결국은 우리 삶의 중심에 군림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리게 되는데, 거기서 각 나라 문학간에 공통된 저항선이랄까 연대의 접점이 형성될 수 있겠죠. 거기서 일국의 문학과 세계문학을 매개하는 이념적 중간항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김영희 하나의 국가라고 해도 자족적이고 닫혀 있는 실체가 아니라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운동이 일국 속에 유기적으로 들어와 있다, 이 점에는 다들 동의하시는 듯합니다. ‘주변성’ 자체를 물신화할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제3세계문학론에서도 ‘제3세계주의’에 거리를 두면서 경계한 바이지요. 김영하 작품의 경우 이 점에서 어떤지는 더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분단문제의 특수성을 제대로 천착하는 가운데 보편적 공감까지 얻어내는 케이스인지, 아니면 ‘주변’의 ‘특수한’ 상황이 주는 흥미와 정체성의 와해라는 ‘보편적’ 문제에 대한 공감이 결합된 케이스인지를요. 어쨌든, 물적 생산에서든 정신적 생산에서든 주변부에 위치한 나라나 지역들의 객관적 조건과 아주 떠난 ‘주변성’의 논의는 그것대로 실질적인 내용을 잃을 위험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자연스럽게 작품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한국문학에서도 박민규든 황정은이든 현실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라든가 ‘환상’을 포함한 새로운 시도들을 ‘구체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문제의식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은 한국문학의 이런 시도들이 세계문학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어떤가 하는 점인데, 주어진 지배적 현실이 고정불변의 벽처럼 그려지는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거나 비껴나 있으려는, 그런만큼은 소극적 의미에서나마 ‘반체제적’인 기미도 보여주는 문학적 도전을 하고 있단 말이지요.
‘하루끼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아까 말씀드린 좁은 의미의 ‘지구문학’ 문제를 좀 짚어봤으면 합니다. 문학적 평가와는 어느정도 독립적으로, 실시간으로 세계에 유통되는 작품이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요. ‘지구문학’도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겠고 의미있는 성취로서의 ‘세계문학’을 겸하는지 아닌지는 작품마다 따로 따져봐야겠죠. 현재 하루끼가 이 현상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이고, 논의를 구체화할 겸,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그의 최근작 『1Q84』를 이야기해보면 어떨까요?
이현우 한가지 에피쏘드를 말씀드리면, 제가 2004년에 러시아에 있을 때 대형서점에 갔는데 한국문학 작품은 한권도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일본문학은 고전문학이 클래식란에도 꽂혀 있고, 매대에는 당시 하루끼 소설이 쫙 깔려 있었는데, 그의 신간이 나왔다는 안내방송까지 나와서 놀랐어요. 그때는 『해변의 카프카』였던 것 같아요. 하루끼의 책은 출간되면 러시아에서만 초판을 10만부쯤 찍는다고 해요. 어느 서점에 가더라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되고요. 지금도 비슷해요, 뭔가 통하는 코드가 있다는 거죠.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어 어필하는 코드를 하루끼 문학이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하루끼 현상’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는데, 문학적 평가를 넘어서 문화현상으로서 연구할 과제일 겁니다.
무엇보다 저는 하루끼 문학이 현실에서 기댈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자신밖에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생존주의적 태도를 잘 구현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일종의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으로서 ‘무연고적인 자아’지요. 그의 작품을 보면 일본이라는 국적성은 별 의미가 없고 ‘나’에서 곧장 ‘인간’으로 넘어가잖아요. 개인으로서의 나와 보편적인 인간 사이에 중간적 정체성이 없어요. ‘일본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죠. 하루끼가 오옴진리교의 독가스 살포사건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그것이 하루끼에게 유일한 ‘현실’이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무중력적이고 탈국적적인 그의 문학을 현실적인 지반에 연결시켜줄 유일한 끈이라는 거죠. 그래서 강박적으로 그런 문제에 관심을 쏟는 것 같아요. 그의 진정성인 동시에 알리바이 같다는 생각입니다.
김영희 그렇다면 『1Q84』는 이러한 하루끼 문학의 전형적인 모습에서 얼마나 달라진 걸까요? 또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세계문학과 관련해서는, 전세계적으로 거부감 없이 소통되는 문학, 각각의 지역이나 사회의 차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없이도 쉽게 이해가 가능한 문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백지운 하루끼 소설이 전세계적으로 소비되는 데 무국적성이 중요한 작용을 한 건 맞는데, 그럼에도 그 속엔 역시 일본의 국내적인 맥락이 있는 것 같아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1Q84』로 이어지는 과정엔 어떤 일관성이 있는데, 전공투(全共鬪) 시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묘하게 건드린다는 점이거든요. 다만, 문제는 하루끼가 그 트라우마에 얼마나 절실하게 대면하고 있는지 그 진정성을 알 수 없다는 데 있어요.
김영희 그럼 트라우마라고는 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웃음)
백지운 『1Q84』에는 ‘선구’라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나옵니다. 60년대 전공투 시대 학생운동의 후신이라는 점이 암시되어 있죠. 그런데 이야기의 다른 한 축에서 ‘선구’는 80년대 토오꾜오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했던 오옴진리교 집단과 겹쳐집니다. 사린사건과 전공투라는, 일본사회에 깊은 상처를 준 별개의 두 사건이 작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데, 그게 왜 그런지는 미스터리로 남거든요. 그 미스터리를 하루끼는 ‘리틀 피플’이라는 알쏭달쏭한 존재로 처리한 것 같아요. 리틀 피플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 같은 독재자가 아닌 평범한 개인인데,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과 행위로부터, 일본사회 밑바닥에 깔린 어떤 어둠의 실체에 근접하려 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 부분을 보면, 작가가 일본사회에 대해 뭔가 하려는 얘기가 있구나 싶거든요.
『1Q84』가 과거 전작들과 다른 점은 여주인공 아오마메가 자기가 갇힌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는 거예요. 『노르웨이의 숲』이나 『해변의 카프카』에선 그런 사투하는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작가 인터뷰를 보니까, 이 폐쇄회로라는 게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어떤 구조를 뜻하는 것 같더라고요. 문제는 그렇게 자신이 속한 사회의 트라우마와 현실문제를 다루는 시도가, 너무나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 안으로 빨려들면서 정작 그 진정성의 깊이랄까 그런 게 아리송해진다는 것이죠. 바로 그 점, 일국적인 문제를 무국적적인 색채로 그리면서 독특한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루끼의 재능인 것 같아요.
김영희 초기작부터 ‘전공투 이후’라는 의식이 배면에 깔려 있던 건 분명한데, 제가 읽은 작품에 국한해 말씀드리면 『해변의 카프카』에서부터는 최소한 작가 의도는, 뭔가 큰 문제, 역사적인 혹은 사회적인 문제를 좀더 정면으로 다뤄보자는 생각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심진경 하루끼 소설에서 생존주의와 개인주의가 결합되었다고 하셨는데, 그건 일종의 자기보존술이죠. 그의 주인공은 끝까지 자기를 포기하지 않잖아요.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도서관은 자아의 현시물(顯示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도서관으로 상징되는 지적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거기에 자아를 계속해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과의 대결이 아니라 내면의 싸움으로 나타나죠. 갈등의 계기로서 외부사건은 발화점에 그칠 뿐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건 내적 갈등이거든요. 그러면서 그 갈등이 내면에서 소화되고 소진되지요. 여기에는 달콤한 나르씨시즘 같은 것이 주는 위안이 있지요. 하루끼가 일본의 현실, 전공투 세대의 경험에서부터 오옴진리교 문제 등을 다뤘다고 하셨는데, 그런 경험이 이야기를 출발시키거나 플롯을 매끄럽게 하는 장치로서만 동원되지 그 자체가 고민의 대상이 되지는 않아요. 게다가 『1Q84』에 오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도 강화되죠. 아오마메라는 주인공은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또한 비현실적인 캐릭터죠. 여전사 이미지라는 판타지적인 요소도 들어 있고요. 하루끼는 그런 대중적인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요.
김영희 두 분 의견이 얼핏 대립하지만 저는 양쪽 모두에 공감이 되네요.(웃음) 『1Q84』를 처음 읽으면서 이제 완전히 대중작가로 나서기로 했나 하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아까 사회적・역사적 문제를 다루겠다는 작가적 의지가 보인다고 했지만, 특징은 역시 일본사회에서 현대사회 전체, 혹은 인간사회 전체로 쉽게 비약이 이루어진다는 점이에요. ‘리틀 피플’만 하더라도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더이상 어떤 한 독재자의 전지전능한 지배가 문제가 아니라 익명적 다중이 문제라는 메씨지에서 출발은 한 듯한데, 갈수록 특정 역사단계가 아니라 역사 전체, 아니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온 (가상)현실을 주조해내는 원초적 힘처럼 그려집니다. 길게 거론할 여유는 없겠습니다만, 박민규의 최근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역시 두사람의 사랑 이야기인데, 잘나가는 1%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99%의 사람들을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리틀 피플’에 담긴 문제의식 중 하나와 맞닿는 면도 있지요. 우연찮게 두 작품 모두 『백설공주』의 일곱난장이 형상을 활용하더군요. 그런데 박민규가 자신의 문제의식을 일관되게 밀고나가면서 재조정도 하고 그런다면, 하루끼는 계속 거창한 의미를 덧붙이는 식으로 독자를 미혹하는 것 같아요. 사랑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도 그렇고요. 세상 내지 씨스템에 대한 자세도 상당히 다르다고 보이는데, 가령 박민규 작품에서 세상과 비껴서 있는 주인공들이 모이는 곳이 영어표기마저 틀린 ‘켄터키치킨 호프(hope)집’이라면, 『1Q84』에서 여주인공 아오마메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며 스스로 뿌듯해하지요. 작은 디테일이지만 저에게는 징후적으로 여겨지는데, 아무튼 아오마메든 하루끼든 폐쇄회로를 필사적으로 돌파하려 든다고 할 수 있을지, 오히려 제스처일 뿐 씨스템에 편승하는 면이 더 승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지운 『1Q84』에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강화된 건 맞지만, 과연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으로 하루끼가 지금의 위치까지 왔을까 싶어요. 하루끼 소설을 보면 무국적적인 아우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일본적인 것이 확실히 느껴지거든요. 하루끼가 특히 서구에서 통할 수 있었던 데는 이 양자를 결합하는 정교한 기술이 한몫했다고 봐요.
이현우 이런 문제를 하루끼가 다 책임질 건 아닌 것 같은데요.(웃음) 하루끼는 일본문단에서 마이너 작가였다가 예기치 않게 주류로 나온 거잖아요. 그런데 그의 문학 자체가 변화했다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정황이나 시대상황이 바뀌면서 폭넓게 수용되고 유통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에요. 아마 그 자신도 놀랐을 거예요. 문제적인 것은 하루끼 문학이라기보다 그게 수용되는 맥락이겠죠. 하루끼 문학이 바람직한 세계문학의 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반드시 부정적으로 단정할 일은 아니겠지요. 『파우스트』에도 나오듯이, 악을 행하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선에 이바지하는 역할도 있으니까요. 러시아에서도 하루끼 때문에 일본어 배우는 학생들이 있어요.(웃음) 그런 부수효과도 있으니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죠.
심진경 하루끼 문학이 우리에게 걸림돌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게 가장 큰 문제죠. 좋은 문학이란, 한마디로 자신의 현실을 반성적으로 성찰해보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 걸림돌을 주지 않고 그야말로 쏙쏙 받아들여진다는 자체가 문제인 것 같아요. 또 그렇게 많은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작품이 세계문학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하루끼는 유수의 문학상들을 받았잖아요. 그런 걸 보면 세계문학의 기준도 바뀌는 것으로 봐야 할까요. 지구문학의 전세계적 유포를 보면서 세계문학이 이제는 그 선결조건으로 대중성 확보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작품성에 대한 논의는 그후에나 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희 오히려 괴테적 의미의 세계문학 형성을 어렵게 만드는 현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문학도 비평도 위기를 면하지 못할 테고, 이같은 위기의식이 창비에서 세계문학론을 제기한 배경 중 하나라고 봅니다. 물론 하루끼 문학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고, 특히 대중문화적 요소를 들여온다는 것 자체가 문제되진 않습니다. 문제는 종래의 문학 문법과 결합하거나 충돌하면서 새로운 어법을 개척해내느냐, 아니면 양자를 적당히 절충하고 활용하는 데 그치느냐 하는 점이겠지요.
활발해진 동아시아의 문학교류
김영희 미국문화와의 친연성도 하루끼 문학의 한 요소로 자주 지적되었고, 작가 본인이 미국시장 진출을 매우 계획적으로 추진해왔지요. 미국 혹은 뉴욕은 가령 까자노바 같은 중요한 세계문학론자가 기존의 세계문학을 대신해서 들어선다고 본 ‘지구문학’의 중심이지요. 그런데 비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세계문학 정전질서 역시 서구중심적이었잖아요. 그렇다면 넓은 의미에서 유럽중심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셈인데, 이런 질서 속에서는 서구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거나 아니면 서구와 달라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품들이 더 승산이 있겠지요. 유럽중심주의에 편승하거나 그 이면인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는 작품들 말입니다. 그 한편에서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및 극복의 시도가 이론적・실천적으로 계속되고 있거든요. 비서구권 문학간의 소통의 움직임도 커졌고요.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에 백낙청 선생이 ‘동아시아 지역문학’이라는 발상을 내놓았고, 같은 시기에 『세계의 문학』에서 한국과 중국, 『자음과모음』에서는 일본까지 더해 한중일 작가의 작품들을 교환하거나 각국에서 동시 게재하는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담론과 실천들을 함께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백지운 지난 90년대 창비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제출된 이래, 사회 각 영역에서 동아시아가 중요한 화두가 되어왔죠. 요즘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동아시아를 단위로 하는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르씨아 마르께스를 꼴롬비아 작가라기보다 남미문학의 거장으로 기억하잖아요. 그에 반해, 동아시아의 경우는 한중일만 해도 하나의 지역문학으로 묶이기엔 이질감이 컸던 게 사실이죠. 그런데 일본 문예지 『분가꾸까이(文學界)』 최근호에 실린 ‘동아시아문학포럼’ 특집을 보니까, 젊은세대 작가들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통합 가능성을 훨씬 적극적으로 전망하는 것 같아요. 가령 앞으로 전자출판이 활성화되면 동아시아 독서시장의 통합은 더 빨라질 테고, 자국만이 아닌 동아시아 독자를 상정하고 작품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동아시아문학 논의에는 필연성과 이념성이라는 두 차원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필연성에 대해서는, 최근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체제에 진입한 중국을 비롯해서 동아시아가 더이상 자본주의의 변경이 아니라는 상황이 있습니다. 거기다가 냉전 기간 격절됐던 한중일 각국 근대경험의 낙차가 근 10여년 사이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금세 좁혀지면서, 우리의 일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어요. 1938년 펄벅의 『대지』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 임화(林和)는 『대지』가 현대문학으로선 수준 미달임에도 당시 세계사적 국면의 핵심에 놓인 중국을 다뤘기 때문에 ‘세계문학’의 영예를 차지했다고 했는데, 참 탁견이에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의 동아시아가 그런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자본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 모순과 여러 부대현상들이 집약된 문제적 장소로서 동아시아가 부상하면서, ‘동아시아문학’은 필연적으로 세계사적 중대성을 획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왔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추세를 수동적으로 맞을 게 아니라, 동아시아문학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동아시아 작가 간의 작품 교류나 독서시장의 통합은 앞으로 더 빨리 진행되겠지요. 과거 남미문학이 결국은 중심부의 문학에 흡수되거나 중심/주변의 위계를 더욱 강화했다고 할 때, 지금 우리에겐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동아시아문학의 비전을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심진경 우리가 동아시아문학 혹은 한중일 문학을 얘기한다면, 운동이나 실천으로서의 세계문학, 느슨하게나마 연대의 그물망을 만들어나간다는 맥락에서 서구-비서구의 연대만이 아니라 비서구 내부에서의 연대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계문학론이 거대한 이론적 틀로만 남지 않기 위해서는, 거꾸로 현장의 움직임들을 포착하면서 그것을 통해 세계문학에 접근해갈 방법론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요. 동아시아문학이 단지 지역문학으로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학적 실천 그 자체로서 성립될 수도 있고, 그 움직임들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세계문학의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김영희 비서구 내부의 소통 및 연대의 시도는 근년에 들어서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듯합니다. 작년에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AALA) 문학포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동아시아 지역문학론의 취지는, 그렇게 모든 비서구지역에 개방하는 노력도 소중하지만 더 지속적이고 내실있는 소통을 위해 전략적으로 범위를 좁히는, 즉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는 동아시아로 좁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 봅니다. 또하나는, 현재 세계문학 질서에서는 대단히 주변적인 위치에 놓여 있지만, 문학적 전통에서나 지금 생산되는 문학적 성과에서 풍성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서 세계문학의 지배적 구조에 단지 편승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잠재력을 지닌다는 것이고요. 백지운 선생님이 강조하신 ‘이념성’과도 통하는 생각인데, 더 생각해보고 싶은 점은 앞으로 구축해나갈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역문학의 예로는 말씀하신 남미문학이나 아랍문학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가령 남미문학이 개별 국민국가의 문학이 아닌 지역문학으로서 지닌 통일성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지요. 뽀르뚜갈어와 에스빠냐어라는 차이가 있긴 해도 브라질을 빼면 언어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서양의 대륙 정복에서 시작된 근대국가 형성과정도 대동소이하고요. 아랍도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동아시아지역에는 중국, 대만, 한반도, 일본, 베트남이 포함되는데, 한자문화권으로서 전통을 일부 공유하기는 하지만, 언어도 다 다르고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진입하는 경로 또한 서로 매우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남미문학식의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갖기는 매우 어려운 조건인데, 동아시아에서 가능한, 혹은 바람직한 지역문학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말씀들을 들어보고 싶네요.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성립 가능한가
이현우 동아시아문학이 성립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을 공유한다고는 해도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을 만들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령 『자음과모음』의 한중일 소설 동시 게재나, 각국의 근현대 고전을 선정해서 번역하는 ‘동아시아 100권의 책’ 사업처럼 공통의 문학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을 서로 공유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도 생길 수 있을 테고, 그런 다음에야 동아시아문학이 실효적인 개념으로 성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세계문학의 일부지만 그동안 배제되어온 자기 몫의 발언권을 찾자는 의미에서의 동아시아문학이 가능할 것이고요, 또한 세계문학의 전 단계로서의 동아시아문학도 가능한 범주라고 생각해요. 개별 언어를 넘어서 소통할 수 있는 그런 문학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게 더 확장된다면 세계문학이 될 수 있는 거죠. 당장 세계문학의 가능성이나 현실성이 잘 보이지 않으니 그보다 작은 단위에서 해보자는 의미도 있겠죠. 제 요점은,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동아시아 담론의 특수성이기도 할 텐데, 중국이나 일본이 동아시아문학을 만들자는 말은 잘 못할 것 같다는 거예요. 한국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면이 있어요. 공통의 문학공간을 만들자는 주장 자체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한국만이 당당하게 제기할 수 있는 거죠.
심진경 『자음과모음』에서 한중일 작품교류를 진행할 때도 중국과 일본은 서로 직접 연락을 안해요. 한국이 늘 매개역할을 하는데, 서로 경계를 하는 건지……(웃음)
김영희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현실성이나 필요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시는 것 같네요. 앞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상이 어떤 것인지는 좀더 얘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일종의 동아시아판 남미문학을 만들자는 것인가요?(웃음) 남미와는 다른 지형이라면,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도 적극적 자산으로 삼는 구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현우 공동체라면 대개 상생하는 것이죠. 역사적으로 갈등과 분쟁도 많았기 때문에, 그런 갈등과 긴장을 줄여나가는 방향에서 공감과 소통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지금도 대립은 존재하죠. 중국도 역사를 자기 편의에 따라 전유하려고 자꾸 시도하잖아요. 그런 식이 아니라 서로의 생존과 번영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죠. 만약 동아시아연합이란 것이 있고 그런 식의 단일시장이 형성된다면, 거기에 문학시장도 만들어질 수 있겠죠.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느슨하게라도 성립한다면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문학도 있어야겠죠. 지금 전세계적으로 하루끼가 읽히듯이, 동아시아 삼국에서 동시적으로 읽히는 작가가 나오는 것, 이게 동아시아문학의 전 단계가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면 중화권에서 공통으로 인기를 끄는 가수나 배우가 있잖아요. 그게 공통의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사람이 중국작가로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작가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거죠.
심진경 세계문학을 얘기할 때 공존이건 평화건 소통이건 간에 그것이 가능한 상상적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되겠지요. 그런데 동아시아문학도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채 이론적인 틀에 머무는 위험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 『아시아』라는 잡지의 간행이 꽤 오래 이어져왔고,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 등에서도 교류사업이 꾸준히 진행됐고, 『자음과모음』에서도 시도하고 있죠. 이런 현장의 움직임을 통해서 동아시아문학에 접근해볼 가능성이 열렸다고 봐야 합니다. 즉 동아시아문학에 대한 논의가 지향점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건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건 실제 이루어지는 교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죠.
백지운 좀전에 동아시아의 경우 남미와 같은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갖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동아시아문학’이 꼭 동질성을 전제하는 건 아니에요. 한중일만 보더라도 근대 이후 100년간 시공간적 경험의 차이는 상당하잖아요. 냉전이 단절을 강화하기도 했고, 지금은 민족주의가 큰 장벽이 되고 있어요. 앞서 한국문학을 제대로 보기 위해 세계문학의 시야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 말 자체는 추상적이죠. 바로 옆에 있는 중국문학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잘 모르잖아요. 그런 점에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추상적 거리를 좁혀주는 것으로서 동아시아문학이라는 단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시야로서 말이죠. 그때 이질성은 내가 처한 장소의 문제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보는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해주죠. 그런 점에서 동질성 못지않게 이질성도 동아시아문학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중일 최근 작품의 성취와 한계
김영희 구체적인 작품 이야기로 넘어가봅시다. 일본문학에 대해서는, 앞서 하루끼를 우선 거론했지만, 그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사실 하루끼 본인도 ‘주류’ 일본문학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거리를 유지해온 편이잖아요. 그러니 최근에 소개된 다른 일본문학 작품들을 짧게나마 함께 논의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국문학에서는 우리가 함께 읽어 오기로 했던 장편들이 우연인지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네요. 다루는 시기도 오래전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전사(前史)로서의 ‘근과거’인데, 어떻게들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세계의 문학』이나 『자음과모음』에 수록된 한중일 작품들에서부터 시작했으면 하는데, 먼저 심진경 선생님께서 『자음과모음』에서 한중일 작품 동시게재를 시작한 취지를 간략히 전해주시지요.
심진경 거창한 뜻이 있었다기보다(웃음), 『자음과모음』의 한중일 문학교류가 기존의 문학교류와 차별화되는 의미가 있다면 민간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었어요. 이미 한국문학번역원 같은 기관에서 한중일 문학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지만, 실제 현장에서 보니까 한국문학이 많이 유통되고 있지는 않았어요. 마치 문서보관소에 저장된 것 같았죠. 중국의 출판사는 모두 국영(國營)이라 번역작업도 업적으로 등록돼요. 그러니 열심히는 하지만 아무래도 결과물의 질 같은 것은 돌보지 않죠. 그런데 상업출판사가 개입되면 도서를 더 많이 유통시키려 하고 또 자기네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번역에도 좀더 신경을 쓰게 되죠. 예전처럼 한국이나 일본의 국비로 하는 게 아니라 상업출판사가 나선다는 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에요. 또 하나는 각각의 언어로 동시에 발표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중국문학의 경우는, 지금까지는 서구에서 인정을 받은 작품들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왔잖아요. 그러지 않고 직접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봐요.
백지운 저도 『자음과모음』이나 『세계의 문학』에 실린 작품들을 흥미롭게 읽었어요. 제가 중국문학 전공자라서 그런지 작품이 주는 임팩트는 중국문학 쪽이 강했어요. 보통 단편은 잘 소개되지도 않고 장편도 몇년을 기다려야 볼 수 있는데, 현재 중국인의 삶의 생생한 단면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쑤퉁의 「샹차오잉(香草營)」은 신역사주의 계열의 작가라는 그간의 인상과는 또다른 면을 보여줬어요. 성공한 중산층과 중산층의 허상을 부여잡고 사는 하층민을 대도시 샹하이 뒷골목의 어느 은밀한 밀애 공간에서 연결시키는 설정이 신비로우면서도 강렬한 리얼리티를 만들어냈죠. 또 저임금노동력으로 뻬이징이나 샹하이 같은 대도시의 바닥층을 형성하는 ‘와이띠런(外地人, 불법이민자)’를 소재로 한 쉬이과(須一瓜)의 「해산물은 나의 운명」을 보면, 식모와 주인 간의 갈등 속에 은근히 깔린 유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경쾌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디스토피아로 전복한 류 커(劉恪)의 「무상도(無相島)」나, 『부생육기(浮生六記)』 『요재지이(聊齋志異)』 같은 전통 서사물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한 주 원잉(朱文穎)의 「덧없는 인생」은 중국문학의 풍부한 서사적 자원과 가능성을 새삼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김영희 쑤퉁과 쉬이과의 작품들을 저도 좋게 읽었어요. 쑤퉁의 작품에 대해 덧붙이자면, 근대적 계층관계에 전근대적인 주종관계가 결합되면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흥미로웠습니다. 중국 단편들의 경우 대체로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필치가 강한데, 낡은 기법이나 이념으로 여겨지기 쉬운 사실주의나 리얼리즘의 여전한 힘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작품에서는, 정이현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만, 평작에 못 미치는 작품들도 있어 보였는데요, 일반화하기는 참 조심스럽지만 묘사나 사변을 낭비하는 느낌도 들더군요. 일본 작품은 모더니즘적 감성이 느껴지지만 전체적으로 맥이 떨어진다고 할까. 그중에서 코오노 타에꼬(河野多惠子)의 「붉은 비단」을 눈여겨봤는데, 지극히 정상적이고 원만해 보이는 결혼생활이 실은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라는 것을 섬세한 심리묘사와 절제된 어조로 전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삶의 허방을 끈기있게 추적하는 치밀함이 느껴졌어요.
심진경 동시게재의 경우는 각국의 작가들이 자기네 잡지에만 발표하는 게 아니라 다른 두 나라의 잡지에 함께 실린다는 걸 알고 쓴다는 점에서 독특한 창작경험이죠. 또 흥미있는 것은, 이 기획에서는 공통주제를 주거든요, 처음에는 도시, 두번째는 성(性)인데, 일본 작가들은 주어진 주제에 가장 충실하게 써요. 죽은 이후의 토오꾜오이건, 토오꾜오의 뒷골목 모습이건, 도시라는 주제를 세목화된 일상적 삶을 따라가면서 쓰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중국 작가들은 대체로 주제와 크게 상관없이 써요. 그런 차이를 엿보는 재미도 있었죠.(웃음)
김영희 세 나라 잡지에 실린다는 것은 독자도 한중일 독자로 넓혀진다는 것인데, 독자를 의식하는 점에 있어서는 어떻던가요?
심진경 일본은 그 부분도 굉장히 의식하는 것 같아요.
김영희 일본의 장례의식을 다룬 「붉은 비단」의 앞부분이 다소 장황한데, 혹시 외국독자를 의식해서 더 그리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심진경 그런 면도 있겠죠. 예를 들면 ‘도시’를 주제로 한 시바사끼 토모까(柴崎友香)의 「하르툼에 나는 없다」의 경우에, 아프리카 수단의 도시 하르툼과 오오사까와 토오꾜오를 그리면서, 자기가 어떤 지역에 존재하면 다른 지역에는 부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른 도시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시키죠. 예컨대 토오꾜오에 있으면서 샹하이와 서울, 혹은 하르툼에는 없다고 상상하는 거죠. 이런 역설적 방식으로 다른 지역의 독자를 염두에 두는 것 같아요. 재미있는 건 일본소설과 중국소설은 일인칭 시점의 소설이 거의 없다는 거예요. 설령 ‘나’가 주인공이 되더라도 인물이 다양하고 각각의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이야기도 사건 위주로 전개돼요. 그런데 한국소설은 대부분 인물이 익명화되어 있어서 활기가 없고 추상적이에요. 캐릭터의 이름도 구체적이지 않고 이니셜로 표현되거나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의 명칭으로 호명된다든가 할 뿐이죠. 인물 자체가 단편 안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기획을 볼 때도 그런 차이점이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이현우 저도 한국소설에서 불만스러운 점이, 유사 디테일만 있지 리얼리티가 없다는 점이에요. 편의점에 가서 뭐 샀는데 얼마짜리여서 거스름돈을 얼마 받았다는 식의 디테일만 있고 삶의 세목들은 다 누락되는 식이거든요. 그런 알리바이식 디테일만 남고 현실의 지표가 되는 고유명사들은 생략되거나 기피되죠. 재현적 서사 대신에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가 동원되고 평론가들은 그걸 ‘징후’로 읽습니다. ‘시적인 소설’이 많아지는 것이 저로선 좀 불만입니다.
김영희 각국의 최근 단편들을 살펴봤으니 그러면 장편소설들로 넘어가볼까요? 단편을 이야기하면서도 얼핏 거론되었습니다만, 저 역시 풍부한 가용자원으로 남아 있는 중국의 서사적 전통이 부럽더라고요. 가령 최근 소개된 모옌(莫言)의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 창비 2008)는 ‘도화원’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유토피아상을 통해서 현실에서 진행된 유토피아 건설 시도들을 조명하는데, 이 점은 꺼페이(格非)의 『복사꽃 피는 날들』(人面桃花, 창비 2009)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면서 혁명에 대한 새로운 시선들이 제출되는데, 모옌 이후 젊은 작가군을 중심으로, 가능하다면 한국작가와의 비교도 염두에 두면서 말씀해주시지요.
역사 속의 개인을 다루는 중국소설의 활력
백지운 중국현대문학은, 문화대혁명 종결 후 그동안 막혀 있던 서구의 다양한 사조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문화열(文化熱)’ 속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쑤퉁, 모옌, 위화도 모두 선봉문학(전위문학)이라고 해서 다양한 형식실험으로 서사장르를 개척했던 대표 주자들이죠. 이들이 중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는데, 거기엔 여러 맥락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장 이머우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욕구에 호응한 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을 했지요. 그런데 한국의 중국문학 수용에도 미묘한 착시현상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문학에서 사라져가는 리얼리즘 전통에 대한 향수가 알게모르게 투영된 게 아닌가 싶은데, 이를테면 2007년 『창비』 좌담에 보면 중국현대사를 개인사의 에피쏘드로 성기게 풀어간 것이 위화(余華)의 맹점이라는 논평이 있었죠. 그런데 그게 바로 선봉파 작가들의 의도거든요. ‘거대서사’를 ‘작은 이야기’로 잘게 부수어서 완결된 관방(官方)의 역사기억에 균열을 내는 것, 그래서 이제까지와 다른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한국독자들에게 위화는 민중문학, 현실주의 문학으로 다가오면서 더 친밀감을 줬던 것 같아요.
최근 중국문학이 폭발적인 생산력을 자랑하고 주제나 장르의 폭도 넓어졌지만, 큰 줄기는 결국 과거 혁명의 역사와 현재 자본주의적 삶의 간극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로 모아진다고 생각됩니다. 20세기가 혁명의 세기였던 점을 생각할 때, 혁명의 역사를 처리하는 일은 비단 중국문학만의 숙제는 아니죠. 그 점에서 중국문학은 일국의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의, 나아가 세계 인류의 자산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그 점에서 1960년대 출생한 세대의 작가들을 관심있게 보고 있어요. 문혁시기에 유년기를 보내고 개혁개방과 함께 성년을 맞은 이들은 중국의 사회격변을 몸으로 겪은 세대죠.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비페이위의 『위미』(玉米, 문학동네 2008)나 꺼페이의 『복사꽃 피는 날들』을 보면, 혁명의 기억을 해체하는 방식들이 흥미롭게 교차됩니다. 양자가 모두 여성의 시선을 택한 것도 의미있는 공통점이죠. 『복사꽃 피는 날들』이 표면적으로 다룬 것은 1911년의 신해혁명이지만 실제로는 혁명 전반을 은유하고 있어요. 어느 작은 마을의 소녀가 부모와 자신에 얽힌 운명에 이끌려 혁명에 가담했다 실패하는 이야긴데, 문제는 실패 이후입니다. 혁명이 실패한 후 주인공이 말을 잃어버리는 것은 중요한 암시죠. 혁명이란 말로 사람을 계몽하는 거니까요. 소설 전체에 깔려 있는 「도화원기」의 모띠프도 중요합니다. 소설 말미, 마을에 덮친 기근을 모두가 십시일반으로 극복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큰 혁명’이 아닌 ‘작은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을 플래시처럼 잠깐 보여주거든요.
김영희 역시 전문가의 말씀을 들으니 큰 그림이 그려지네요.(웃음) 중국문학의 현재에 한국문학의 과거를 투영하는 식의 접근은 저 역시 마땅치 않습니다. 특히 장편들의 경우에는 제가 읽은 실감하고도 거리가 먼 이야기고요. 그러나 ‘거대서사에서 소서사로’라는 일반화라면, 두가지를 덧붙이고 싶네요. 하나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물에 대한 판단과 평가 또한 적극적으로 시도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고요, 또 『복사꽃 피는 날들』도 그렇고 모옌 장편도 그렇고 거대서사를 내려놓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는 작품들로도 보입니다. 구체적으로 혁명에 대한 태도에서도 『복사꽃 피는 날들』이 혁명의 해체라고만 볼 수 있을까요?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꿈이 파괴와 폭력으로 변질되는 양상을 그리는 것은 분명한데, 그럼에도 그 꿈 자체의 절실함은 인정하는 것 같거든요.
적극적인 평가의 시도는 전통서사의 활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복사꽃 피는 날들』에서 ‘도화원’을 혁명에 겹쳐놓은 것이 설화적 분위기를 강화하면서 현실감을 덜하게 만드는 듯도 합니다. 모옌 작품을 다시 거론합니다만, 『삼국지』 『서유기』의 서사까지 활용하면서 당나귀, 돼지 등으로 거듭 환생하는 화자의 시선으로 작품을 풀어간 『인생은 고달파』가 황당무계하기로는 훨씬 더할 텐데, 오히려 이런 설정이 중국의 사회주의혁명부터 개혁개방기까지 굵직한 사건들을 활달한 필치로 실감나게 담아내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한 측면이 더 크다고 보았습니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으되 그것을 답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서사와 결합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정신도 어느정도 살려낸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문외한의 만용일까요?(웃음)
백지운 모옌의 서사실험은 젊은 세대와는 다른, 이중성이 있는 것 같아요. 거대서사가 스케일의 문제만은 아니거든요. ‘집단의 공적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상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혁명의 해체, 거대서사의 해체라는 건 혁명의 이상 자체를 부인한다기보다, 국가의 공식서사로 봉합된 혁명의 역사를 개인들의 다양한 시선으로 절단하는 겁니다. 하나의 구조 안으로 환원되지 않는 제각각의 단면들이 서로 부딪히면서 지금 중국문학의 역동성이 생겨난 거죠. 방식은 다르지만 『위미』에서도 국가나 혁명이라는 ‘큰 역사’를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꺼페이가 도가적 신비주의라면 비페이위는 설서인(說書人)의 계열이랄까요, 통속적 이야기꾼 기질이 짙죠. 특히 재미있었던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이름이에요. 위미의 약혼자였던 ‘펑 궈량(彭國梁)’은 ‘국가의 대들보’라는 뜻이고, 위미의 남편 ‘궈 자싱(郭家興)’도 ‘국가의 부흥’을 뜻하죠. 중국어에서 ‘郭’과 ‘國’은 발음이 같아요. 위미의 동생 위슈를 파멸시킨 ‘궈 줘(郭左)’도 있고요. 이에 반해 주인공의 이름 ‘위미(玉米)’는 옥수수를 뜻합니다. 그야말로 들판에 자라는 빈천한 곡물이죠. 위미와 그 자매들이 이들 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혁명에 당하면서, 역으로 악착같은 생존력을 발휘해서 혁명과 권력의 논리를 자기 몸에 내재화하는 과정이 섬뜩하도록 리얼합니다.
심진경 중국소설에서는 역사의식이 굉장히 강한 것 같아요. 신해혁명이건 사회주의혁명이건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식민해방이나 한국전쟁 같은 경험이잖아요. 한국문학은 언젠가부터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고려시대 혹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버리거든요. 그때의 역사적 공간은 상당히 비현실적이고 허구적인, 오히려 탈역사화된 공간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역사의식도 드러나지 않아요. 중국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렇게 장르화된 한국의 역사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 개인의 일생을 역사 전체와 겹쳐서 사유하고 상상해내기 때문에 중층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한 단면을 잘라도 그 안에 전통적인 서사부터 아방가르드한 서사까지 들어가 있어서 활기가 느껴지죠.
한국문학에서 그런 문제의식을 나름의 방식으로 유지하는 작가로는 김연수(金衍洙)를 들 수 있겠습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나 『밤은 노래한다』 같은 소설들이 그런 작품이죠. 그 성과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더라도, 희귀한 사례라는 거죠. 대부분은 그런 의식이 없어요. 역사적 경험을 쓰는 걸 촌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추상화된 현실감각에 사로잡힌 것 같아요.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관통하는 삶의 경험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배제하려고 하고, 그것과 무관한 추상적인 공간을 그려내면서 그 안에서 쿨하고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잔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깊이 공감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저는 김연수 식의 노력들이 계속돼야 한다고 봐요. 물론 그의 작품에 대해 불만이 적지는 않아요. 현학취미나 지나친 감상성도 그렇고, 청년의 감수성과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적인 문제를 보려는 한계도 보이죠. 그럼에도 김연수가 드문 작가이고 이런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서사 해체와 이국적 공간의 일본소설
김영희 우리가 선별한 일본의 장편소설들에도 역사 쓰기를 시도하는 작품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어떻게들 읽으셨어요?
심진경 일본문학에서는 역사의식조차 상당히 소소한 방식으로 다뤄지는 것 같아요. 쯔시마 유우꼬(津島佑子)의 『웃는 늑대』(笑いオオカミ, 문학동네 2010)는 전후 일본의 피폐된 상황을 얘기하는 소설이죠. 늑대는 일본에서 거의 사라져서 신령화된 동물이거든요. 이 작품은 그런 늑대가 전부 없어지고 원숭이만 남아 있는 사회에 대한 얘기예요.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이 특이한데요, 두 아이의 여행과정에서 전후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실제 있었던 사건들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어요. 이 작가는 그동안 일본의 전통서사 양식을 채용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소설적 형식으로 전유하는 시도를 해왔거든요. 이 작품에서 꼭 그런 방식은 아니지만, 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물인 늑대를 모띠프로 삼아 얘기를 풀어가고 있어요.
호시노 토모유끼(星野智幸)의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目覺めよと人魚は歌う, 문학과지성사 2002)는 일본 라틴계 혼혈인 갱들의 이야기인데, 공간적 배경이 마치 사막 같은 외딴 공간이고, 인물도 초록색 눈의 혼혈인이라든가, 여자가 반 수면상태에서 떠나간 옛남자와 계속 교섭하는 몽환적인 이야기가 삽입돼요. 지금 일본의 상황을 상당히 이국적으로 그려내지만 그러면서도 그곳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지 않나 싶어요. 일본의 전통적인 서사양식이나 소재가 아니라 오히려 탈일본적인 배경이나 인물을 통해서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었어요.
김영희 유폐된 여성의 내면풍경과 일본내 소수민이 겪는 질곡을 한데 결합하려는 시도가 흥미로운데, 저로서는 탈일본적이라기보다 일본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 작품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작품의 한 축을 이루는 일본계 페루인의 문제를 통해서 그런 물음이 추구되는데, 일본에 거주하는 이 집단에서도 1세와 1.5세 사이의 간극을 섬세하게 짚어내지요. 일본인도 페루인도 아니고 어느 국적에도 매이지 않는 존재로 살려는 주인공이 폭력사건에 휘말리면서, 그런 유목적 자아상이 허구이자 문제의 근원임을 깨닫고 피할 수 없는 자기정체성과 정면으로 씨름하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인데, 무겁다면 무거운 이런 문제의식이 전체를 지배하는 몽환적 분위기와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백지운 그러고 보면 일본문학에서 무국적성은 꼭 하루끼의 전매특허만은 아닌 것 같아요. 호시노 토모유끼도 그렇고, 쯔시마 유우꼬의 『웃는 늑대』도 사실 전후(戰後) 뿌리를 상실한 일본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 점에서 최근 국내에 소개된 시마다 마사히꼬(島田雅彦)의 ‘무한캐논’ 씨리즈(혜성에 사는 사람들 아름다운 혼 이트루프의 사랑)도 분석해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돼요. 자기의 가계(家系)를 찾아가는 이야기인데요, 거기서 자기 할아버지가 ‘나비부인’의 아들인 걸 알게 되죠. 미군과 게이샤 사이에서 태어난 저주받은 아이가 바로 자신의 뿌리라는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자기의 근원을 따라올라가는 과정에서 근대 동아시아 역사가 한데 얽혀 펼쳐지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고요. 그런데 그게 고뇌에 찬 탐문이라기보단 가볍고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라이트노블’에 가깝죠. 그럼에도 일본문학에서 정체성 문제는 그 맥락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현우 저는 중국문학이나 일본문학에는 문외한에 가까운데, 우리에게 소개된 중국문학은 최량급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세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한국문학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뭔가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런데 1990년대 이후가 중국문학의 중흥기라고 한다면, 최근에 와서야 좋아진 거니까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하네요.(웃음) 중국문학의 경우엔 아직 가족이라는 중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듯싶고 반면에 일본문학은 그게 약한, 그래서 상당히 개인화된 주인공을 등장시킨다는 인상입니다. 한편 일본문학에 대해서는 작품은 많이 소개돼 있지만 전체적인 상이 어떻고 이 작가들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그림이 안 그려져요. 말하자면 ‘지도’를 안 갖고 있는 셈인데, 일본문학에서는 그런 지도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김영희 다양한 층위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문학종언론’에서 거론한 바 일본문학의 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네요. 현재의 세계문학 판도에서 일본문학이 차지하는 지분을 보면 역설적인 현상인데, 진지한 시도들이 각개약진하고는 있지만,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는 형국인 셈인가요?
이현우 일본독자들도 감을 잡을 수 없는 건지.(웃음)
김영희 일본문학의 실상이 어떤지는 더 관심을 두고 들여다봐야겠습니다만,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구상에서나 세계문학의 기획에서나 전제로 하고 있는, 뜻있는 작가와 작품의 활발한 국제적 소통이 각각의 국민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도 절실하다는 점이 더 실감있게 다가오네요. 어느새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겼습니다. 세계문학과 관련해서 현재 한국문학에 안겨진 과제도 좋고,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씩 해주시지요.
심진경 사실은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대부분의 한국소설은 굉장히 특수한 소설이에요. 자국의 현실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죠. 오히려 어느 편인가 하면, 현실을 그리는 것을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사실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적 보편성을 가지려면 한국적 현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대한 좀더 깊고 넓은 이해, 각자에게 새겨진 역사의 흔적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죠. 예컨대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설이 미국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다루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무국적 색채가 강한 하루끼 소설조차 일본사회의 문제에서 출발하잖아요. 지금 세계문학으로의 가능성을 엿보고자 하는 한국소설이 고민해야 할 과제의 출발점은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백지운 말씀 들으니 동아시아 작가들이 역사나 현실에 갖는 불균등한 원근감 자체가 현재 동아시아문학의 지형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동아시아문학’에 대한 고민이 한국문학뿐 아니라 중국 및 일본 문학의 좌표를 읽는 이론적・실천적인 방법으로 깊어지면 좋겠네요. 과거의 ‘제3세계문학’보다는 한결 구체적인 시야를 열어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오늘 논의에서 동아시아를 한중일로 제한한 게 마음에 걸리는데 차차 넓혀가야겠죠.
이현우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과제와 세계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을 정립하는 과제, 이것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이중과제’ 같습니다. 한국인들만 읽는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보면 더 많은 번역공간, 소통공간을 마련하고 확대해나가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김영희 예, 번역과 언어의 문제 역시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제대로 다룰 여유가 없었네요. 아쉬운 대로 이번 자리는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긴 시간, 수고들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