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

중화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성찰

 

 

첸 리췬 錢理群

전 뻬이징대학 중문과 교수. 루 쉰을 중심으로 한 중국근현대문학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체험과 현실인식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왔다. 저서로 『知我者謂我心憂』 『1948, 天地玄黃』 등이 있음.

 

 

이번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게다가 발표까지 한다는 것이 저로선 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주제가 제 전공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심포지엄 의제와 제 연구를 어떻게든 끌어다 붙일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곧 저우 쭤런(周作人)이 말한 ‘탑제(搭題)’1)인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오 쩌뚱(毛澤東)과 당시의 중국을 연구할 때 한가지 현상에 주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오 쩌뚱이 중국 국내문제를 처리할 때 늘 국제문제를 고려했고, 거기엔 냉전이라는 국제정세의 배경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이라는 주제입니다만, 실은 이것도 제가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대륙의 저명한 역사가 양 쿠이쑹(楊奎松)의 『‘중간지대’의 혁명: 국제적 거대구도하에서 본 중국공산당 성공의 길』(中間地帶的革命: 中國革命的策略在國際背景下的演變, 1991)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일부 내용은 양선생의 연구성과를 활용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분야에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저 그런 자료를 접하고 몇몇 결정적 시기 마오 쩌뚱의 전략결정에 냉전상황이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었는지 지엽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1. 1946~47년

 

2차대전이 종결되고 중국의 항일전쟁도 끝난 뒤 중국 국내의 최대 전략문제는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이 ‘전(戰)’할 것인가 ‘화(和)’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마오 쩌뚱이 이끈 중국혁명 자체의 논리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에 따르면 그 답은 당연히 전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국민당의 통치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적 압박에 부딪힙니다. 미국과 소련 양대국 모두 중국내전으로 3차대전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지지하에 국무장관 마셜(G. Marshall)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재에 나섭니다. 중국문제에 중국의 국민당, 공산당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미소 양국이 결정권을 쥐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잘못됐다 싶은 건 못 참는 마오 쩌뚱으로선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자기의 의지에 따라 중국문제를 수습하려면 우선 국내외를 향해, 그리고 공산당 내부를 향해 두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습니다. 첫째는 내전이 개시되면 미국이 출병할 것인가 하는 문제, 둘째는 중국의 내전이 3차대전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여부였습니다. 이에 마오 쩌뚱은 19468월 미국기자 애너 스트롱(Anna L. Strong)과의 대담에서, 냉전 개시단계의 국제정세에 대해 자신의 판단과 분석을 내놓습니다.2) 마오는 이후 널리 회자된 “미 제국주의와 모든 반동파는 전부 종이호랑이”라는 단언 말고도 처음으로 ‘중간지대’ 이론을 내놓았는데, 실은 이것이 더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광활한 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의 많은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들이 그 속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가지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첫째, “미국 반동파는 이들(중간지대) 국가를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하자는 말은 꺼낼 수 없을 것이다.”3) 그러므로 미소 양국은 모순과 투쟁 속에서 타협을 구할 수밖에 없고 중국내전은 결코 또 한번의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킬 리 없다.

둘째, 소련과 미국의 대치는 역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고, 미국이 출병하여 국민당을 도와 내전을 벌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셋째, 중국을 대표로 하는 중간지대의 혁명은, 소련을 리더로 하는 민주・반제혁명진영의 역량을 강화하여 직접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역량 대비에 영향을 주고, 아울러 미래세계의 향방에 영향을 줄 터이다.4)

요컨대, 마오 쩌뚱은 바로 이런 ‘중간지대’ 이론에 의해 계발되고 힘을 얻으며 자주독립적으로 중국혁명의 최후승리를 이끈 것입니다. 아울러 2차대전 이후의 국제문제를 관찰하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는데, 바로 미소 양대국의 대립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중간지대’ 국가들의 역할에도 주목한다는 점입니다. 이들 중간지대 국가는 각자 서로 다른 수준으로 미소 양국의 영향과 제약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이해관계가 있었고 국제적 사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마오 쩌뚱은 의식적으로 아예 중국을 ‘중간지대’ 국가의 자리에 갖다놓습니다. 이런 자리매김은, 중국 입장에서는 ‘일변도(一邊倒)5)를 분명히해서 소련을 리더로 하는 사회주의진영 국가들의 외교 및 국내정책의 동반자가 되면서도 자연스럽게 일종의 제약을 가하는 역할도 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관계를 보증하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성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반둥회의에서 중국이 ‘평화공존’ 5개 원칙을 제안하고 비동맹국운동에 시종 지지를 표명한 것은 모두 자신의 독자성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1956년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마오 쩌뚱은 즉각 하나의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소련의 사회주의모델 외에 중국 스스로의 발전적 사회주의모델을 구축하고자 미국과 소련의 외부에서 ‘제3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려 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이야기된 부분이지요. 저는 이 문제를 파고들면서 한가지 자료에 주목했는데, 마오 쩌뚱의 사고맥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왕 리(王力)가 『반사록(反思錄)』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19568월 중국은 휘트먼(W. Whitman)의 시집 『풀잎』의 역자 추 투난(楚圖南)을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예술단을 남미에 파견하며 왕 리가 부단장 겸 비서장을 맡도록 결정합니다. 당시 왕은 중앙국제활동지도위원회의 부비서장으로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대외연락부장 왕 자샹(王稼祥)이 직접 마오 쩌뚱에게 책임보고를 하는 조직이었던바, 이는 마오의 전략적 결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왕에 따르면 당시 이미 미국정부의 초청을 받은 상태였고 남미 방문 후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답니다.6) 그러나 대표단이 한창 아르헨띠나를 방문하고 있을 때 헝가리사건7)이 일어나 형세가 급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중관계 해빙노력은 20년 후 미국 탁구팀의 중국 방문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실제 1956년 마오 쩌뚱은 미국으로부터 배울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떵 샤오핑(鄧小平)이 회고하길, 당시 마오 쩌뚱은 스딸린에 의한 사회주의 법제의 파괴는 “미국, 영국, 프랑스 같은 서방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오는 1956년에 쓴 유명한 『십대관계를 논하다(論十大關系)8)에서 미국 같은 제국주의국가가 “실은 나쁘지만 이렇게 선진국이 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정치제도는 연구해볼 수 있다”고 확실히 언급했던 것입니다. 물론 마오 쩌뚱의 반제국주의 입장은 변할 리 없었고 스딸린모델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었으며 마오 쩌뚱의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진영의 성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주체적으로 미소 양국 및 그 발전과정을 참고하고 비판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독립적이고 자주적으로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3. 1958년

 

마오 쩌뚱이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운동을 일으키게 된 원인은 물론 매우 복잡하고 전문가들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역시 미소 양대국과의 관계 배경입니다. 우선 소련과의 관계를 봅시다.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 후에 스딸린 문제가 폭로되고 더욱이 폴란드・헝가리사건의 처리에서 범한 여러 실책으로 말미암아 소련의 영향력과 권위가 크게 약화됩니다. 1957년말 모스끄바에서 열린 세계공산당대회에서 사회주의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이 권위있는 제1인자를 필요로 할 것인지, 누가 그 역할을 맡을 것인지의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하여 큰 존재감을 보인 마오 쩌뚱은 역시 ‘제1인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소련이 앞장서줄 것을 적극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의미심장한 얘기도 했습니다. “중국은 정치나 인구 측면에서는 대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소국이다.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고자 한다. 중국을 진정한 대국으로 만들어 인류에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중국은 ‘제1인자’가 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 “정치대국과 경제소국의 모순을 해결해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진정한 대국이 되어야” 명실상부하게 사회주의진영과 국제공산주의운동, 나아가 전인류의 영도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마오 쩌뚱의 웅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내포된 중화중심주의는 뒤에서 논의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마오의 포부를 소련인들이 못 읽었을 리 없고 이것이 곧 이후 중・소 모순과 충돌의 복선이 됩니다.

그 다음은 미국과의 관계입니다. 폴란드・헝가리사건 발생 이후 미국은 사회주의진영이 와해될 좋은 기회라고 여겼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소반공(反蘇反共)의 물결이 높아졌습니다. 중국문제에 있어서도 강경한 공격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19574월 미 국무성은 성명을 발표하여 일방적으로 일체의 대중(對中)무역을 금지했고, 513일엔 국무장관 덜레스(J. F. Dulles)가 대만의 중화민국을 지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한다고 선포했습니다. 9월엔 또 공산주의 현상이 중국에서 사라지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195712월이 되자 미국은 더욱 일방적으로 1954년 시작된 미・중간 대사급 회담도 중단시킵니다. 미국의 일련의 태도와 행동은 모두 1957년에 발생한 것들로서, 마오 쩌뚱이 1958년 대약진운동을 발동하는 중요한 정치적・심리적 배경이 됩니다. 즉 마오는 ‘고립무원’의 심정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이를 돌파하겠다는 강렬한 충동을 가지면서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넘어서자”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표면적으로 반미・반서방의 태세를 취하며 내심으론 역시 미국과 서방의 승인과 지지를 기대하는 동시에, 그에 기대어 대만이라는 중국통일의 최후 장애물이자 치명적인 우환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국제정치가로서 마오 쩌뚱은, 물론 중국의 경제발전이 관건이라는 것, 그리고 강대한 국방산업이 있어야 진정으로 실력으로써 담판을 통해 미국의 승인을 압박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후 미중관계의 역사는 과연 마오의 구상대로 발전하게 됩니다. 빠른 경제발전으로 미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서방세계의 포위를 돌파하겠다는 마오 쩌뚱의 생각과 노선, 거기에 표출된 민족정서는 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의 인민들(농민・노동자 인민과 지식인을 포함하여) 사이에 뿌리깊은 대중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고, 이것은 그가 대약진운동을 발동시키는 강력한 대중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1958년 ‘진먼따오(金門島) 포격’ 사건 얘기를 해보지요. 이 역시 전문가의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서 간단히밖에는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마오 쩌뚱이 진먼따오를 포격한 데는 세가지 동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대륙 내부의 필요성입니다. 마오 쩌뚱이 발동시킨 인민공사운동의 중요한 측면이 ‘전인민의 무장’을 실행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이 진먼따오 포격을 이용합니다. 푸젠성(福建省) 연안과 전국에서 ‘민병사단(民兵師團)’을 대대적으로 조직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민심을 모으고 사기를 고무시켰습니다. 둘째, ‘장 제스와 연합하여 미국에 저항하자連蔣抗美’ 전략으로 미국과 장 제스(蔣介石)의 관계를 갈라놓음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 양자 담판으로 양안(兩岸)을 통일하기 위한 한가지 복선을 깔아두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약진의 기세를 몰아 미국을 향해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이 회담 테이블에 돌아오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은 과연 달성되었습니다. 1958823일 진먼따오 포격이 있고 나서 915일 대사급 회담이 재개됩니다. 비록 회담은 진전 없이 결국 다시 좌초했지만 말입니다.

 

 

4. 1959~61년

 

이 시기 중국에는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작년(2009) 대만에서 강의를 할 때 대약진운동에서 대기근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즉 고속도의 고목표가 고지표를 낳고, 이것이 다시 고생산예측, 고수매, 고누적, 고비축을 낳아 결국 농민의 식량을 빼앗을 수밖에 없게 되면서 대량 아사자를 낸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고리는 ‘고매수, 고누적, 고비축’이었습니다. 100만명이 죽어간 허난성(河南省) 신양(信陽)지구의 경우 1959년 수확된 식량 절반이 국가에 수매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졌을 때 국고엔 약 10억톤의 식량이 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 이런 ‘고수매, 고비축’을 하려 했을까요?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을 보증함으로써 사회안정을 유지하려는 것 이외에 주요 목적은 바로 수출을 증가시키려 한 것이었고 그 이유는 모두 국제정세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련에 진 부채입니다. 실제 당시 소련은 상환을 재촉하지 않았지만 마오 쩌뚱은 기죽지 않으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채상환을 앞당기려 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알바니아와 베트남 등 맹우(盟友)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는데, 바로 대기근이 가장 심각했던 1960년 중국공산당은 전문기구를 발족하여 해외지원업무를 맡기고 그 예산도 이 해에 크게 늘렸습니다. 셋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이 국방력 강화였습니다. 바로 1959~60년 국방비용을 대폭 늘렸고 핵무기 개발연구도 시작됩니다. 농민을 희생시켜 그 댓가로 ‘부국강병’의 노선을 밀고간 것입니다. 듣건대 국가안전을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의 국제정세가 확실히 긴장국면이었던 측면은 있습니다. 특히 1962년 동남방에서는 장 제스의 대륙공격이 있었고 그 배후에 미국이 있었습니다. 서남방 변경에선 인도의 침공이 있었고 그 배후에 소련이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또 소련의 직접적인 위협이 존재했고 유럽의 공산당과 사회주의국가의 대다수는 중국을 규탄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마오 쩌뚱은 다시금 심각한 고립무원의 심정에 빠졌고, 그럴수록 어떤 댓가를 치르고라도 군수산업과 관련 중공업을 발전시키려 했다는 것, 이것이 대기근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5. 1965년 문화대혁명 전야

 

마오 쩌뚱이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키는 배경에는 분명 미소 양국의 존재가 있었습니다. 60년대 미국 케네디와 존슨 두 정부 모두 사회주의진영 가운데 중국이 가장 호전적이며 장기적으로 주적이 되리라고 인식했습니다. 그 때문에 몇차례 장 제스와 연합하여 중국의 핵개발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1964년 미국은 베트남 북방을 폭격하고 1965년엔 베트남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는데, 이는 모두 직접적으로 중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 쩌뚱은 ‘중간지대’ 이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립니다. 즉 “중간지대는 두 부분이다. 하나는 아시아・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광대한 저개발국가, 다른 하나는 유럽을 대표로 하는 제국주의국가와 선진자본주의국가, 이 양측이 모두 미국의 지배에 반대한다. 동유럽 각국에서는 소련의 지배에 반대한다”9)면서,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지배되고 간섭받고 기만당하는 모든 국가들이 연합하여 광범한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미 제국주의 침략정책과 전쟁정책에 반대하자”고 호소했습니다.10) 마오 쩌뚱이 보기에 소련의 수정주의는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에의 투항을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반제(反帝)’는 반드시 ‘반(反)수정주의’가 되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소련과 미국 모두 마찬가지로 최고로 위험한 적국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1965년 마오 쩌뚱은 린 뺘오(林彪) 이름으로 발표된 「인민전쟁승리만세」(1965)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이들 제3세계가 미국과 서구제국을 포위하는” ‘세계혁명’의 모델을 제안함으로써 제3세계를 놓고 소련과 리더십을 다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오 쩌뚱이 1년 후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키는 중요한 이유이자 목적이며, 그의 ‘세계혁명의 교사(敎師)’ 심리를 반영하는, 말하자면 중화주의의 혁명 버전인 셈입니다.

마오 쩌뚱을 가장 경계하게 만든 것으로 미국이 줄곧 ‘평화발전’ 전략을 고취했다는 점도 있습니다. 마오는 점점 당내에서 이견을 가진 측을 미 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의 대리인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1965년 마오는 징강산(井岡山)에 다시 올라 착잡한 심정으로 말합니다. “안팎의 협공 속에서, 우리 공산당은 어떻게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보호할 것인가!?”11) 이런 ‘내외협공’의 우려는 아마 ‘적수들의 형편’에 대한 마오 쩌뚱의 과대평가였는지도 모릅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그가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하나의 동인이라는 점입니다.

 

 

6. 1971년, 72년, 문혁 후기

 

마오 쩌뚱은 대미관계를 회복할 전략적 결정을 내리면서 1974년 명확하게 ‘제3세계’ 이론을 제기합니다. 즉 “미국, 소련이 제1세계” “일본, 유럽, 호주, 캐나다가 제2세계”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는 모두 제3세계, 아프리카제국은 모두 제3세계, 라틴아메리카도 제3세계다.”12) “세계를 3개로” 구획한 것은 분명 마오 쩌뚱의 ‘중간지대’ 이론의 발전형태로, 그가 일관적으로 견지해온 제3세계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현실적 의의는 두가지 구분에 있습니다. 즉 하나는, 일본 유럽 호주 캐나다를 미국과 떼어내 구분함으로써 통상 서방이라고 일컫는 세계를 두개로 나누어, 중국이 일본 유럽 호주 캐나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공간을 열어둔 것입니다. 둘째는 미국을 소련과 분리해서 소련을 주적으로 보고 반소 미중연합의 새로운 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반패권주의 연합’으로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를 대신하는 것. 이것은 자연히 하나의 대국적(大局的) 차원의, 근본적인 전략의 선회였고, 미중관계를 발전적 방향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세계발전의 틀과 방향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마오 쩌뚱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미래 발전을 위한 더 넓은 국제적 공간을 열어두려 했던 것이고, 바로 여기서 개혁개방의 신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마오 쩌뚱이 중국에 남겨준 최대 유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간략한 역사적 회고에서 마오 쩌뚱이 국제적 전략의 안목을 가진 존재이고, 늘 국내외의 복잡한 얽힘 속에서 모종의 돌파구를 찾아내고 자신의 전략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 본토에 발을 붙인 채로 국제냉전의 장을 종횡무진했고 중국을 주재했을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독특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마오 쩌뚱이 국제문제를 처리할 때 시종 세가지 기본입장을 견지했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날 평가해볼 때 이런 입장에는 어떤 역사의 합리성이 존재하는 동시에 모종의 깊은 역사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간관계상 몇가지만 간단히 얘기해보겠습니다.

첫째, 마오 쩌뚱은 시종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우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을 강조했고, 따라서 냉전의 양극 가운데 소련을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진영 쪽으로 경도되었습니다. 나중엔 또 ‘맑스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을 강조하며 ‘반제국주의, 반수정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제국주의 침략 반대와 국제패권주의 반대라는 입장에는 당연히 나름의 합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적지 않았는데, 저는 크게 두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우선 마오 쩌뚱이 견지한 ‘사회주의’와 ‘맑스주의’(실제는 ‘마오쩌뚱주의’) 자체가 의문점이 많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 하나, 여기에 은폐된 ‘이것 아니면 곧 저것’ 식의 대립논리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독선적 극단논리는 곧 자신의 이른바 절대순수성을 보증하기 위해 실질적으로는 상대에 대한 학습과 흡수 및 참고를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자기의 합리성을 극단으로 몰고 가,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封・資・修(봉건주자본주수정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인류문명의 모든 성과를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사상, 문화, 교육에 남긴 심각한 부작용은 오늘날까지 청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마오 쩌뚱은 시종 민족주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는 냉전구도에서 미소 양대국과의 관계를 다룰 때 일관되게 ‘자주독립’을 강조하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호하며 자기발전의 길을 갈 것을 강조했던바, 이는 마오 쩌뚱의 가장 귀중한 유산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두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우선 전제적 수단을 사용하여 노동자 특히 농민의 이익을 가차없이 희생시켰고, 그들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부국강병’이라는 민족국가의 목표를 실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오 쩌뚱의 영도하에 중국은 경제면에서 고도성장을 이룩하기는 하지만 이는 일종의 파괴적 발전이었고 이런 노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마오 쩌뚱의 민족주의는 중화중심주의의 흔적이 짙다는 점입니다. 이는 문화대혁명기에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는데, 운동이 시작되자 당시의 중앙문혁소조 부조장 천 뽀따(陳伯達)가 발표한 강화(講話)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의 세계문화중심이 이미 서방에서 동방으로 옮아왔음을 강조하며 동방문화의 중심은 중국이라고 강조합니다. 마오 쩌뚱이 창조한 중국혁명의 문화, 즉 이른바 ‘마오주의’가 장차 동방과 세계문화를 이끌어가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중국 전통문화 가운데 중화제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삼고 중화문명의 바깥은 문명이 없다고 여기는 관념과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일찍이 중국 전통문화 속에 두가지 가장 나쁜 점이 전제주의와 중화중심주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은 모두 마오 쩌뚱에게 계승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것도 자각적으로 말입니다. 마오 쩌뚱의 유산 가운데 비판적으로 정리되어야 할 요소일 것입니다.

셋째, 마오 쩌뚱은 국제주의의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는 본래 맑스주의 기본원칙의 하나입니다만, 앞에서 거듭 얘기했듯 마오가 냉전시기의 국제구도를 관찰하고 분석할 때 그의 출발점은 바로 ‘중간지대’였습니다. 이 개념은 1946년 제출되어 60년대 한단계 발전했고, 70년대 ‘제3세계’를 구분하는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마오 쩌뚱이 거듭 ‘제3세계’에 중국이 속함을 강조하고 패권주의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제3세계의 혁명과 건설을 지지한 것은 일정부분 적극적 의의를 가집니다. 마오시대에 성장한 저희 세대는 어려서부터 하나의 관념, 혹은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의 기본 방법론을 키워왔는데, 바로 모든 국가의 인민과 통치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는 공통의 이익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협력하여 본국의 통치자와 국제제국주의에 반대해야 한다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이는 ‘세계노동자연합’의 관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당시 일본인들의 미일안보조약 반대투쟁(오끼나와인의 투쟁도 포함해서), 한국인의 이승만정부 반대투쟁, 1968년 프랑스의 학생 및 노동자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에 우리는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각국의 노동자연합이 서로 지지하는 국제주의사상은 오늘날 세계화시대에도 의미있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우리의 전세계 인민에 대한 지지는 동시에 하나의 허망한 상상을 기초로 구축된 것이라는 점, 세계 각국의 인민 모두 ‘모진 고통’에 살고 있으므로 중국인이 가서 ‘구제’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구세주적 심리의 이면에는 중국사회 자체의 심각한 폐단과 위기가 감춰져 있었는데 이는 두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실질적인 중국중심론인데, 앞에서 얘기한 대로 전통적 중화주의의 혁명 버전이라는 점, 또 하나는 중국의 혁명경험과 마오사상을 수출하여 많은 나라에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미 마오 쩌뚱이 당시 설정한 국가목표를 실현했습니다. 즉 정치대국, 인구대국일 뿐 아니라 경제대국으로 발전하면서 이른바 ‘대국의 발흥’을 드러냈고 아울러 냉전 후의 국제정치・경제・문화 면에서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특별히 우리가 숙고하고 경계해야 할 두가지 문제가 제기될 듯합니다. 첫째는 중국의 경제부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분석할 것인가, 그 속에서 어떤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흡수해야 하는가입니다. 저는 요 몇년 줄곧 설득력있는 비판이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호소해왔습니다. 역사가 제기한 이 새로운 과제에 답하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현재 연구중이라 여기서 논의를 전개하긴 어렵겠고, 그저 근년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제기하고 국가적 지지를 얻어낸 ‘중국모델’론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제창하는 이른바 ‘인민을 위한 집권’이라는 ‘개명(開明)한 독재’는 실질적으로 마오 쩌뚱에서 이어져온 것을 독재정치의 수단이자 노동자 수탈의 방식으로 활용하여 국가근대화 목표 및 노선의 이상화와 모델화를 달성하려는 것이라는 점, 아울러 중국당국이 그동안 추진해온 ‘역량을 집중하여 큰일을 이루자’는 것은 이른바 ‘거국체제(擧國體制)’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런 ‘거국체제’ 역시 두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할 것’을 강조하며 ‘민생을 개선’한다고 선전합니다. 또다른 면은 일당독재체제 유지에 진력하고 사상문화적 통제를 계속함으로써 사회를 제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체제 개혁을 뒤처지게 만듭니다. 기득권집단의 권력이 장악하고 주도하는 어떤 개혁도 노동자의 이익에는 새로운 마이너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면 오히려 경제발전을 제약하고, 민생안정의 실질적 효과에 영향을 미쳐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회는 점점 불안정해질 것입니다.

저는 최근 뻬이징의 한 좌담회에서 2010년 중국의 현실에 대해 이런 묘사와 판단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2010년 중국은 내외모순에 있어 공전의 격화를 맞는 시대로 진입했다. 연초의 ‘폭스콘 노동자 투신자살사건’에서 시작해 ‘유치원 피바람’13) 같은 돌발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갖가지 원인에 의한 폭력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사회저변으로부터 민(民)과 관(官), 민과 상(商) 사이, 약자와 기득권층 강자 간의 모순이 이미 한계점에 이르러 수시로 폭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회 중간층의 지식인은 거듭 압박을 받으며 체제와의 모순을 나날이 더해가고 한편으론 그들 내부의 분화도 날로 심각해져, 본래는 보통이고 정상적인 이견인데도 모두 큰 풍파를 일으킬 수 있는, 마치 물과 불처럼 서로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같다. 고도의 모순이 드디어 표면에까지 떠오른 것이다. 기층으로부터 중간층, 상류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느끼게 되면서 전사회적 불안감, 전사회적 우울과 불만이 원한 수준에 다다랐음을 뜻한다. 사회위기의 대폭발은 바로 우리 앞에 닥쳐 있고, 언제 어떻게 촉발되어 별안간 나타날지 알 수 없다.”

결코 겁주고 놀라게 하려는 말이 아니라 ‘중국발흥’이 이런 심각한 국내문제와 냉엄한 현실을 가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형형색색의 ‘중국모델’ ‘중국의 길’이란 바로 경제결정론적 사유로서, 경제발전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위기를 은폐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발흥이 초래하는 둘째 문제는 경제발흥의 중국과 중국인이 사회제도, 관념, 사유, 문화가 상이한 국가나 민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국가와 인민은 또 자기들과 전혀 다른 사회제도, 신앙, 사회, 문화를 가지는, 그러나 정치・경제・인구대국인 중국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냉전 후 세계가 오늘날의 지구화시대로 발전하여 새롭게 직면한 큰 과제입니다. 저는 2008년 올림픽 기간에 우려를 표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중국 자신이나 세계나 이 문제에 대해 사상적・심리적으로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이후 2009년, 2010년 ‘중국과 세계’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많은 사건들이 모두 이 점을 증명해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더욱 주목하고 경각심을 갖는 것은 중국과 중국인 스스로의 문제입니다. 바로 현재 중국에서 나날이 영향력을 키우는 국가주의, 중화주의의 물결입니다. 이는 대외적으로 중화중심주의, 국내적으로는 소수민족에 대한 대(大)한족주의, 대만에 대해서는 중원중심주의로 드러납니다. 이런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 사조는 물론 중국문화의 전통과 관련이 있지만 더욱 실질적으로는 오늘날 중국에 널리 퍼진 허무주의 풍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을 때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것이 바로 ‘애국’입니다. 당국은 스스로 신뢰를 잃어 민심을 결집할 수 없게 될 때 필연적으로 국가주의, 중화주의 색채를 짙게 띤 소위 ‘애국주의’를 국가이데올로기로 삼게 됩니다. 젊은이를 포함하여 민중심리는 당국의 통치수요와 결합하여 국가주의, 중화주의의 튼실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대국발흥’은 그것에 더욱 물질적 기반과 정서적・심리적 자극을 제공하게 되겠지요. 거듭 말하지만, 중국의 발흥 이후 중국 주변국가와 서방세계의 우익세력이 하나같이 ‘중국을 저지하자’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이런 중국에 대한 포위는 반대로 중국 내부에서 민족주의의 극단화를 다그칩니다. 저는 앞에서, 동아시아 각국의 비판적 지식인이 모두 자기 나라의 극단적 민족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만일 그것이 그냥 커지도록 방치하면 상호자극의 악순환을 낳아 큰 위험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협력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국내문제에 대해 얘기하며 제가 더욱 충격과 우려를 느끼는 것은, 이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의 광풍 속에서 중국대륙의 일부 지식인과 청년들이 하는 역할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이 문제에 저는 전혀 준비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잘 아는 몇몇 친구들, 심지어 80년대 계몽주의 사조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하고 싸운 친구들이 그 속에 쓸려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사상적 결렬에서 비롯된 현실에서의 분열은 저를 난감하게 하지만,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오는 고통과 곤혹은 형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제가 줄곧 큰 기대를 걸어온 청년들이 거기 휩쓸려가는 것이 심정적으로는 ‘그럴 만도 하겠다’ 싶으면서(요 몇년 우리의 청년교육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또 ‘상상초월’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이 때문에 망연자실하곤 합니다. 가까운 두가지 예가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젊은 기자가 한국에서 열린 오바마 대통령 기자회견석상에서 갑자기 자기를 “아시아를 대표”해서, 심지어는 “한국을 대표해서”라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14) 뻬이징대학의 한 학생은 갑자기 대놓고 영국 수상에게 “영국은 중국의 모델과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루 쉰(魯迅, 본명 周樹人), 저우 쭤런(周作人) 형제가 54시기에 첨예하게 비판했던 “애국적 자기과대평가”가 팔구십년이 지난 오늘의 중국 청년들에게서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동시에 부활한 마오 쩌뚱 시대의 “혁명경험의 수출, 중국식 패턴으로 세계를 개조한다”는 식의 중화중심주의, 그것도 이 정도의 기고만장함에 정말이지 비애를 느꼈습니다. 이런 과도한 자기중심적 자아의식 역시 바로 앞서 얘기한 국내적 위기의 갖가지 배경을 생각할 때 걱정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정신적 환각상태에 빠져 있으면 결코 자기반성이 있을 수 없고, 위기감 없는 국가나 민족이나 개인은 위험하니까요. 저는 그 속에서 진정한 민족의 위기를 보며 근심걱정에 애가 탑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저도 분명 애국주의자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독립된 비판적 지식인의 입장을 지킨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해와 추구에 따르면, 비판적 지식인이란 우선 비판의 예봉을 자기 나라에 향하게 해야 하고 자기 민족 스스로 구성원과 사회의 개혁에 힘을 다해야 합니다. 루 쉰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매국노’로 몰려 비난의 화살을 맞기 십상입니다. 그 다음, 독립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두가지 기본요건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형태의 독재에 대한 비판을 견지할 것, 국가정치의 독재성만이 아니라 자본시장의 전제성도 비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형태의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것, 즉 성난 젊은이들의 조악한 감정적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를 비판해야 하고 지식인의 정치한 이론으로 포장된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도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에서 이렇게 하려면 루 쉰이 말한 바 ‘횡전(橫戰)15)’을 배워 상하사방(上下四方)으로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국가이데올로기, 그리고 이른바 ‘민심’ 및 ‘공론’과 싸우고, 나아가 지식인들과 고도의 논전을 벌이고, 심지어 지난날의 전우와도 맞서야 합니다.

저로서는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모든 바깥의 곤혹이 최종적으로는 자기 속의 곤혹이 되어버립니다. 제게는 지금껏 해소하지 못하는 두가지 모순과 곤혹이 있습니다. 첫째, ‘인도주의와 민족주의의 모순.’ 예를 들어 제가 마오시대를 마주해 연구할 때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대기근시대에 중국이 진행한 핵실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그 배경에는 ‘생명지상주의’를 견지하는 신념과 국가안전유지의 필요성이라는 선택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곤혹은 한편으로는 국가주의, 중화중심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 분명 견고한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민족의 지식인으로서, 중국인으로서 민족적・국가적 입장이 없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국이 일본의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 루 쉰은 막내아우 저우 젠런(周建人)으로 하여금 저우 쭤런에게 주의를 주도록 했습니다. 민족 대의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분명한 입장이 없으면 안된다고요. 당시 쭤런은 항일을 선전하는 국가주의 경향에 반감을 품었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었습니다. 루 쉰은 그의 반국가주의를 이해하면서도 쭤런의 애매함에서 예민하게 위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결국 루 쉰의 선견지명대로 되어버렸습니다.16) 저는 루 쉰과 저우 쭤런 형제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줄곧 이런 역사적 교훈을 단단히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깊은 곤혹 속에서도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이론적 한계를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실생활에서 국가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부딪힐 때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할 것인지 상당히 난감해집니다. 그밖에 우리는 국가주의를 반대하지만 국가의 역할을 간단히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중국대륙에서 국가는 강자입니다. 설사 민간 차원의 운동을 일으킨다 해도 국가의 뒷받침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국가나 정부와의 관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는 여전히 난제이며, 우리가 국가주의를 단연코 반대하고 중화중심주의를 경계하는 민간 차원의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 하는 이상, 더욱 우리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곤혹 속에서 독립된 사고와 탐색을 하고, 곤혹 속에서 그것을 지켜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다른 의미에서 이는 절망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상호지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선 각자가 처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자기 나라와 그 지역사람들의 저항운동에 입각하여 서로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내며 ‘아래로부터의 민간 세계화운동’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은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번역 | 임명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

*이 글의 원제는 ‘中國國內問題的冷戰背景’이며, 2010년 11월 26~28일 대만 진먼따오(金門島)에서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 ‘냉전의 역사와 문화’의 발표문을 필자가 수정・보완한 것이다. 錢理群 2011 / 한국어판 창비 2011

1)절탑제(截搭題). 경서에서 발췌한 자구를 임의로 이어붙여 글제목으로 삼는 것. 명・청시대 팔고문(八股文) 위주의 과거시험 출제방식으로 많이 이용되었다—옮긴이.

2) 냉전의 정식 개시는 1947년 3월 21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유명한 ‘냉전선언’을 발표하고 ‘유럽부흥’의 마셜플랜을 제안하자, 소련을 대표로 하는 동유럽 각국 공산당이 즉각 유럽 프롤레타리아정당과 공산당 정보국 성립을 선포하면서부터다. 이로써 양대 진영이 형성된다.

3) 毛澤東 「和美國記者安娜. 路易斯. 斯特朗的談話」(1946.8), 『毛澤東選集』(四卷本), 人民出版社 1967, 1985면.

4) 楊奎松 『“中間地帶”的革命: 國際大背景下看中共成功之道』, 山西人民出版社 2010, 515~17면, 518~19면.

5) 50년대 중국의 외교기조였던 친소련정책—옮긴이.

6) 『王力反思錄』(), 香港北星出版社 2001, 342면.

7) 1956년 공산정권에 반발하여 일어난 대규모 민중봉기로 스딸린 사후 동구권에 퍼진 반소운동의 하나. 탈(脫)스딸린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소련의 무력진압으로 좌절했다—옮긴이.

8) 1956년 4월 25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석상에서 밝힌 국가건설 기본구상. 그 골격은 아래 10개 항목으로 정리된다. 중공업과 경공업과 농업의 관계, 연안공업과 내륙공업의 관계,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관계, 국가생산조직과 생산자 개인의 관계, 중앙과 지방의 관계, 한족과 소수민족의 관계, 당과 비(非)당의 관계, 혁명과 반혁명의 관계, 시비(是非)의 관계, 중국과 외국의 관계—옮긴이.

9) 毛澤東 「中間地帶有兩個」(1964.1.5), 『毛澤東外交文選』 中央文獻出版社, 世界知識出版社 1994, 508면.

10) 毛澤東 「支持多米尼加人民反對美國武裝侵略的聲明」, 『毛澤東外交文選』, 569면.

11) 馬杜香 『前奏: 毛澤東1965年重上井岡山』, 當代中國出版社 2006, 151면.

12) 毛澤東 「關於三個世界的劃分問題」(1974.2.22), 『毛澤東文集』 8권, 人民出版社 1999, 441~42면.

13) 2010년 3월 이래 푸젠(福建), 장수(江蘇), 샨동(山東), 샨시(陝西), 꽝뚱(廣東) 등 중국 각지의 유치원을 대상으로 벌어진 일련의 ‘묻지 마’ 살상사건. 범인들이 휘두른 식칼 등 흉기에 총 100여명(대다수가 5세 전후 어린이)의 사상자가 발생,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옮긴이.

14) 2009년 11월 G20 서울회의 폐막 기자회견에서 벌어진 에피쏘드—옮긴이.

15) 전방 후방이 따로 없는 전투, 적과 전우 사이에 끼여 벌이는 싸움을 말한다. 루 쉰의 조어로 본래는 ‘橫站’(전방 후방 양쪽이 보이도록 가로로 서 있는 것).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벌이는 싸움이 바로 ‘橫戰’이다. 중국어로 ‘站’과 ‘戰’ 발음이 똑같아 해음(諧音)을 이용하여 의미를 굴절 내지 확대시킨 것이다—옮긴이.

16)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에 회의적이었던 탈정치적 자유주의자 쭤런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특히 문혁기에 반동분자 매국노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루 쉰은 이런 쭤런의 기질과 성향을 이해하면서도, 균형과 중도가 용인되기 어려운 시대에 겪을 수 있는 그의 운명을 염려한 것이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