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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다시 동아시아를 말한다

 

민중시각과 민중연대

 

 

쑨 꺼 孫歌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중국현대문일본근현대사상비교문화 전공. 국내 소개된 저서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등이 있다.

 

 

201011월 하순, 대만의 진먼따오(金門島)에는 동아시아 각 지역에서 온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특수한 지리공간에서 이들은 ‘냉전의 역사와 문화’라는 제목 아래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창작과비평』(한국), 『케시까지』(け, 오끼나와),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일본 토오꾜오), 『대만사회연구』(臺灣社會硏究季刊, 대만 타이뻬이), 『러펑쉬에슈』(熱風學術, 중국 샹하이) 등 각지에서 영향력있는 잡지의 편집인과 필자, 그리고 대만과 동아시아 기타 지역에서 온 젊은 청중이 참여했다.

이번 진먼에서 열린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는 2006년 서울, 2008년 타이뻬이에 이어 세번째로 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는 조금 특별했다. 그 특별함은 그간 국가담론 속에서 늘 주변지역으로 치부되었던 진먼(金門)과 오끼나와(沖繩) 두 곳이 회의의 중심화제였다는 데 있다. 중국대륙과 일본이 토론의 중심이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늘 동아시아의 주변지역으로 여겨지던 한국과 대만조차도 이번에는 주변 축에 끼지 못했다. 민족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담론틀 안에서는 항상 가려져 있던 진먼과 오끼나와가 이번 회의에서는 과거 혹은 지금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참석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주목이 역사적 성찰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은 단지 두 지역이 냉전구조 속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두 지역과 민족국가 정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비틀린 관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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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은 행정구역으로는 대만에 속하지만 대만 본섬보다 중국대륙의 푸젠성(福建省)에 더 가까운 섬이다. 이곳은 국민당이 내전에서 실패하고 대만으로 퇴각할 때 끝까지 고수했던 반공전선으로서 1949년부터 1956년까지 군사관제(軍事管制)를 실시했으며, 1956년부터 1992년까지는 군사화된 통치가 이루어지던 준전시상태의 섬이다. 이곳에서 비행기로 타이뻬이의 쑹샨(松山)공항까지는 거의 한시간이 걸리지만 대륙 샤먼(厦門)의 우퉁항(通港)까지는 배편으로도 30분밖에 안 걸린다. 진먼 서북쪽 해안에서는 샤먼의 고층건물들이 또렷이 보이는지라 밤이면 샤먼의 야경을 감상하려는 유람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1958년부터 중국대륙은 진먼에 ‘격일(隔日)포격’을 실시했으며, 실탄에서 선전물에 이르기까지 공격은 20여년간 계속되었다. 국민당 군대 역시 이곳에서 샤먼과 취안저우(泉州) 일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그 때문에 이 지역 양안 민중들 사이에는 모두 “첫번째 폭탄에나 맞아버려라!”라는 끔찍한 저주가 일상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기나긴 전시상황 속에서 진먼은 완전히 전쟁에 적합한 환경으로 무장되었고 일반인들의 삶 역시 전쟁에 의해 구성되었다. 섬 안의 주요 지역은 지하가 모두 파헤쳐져서 지상의 거의 모든 중요한 건물들은 몇킬로미터나 되는 땅굴로 연결되어 있다. 연해지역에 쫙 깔린 지뢰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상태다. 양안관계가 완화되고 샤먼과 진먼 사이에 ‘소삼통(小三通)1이 실현됨에 따라 양안 민중들 사이의 교류가 늘었고, 덕분에 진먼 사람들은 대륙으로 건너가 집을 사거나 일자리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탈냉전’ 후에도 진먼은 군사화의 흔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곳의 민중은 군사화가 가져온 부정적 결과들을 떠안는 한편 이제 그간의 역사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서사양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오끼나와의 전후 역사는 진먼보다 더 복잡하다. 1951년 일본은 연합국과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주권을 회복하는 대신 오끼나와를 미국의 관리하에 두기로 했다. 1972년 오끼나와는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진정한 독립과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이른바 ‘전후’ 시기에 미국 민정부(民政府)의 관리하에 있었을 때나 일본의 일개 현(縣)으로 존재할 때나 오끼나와는 늘 전쟁상태였고, 미군기지는 언제나 오끼나와인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2010년은 오끼나와인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이 거세진 해였다. 후뗀마(普天間) 비행장을 헤노꼬(邊野古)로 이전한다는 일본과 미국의 합의에 반대하고 미군기지 퇴출을 위해 오끼나와 민중은 지속적으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벌여왔다. 얼마전 실시된 오끼나와현 지사 선거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기지문제가 경선 구호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한 이 투쟁은 오늘까지도 최종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고, 오끼나와인은 여전히 한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태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오끼나와는 한국사회와 좀더 닮았다. 회의에서 기조강연을 했던 오끼나와대학 전 총장이자 저명한 기지반대운동가인 아라사끼 모리떼루(新崎盛輝)도 이 점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1995년 미군사병의 오끼나와 소녀 강간사건을 계기로 오끼나와 민중의 대대적인 항의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한국의 기지반대운동 인사들과 연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도 잘 모르는데다 한국 친구들에게 부담을 줄까봐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무렵 한국의 기지반대운동가들이 먼저 오끼나와로 찾아와서 교류하기를 요청했고, 그때부터 오끼나와는 줄곧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참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미군기지 반대 차원에서 연대하고 있지만, 오끼나와는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사회와 차이가 있다. 바로 곤혹스런 정체성의 문제다. 한국사회 역시 분단체제에서 비롯한 불완전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이 있지만 오끼나와처럼 복잡하게 착종된 정체성의 문제는 찾아볼 수 없다. 오끼나와는 미일관계 및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늘 일본의 한 부분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오끼나와인의 요구나 이익은 줄곧 홀시되었으며 그들의 바람이나 일본본토와의 복잡한 관계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은 다시 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 서사에 의해 은폐됨으로써 동아시아 시야 속에서 오끼나와인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끼나와의 문제가 복잡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기지반대운동에 투신한 오끼나와인은 갈수록 분명하게 자신을 류우뀨우인(琉球人)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정작 이것을 ‘독립운동’으로까지 밀고나가지는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반미투쟁의 일정 단계에서 고립상태에 처하게 된 오끼나와인은 주변사회가 그들을 일본인이라고 간주할 때 별 수 없이 피해자로서의 댓가와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만 한다.

오끼나와와 마찬가지로 홀시되고 시야에서 가려져온 진먼이라는 공간에 들어서서야 나는 비로소 근대적 행정의 틀 안으로 강제귀속된 지역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이 전쟁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들을 본의 아니게 짊어지면서 감내해야 하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난이란 주변사회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진먼에서 정신질환 회복사업을 하는 훙 떠(洪德舜)은 이번 회의에서 진먼의 정신질환 실태에 대해 보고했다. 그에 따르면 1949년 이후 진먼에는 10만여명의 국민당 군대가 진주했는데, 당시 진먼 인구는 10만이 채 안됐다고 한다. 이 방대한 군대와 반세기에 달하는 군사관제가 섬 주민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때문에 진먼에는 수많은 정신질환자가 생겼으며 그중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먼에는 쓸 만한 의료시설이 없어 주민들은 종종 전통 무속이나 풍속에 의지했고, 그런 탓에 더 심각한 후유증을 낳았다. 대만 본섬이 통일이냐 독립이냐를 둘러싼 논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진먼 민중은 장기간의 긴장상태에서 비롯된 악영향에 직면해야 했다. 진먼 고량주는 원래 군대 보급품으로 생산된 군사산업의 산물이었지만 지금은 지역주민의 전쟁 트라우마를 위로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탈군사화’가 진행됨에 따라 진먼 사람들은 어제의 그늘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전쟁의 기억은 그리 쉽게 잊혀질 리 없다. 1949년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꾸닝터우진(古寧頭鎭)에는 지금도 탄흔이 역력한 담벽들이 허물어진 채로 남아 있다. 주민들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에 대해 웬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 참극을 목도했거나, 강제로 시체를 묻거나 부상자를 생매장했던 많은 촌민은 지금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통일/독립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대만사회의 서사 속에 이같은 진먼 사람들의 트라우마적 기억은 설 자리가 없다.

오끼나와 민중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에도(江戶)시기 류우뀨우(琉球)는 사쓰마번(薩摩藩)의 시마즈(島津) 일가의 침략으로 지배받게 되었으며 청나라 및 에도정부와 이중의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 1879년에는 메이지정부가 류우뀨우를 정식으로 합병하여 오끼나와현으로 개정했는데, 이를 ‘류우뀨우 처분’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2차대전 말 미군이 일본본토에 공세를 가하면서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바로 미군기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1951년 일본은 미국 등 연합국과 쌘프란시스코 강화를 맺고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했다(1952년 발옮긴이). 그로부터 오끼나와는 일본에서 떨어져나가 오끼나와에 건립된 미국 민정부의 관리를 받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및 아시아를 통제하는 미군의 최대기지로 변모했다. 1972년 오끼나와의 시정권(施政權)2은 일본으로 반환되었으며 본토인과 오끼나와인의 자유로운 왕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반환으로 오끼나와 민중에게 실질적인 자유와 자주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정부는 본토의 미군기지를 모두 오끼나와에 집중시켰다. 그 때문에 오끼나와인은 1952년과 1972년의 상황을 1차 류우뀨우 처분에 이은 2차, 3차 처분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중반 미일정부는 안보조약의 보조조항 삽입에 동의했는데, 그중에는 후뗀마 군용비행장을 헤노꼬 해역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헤노꼬와 전체 오끼나와현 민중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규모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십수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민주당 집권 후 첫번째 내각이 사퇴하기도 했다. 오끼나와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비행장 이전 조약이 폐기되지 않는 한 오끼나와인은 이 오랜 반대운동을 지속할 것이다.

과거 진먼, 오끼나와 그리고 한국은 냉전구조의 최전선에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 때문에 그 최전선의 의미도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지만, 그들이 모두 냉전구조하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서양 편에 있으면서 직간접적으로 미국의 영향과 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먼에서 냉전문제를 논의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처지면서도 다른 역사적 맥락을 지닌 이들 지역을 동시에 고려함으로써 나는 일련의 단서들을 찾았고 하나의 지역 안에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사고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오끼나와인이 본토 일본인에게 왜 그토록 강한 거부감을 갖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자기비판 의식이 투철한 본토의 좌파지식인조차도 오끼나와인의 인정을 받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먼에 와서 바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민족국가 서사 속에서 자기주체성이 지워져야 했던 지역, 특히 오끼나와처럼 오랫동안 일본정부에 의해 팔려나간 지역에서 본토의 정부나 사회에 대한 신뢰를 쌓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진먼과 달리 오끼나와인은 그들의 트라우마적 경험을 그리 단순하게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랜 민주화투쟁을 거치며 오끼나와인이 피해의식 안에 고도의 책임의식을 새겨넣었기 때문이다. 아라사끼 모리떼루의 발표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벌어질 때 오끼나와 기지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했는데, 그때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24시간 파업을 하면 그만큼 미군의 발목을 잡아 베트남유격대가 24시간 더 주동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이미 오끼나와인은 베트남민중과 연대하자는 구호를 제기했던 것이다. 1995년 미군사병의 성범죄사건으로 오끼나와현 전역에서 기지반대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그들은 미군기지 문제에 마찬가지로 직면해 있는 한국민중과의 연대를 희망했다. 그런데 오끼나와 민중과 본토 민중 사이에는 오히려 여러가지 이유로 실질적인 대규모 연대가 실현된 적이 없다. 본토 진보지식인의 연대행동도 소수의 지원활동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오끼나와인에 대한 사죄의 심정 혹은 동정의 수준에 머물렀다. 소수의 연대관계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본다면 오끼나와 사회와 일본 사회 사이에는 여전히 극명한 비틀림이 존재한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평면적 개념으로는 이를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역사와 미 군사력의 동아시아 진입이라는 특별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오끼나와 사회가 본토 사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되었다면, 오끼나와의 민주화운동 역시 끊임없이 본토와는 다른 문제의식에 의해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끼나와는 본토처럼 ‘국가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본토의 진보인사들처럼 ‘반국가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 두가지 의식은 오끼나와의 실제 투쟁 속에서 냉전상태하의 긴박한 과제 때문에 다양한 정치적 요구로 변형되었다. ‘국가의식’의 경우, 오끼나와인은 분명한 ‘류우뀨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류우뀨우 독립운동’을 추진한 적은 없었다. 동시에 각종 운동에서 오끼나와의 사회운동가들은 ‘일본국가 반대’를 전제한 적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더 세부적인 투쟁목표가 있을 뿐이었다.

아라사끼에 의하면 오끼나와의 기지반대운동에서 ‘가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야말로 그들 투쟁의 동력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높은 정치적 목표 덕분에 오끼나와의 민중운동은 분열과 대립 속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중요한 순간마다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한 예로, 오끼나와 독립을 주장하는 운동가는 언제나 존재했고 또 지금도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지만 경선에서는 독립을 구호로 내세운 후보의 득표수가 가장 적었다. 아라사끼는 이에 대해, 오끼나와인에게 독립할 권리는 있지만 이 권리를 행사할 것인가의 여부는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왜냐하면 유고슬라비아가 남긴 교훈대로 만약 독립운동이 지역의 평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평화를 파괴하는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센까꾸/오위따오(尖閣/釣魚島) 문제에 대해서도 아라사끼는 양국 정부가 주권문제에 집착하며 대치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사안을 놓고 대화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하며 동시에 센까꾸/오위따오 해역에서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오끼나와인을 존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0년 하반기 동아시아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중일 사이에는 정부나 사회를 막론하고 센까꾸/오위따오 문제를 둘러싼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이는 센까꾸/오위따오에서 가장 가까운 오끼나와와 대만까지 끌어들이며 더욱 복잡한 귀속논쟁을 낳았다. 남북한도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한때 긴장상태에 빠졌다. 짧은 몇개월이지만 동아시아지역의 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다양한 정치세력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완화되었지만 지역평화는 지금도 위협받고 있다.

냉전의 역사와 문화를 주제로 진먼에서 열린 이번 회의는 바로 이같은 지역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회의에 참여한 비판적 잡지의 주요성원들은 각 지역의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어떻게 효과적인 연대의 길을 찾을지, 지역내 민중운동을 어떻게 서로 연결시킬지라는 긴박한 과제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했다.

이번 진먼 회의에서는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 백낙청(白樂晴)과 백영서(白永瑞)가 전체 참가자에게 동아시아 문제를 사고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바로 ‘분단체제론’과 ‘복합국가론’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해 자세히 논할 생각이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먼 회의를 계기로 한국사상계가 동아시아담론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사실 근래 동아시아에 관한 근본적 사고를 이끌어낸 것도 바로 한국의 사상가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동아시아 각 지역의 이론 생산에 효과적인 참조체계를 제공해왔다.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복합국가론’이나 백영서의 ‘이중적 주변의 시각’과 ‘동아시아론’은 모두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근본적 탐색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 한국의 사상가들에 따르면 여기서 현실이란 추동이 필요한 가능성의 일부이지 결코 기정사실이 아니다. 그 때문에 국민국가의 존재방식이나 남북한 긴장관계에 대한 그들의 사고는 신선하고 탄력있는 이론적 가설을 제공한다. 한반도 바깥에 사는 사람으로서 20세기 내내 외세의 패권관계에 놓여 있던 한반도의 역사, 특히 1950년대초 동족간의 전쟁을 치르고 다시 분단상태가 굳어진 한국의 정치적 국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동아시아를 논할 때 대륙의 중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조차 종종 한반도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그것을 단지 동아시아 냉전의 전초기지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의 역사를 일종의 사회체제 형성의 역사로 보는 백낙청의 설명에서 분단은 더이상 하나의 피동적 과정이 아니라 주체적 참여의 과정으로 변한다. 백낙청은 분단이 남북한 기득권세력 사이의 공모체제로서 그 상호의존관계가 자신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고 본다. 나아가 그는 분단체제란 냉전의 직접적 결과일 뿐 아니라 냉전구조를 견제하면서 이용한다는 것, 또한 그것은 근대민족국가 형태의 전복인 동시에 새로운 복합국가 모델을 창출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며 그 특수한 성격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백영서는 저서와 발언을 통해 한반도의 ‘탈중심화’ 과정과 전세계 한인네트워크의 성립 및 연동하는 동아시아 건설과정이 함께 움직인다는 기본 견해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 역시 중요한 이론이자 실천적 명제이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방식을 의미한다. 잠정적으로 “개방적 결집점”3이라 부를 수 있는 이 감각방식은 기존의 ‘중심’과 ‘반중심’이라는 구도를 대체한다. 그런 차원에서 백영서는 한반도가 냉전적 의미에서 국제자본의 세계체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동아시아와 국제세계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4

어떻게 해야 한국사상계에 축적된 이들 사상적 자원이 진정으로 한국을 넘어서 동아시아 지식계에 공유될 수 있을까? 이번 진먼 회의는 오끼나와나 한국 같은 지역의 사상적 자원이 만남으로써 원리적 사고들이 서로 검증되고 보충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덕분에 단일한 배경하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담론들이 입체적으로 드러나고 더 많은 이해와 상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끼나와의 원로 사상가 오까모또 케이또꾸(岡本惠德)는 일련의 중요한 사상텍스트를 남겼다. 그중 이미 중국어로 소개된 바 있는 「수평축(水平軸)사상—오끼나와의 ‘공동체의식’에 대하여」5라는 글은 백낙청・백영서의 사고와 우회적으로 호응하는 중요한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 오까모또는 오끼나와의 공동체의식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뤘다. 그는 ‘오끼나와인의 자기비하는 일본본토의 차별에서 비롯된다’는 기존의 인식방식을 거부하고 ‘수평축’이라는 하나의 좌표를 설정함으로써 일상으로부터 인간관계와 질서감각이 형성되는 방식을 검토했다. ‘수평축’이란 개인으로서의 민중이 공동체에 대한 귀속의식을 구축할 때 자신과 주위 성원의 관계가 방해받는가의 여부를 기준으로 함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 성원은 특정한 대상들 사이의 위치와 거리의 차이에 근거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절대불변의 판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해당 개인이 관심을 갖는 대상 및 영역이 자신과 맺는 관계의 안정성에 의해 제약받는데, 이 안정성을 오까모또는 ‘질서감각’이라 부른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때의 질서감각이란 반드시 구체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대상과 영역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오까모또는 이처럼 끊임없이 변동하는 질서감각을 ‘공동체의 생리’라고 부른다. 오까모또가 주목한 문제는 오끼나와 사회의 공동체의식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민중의 생활감각이라는 점, 여기서 공동체의식이란 복합적 형식을 통해 무수한 개인의 그같은 질서감각에 균형을 부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의 지향성은 위로부터 민중의 정체성을 통합하는 사유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전시의 집단자살 사건61972년 일본복귀운동7을 사례로 ‘공동체의 생리적 기초’를 분석하고 오끼나와 공동체의식의 또다른 면, 즉 집단자살이라는 비참한 사건의 밑바닥에 ‘공생공사(共生共死)’라는 집단적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오끼나와인에게 그러한 가치관은 이른바 ‘근대’의 개인주의적 가치관보다 더 널리 수용되어 그들의 정서세계를 좌우해왔다. 오까모또에 따르면 공동체의식은 메이지시기에 시작된 황민화교육에 이용되었으며 오끼나와인의 ‘일본인 되기’나 ‘이질적인 점령자’(즉 미군)에 저항하는 추동력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같은 상태는 또다른 논리, 즉 민중은 행위규범으로서 ‘질서감각’을 필요로 했던 반면 천황제는 공동체의 바람 속에 내재된 이같은 기능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애국심’을 만들어냈음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공동체 이데올로기는 오끼나와에서 결코 제일의 ‘질서감각’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전시 생사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표출되었던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오끼나와 민중이 간직해온 ‘공생공사’라는 질서감각이 특정시기 천황제의 정치권력에 의해 심각하게 통제되면서 표면적으로 그것은 일본천황제에 대한 동일시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잘 가려서 보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애국심’처럼 보였던 그것이 실은 단지 ‘공생공사’라는 질서감각의 표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오까모또는 오끼나와인의 공동체의식 깊은 곳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했음이 분명하다. 그가 볼 때 일련의 소박하고 건강한 ‘집단무의식’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간단히 환원할 수 없으며, 만약 적당한 통로만 있다면 이들 사회적 에너지는 더욱 실제적인 책임감과 연대감으로 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민중의 공동체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관변이데올로기가 위로부터 통제한 결과일 뿐 아니라 ‘수평축’ 위의 생활감각에서 비롯하는 생활질서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포착했다. 이들 질서가 권력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없다. ‘구성된다’ ‘통제된다’ 같은 언급은 권력의 지배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비판적으로 기능하지만 일상 속 민중의 주체적 능동성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상 민중의 공동체의식은 황민화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될 만한 요소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공생공사한다는 민중 사이의 연대감도 포함하고 있다. 그 둘은 똑같이 삶의 경험이라는 ‘수평축’ 위에 뿌리내렸고 복잡하게 한데 얽혀 있기도 하다. 민중의 공동체의식을 하나의 잣대로 쉽게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거의 생리적 본능(오까모또가 ‘공동체의 생리’라고 말한)에 가까운 연대감으로서 강권체제에 이용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그것에 저항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민중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이 ‘생리본능’을 그들의 주체의식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단순한 자유주의자는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단순한 맑스주의자는 민중을 혁명의 동력으로 본다. 이같은 민중관은 대립되는 것 같아도 모두 민중의 위에 서 있는 ‘외부의 시각’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그런데 오까모또가 제공한 ‘수평축’이라는 시각은 민중 속에 자리한다는 특징을 가지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중이라는 복잡다단한 집단의 동태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준다는 점이다. 오끼나와의 기지반대투쟁에서도 오까모또가 말한 두가지 다른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전쟁 말기의 집단자살이든 전후의 일본회귀운동이든 그 속에는 모두 오끼나와 민중 자신의 삶의 논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그들이 부득이한 상태에서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그들을 피해자로만 본다거나 그들이 집단자살하도록 만든 일본군인만 비판하거나 혹은 일본복귀운동이 일본정부에 이용당했다는 사실만 밝히는 것은 모두 오끼나와 민중이 겪은 피해경험의 외재적 요소만 드러내는 것(물론 이러한 작업은 중요하며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한다)이 된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더 중요한 요소는 바로 그들이 부득이한 선택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았는가 하는 점이다. 오끼나와 지식인들이 민중과 기지반대운동을 쉽사리 이상화하지 않는 것도 민중의 판단과 선택을 결정하는 기준이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아니라 바로 ‘수평축’ 위의 생활감각이기 때문이다. 민중의 생존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저항의 형식은 매우 혼돈스럽고 다중적인 반면 지식엘리뜨들의 이념화된 분석은 그 원인을 단순화하거나 삶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심지어 역사로부터 동떨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오까모또의 이러한 견해를 빌려 다시 한국의 사상가들에게로 돌아가보자. 같은 차원에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을 보면, 그 속에 오까모또와 매우 유사한 문제의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백낙청이 분단체제극복운동을 ‘일상생활의 실천’이 되게 하자고 주장할 때 그는 바로 민중의 질서감각 차원에서 정치의 함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분단체제는 이미 단단한 일상적 구조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상생활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전환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전환을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유일한 실질적 선택이란 끊임없이 삶을 개조하는 일상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서 백낙청은 오까모또가 제기했던 문제에서 더 나아가, 민중에게 수평축상의 질서감각이 일차적인 판단기준이라면 운동의 목표를 어떻게 이 기본 위에 설정할 것인지가 바로 개혁을 추동하는 운동가들이 고민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어쩌면 이 공동체의 생리라는 차원에서 ‘국가’가 진정으로 상대화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까모또와 백낙청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본능적 차원에서 민중이 국가와 맺는 관계는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 선택(물론 대개는 부득이하고 부자유한 상황하의 선택이지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복합국가 구상은 국가적 시각이 아니라 민중의 시각에서 제출된 것이며 바로 그 점에서 연대의 과제는 실제적이며 그것에 따르는 곤경 역시 더욱 쉽게 판별될 수 있다.

백낙청은 한반도 분단체제의 특성을 분석한 후 사실상 ‘분단’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기본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일본과 그 나머지 지역 사이의 분단, 중국과 그 나머지 지역 사이의 분단을 ‘거대 분단’8이라고 부르며 이 거대 분단을 배경으로 한반도의 분단체제 문제를 논한다. 동시에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새롭게 정의한 ‘제3세계’라는 개념이다. 그는 민중의 시각에서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총체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제3세계란 실체적으로 세계를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인식론적 각도에서 세계를 하나의 총체로 새롭게 정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자본의 전지구화 과정과 달리 백낙청은 제3세계라는 민중의 시각을 통해 ‘밑에서 위로 향하는 전지구화’를 완성하고자 한다.

이같은 ‘전지구화’가 국경을 초월하는 민중의 연대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본의 전지구화 시대 민중의 ‘질서감각’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직시하기 위해 그는 또다른 중요한 개념으로서 ‘민족문학’을 제시한다. 그는 1970년대 한국의 민족문학운동은 ‘국민문학’과는 다르며 분단체제를 초월하는 민중문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족문학운동은 일종의 민족운동이지만 단지 민족주의적 운동이나 방안만은 아니다 (…) 그것은 추상적 민중이나 민족 개념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구성원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것”9이라고 말한다.

위와 같은 세개의 기본범주10들의 관련 속에서 우리는 일련의 중요한 이론적 사색의 경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색의 경로는 아주 어려운 문제 하나를 제기한다. 즉 만약 비판적 지식인이 현실을 벗어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담론에 만족할 수 없고 또 민중의 삶에 의해 규정되는 ‘일상의 규율’에도 동일시할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창조적 변화가 보통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생겨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백낙청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창조적인 변화가 이룩되고 나아가 생활 속에 구현되는 진리라야 정녕 진리의 이름에 값한다고 믿는 경우에는, 일상성과의 미묘한 긴장과 균형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운동이 불가피하게 떠맡을 짐이 될 것이다”11라고 지적한다.

국가를 초월해 연대하는 민중에 대해 논의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이같은 ‘미묘한 긴장과 균형’일 것이다. 그것은 백낙청의 ‘제3세계’라는 기능론적 시각과 오까모또 케이또꾸의 ‘수평축 질서감각’ 사이에서 진정한 접점을 찾아 국경을 초월하는 민중의 연대의식과 공동체 질서감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를 하나의 총체로 보는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전지구화 구상이나 생활영역을 본위로 삼는 민중의 공생공사라는 공동체 감각은 모두 단지 수사의 차원에 머물고 말 것이다. 또한 자본의 전지구화와 국가의 공모 속에서 그것들은 긴장관계에 있는 유기적 조합이 아니라 대립하는 삶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말 것이다. 오까모또 케이또꾸, 백낙청, 백영서의 사상작업은 바로 이같은 곤혹스런 과제와 대면하는 일이며 그것을 더 진전시켜 효과적인 인식론적 도구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모두 민중의 ‘민족감정’을 민족주의라고 하여 단순히 부정해버릴 수 없음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적한다. 심지어 백낙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족주의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오까모또가 ‘애국심’으로부터 오끼나와 민중의 연대의식을 구하고자 하는 것도 개방적 정체성 수립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다. 백영서가 구상하는 ‘한반도의 탈중심화’와 ‘한인 네트워크 수립’이라는 역설적 과제는 민중의 공동체 정체성이 배타성을 지니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민중 차원에서 국경을 넘는 연대가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훨씬 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국가의 틀을 초월한 민중연대는 어떤 사회과정일까? 그 실제 상황과 지식인의 담론 및 실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식인의 담론 속에서 ‘민중’은 대개 주체적인 사회적 존재라기보다 하나의 담론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담론이나 분석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의지의 대상이 될 때에도 민중은 대개 하나의 단수(單數)집단으로 환원되어버리며 기껏해야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사회세력으로 묶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연대에 관한 지식인들의 토론은 때때로 사회집단으로서의 민중 자신의 정치적 불확정성이나 정치적 선택의 주체적 의지를 간과하고 그 자리를 지식인 자신의 가치판단으로 대체하곤 한다. 이같은 이론적 딜레마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사회상황에 대한 지식인들의 추측은 종종 현실과 어긋날 뿐 아니라 현실을 평가할 때도 우리는 민중에 대한 상황평가가 기본적으로 생략되었거나 혹은 지나치게 추상화되었음을 발견하곤 한다. 이는 지식인의 민중 개념이 민중의 ‘공동체의 생리’가 지닌 비범한 에너지의 특성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생리가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중은 곧잘 낙후한 보수세력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지식인들의 엘리뜨 의식은 바로 그같은 공동체의 생리 앞에 좌절하곤 한다. 이 난감한 문제를 처리할 때 흔히 동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민중’을 하나의 범주로 추상화하여 지식인의 가치판단을 그 안에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 담론에서 민중연대는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만약 이 과제를 지식인의 관념세계에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 그것은 ‘수평축’의 시각에서 다시금 지식인의 사고와 문제의식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것이 바로 진먼 회의에서 얻어낸 기본문제라고 생각된다.

동아시아 각지의 지식인들이 진먼에 모인 결과, 다원화된 담론을 펼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동안 동아시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진먼이라는 낯선 공간에 서게 됨으로써 많은 기성의 사유들이 타파될 수 있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비판적 지식인에게 ‘민중’이 지니는 진정한 함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만약 냉전구조하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치하지 않았다면 진먼은 백영서가 말한 ‘핵심현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먼의 보통사람들에게 그 대치상황은 둘째 문제다. 그들에게 이보다 우선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삶 자체다. 진먼의 땅굴들이 관광지로 새롭게 단장되고, 낙하방지 말뚝이 어민들의 굴 채취장이 되며12 상인들이 당시의 탄피를 주워다 칼로 만들어 판다고 해서 그들이 과거의 잔혹한 역사를 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진먼 사람들은 확실히 자신의 방식으로 그 역사를 수용하며 짊어지고 있다. 진먼의 번화가에서 ‘구 진먼향수관(老金門懷舊館)’이라는 음식점 간판을 보면서 나는 ‘민중의 질서감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작은 식당의 간판에는 커다란 마오 쩌뚱 초상이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마오 쩌뚱 밀크차”라는 광고 밑에 작은 글씨로 “시대가 변하고 밀크차가 변하면 운명도 변한다”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 밑에는 더 구체적으로 “여기 와서 통독(統獨)과 남록(藍綠)13 모두 양쪽에 내려놓고 양안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가볍게 즐겨보세요”라고 권하는 문안이 적혀 있었다.

우리가 시야를 민중 삶의 ‘수평축’ 위에 둔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하층일수록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대립이 약한 반면 상층으로 갈수록 이데올로기 대립이 점차 중요하고 분명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상층의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따라 민중의 삶으로 스며들 때 민중은 많은 경우 이데올로기의 소비자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민중이 상부구조로부터 오는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다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선택기준이 존재한다. 전쟁시기 다른 선택이 불가능했던 극단의 상태를 제외하면, 민중의 선택기준이 비록 대중매체와 각종 선전수단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그들이 권력에 의해 조종되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피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민중의 다양한 요구(설령 이들 요구가 왕왕 서로 충돌한다 해도)가 어떻게 그들의 모습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사회의 상부구조에 도달하는지, 이는 비판적 지식인이 반드시 대면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까모또 케이또꾸의 「수평축사상」의 중요성은 바로 이 곤혹스런 과제를 직시하고자 한 데 있다. 이 텍스트는 민중의 공동체의식에 대한 신중한 성찰적 태도 덕분에 깊은 역사성을 획득한다. 이것이 이 오끼나와의 텍스트가 멀리 백낙청 같은 한국 지식인의 사상담론과 호응할 수 있는 이유다. 백낙청 등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민중의 시각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하자는 제안은 결코 간단한 정치적 대안은 아니다. 그것은 인식론 차원에서 비판적 지식인 담론을 근본적으로 조정해야 하며, 국가이데올로기가 위로부터 민간으로 스며드는 오늘날 국경을 초월하는 민중연대는 어떻게 해야 실제적이고 가능한 것이 되는가를 진정으로 고민해야 함을 말해준다.

나는 이것이 동북아 지식인들의 공통된 과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때 비로소 동아시아 담론은 실질적인 것이 될 것이다.

 

번역 | 임우성공회대 HK교수

 

 *이 글은 본지의 청탁을 받고 필자가 중국어로 집필한 원고를 전문 번역한 것이다. 원제는 「民衆視角與民衆的連帶」이다. 孫歌 2011 / 한국어판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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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0년 12월 13일 대만정부가 진먼, 마쭈(馬祖) 지역과 대륙간 왕래를 일부 허용하기 위해 발표한 통신・통상・통항 정책의 속칭. 그에 비해 훨씬 폭넓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양안 왕래정책은 ‘대삼통(大三通)’이라 부르며 대륙과 대만의 합의에 따라 2008년 12월부터 실행되었다—옮긴이.
  2. 신탁통치지역에 대해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행사하는 권한—옮긴이.
  3. 이것은 여러 방면의 역량을 결집시키되 동시에 개방성을 가져 패권적 중심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담기 위해 내가 만든 단어다. 백영서가 되풀이해 강조하는 한반도의 탈중심화와 한인공동체 관계, 즉 한반도가 지구적 규모의 한인공동체의 ‘중심’이 되더라도 그를 통해 탈중심화하여 자신의 개방적 결집을 완성한다는 것을 내 식으로 표현해본 것이다. 한마디로 ‘비패권적 중심’과 통한다.
  4. 더 자세한 것은 백영서 『思想東亞』(臺灣社會硏究雜誌社 2009) 참조.
  5. 『熱風學術』 제4집(上海人民出版社 2010.8)에 실려 있다.
  6.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군은 미군의 오끼나와 점령이 확실시되자 주둔 일본군과 주민에게 ‘명예롭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그 결과 섬 곳곳에서 가족이나 친지, 이웃끼리 서로를 죽이는 참극이 발생했다—옮긴이.
  7. 원문에는 “1972년의 일본복귀운동”이라고 되어 있으나 “1972년까지의 일본복귀운동”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1945년 미군의 오끼나와 점령 이래 오끼나와 주민의 일본으로의 복귀운동이 꾸준히 계속되었다. 1960년 이래 평화헌법이 관철되는 일본 본토처럼 ‘민중의 권리가 군사에 종속되지 않는 오끼나와’로 복귀하는 가운데 일본 전체의 미군기지를 철거시킨다는 ‘평화헌법 아래서의 복귀’를 기본전략으로 삼았다. 일본복귀운동은 1972년 미일간 오끼나와 반환협정의 발효와 함께 표면적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이 협정이 미일동맹의 강화에 이바지할 뿐이라는 인식 속에서 지금까지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이어지고 있다—옮긴이.
  8. 이 말은 쑨 꺼가 쓴 ‘거형분단(巨型分斷)’을 옮긴 것인데, 이는 사실 백낙청의 용어는 아니다. 백낙청은 이를 한반도 분단과 다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분열’로 표현한 바 있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한반도」, 『역사비평』 2010년 가을호, 231면 참조—옮긴이.
  9. 「全地球化時代的第三世界及民族文學槪念」, 『白樂晴—分斷體制·民族文學』(聯經出版社 2010) 197면.
  10. 백낙청이 제기한 세개의 중요한 범주(분단체제, 제3세계, 민족문학—옮긴이)는 대만에서 세차례에 걸친 그의 강연에서 나온 것으로 앞의 책에 수록되어 있다.
  11. 같은 책 81~82면(원문은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5~16면).
  12.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치시기에 대륙의 공군부대가 낙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먼도 연해지역에 수많은 시멘트 말뚝을 세우고 낙하산을 꿰뚫을 수 있도록 그 위에 강철침을 박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같은 공격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시멘트 말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굴이 많이 서식하여 주민의 굴 채취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13. ‘통독’이란 대륙에 대한 대만의 두가지 정치적 주장, 즉 통일파와 독립파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국민당이 대표하고 후자는 민진당이 대표한다. 국민당의 당기가 남색이고 민진당 당기가 녹색이기 때문에 ‘통독’을 ‘남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