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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2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
권여선 윤성희 김미월의 소설을 중심으로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불안의 시대에 꿈꾸는 소통의 상상력
최근 우리 소설의 한 흐름으로 드러나는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에는 사회현실 전반에서 감지되는 민주주의의 위기양상과 경쟁체제의 심화가 중요한 배경으로 스며들어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기는 교육・주거・복지에 이르는 빈곤과 소외를 심화시키며, 사회 전반에 걸쳐 각종 불공정과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거대한 규모의 자연재해와 질병의 공포, 개인의 일상을 결박하는 경쟁체제의 심화는 개인의 불안의식을 추동하며 삶의 전반적인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있다. 어느 순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재난에 휩쓸리거나 생존의 현실에서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근 몇년간 한국문학에서 자주 논의돼온 문학과 정치, 문학과 윤리라는 주제는 이러한 사회현실이 야기하는 불안의 제반 양상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우만(Z. Bauman)의 수사를 빌리자면, 현대사회의 씨스템은 끊임없이 ‘배제와 포함’의 원리를 작동시키면서, 경쟁에서 낙오된 자를 잉여의 존재로 몰아넣는 공포와 불안을 양산하고 있다.1) 그의 지적대로 자본주의 근대 일상체제의 ‘빅 브라더’는 누구를 포함할지가 아니라 누구를 배제할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배제의 원리는 현실에서 작동되는 각종 써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절실하게 체감된다. 오락문화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강도 높은 경쟁체제의 형식은 일상인의 삶을 ‘리얼 다큐’의 연속으로 만들고 있다. 한가로워야 할 주말 저녁에도 사람들은 미디어의 써바이벌 게임이 드라마틱하게 환기하는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쟁에서 밀려나 쓸모없는 ‘잉여물’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위기는 휴식의 시간에도 끊임없이 엄습한다. 그야말로 ‘타인보다 오래 살아남기’라는 절박한 명제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생존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관계가, 어떤 조직이, 누구를 금 밖으로 밀어내는가를 둘러싼 불안과 위기의식은 ‘쓰레기’로 소각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필사적인 무한경쟁을 불러일으킨다.
경쟁이 심화될수록 따뜻하고 안정적인 관계에 대한 욕구는 강렬해지지만, 이를 채워줄 가족과 각종 친밀성의 집단관계는 약화되고 있다. 지난 시대에 개인을 묶어주던 집단적인 유대가 느슨해지면서 소통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불안과 고립에 시달리며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있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문을 열고 걸어나와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시작한다. 현실이 삭막해질수록, 사라진 유대의식을 보상해줄 따뜻하고도 친밀한 공동체에 대한 갈망과 상상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고립과 소외에서 비롯된 소통의 상상력은 냉담한 현실을 상상적으로 보상하는 기능도 하지만, 삶의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정체성의 탐색과정을 끌어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기와 타자를 둘러싼 관계의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심화된 자기성찰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소설에 나타난 우연적이고 상상적인 공동체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대상 역시 현실에서 완전히 유리된 타자들만은 아니다. 익명적으로 결집된 듯 보이는 공동체 속에도 성차와 계급, 빈부의 격차라는 구체적 조건을 내재화한 개인들의 충돌과정이 담겨 있다. 임의로 모인 우연의 공동체 속에도 타자들의 적대와 충돌이 자아내는 긴장관계가 존재하며, 여기서 근대적인 귀속성들, 집합성들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가로질러 자유롭게 존재하는, 열려 있는 존재로 나아갈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2) 그런 점에서 단자적 개인들 간의 익명적 소통을 꿈꾸는 상상의 공동체나, 긴장과 충돌이 공존하는 현실 속의 다양한 공동체에 대한 문학적 해석은 폭넓은 층위에서 시도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이 의미하는 새로운 서사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권여선과 윤성희, 김미월의 소설을 살펴보고자 한다.3) 이들의 소설은 불안의 시대에 등장한 문학 속의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권여선의 소설이 일상의 허위감각을 예리하게 투시하면서 친밀성의 영역에 잠복한 성차의 위계관계를 드러낸다면, 윤성희의 소설은 가족공동체의 쇠락을 보상하는 새로운 익명의 공동체적 유대를 꿈꾼다. 청년들의 사회적 불안과 실존을 현실적으로 묘파한 김미월의 소설 역시 세대론적 층위에서 개인과 집단의 소통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들 소설이 보여주는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은 문학과 현실이 관계맺는 다양한 층위를 진단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우아한 친교’ 뒤에 숨은 그녀들의 이야기: 권여선 소설
권여선(權汝宣)은 개인을 둘러싼 친밀한 관계들과 그것이 야기하는 갈등의 상황을 누구보다 섬세하고 예리하게 투시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가족을 포함해 여성과 남성, 친구와 선후배 등 가까운 집단이 맺는 관계의 다양한 양상을 깊이있게 들여다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사랑의 탈낭만화 현상을 씨니컬하게 직시한 은희경 소설과 부르주아적 삶의 허위적 양상을 예민하게 관찰하는 정미경 소설, 소비사회의 사물화 경향을 경쾌하게 포착하는 정이현 소설의 특성들은 권여선 소설의 일정 부분과 연결된다. 더불어, 견딜 수 없는 자기갈등과 자학의 예민한 심리학은 소설사의 계보를 거슬러올라가 김승옥이나 오정희 소설의 자기해부와 만난다.
평범한 일상적 소통관계 속에 존재하는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그려내는 권여선 소설은 적대와 모욕의 인간학,4) ‘자학과 자폭’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자아탐구5)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청춘시절에 경험했던 집단적 연대와 현재의 고립된 개인 일상을 대조적으로 비춰보는 일련의 연애서사 속에 이러한 허위의식의 성찰을 엿볼 수 있다. 성차의 권력관계와 허위적 감각을 전도시키는 해석의 시선은 「분홍 리본의 시절」 「가을이 오면」 같은 수작들에서 그 매력을 한껏 발휘한다. 「사랑을 믿다」와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도 연애의 파국을 둘러싼 오해와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
권여선 소설에서 인물들의 소통관계에 대한 성찰은 비밀-오해를 폭로하는 반전 형식의 서술방식으로 자주 드러난다. 욕망의 실체가 폭로되는 순간 인물이 겪는 당혹감, 그리고 자기누설과 폭로를 거쳐 얻게 되는 예상치 않았던 해방감은 여러 소설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그중에서도 「분홍 리본의 시절」은 주목할 만한 개성적인 작품이다. 한때 사모했던 선배와 그의 아내에게 쿨한 우정을 보여주던 주인공 나는 선배의 불륜을 알게 되면서 갈등의 상황에 말려든다. 선배의 아내는 불륜의 당사자도 아닌 나에게 찾아와서 온갖 분노와 욕설을 퍼부으며, 나 역시 선배의 아내 앞에서 스스로도 감추고 있던 욕망의 허위의식을 노출한다. 주인공이 선배 부부를 통해 접하는 중산층적인 생활양식과 예절바른 거리감각은 현대인의 전형적인 ‘자기 연기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이 애써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교환했던 위선적인 교양의 세계는 도발적이고 충동적인 성욕망의 기호 앞에서 허약한 본질을 드러내고 만다.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지만 늘 자기 안에 일탈적 욕망을 감추고 사는 선배, 남편의 이성후배를 ‘존댓말’과 ‘우아함’으로 포용하는 선배의 아내, 이들과 적절한 거리에서 친교를 누려온 주인공은 제멋대로 욕망의 충동을 뿜어내는 수림이라는 젊은 여성과 만나면서 평상심을 잃고 만다. “몸에 꽉 달라붙는 검정 가죽재킷”(66면)을 입은 젊고 앳된 수림이 발산하는 싱싱한 성적 욕망은 선배가 품고 있던 ‘실수투성이 괴물’을 유인하고, 주인공과 선배의 아내가 표면적으로 거부하고 부인하는 성욕망을 끌어낸다. ‘쎅스광’으로 각인되는 수림의 존재는 그들이 마주치기 두려워했지만 남몰래 지니고 있던 상상적인 욕망, 즉 “오래전에 단념했다고 믿었”지만 “툭 건드려진 뒤부터 움찔움찔 움직이며 몸을 비트는 그것”(72면)을 내부에서 끄집어내게 만드는 것이다.6)
이미지로 포장된 현대인의 허위적 일면을 가차없이 공격하는 이 소설에서 들추는 것은 결혼생활을 기만하는 남성의 이중적인 성욕망만이 아니다. 「분홍 리본의 시절」의 주인공과 선배 아내가 ‘표면적으로’ 대결해야 할 대상은 성욕망을 제멋대로 누설하는 수림이지만, 정작 이들의 본격적인 싸움은 수림을 배제하고 이루어진다. 교양있는 중산층 생활을 영위한다는 자부심, 결혼제도 속에서 억눌린 성적 욕구, 쿨하고 선량한 태도 속에 감춰져 있는 질투와 경멸 등 여성인물들이 상상하고 왜곡하는 모든 사랑의 실체가 이 앞에서 드러나고 만다. 세련되게 치장된 ‘그녀들’의 친교는 ‘싱싱하고 낭자하게 튀’는 욕설의 주고받음 속에서 그 허상이 벗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격렬한 싸움은 실체의 폭로만을 의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 순간 각자의 내면에서 튀어나온 괴물적인 욕망은 거부되고 혐오되는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로서, 그 자체의 개별적인 존재로 성찰되기 시작한다. 소설 속에서 선배와 그의 아내, 수림 모두 “내 혀뿌리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한쌍의 혀”(62면)로 내 안에 잠겨 있던 복수적인 타자들이다. 이 복수적 존재들은 성과 사랑을 둘러싼 남녀의 심리적 반응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인물들이 연출하는 적대와 긴장의 구도는 단순히 허위의식을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신랄한 자기해부의 차원으로 심화된다. 자기폭로와 허위의식의 성찰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투영되어 있다. 어머니와 딸의 갈등은 어머니의 허상을 벗기는 부정의 과정을 거쳐 딸 자신의 내면을 해부하는 과정으로 이동한다. 「가을이 오면」에서 시종일관 어머니의 ‘우아함’과 싸우던 딸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해온 남성이 지니고 있을지 모를 위선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어머니가 보여주던 “상대방의 어떤 비명도 아우성도 듣지 못하는 그런 여인들의 무아지경적 우아”(15면)를 혐오하는 딸은 자기에게 다가온 남자에게서도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상관하지 않는 “우아한 종족”의 표정을 발견한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대결의식은 연애서사의 허위마저 깨뜨리는 맹렬한 자의식의 분출을 이끌어낸다.
「K가의 사람들」에서도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은 아버지의 존재를 통하여 객관화된다. 딸들 앞에서 끊임없이 아버지를 경멸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공포와 죄의식에 직면한다. 혼자 남은 어머니는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아버지의 셔츠를 불태운다. 이 소설은 아버지의 삶을 둘러싼 모녀의 시선을 교차시키면서 아버지의 기억을 지우려는 어머니의 충동적 행동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의 복잡한 마음을 전달한다. 「그대 안의 불우」에서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남편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 역시 단절된 부부관계의 문제를 발견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끔찍한 반목의 형식 속에서 자기만은 조화로운 사랑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꿈”(235면)을 지녔던 자신과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이처럼 가족관계의 모순을 매개로 하여, 내면의 허위에 대한 성찰로 힘겹게 거슬러올라가는 주인공의 분투는 가장 가까운 가족과 연인들이 주고받는 ‘우아한 친교’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환상물일 수 있는가를 실감하게 한다.
세속적 일상을 향유하는 기만적인 행위에 대한 경멸을 넘어서 타인과 맺는 복잡한 관계의 심리학을 보여주는 권여선 소설은 ‘우리’라고 믿었던 관계 속에 잠복한 허구적인 소통의 환상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 끈질긴 탐구에는 인간을 관찰하는 애정어린 시선과 일상의 생생함에서 유도된 보편적인 윤리감각이 깃들어 있다.7) 한 예로 「분홍 리본의 시절」의 결말은 서로의 실체를 폭로한 선배 부부가 뜻밖의 자동차사고를 계기로 이혼하지 않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현실에서 목도하는 삶의 리얼리티야말로 이런 것이 아닐까.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격렬한 모욕과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도 어느 순간에는 일상의 흐름 속에 다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지난 시절의 연애가 엄청난 오해와 자기연민으로 포장되었음을 깨닫지만 그것을 망각의 강물에 쉽게 던져버릴 수는 없다. 권여선 소설은 고통스러운 체험을 뒤로하고 일상을 지속한다는 것이 현실의 단순한 수용이 아님을, 어떤 현실을 진정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끝없는 갈등과 좌초의 지점들을 통과하고 견디면서 나아가는 ‘적응’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성숙한 소설의 세계가 보여주는 아이러니의 진실이다. 자학과 연민을 때로 유머와 풍자로 변주하는 권여선 소설의 중요한 동력은 이러한 아이러니의 다층적 진실을 대면하고 성찰하는 데서 발생한다.
일상의 허위를 존재의 자기성찰과 연결시키는 권여선 소설은 궁극적으로 내면에 유폐되지 않은 존재의 개방성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상투화된 인물 유형을 돌파하는 개성의 활력을 보여준다. 권여선 소설이 돋보이는 지점은 단순히 자기 속에 ‘낯설고 불안한’ 그 무엇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다. 개인과 개인이 공존하면서 이루는 관계의 입체성과 윤리의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 그의 소설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의 소설에 현시(顯示)되는 개인 내면의 내밀한 갈등은 현실에 잠재한 소통의 모순과 날카롭게 연계되면서, 자기를 열어 다른 존재로 나아가는 실마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깊게 다가온다.8)
3. ‘우연’의 소통, 가족 바깥의 가족을 바라보기: 윤성희 소설
윤성희(尹成姬)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익명적이고 자유로운 유대관계에 대한 환상은 고립된 개인의 무기력한 현실을 담아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에는 현대의 파편화된 가족공동체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과 그로 인해 왜소화된 개인, 무기력한 주체의 모습이 깊게 새겨져 있다. 혈연집단, 운명공동체로서의 가족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은 등단작 「레고로 만든 집」(1999)에서 시작하여 근작 장편 『구경꾼들』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다. 주인공 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이 우연한 사고로 곁을 떠나가는 상실과 쇠락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단편의 에피쏘드들을 모자이크한 듯한 이 소설의 특이한 서술방식은 서두에서부터 나타난다.9)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주인공이 중심화자가 되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서부터 아버지의 유년시절을 들려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 중심인물이 교차하는 에피쏘드의 구성방식은 소설에서 시도되는 인물들의 소통양상이 보여주는 우연성, 일회성과도 닿아 있다. 얼핏 보기에 『구경꾼들』을 메우는 에피쏘드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장편 형식의 응집성을 갖추지 못한 단편 형식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적인 서사의 흐름을 부수는 이러한 이야기의 연결방식은 최근의 단편 작업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공기 없는 밤」 같은 단편을 보더라도 시간의 일관된 흐름이나 인과적 서사를 방해하는 짤막한 에피쏘드들이 기억의 파편성을 드러내는 서술방식으로 쓰이고 있다.
우연을 매개로 하는 이야기의 증식과 더불어 등장인물의 삶을 압도하는 것은 죽음의 상징이다. 큰삼촌과 부모의 죽음처럼 예기치 못한 이별의 순간들은 삶의 덧없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천원짜리 지폐가 돌고돌아 제자리를 찾는 데는 삼년이 필요했지만 그 행복이 무너지는 데는 단 오분도 걸리지 않았”(86면)다는 전언처럼 그 누구도 자기 앞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다. 죽음은 구경꾼-타자일 뿐인 유한한 생에 대한 인식을 촉발하는 계기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인물들이 맺는 소통의 관계는 이 죽음을 지연하는 기억의 서사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큰삼촌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할머니를 위로하는 것은 외할머니의 전화 한통이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88면)라는 외할머니의 말처럼, 죽음을 지연하는 기억과 소통의 추구는 죽은 큰삼촌의 밥을 차려놓는 할머니의 일상적 몸짓으로 나타난다.
구성원들이 사라지면서 가족공동체는 해체와 쇠락의 길에 접어들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뛰어넘는 상상공동체는 강화되어간다. 소설에서 인물들끼리 주고받는 익명적인 소통과 기대는 상처를 치유하고 위무하려는 보상행위로 시작된다. 이는 주인공 나의 부모가 시도하는 여행에서 절정에 이른다. 삼촌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달래러 여행을 떠난 부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지구 저편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거꾸로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설파하는 ‘이야기꾼’으로 변신한다. 그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임으로써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런 맥락에서 『구경꾼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인생의 ‘구경꾼’으로 남은 타자들이 교환하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장막 뒤에 숨은 배우들은 타인의 기막힌 사연과 고통에 공감하며 자신의 내면을 위로한다. 슬픔의 발화자가 거꾸로 슬픔의 청자가 되는 위치의 전도(轉倒)는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삼촌의 죽음을 위로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간 주인공의 부모는 거꾸로 그들을 위로해주며 “혹시, 친구가 없다면 저희 집에 가세요. 제 이야기를 하면 따뜻하게 반겨줄 겁니다”(114면)라고 말한다.10)
가족들이 발견한 우연적인 소통의 세계는 타인에 대한 댓가없는 의무와 호의의 나눔으로 연결된다. 낯선 타인을 향한 열린 공감의 세계는 소설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장면 하나로 드러난다. 아버지가 일하는 편의점에는 늘 새벽 3시에 나타나 초콜릿을 사먹는 여자가 있다. 아버지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진 주인공의 가족들은 새벽에 편의점에 나타난다. 사기를 당하고 그 충격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보살피며 힘겨운 일상을 보내던 그녀는 낯선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게 된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그녀가 컵라면 국물을 마시는 장면은 주인공에게도 잊히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후루룩.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소리였다. 아기였을 때 그 소리를 들었다면 밤에 잠을 자다 오줌 따윈 싸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후로 오랫동안, 쓸쓸한 기분이 느껴지면 나는 늘 여자가 국물을 마시며 냈던 그 소리를 생각했다.”(129면)
자기 가족의 불행을 벗어나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공명하기 시작한 소설 속의 ‘구경꾼’들은 ‘가족 바깥의 가족’을 이루어나간다. 이 대목에서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까지 가닿는 ‘함께-있음’의 관계가 순간적으로나마 이룩된다.11) 가족 바깥의 가족에는 식구들을 책임지는 위계적인 ‘가장’이자 ‘부모’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양의 책임을 포기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는 자유로운 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관용적인 태도는, ‘오래된 미래’의 라다크 전통 공동체의 삶을 언뜻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따뜻한 공동체의 환영은 역설적으로 가족공동체가 지고 있는 비극적 운명을 쓰라리게 들여다보게 한다. 상처받은 가족을 위무하고 부양할 장남 부부가 집을 떠나 자유롭게 여행하다 어이없는 사고로 죽음을 맞이할 때 남겨진 이들이 안고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는 두배 이상으로 무거워진다. 이 결핍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된 할머니, 부모를 잃은 자식이 된 주인공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다. 우연과 상상이 이루는 공동체, 귀속성을 전제하지 않는 이 공동체는 동화적이고 초현실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꼭 그만큼의 자유와 초월을 허용한다. 부재한 가족에 대한 슬픔과 애도의 비중만큼 환상의 수위는 높아지며, 철저한 ‘구경꾼’으로서 존재하는 인물들은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 위에 구축되는 순환적이고 몽환적인 환상담 속에서만 숨쉬고 있는 것이다. 듣는 ‘이야기꾼’의 탄생을 보여주는 윤성희 소설에서 목도하는 소통의 환상은, 타율화된 삶을 견디고 살 수밖에 없는 근대적인 공동체로서의 가족제도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 그 자체로 조용히 침잠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반복되는 허구적인 이야기들은 가족공동체의 사멸과 더불어, 시간 위에 작성되는 서사의 계보마저 사라져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구경꾼들』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가장 건조하고 비극적으로 정제된 ‘가족로망스의 해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고립과 불안을 견디는 낭만적 기억의 소환: 김미월 소설
『서울 동굴 가이드』를 비롯한 김미월(金美月)의 소설에는 도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아웃사이더 청년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서울의 방’을 찾아 떠도는 20대 청춘의 좌절과 방황을 그린 김미월 소설은 김승옥과 박태순의 소설에 깃들어 있는 도시 서울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불빛이 휘황한 거리에서 느끼는 고독과 불안은 신경숙 소설의 고립된 방을 거쳐 박민규 소설 속 고시원의 좁은 방, 김애란 소설의 옥탑방의 계보로도 연결된다.
김미월의 첫 장편 『여덟번째 방』은 ‘외딴 방’의 계보와 2000년대 소외된 청춘의 수사학을 연결시키면서 ‘지난 시절의 연대’를 회고한다. 그의 작품에서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은 대학시절의 만남들을 돌아보는 ‘후일담’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 대목에서 권여선 소설과 김미월 소설의 후일담 모티프를 잠시 비교해보아도 흥미롭겠다.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에서 주인공의 연애서사는, 대학시절 만난 친밀한 집단에 대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대학에서 만난 선후배와 친구들은 주인공에게 세상을 여는 중요한 대화 창구로 다가온다. “소통을 열고, 나를 자폐된 내부에서 끌어내 술자리로 미혹하고, 내게 눈물과 토사물을 분출할 기회를 주는 감격적인 말건넴”(97면)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주인공의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권여선 소설이 그리는 청년시절이 이념적인 공감대와 친밀감을 부여했던, 그리하여 강력한 동일성의 감정을 요구했던 연대로 기억된다면, 김미월 소설에서 이러한 정치적 연대의 경험은 희미한 밑그림으로만 존재한다. 『여덟번째 방』에서 주인공 지영이 실감하는 학창시절의 연대는 자유를 구속할 정도로 강력한 동일성의 세계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동아리활동을 하고 우연히 철거반대 시위대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 시절의 공통경험은 ‘자기만의 방’을 스쳐간 단편적인 기억으로 묘사된다.
『여덟번째 방』이 보여주는 낭만적인 기억들과 소통의 상상력은 ‘방’을 공유하는 개인과 개인의 이야기 속에서 본격적으로 서술된다. ‘잠만 자는’ 낡고 초라한 자취방에서 서른살의 김지영과 스물다섯살의 오영대는 ‘일기장’이라는 문학적 매개물을 통해 상상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오영대가 김지영의 일기장을 통해 접하게 된 것은 지난 시절 소외된 청춘의 한 그림자이다. “대학교정의 사계, 첫 엠티, 지저분하고 시끄럽던 과방, 최루탄 냄새 가득한 거리, 학교 앞 술집, 단체미팅,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의 얼굴, 이제는 그립기만 한 그 무렵의 갖가지 고민과 갈등들”과 “스무살, 스물한살, 스물두살, 청춘의 계단을 밟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조금씩 좁아지고 낮아지고 어두워졌던 방들”에 대한 고백이 그의 내면에 들어온다(49면).
김지영의 성장담에서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청년 소외의 양상은 안주를 위한 최소한의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구체화된다. ‘열악하다 못해 해괴한 방’들을 돌아다니며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소외감은 ‘방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의 고단한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203면). 떠다니는 ‘방’들의 세계는 졸업을 하고도 쉽게 사회에 진입할 수 없는 청년세대의 위기와 불안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취업하기가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세상”(221면)에 청년들은 내던져져 있다. “신의 직장이야 애초부터 신의 아들만 들어가는 곳이겠지만, 인간의 직장에도 못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221면)라는 하소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김미월 소설에서 청년들을 압박하는 취업난, 경제적 궁핍은 가까운 친구에게도 온전히 자기를 열지 못하는 불안감으로 작용한다.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하는 김지영은 친구나 선배와의 관계에서도 소통의 실패를 거듭한다. 첫사랑을 느꼈던 동아리 선배 시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며, ‘무당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자의식을 벗지 못했던 ‘관’과도 지속적으로 소통하지 못한다. 이혼 위기를 겪는 부모와, 온전한 우정을 맺지 못하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녀로 하여금 불안과 소외를 느끼게 한다.
김지영이 경험하는 불안정한 소통과 장소성의 상실감은 세대론적 층위를 달리해서 오영대의 서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연결된다. 그러나 가난과 소외를 겪으며 거주할 방을 찾아 전전하다가 글쓰기를 통해 자기회복의 길을 모색하여 성장을 이룬 김지영에 비한다면, 오영대는 목표와 꿈도 명시되지 않은 무기력한 청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영대에게는 지영이 기억하는 간접적인 정치적 연대의 경험마저도 없다. 어쩌면 2011년 지금-여기 청춘의 현주소가 있다면 그것은 김지영보다는 오영대의 삶과 가까운 것일 터이다. ‘88만원세대’가 체감하는 불안과 경쟁의 심화 속에서 청년들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친구들이 하라는 대로 선생이 하라는 대로 따라온 삶”(15면)에 대한 무기력감을 토로할 뿐이다. 닫힌 미래에 대한 무기력감은 “말하지 못한 꿈. 자신이 갖고 있는지 안 갖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꿈. 사람은 꼭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일까. 그냥 되는 대로 살면 안되나. 꿈 없이도 지난 25년간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왔는데”(84면)라는 오영대의 고백에서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렇듯 청년세대가 느끼는 실존적인 불안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는 장점과 더불어 『여덟번째 방』이 보여주는 아쉬운 대목도 짚지 않을 수 없다. 소설에서 지영의 소통 부재와 좌절은 글쓰기로 보상되지만, 영대의 희망과 꿈은 지영을 직접 만나서 일기장을 돌려주겠다는 소박한 결심으로 구체화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영대의 삶과 지영의 삶이 이루는 접점이 모호하게 그려지는 것은 이 소설의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지영의 풋풋한 성장담이 지니는 낭만적인 회고성은 출구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에 둘러싸인 영대의 현실과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지영의 서사와 견주어볼 때 영대가 표현하는 청년세대의 고민과 불안은 제한적인 구도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영대의 목소리가 관찰자라는 시점에 제한되어 있는 서술상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여덟번째 방』은 그런 점에서 지영과 영대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방황과 좌절을 거친 지영의 세대가 영대의 세대에 보내는 위로와 공감의 메씨지로 다가온다. 현실적 조건들을 초월하는 낭만적인 청춘의 공감대에 대한 기대는 일기장을 읽고 영혼끼리 내면을 교류한다는 환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윤성희 소설이 보여주는 우연의 소통들이 사실은 가족서사의 해체와 쇠락을 견디려는 상상적인 보상에서 출발한 것처럼, 김미월 소설에서 형상화된 ‘방’들의 소통 역시 불안과 결핍의 청춘을 메우기 위한 낭만적인 상상력에서 발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발표한 단편 「프라자 호텔」에서도 이러한 청춘시절의 연대는 그리운 기억으로 회상된다. 기성세대로 성장한 주인공은 청춘의 그리운 한 시절을 ‘프라자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추억한다. 『여덟번째 방』에서 “문이 잘 닫히지 않던 방, 저녁마다 서향으로 난 창에 노을이 번지던 방, 장마 때면 침대 다리가 물에 잠기던 방, 정전이 잦던 방, 그가 들어오고 싶어했던 방, 방, 방들”(49면)은 이제 휴가 때 찾아와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는 ‘호텔방’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 이처럼 관계와 소통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는 김미월의 최근 소설들은 청춘시절의 연대를 돌아보는 담담하고 소박한 현실 투시를 지속적으로 담아내는 방식으로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최근 소설에 나타난 소통과 공동체의 상상력은 경쟁체제 속에서 심화되고 있는 개인의 존재 불안을 입증하는 문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자화된 개인의 내면탐구를 집중적으로 다루던 소설에서 개인들이 이루는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소설로의 변화는 분명 주목할 만한 양상이다. 그중에서 개인들이 이루는 소통과 관계의 허위성을 예리하게 해부하는 권여선 소설은 개인의 심화된 자기성찰을 이루어낸 사례다. 좁고 사소한 듯 보이는 친밀집단의 영역에 깊숙이 진입하는 권여선 소설은 내면에서 끄집어낸 타자성을 통하여 성차의 권력관계를 뒤집어보고, 궁극적으로는 이것에 제약되지 않는 존재의 개방성을 꿈꾼다. 현실의 부정성을 통과해 진행되는 이러한 성찰은 시종일관 관찰자 시점에 의해 유지되는 통렬한 냉소와 자기풍자를 동반한다.
가족 바깥의 우연적 공동체를 꿈꾸는 윤성희 소설의 서사적인 실험 역시 최근의 소설 가운데 돋보이는 부분이다. 윤성희 소설에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는 등장인물처럼 ‘구경꾼’의 모습으로 변하여 스스로를 객체화한다. 정교한 사물묘사와 감각들을 서술기법 자체의 새로움으로 승화시킨 『구경꾼들』은 장편 형식의 변모 양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징후로 보인다. 가족연대기로부터 출발했지만 그로부터 가장 멀리 가버린 그의 소설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지향하는 문학적인 상상의 공동체를 만난다.
김미월 소설이 일깨우는 청년세대의 소통 불안과 공동체의 상상력은 특정 소속의 집단적 정체성이 아닌 익명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의 관계맺음에 대한 염원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형을 그리고 있다. 백수와 루저라는 말로 명명되는 청년세대의 고통과 불안은 그의 소설에서 개인들을 연결하는 작고 따뜻한 위무의 공동체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진다. 마니아적인 감수성과 아웃사이더적 특징을 공유했던 ‘취향의 공동체’로부터 익명의 관계들이 연결하는 ‘소통의 공동체’를 열망하는 것으로 이동해가는 소설적 흐름은 김미월 소설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소설들에 드러난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이 말해주듯이, 문학에서 나타나는 연대와 소통에 대한 물음은 어떤 소통방식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가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방식의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적 희망을 설파하는 것으로도 귀결되지 않는다. 개인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범주를 되묻는 작업, 그리고 그 범주 안에 존재하는 미세한 관계들의 차이를 직시하는 가운데 소통의 새로운 지점들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개별성을 보존하면서도 자신 속에 잠재한 관계성을 발현하는 능동적인 유대관계에 대한 희망 역시 이러한 섬세한 투시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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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08, 241면.
2) 한기욱은 아감벤(G. Agamben)의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 개념을 통해 촛불공동체와 황정은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존재의 개방성 문제를 논의한다. 평자에 따르면 ‘있는 그대로’의 ‘여여한 독자성’의 개념은 ‘딴사람 되지 않기의 잠재성’을 수행하면서 온갖 근대적 정체성에 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있고자 하는 열려 있는 존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한기욱 「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3) 분석 작품으로 권여선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창비 2007)과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 2010), 윤성희 장편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과 단편 「공기 없는 밤」(『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 김미월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문학과지성사 2007)와 장편 『여덟번째 방』(민음사 2010) 및 단편 「프라자 호텔」(『서울, 밤의 산책자들』, 강 2011)을 정했다. 본문에서는 인용 면수만 표시한다.
4) 정홍수 「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40면
5) 심진경 「자기보다 낯선: 권여선 소설의 자아탐구에 대하여」, 『떠도는 목소리들』, 자음과모음 2009, 159면
6) 소설에서 “고양이처럼 작은” 두개골을 지닌 수림의 성적 이미지는 다른 작품인 「문상」에서 묘사되는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의 소유자”인 우정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하나의 사물처럼 견고하고 응축된 모습”을 지닌 수림의 육체는 “흘러내릴 듯한 살덩이”로 서 있는 우정미의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한쌍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권여선의 소설에서 이렇듯 기묘한 대칭을 이루는 여성인물들의 성적 이미지는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인 모티프로 등장한다.
7) 개인들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는 공공의 영역에는 차이와 충돌이 생겨나지만, 그 충돌 속에서 이룩되는 보편적인 감각들도 존재한다. 개인이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얻게 되는 보편적인 질서감각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논의한 것으로, 쑨 꺼(孫歌)의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수평축 위의 생활감각에서 비롯하는 생활질서를 강조하면서, ‘공동체의 생리’가 지각하는 ‘끊임없이 변동하는 질서감각’으로 ‘공동체 의식’을 논한다(쑨 꺼 「민중시각과 민중연대」,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85~88면 참조).
8) 이러한 맥락에 덧붙여서 현실의 부정성에 대응하는 최근 권여선 소설에는 상반된 진로의 모색이 함께 엿보인다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겠다. 소설적 고민의 흔적은 적대와 자학의 포즈가 정점을 드러낸 『분홍 리본의 시절』보다는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포함한 근작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지난 시절에 대한 담담한 수락과 모색의 과정이 담긴 「빈 찻잔 놓기」나 「사랑을 믿다」 같은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상성에 대한 연민과 지나간 시절에 대한 수락을 미묘하게 감지하게 한다. 더불어 「팔도기획」(세계의문학2010년 여름호)이 보여주는 강한 세태풍자의 구도 역시 중요한 방향으로 보인다.
9) “그냥 단어들을 머릿속에 펼쳐놓아요. 그리고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그 단어들이 알아서 저절로 이리저리 연결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일곱개의 단어로 한 이야기가 탄생되기도 하죠.”(112면)라는 등장인물의 고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피쏘드가 연결되는 이 소설의 서술방식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작은 이야기들이 마구 뻗어나가는 장편을 쓰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신형철・윤성희 대담 「상상해, 공동체」, 『문학동네』 2010년 겨울호 61면).
10) 이 대목은 우리시대의 문학이 갖는 소통의 역할에 대해 작가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는 것으로도 읽힌다. ‘들어주는’ 이야기꾼은, 허구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창조자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주변부에 물러서서 수많은 다성적 목소리들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작가의 역할을 암시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11) 낭씨는 합일과 소통의 관계를 구분하면서, 그 어떤 소속에도 연루되지 않은 완전히 개방된 존재로서의 공동체를 천명한다. 그의 논의에서 함께-있음의 논리는, “관계 없는 어떤 관계, 또는 관계와 관계의 부재로 동시에 외존”된다고 설명된다.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박준상 옮김, 인간사랑 2010, 2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