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정치적인 말의 모습과 조건
시와 정치의 소통을 추구하는 최근 논의를 읽고
김종훈 金鍾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시와 삶과 노동시의 재인식」 「미래의 서정에게」 등이 있음. splive@chol.com
1
최근 진행되고 있는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는 십여년 전에 있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會通)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음을 확인한 뒤, 그 둘의 소통 가능성을 모색하는 순서가 그러하다. 당시 최원식(崔元植)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대별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주목하며 글을 시작했다.1) 최근 진은영(陳恩英)은 집회에 참석하는 일 등 시민으로서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수월하지만, 시를 통한 참여는 어렵다는 말로 시와 정치의 간극을 드러냈다.2) 최원식은 좋은 작품에는 두 사조가 이미 회통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담론 안에 갇힌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창작측으로 방(放)”해야 한다며 글을 맺었다.3) 진은영은 글의 마지막에서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고 하며 제 분야의 자유분방한 실험과 접합을 제안했다.4)
그러나 이 두 논의가 꼭 포개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시에 관한 논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구획한 영역을 교란하고 있고, 정치에 관한 최근 논의는 삶의 문제와 밀착해 있다. 이는 진은영의 모색을 최원식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회통론을 촉발시켰던 논의 중의 하나인 진정석(陳正石)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게 한다. 진정석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포괄하는 ‘광의의 모더니즘’과 추상화 이전의 근대적 경험에 밀착한 ‘리얼리티’를 설정한 뒤, 이 둘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주체들의 출현을 요청했다.5) 거칠게 대입하자면 이때 ‘광의의 모더니즘’은 문학적 텍스트로서의 시와 대응하고, ‘리얼리티’는 삶과 경험을 경유하여 사회적 텍스트로서의 정치와 대응한다.
십여년 전의 논의가 지금 본격적이고 전면적으로 개진되는 까닭은 우선 2000년대 이후 여러 개성적인 목소리가 시에 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은 이 새로운 목소리들을 이해하려 분주했다. 그때와는 다른 정치적 상황도 이 논의를 부추겼다. 2008년에 ‘촛불’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2008년 겨울 진은영은 시와 정치에 대한 고민을 드러냈다. 2009년 1월에 용산에서 여섯명이 죽었고, 5월에 김해 봉하마을에서 한사람이 죽었고, 6월에 작가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시와 정치에 관한 논의는 이어졌다. 논의는 2000년대의 시와 비평이 알게모르게 미적 자율성의 권위를 높이는 쪽으로 흘러간 것은 아닌지, 정치적인 것이 거기에서 소외되고 있지 않은지 되물었다.
잠재된 삶의 부면(部面)을 시에 끌어들어야 한다거나, 기존의 것과 단절하고 질서를 초과하는 자리에서 시와 정치의 만남을 모색해야 한다거나, 말과 사유와 삶의 자리를 지상의 다른 자리로 옮겨 익명의 힘을 맞이해야 한다거나, 시와 정치의 제휴를 가능한 불가능성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의견은 크게 보았을 때 같은 기제를 지닌다.6) 이질적인 것의 표현이 다를지라도, 출현하는 시의 장소와 모습과 시기가 다를지라도, 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을 시쓰기의 영역에 포섭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
과거 회통론과 관련된 논의와 최근의 비평이 제출한 결론의 성격 또한 닮아 있다. 이들은 모두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또한 당장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미적 자율성의 권위에 대해 회의를 품을 수는 있으나 미적 자율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고, 시와 정치의 거리를 좁히려 할 수는 있으나 그 차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문학의 장에서는 문제를 푸는 과정이 대개 정답이 아니라 전망을 제시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끊임없는 질문을 요구하는 문학의 장 안에서 제시된 정답은 임시방편일 경우가 많다.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을 시쓰기의 영역에 포섭하려는 최근의 논의를 따라간다. 특별히 주목하는 지점은 거기에 인용된 시와 그 분석들이다. 인용된 시는 2000년대의 것으로서 이 시대의 고민을 반영하며 시에 출현한 ‘정치적인 것’의 모습을 언뜻 보여준다. 시 분석을 함께 다루는 까닭은 최근의 논의를 보완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또한 그 논의가 요구하는 시의 조건과 관련이 있다.
2
진은영은 거듭해서 1980년대 박노해(朴勞解)와 백무산(白無産)의 시를 새로 도착할 정치시의 귀감으로 삼았다.7) 순정한 언어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의 모습으로, 또는 당시의 감성체계를 재편한 미학적 주체의 모델로 그들의 시는 등장한다. 이로써 새로운 정치시는 공동체의 문제를 환기하는 동시에 시적인 것의 관념에도 충격을 주는 것을 조건으로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1980년대의 시인 중 황지우(黃芝雨)와 이성복(李晟馥)과 최승자(崔勝子)가 배제된 까닭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문학과지성사 1983)의 황지우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92)의 이성복과 『즐거운 일기』(문학과지성사 1984)의 최승자는 폭압적인 현실의 문제를 시집 여기저기에 흩뿌려놓았고 비시적인 언어와 이미지를 시에 끌어와 시적 개성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닌 기성시인이었다.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요청하는 목적에는 박노해와 백무산이 더욱 부합했던 것이다.
박노해와 백무산은 시인으로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냈다기보다는 시인이 아니라서 개성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하게 등장했고 예상치 못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들의 말투는 덜 세련되었고 투박했으나, 목소리에 담긴 힘과 메씨지는 세련됨과 투박함을 가르는 기준을 의심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곧 낯익은 것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시의 운명은 시와 정치를 함께 성찰하는 시인에게 시쓰기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종용한다. 지금은 낯익지만 당시에는 낯설던 주체의 등장이 노동시와 민중시를 형성했듯이, 지금 시와 정치를 함께 고려하는 일이 철 지나고 부질없어 보이지만 이러한 모색을 거쳐 출현하는 새로운 시가 기존의 감성체계를 재편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의 선택에는 담겨 있다.
공동체의 문제를 환기하는 정치시는 아닐지라도 민주주의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라는 측면에서 심보선(沈甫宣)은 진은영이 가능성으로 남긴 자리를 구체적인 이미지로 채웠다. ‘평론가, 시인, 문맹자의 문학적 정치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글은 평론가를 ‘천사-되기’, 김수영과 진은영 같은 시인을 ‘지게꾼-되기’, 문맹자들을 ‘무식한 시인-되기’와 연결하여 각각의 성격과 임무를 부여했다.8) 그에 따르면 ‘천사-되기의 시’는 기존의 분할선을 토대로 하지만 ‘지게꾼-되기’는 그것을 가로질러 새로운 다수성, 새로운 시간과 장소를 세운다. 이는 추상화된 리얼리즘의 개념을 풀어 삶의 리얼리티 속으로 침투하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마지막 ‘무식한 시인-되기’는 시인/비시인 같은 기존의 분할선을 무화시키는 제도권 밖 시들의 출현과 대응한다.
그는 기성시인의 시보다는 그것을 분석하는 비평가들의 작업을 문제삼았다. 그가 보기에 비평가들은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한 뒤 시인에게 정언명령의 형식으로 고뇌를 지속하라고 계속 주문하고 있다. 그 주문이 이어질수록 기존의 인식체계와 정언명령의 권위는 점점 굳건해진다. 문학과 정치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할수록 문학과 정치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기존의 시들은 비평가들에게 인용되고 분석되며 이 작업에 동원된다. 이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기존의 분배방식을 재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성시인의 시가 아니라 제도 바깥에서 출현하는 시이다. 문맹자들의 시, 즉 ‘무식한 시인-되기’의 시는 이렇게 그의 글에 등장한다.
시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
배운 사람이 시를 써 읊는 거지
가이 갸 뒷다리도 모르는 게
백지장 하나
연필 하나 들고
나서는 게 가소롭다
꽃밭에서도 벌과 나비가
모두 다 꿀을 따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벌들은 꿀을 한보따리 따도
나비는 꿀도 따지 못하고
꽃에 입만 맞추고 허하게 날아갈 뿐
청용도 바다에서 하늘을 오르지
메마른 모래밭에선 오를 수 없듯
배우지 못한 게 죄구나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써도
나중엔
배운 사람만 못한
시, 시를 쓴단다
—한충자 「무식한 시인」 전문9)
‘무식한 시인’은 문맹자이면서 동시에 시인의 자리를 왕복하며 기존의 분할선을 교란한다. 억압되었던 문맹자의 ‘말하려는 의지’는 시인의 자리에서 발화되는데, 심보선은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낯선 표현이 거기서 출현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을 구분하여 ‘치안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인용된 시의 구도를 깨뜨린다. 구체적인 그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이 시는 늙은 문맹자의 슬픈 고백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비참한 현실을 확언하는 시의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가이 갸 뒷다리” 같은 허구적 말, “꽃밭” “바다” “메마른 모래밭” 같은 허구적 장소, “벌” “나비” “청용”(청룡) 같은 허구적 동물을 상상하는 역량,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허구적 이야기를 짓는 역량은 도대체 누가 소유한 감성적 역량인가?”10) 문맹자의 자리에 머문다면 저 허구적 말과 허구적 장소와 허구적 동물은 시에 나타나기 어려웠다. 무식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치안적 질서’를 재편할 ‘딴사람의 감성적 역량’이 발휘되어 이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꽃밭의 꿀을 흠뻑 흡수하는 벌과 그렇지 못한 나비는 각각 기존의 시인과 무식한 시인을 비유한다. 또한 하늘로 오르는 청룡과 그렇지 못한 자신의 토대는 각각 바다와 모래밭으로 설정된다. 메마른 땅 위에 있는 자신은 결코 청룡 같은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자괴감이 이 시에 놓인 주된 정서인데, 이 완강한 시의 구도 안에서 심보선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시인과 문맹자를 대변하는 시어들이다. 그런데 좀더 논의가 필요한 “가이 갸 뒷다리”를 제외한 다른 시어들은 오히려 기존의 질서에 포함되는 과정의 초기에 드러나는 현상은 아닐까.
하늘로 올릴 수분이 많은 바다와 그렇지 못한 모래밭은 풍족함과 메마름을 오래도록 대변해왔다. 벌과 나비와 청룡 또한 많이 보고 들어왔다. 시를 몰라도 익히 알고 있고 글을 몰라도 들은 바 있는 말이다. 이것은 기존의 감성체계를 재편할 새로운 상상력에서 출현했다기보다는 그 체계를 지키는 관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무식한 시인’은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학습하는 과정 초기에 자신의 밑천을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막 시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아직 그 미묘한 감정상태를 표현할 개성적인 목소리를 지니지 못했다.
이 시에서 감성체계의 재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지점은 말하려는 의지가 누추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갑갑함이다. 이 갑갑한 마음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체계가 재편될 가능성을 실패의 형식으로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말을 표현하는 주체의 위치가 아니라 말에 걸려 있는 세계의 모습이다. 어느날 느닷없이 출현한 유령이 산 자와 구별되지 않고 어느날 느닷없이 도착한 외계인이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느닷없는 출현과 도착은 곧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기존의 것을 재편하는 것은 다른 세계를 거느린 말이다. 다른 곳에서는 낯선 말이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은 낯선 말을 경유하여 다른 곳을 느낄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그 자신이 낯설어지고 이곳은 재편될 수 있다.
3
심보선은 ‘딴사람 되기’를 설명하면서 여분의 것과 초과의 것을 구별했다. 그에 따르면 창작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장소를 초과의 것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끊임없이 사유와 열정을 채워넣어야 한다.11) 함돈균(咸燉均)은 그 이전에 이미 글의 제목에 ‘초과’를 넣어 논의를 개진했다.12) 그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것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해야 할 자세며 이는 시에서뿐 아니라 윤리와 정치의 장에서도 요구되는 것이라 했다. 확실히 ‘초과’라는 말에는 ‘여분’과 달리 기준이나 한계가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초과’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할 것 같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시쓰기의 자세를 일깨우는 말로 인식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텍스트에 나타난 수다스러운 말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다스럽게 보이는 말로써 기존의 시적인 것을 넘어선 예는 한국시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정치적인 것을 환기하는 시로 범위를 제한해도 그렇다. 김수영(金洙暎)은 「거대한 뿌리」에서 청계천 가의 “무수한 반동들” 하나하나를 호명하며 기존에 형성된 시적인 것을 초과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것을 선명했다. 진이정은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에서 파국을 앞에 두고 떠오르는 모든 상념을 끌어모으려 애썼는데, 어지럽게 배치된 이미지의 논리를 형성한 것 중 하나가 정치적인 상상력이었다.
더듬거리고 어눌한 것처럼 보이는 말로 기존의 분할선을 재편하는 모습을 찾기란 상대적으로 어렵다. 낱말들은 의사소통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듯이 스스로 고립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제각각 다른 세계를 거느린다. 그 세계는 이 세계를 초과하고 재편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그것들에 고여 있는 세계는 다른 장소거나 다른 시간일 수 있다. 외국의 한인거리나 서울의 퇴락한 골목에 보이는 주점들의 상호는 ‘은하수’ ‘무지개’ ‘달밤’처럼 촌스럽다. 그것은 외국어나 외래어나 세련된 말들에 포위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간판을 내걸었을 당시의 인식과 사회상이 보존되어 있다.
고립된 말은 처음 그것을 꺼낸 시인의 감정에서, 매끄러운 의사소통의 국면에서, 지금 이 시대가 거느린 맥락에서 거리를 두며 딱딱해진다. 정치적인 것을 환기하는 말이 이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체계를 재편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들러붙은 여러 감정과 맥락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다. 간혹 그 메마르고 딱딱한 모습은 이 세계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전생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명료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전문13)
함돈균은 ‘잉여로 초과하는 시’라는 부제를 달고 이장욱(李章旭)의 시 두편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데, 「동사무소에 가자」에서는 특히 “동사무소란/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보기에 이 질문은 ‘공적 지식더미들의 허구성을 역설적으로 야유’하는 기능을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공적 지식더미에 기입되는 항목에 맞춰 자신의 삶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그같은 허구적 삶을 비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인데, 질문 없는 삶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간결하면서도 무한한 이 서류더미의 세계는 기입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의 형식을 갈라 정보(‘공적 지식’)로 등록하고, 희로애락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생의 부면들을 일사분란하고 매끄러운 서류적 코드로 가공하고 분류하며, 그럼으로써 삶을 ‘합리적’으로 규율하고 관리한다. (…) 가공된 지식과 승인된 언어, 인지착오적 믿음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 이 세계에서 ‘(승인된) 주체’는, 기왕에 주어진 노동의 사회적 분할을 자진해서 수행하고 세계와 거짓화해를 함으로써 ‘낙천적’으로 삶을 살아간다.”14) 이 맥락을 따르면, 초과하는 것은 문제적 질문이며 분할된 것은 질문이 없기 때문에 낙천적일 수밖에 없는 삶이다.
기존에 조성된 사회적 분할선을 대변하며 일상에 침투한 대상으로 동사무소는 잘 어울린다. 동사무소는 파출소와 함께 관공서 중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곳이지만 파출소 같은 위압감이 없다. 동사무소는 범죄를 다루는 곳이 아니라 일상을 다루는 곳이다. 그곳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 낙천적 삶에 대한 역설적인 야유로 보이고, 기존에 형성된 분할선을 초과하는 말로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시의 맥락은 이 질문을 역설적인 야유로 여기는 과정에 제동을 건다.
문제적인 질문 “동사무소란/무엇인가”의 해석을 다르게 보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에서 비롯한다. 첫째, 질문을 접했을 때 기대되는 수용자의 반응이다. 처음 읽거나 들었을 때 수용자는 수긍하거나 놀라기보다는 웃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쓴웃음도 아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동사무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견주어보자. 더구나 이 질문은 중간에 한 호흡이 끊겨 있다. 이 구절은 전 시집 정오의 희망곡에 있는, 문득 자신이 의아해진 느낌을 적은 「엉뚱해」의 마지막 구절 “엉뚱해 역시/펭귄이란”이나, 정처 없는 삶을 그린 「근하신년」의 마지막 구절 “널 사랑해”를 떠올리게 한다. 앞 시의 마지막 독백은 엉덩이가 뚱뚱한 펭귄을 연상시켜 많이 웃기고, 뒤 시의 마지막 고백은 시의 전체 맥락과 동떨어져 조금 웃기다. ‘동사무소’와 ‘무엇인가’를 분리한 채 그 의미를 헤아리면 ‘동사무소’는 기존에 형성된 분할선을 가리키고, ‘무엇인가’는 그 분할선에 구멍을 뚫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미뿐 아니라 표현까지 고려하면 여기에서 비판적 시선이 개입된 야유를 읽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시인이 동사무소가 상징하는 세계와 반목을 풀고 화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풍자에 담긴 비판, 해학에 담긴 화해의 감정은 모두 긴장과 갈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긴장과 갈등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외로움과 허허로움이다. 그 까닭은 이어서 살펴보는 삶의 위력과 연관된다.
둘째, 질문의 역할이다. 제목이기도 한 구절 “동사무소에 가자”는 시에서 네번 반복된다. 동사무소는 일상에 침투해 있으나 그렇다고 일상 그 자체는 아니다. 시에서 동사무소는 있는 곳이 아니라 가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인은 “외로울 때”나,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에 있을 때나,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을 때 동사무소에 가자고 한다. 그는 공동체에서 누락되었다고 느끼는 중인데, 자신의 정체성마저 흐릿해질 때 생겨나는 무력감을 떨쳐내고자 찾는 곳이 동사무소이다. 거기에는 간결하고 뚜렷한 분할선이 있고 무한한 과거와 미래가 있다. 하지만 그곳을 찾았다고 무력감이 해소될 리는 없다. 그곳은 ‘인지착오적 믿음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 세계’(함돈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야유하는 주체의 힘보다는 그 주체를 가두는 삶의 위력을 드러낸다.
이장욱 시의 일인칭은 낙관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대신 낙관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산다. 간혹 소문(「근하신년」)이나 좀비(「좀비 산책」)와 같이 떠도는 일인칭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안식하고 싶지 않지만 안식을 강요당하는 삶을 살며 ‘나’는 미약해진다. 초과하고 싶지만 초과하기 힘든 삶 안에서 ‘나’는 분산된다. 그러나 이 미약해지고 분산되는 주체의 모습은 그것으로 긍정적이고 강인한 주체를 조성하는 낙관적인 삶과 대비된다.
주체의 이 미약한 힘은 대상의 선택 범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현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함께 나타난다. 이를 구분하고 분류하는 작업도 강인한 주체의 몫이라는 듯, 대상들은 기존의 분할선을 넘나들며 미약한 주체와 접속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 세계에서의 맥락이나 거기에서 생겨나는 정념과도 거리를 둔다. “우리는 엉뚱하게 연금을 부었다/갑자기 미래가 시작되었다”(「엉뚱해」)의 미래가 밝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부르주아에 대한 고전적인 적의 같은 것”(「근하신년」)의 적의가 뜨겁지 않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연관될 것이다. 이장욱의 시어는 의사소통에서 고립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인칭의 정념과는 거리를 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딱딱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건조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에 들어 있는 이 평등하고 건조한 말들은 기존의 감성체계를 재편할 징후기도 하다.
4
신형철(申亨澈)의 말을 빌리면 진은영의 고민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의 창작이다.15) 앞부분은 대상 시의 성격을 규정하고 뒷부분은 대상 시의 가치를 문제삼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말의 조건은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의 조건과 어느정도 겹친다. 진은영은 거듭 박노해와 백무산을 언급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는 기존의 공동체를 환기한다거나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다루었다. 그것들은 김수영과 진이정과 이장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에둘러 제시되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신형철이 ‘시인은 무엇을 원하는가’와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나누어 논의를 전개한 까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시가 출현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이 둘은 나뉜다. 시인은 시를 비평에게 건넨다. 시인은 예감을 말로 드러내고 비평가는 그 말을 전제로 다음 말을 생각한다. 비평가의 예상은 어렴풋하다. 뚜렷한 것은 시인이 건넨 말이다.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뚜렷해야 한다면 그것은 비평가의 다음 말이 아니라 시인의 말이어야 한다. 이 글이 취한 방법은 에두른 길이지만 뚜렷한 길이기도 하다.
신형철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먼저 그는 두가지 질문을 나누고 그에 대해 답변한다. 시인에 관한 질문의 답변은 위의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면서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의 창작’이고, 비평에 관한 질문의 답변은 ‘첨예하게 미학적인 시들에서 우선 그 미학적인 것의 핵심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 이후에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까지를 읽어내는 일’이다.16)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한 그의 논의에 대입하면 이 글은 ‘정치적인 것’을 따라간 것이고 그의 글은 ‘정치학적인 것’을 제시한 것이다.17) ‘정치’는 이 글에서는 시인이 건넨 말에 걸려 있고, 그의 글에서는 비평가가 포착해야 하는 임무에 해당된다. 이 비평의 임무는 신해욱(申海旭)의 시가 인용되며 구체적인 모습을 띤다.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신해욱 「축, 생일」 전문18)
「축, 생일」은 신형철의 글에 인용된 신해욱의 시 두편 중 하나이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생물성』과 전작 『간결한 배치』(민음사 2005)까지 고려했을 때 신해욱은 다분히 건조하고 미니멀한 시어를 구사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어가 일인칭의 감정이나 의사소통의 국면에서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낱말의 개수가 별로 없는 반면 그 뜻 사이의 여백을 크기 때문에 그 고립의 정도는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고립된 그의 말이 주로 흠집을 내는 것은 시 속에서나 현실세계에서나 가장 중요한 ‘나’이다. 신형철은 신해욱 시의 미학을 ‘투명성의 시학’이라 명명하고 거기에서 이 시대에 만연한 주체성의 위기를 읽어낸다.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잃어버린 나’를, 더 나아가, ‘잃어버린 나를 잊어버린 나’를 아파하는 신해욱의 시는 오늘날 우리들 마음의 현황이자 주체성 위기의 한 징후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부터 신해욱의 투명성의 시학은 미학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기를 멈춘다. 그것은 지적한 대로 사회학적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주체성의 위기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 결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정부의 퇴행적 통치형태의 한 배후가 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정치학적이다.”19) 주체성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와 퇴행적 현실정치와 연결된 뒤 정치학적 영역에 배치된다.
신해욱의 시에는 신형철의 말대로 ‘정치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물다. 대신 ‘정치학적’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기존에 조성된 분할선을 재편하거나 초과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신해욱의 시를 다시 보자. 주어와 보어와 목적어와 관형어의 위치에 있는 각각의 ‘나’가 생일날 한자리에 모인다. ‘나’는 정돈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는데, 정작 흩어져 있는 것은 ‘나’들이다. 그것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여러 시간에 흩어질 것도 같다. 어떤 ‘나’는 또다른 어떤 ‘나’보다 오래 살 것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 생일은 같지만 모든 것이 다른 일인칭은 여러 장소와 시간에 배치되어 있다. 이 시에서 힘센 일인칭의 모습을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같은 신해욱의 시에서 주체성의 위기를 읽어내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근대 초기의 한국시에도 분열된 자아가 보이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이 근대의 보편적인 현상을 대변한다라는 해석에도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 현정부의 퇴행적 통치형태의 배후와 결부된 뒤 정치학적 장에 놓일 때부터 재고의 필요가 생겨난다. 현실정치와 경제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정치학적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경유지이지 종착지는 아닐 것이다. 그것이 종착지라면 의미 해석의 확장 가능성은 일찍 차단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일찍이 자아의 분리를 통해 주체성의 위기를 보여준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그 정치학적인 장에 놓이지 못하게 된다. 정치학적인 장에 신해욱의 시는 옮겨질 수 있다. 많은 시들이 신해욱의 시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시에서 주체성을 다루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정되고 완강한 주체의 모습을 보이는 시들은 그같은 성질을 표나게 드러내는 것 자체가 위기의 방증이라는 평가를 얻을 것이다.
질문은 그다음부터다. 신해욱의 시가 놓여 있는 정치학적 장은 이미 있는 것인가, 기존의 장을 초과하고 재편한 것인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편된 체계가 아니라 기존의 체계다. 시에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만들려고 애썼던 비평의 공통점은 기존의 체계를 초과하고 재편하는 시에 대한 신뢰이다. 기존 체계의 재편을 즉각적이고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은 독자, 비평가이다. 정치와 관련된 비평의 목적은 그의 글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말의 미학적 핵심을 파악하고 거기에서 정치학적인 것을 읽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 정치학적인 것 또한 재편된 체계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5
시에서 정치적인 것을 모색하는 세 논의에 힘입어 그 말이 기입되는 장소를 떠올려보자. 먼저 문예지나 시집, 다음에는 행사시나 추모시가 놓일 언론매체나 단상 위. 오래전부터 시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분할선을 넘기가 쉽지 않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지하철 스크린도어, 아파트 담벼락, 화장실 타일벽 등등. 몇몇 서울의 지하철역 스크린도어에는 현재 시가 붙어 있다. 어떤 구청은 몇몇 아파트 사이를 시의 거리로 지정해 담벼락에 시화 액자를 걸어두고 있다. 몇몇 화장실 벽면에는 잠언풍의 시가 걸려 있다.
그곳에 걸려 있는 시의 창작자는 기성시인, 비등단 시인, 학생, 승려 등 다양하다. 그 시들의 내용은 대체로 따뜻하고 따분하다. 연령이나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일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 완고한 체계가 작품선정 과정에 개입한 것 같다. 그곳은 분할선이 초과된 곳이 아니라 분할선이 연장된 곳이다. 하지만 그곳은 저항선이기도 하다. 지워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체될 것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시는 상업광고에 저항하고 있다. 아파트 담벼락의 시는 관공서 행사 안내문에 저항하고 있다. 화장실의 시는 장기판매안내 전화번호와 외설적 낙서에 저항하고 있다.
분할선을 재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걸려 있는 시를 바꾸는 것이다. 새로 걸리는 시는 이미 있는 시의 완고한 체계와 경제·정치·외설적 폭력을 동시에 넘어선다. 이때 분할선과 저항선은 동시에 재편된다. 분할선을 재편하는 다른 방법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곳을 찾아내 그러한 시를 기입하는 것이다. 무수한 곳에서 동시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시의 출현이 전제조건이라면 시집, 문예지, 신문, 스크린도어, 담벼락, 화장실 등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말에는 어떠한 곳도 재편할 수 있는 정치성이 있다. 고립된 말에는 다른 세계를 제시하는 정치성이 있고, 어지러운 말에는 다른 것들과 연대하는 정치성이 있다.
--
1) 최원식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 『문학의 귀환』, 창비 2001, 42~48면.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3) 최원식, 앞의 글 58면.
4) 진은영, 앞의 글 84면.
5) 진정석 「모더니즘의 재인식」, 『창작과비평』 1997년 여름호 152~62면.
6)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함돈균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심보선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7) 진은영, 앞의 글 67면; 진은영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25~29면.
8) 심보선, 앞의 글 248~66면.
9) 같은 글 262~63면에서 재인용.
10) 같은 글 263면.
11) 같은 글 260~61면.
12) 함돈균, 앞의 글 38면.
13)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14) 함돈균, 앞의 글 48면.
15) 신형철, 앞의 글 370면.
16) 같은 글 370, 385면.
17) 같은 글 374면. 신형철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특정 작품이 현실정치의 의사소통 장에서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포함할 때 그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가치판단’하고, 특정 작품이 (예컨대 ‘생체-정치’ ‘성-정치’ 혹은 ‘정체성-정치’ 등의 용례에서 보듯) 넓은 의미의 ‘정치’와 연계되어 있어 정치학적 토론의 대상이 될 만한 논점을 내장하고 있을 때 그것을 ‘정치학적인’ 것으로 ‘사실판단’하자는 것이다. (…) 요컨대 이렇다. 정치적·윤리적·미적인 것은 기존 장에서 특정한 입장을 채택하면서 개입하고, 정치학적·윤리학적·미학적인 것은 최상의 경우에 앞의 것들이 근거하고 있는 장 자체를 성찰하게 만드는 의제를 제기한다.”
18)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
19) 신형철, 앞의 글 3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