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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중・일 작가가 말하는 동아시아문학

 

또다시 고독을 맛보고 싶지 않다

 

 

쯔시마 유우꼬 津島佑子

1947년 토오꾜오 출생. 1969년부터 작품활동 시작. 국내 소개된 작품으로 장편소설 『불의 산』 『웃는 늑대』, 소설집 『나』 등이 있음.

 

 

이제 와서 한사람의 소설가인 내가 새삼 말을 더할 것은 없겠으나, 올해 3월에 일본열도의 동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큰 지진과 거대한 쯔나미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또한 후꾸시마(福島) 해안의 원자력발전소 4기가 잇달아 폭발하는 대사고도 일어났다. 이 사고에 의한 심각한 방사능오염은 현재도 진행중이며, 스트론튬이나 쎄처럼 듣고 싶지 않은 무서운 방사성물질의 이름이 연일 보도되고 어느 곳의 방사선량이 얼마라는 보고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아둔함을 스스로 대단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이 원전으로 인한 방사능오염이 일본열도뿐 아니라 태평양 및 인근 여러 나라, 그리고 지구 전체로까지 확대된 현실에 직면해서야 일본 일국의 피해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진과 쯔나미의 피해에 대해 한국에서 즉각 보내준 위로와 지원에 여기서 깊은 감사를 표함과 더불어, 일본이 확산시킨 방사능오염에 대해 일본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거듭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방사능 구름은 원전이 자리잡은 시(市)·정(町)·촌(村)을 가볍게 넘고, 현(縣)의 경계도 넘고, 나아가서는 바다도 넘어 한반도 그리고 중국, 러시아까지 흘러가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국경 같은 것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뜻밖의 이번 사고로 인해 동아시아 지역이라는 지리적 조건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 중국의 작가들과 2년마다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내년은 중국에서 포럼이 개최될 예정인데, 그때 일본의 우리는 과연 한국과 중국의 참여작가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순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이전처럼 느긋한 기분으로 참석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 문학포럼은 한국의 대산문화재단이 계기를 마련하고 중국작가협회와 일본의 현역작가 중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호응하는 형태로 2008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일본작가측 중심 멤버는 당시까지 10년 이상 계속되어온 한일문학심포지엄과 겹친다. 나 자신과 한국작가와의 접촉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할 수 있다. 한편, 2001년에 마침 9·11사태가 일어난 날에 일중여성작가회의가 뻬이징의 사회과학원 주최로 열렸는데, 내게 있어 그 회의는 중국의 현대작가와 가까이 접한 첫 기회였다. 그때, 남성이기는 하지만, 참관인으로 모옌(莫言)도 참석해주었다. 그는 동아시아문학포럼의 중국측 중심 멤버다.

일중여성작가회의가 9·11과 때를 같이한 것도 잊히지 않지만, 한일문학심포지엄의 시작도 실은 1991년 걸프전쟁 때였다. 이렇게 돌이켜보면, 세계적 대사건과 우리 동아시아 작가들의 모임이 연결되어 있는 데 새삼스레 놀라게 된다.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 정치적 배경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무엇보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의 문화적 차이가 아시아의 우리를 겨누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역시 절박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금 아시아와 서구 사이에 존재하는 근원적이라고도 할 만한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물론 다른 작가들도 가지고 있었다. 걸프전에 반대하는 작가들의 회합 뒤에 들른 찻집에서 나까가미 켄지(中上健次)라는 작가가, 차제에 한국의 작가들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지, 적어도 이웃 한국의 작가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그는 이미 한국의 소설가 윤흥길(尹興吉)과 친밀한 교분이 있었다. 나까가미 자신은 그 이듬해에 암으로 타계했지만, 한일문학심포지엄은 실행되어 착실하게 이어지고 있다.

걸프전 당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일본에서는 한국문학의 실정에 어두웠다.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김지하(金芝河)만은 알려져 있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한국의 정치적인 긴장만 과도하게 강조되어 일본에 전해졌다는 느낌도 든다. 평범한 일본인이 마음 편히 한국에 놀러 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1980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일본의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중국 문화대혁명의 실태를 잘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불분명한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국이 크게 변하고 있다고는 느끼고 있었을 테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동시대 문학을 우리도 직접 알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일본의 작가들은 유럽이나 미국의 문학은 잘 알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한국이든 중국이든 ‘이웃’의 동시대 문학은 모르고 있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상태는 어딘가 텅 비고 어긋난 게 아닌지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각해보아도, 소중한 것이 빠져버린 상황이었다. 문학은 개인을 단위로 하는 행위이며, 고독을 수반한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의지해 ‘이웃’에서 꾸준히 쓰고 있는 벗을 발견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다. 정치나 경제의 움직임과는 다른, 문학적인 의미에서의 ‘육친’과 만나고 싶다.

걸프전 직후부터 시작된 한일문학심포지엄에서는, 그런 우리의 생각이 마침내 벽을 허물고 흐르기 시작했다는 감동이 있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동아시아문학포럼에서도 나는 매번 같은 감회에 휩싸인다. 같은 장소에 모인 한국, 중국의 작가 한사람 한사람이 마치 나의 친척처럼 느껴진다. 구미의 문학 심포지엄에서도, 이렇게 공통된 테마로 작품을 쓰는 작가가 어떻게 이런 먼 곳에도 있는 걸까 하는 기쁨에 휩싸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경우엔 더욱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친근함이 있다. 하지만 ‘이웃’인 탓에 생겨난 무거운 과거도 그곳에 가로놓여 있다. 게다가 과거는 단지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기에, 문학에 희망을 두는 북한작가와는 아직 만날 수 없고, 중국의 작가들과 환담하노라면 대만의 작가들이 마음에 걸려 견딜 수 없다. 서로 짊어지고 있는 그런 그림자가, 우리 사이에 ‘육친’이라는 감각을 배양해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번 대지진과 원전사고를 경험하고 일본의 우리는 머리가 아파질 만큼 여러가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핵의 시대에 관해, 과학기술에 관해, 근대라는 것에 관해,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에 관해, 그 이후 급속하게 발전한 대량생산과 자본주의에 관해, 과거의 제국주의에 관해, 인간의 욕망에 관해, 인간이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에 관해,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의 행복에 관해.

동아시아의 우리에게 있어 ‘근대’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들이닥쳐온 것이었다. 2차대전 후에도 마찬가지로 초강대국의 냉전구조와 핵의 위협에 휩싸였다. 예전부터 동아시아에서는 교류가 끊이지 않았고,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좋든 싫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웃끼리는 사이가 나쁘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미 나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각국의 작품을 읽는 것이 얼마나 서로의 마음을 가깝게 이을 수 있는지를. 정치로는 결코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이 직접 전해진다. 그리고 특히 동아시아의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거대한 세계사 안에서 농락당해왔지만 앞으로는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공통의 지반을 발굴해가고, 그 가치를 인식해야 하며, 또다시 문학의 고독을 맛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번역 | 정신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