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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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79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진리 대설』『성에꽃 눈부처』『김포 운호가든집에서』『밤 미시령』등이 있음. sipyung2000@hanmail.net

 

 

 

물구나무서기 하는 나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즐긴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시작하였다

공중으로 번쩍 다리를 쳐들고

뒤에서 보고 있는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벽에 발꿈치도 대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웃었다 거꾸로 선 아버지라고

아버지는 책상에서 뭔가를 하루 종일 쓴다

 

깜박 잊고 엇차, 하는 소리 들려 돌아보면 아버지는

영락없이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하루에 몇번씩

물구나무서기를 잊지 않으려고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최근엔 물구나무서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식구들은 물구나무서기 하는 아버지에 관심이 없다

조만간 우리 집은 해체될지 모른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무언가를 쉬지 않고 쓰는 집

아버지가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집

아버지는 대체 뭘 저렇게 써놓는 걸까

아버지는 저렇게 물구나무서기만 하다 돌아가실 건가

 

그런데 아버지가 우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다

 

 

 

비명

 

 

나는 유리창을 향해 서 있었다 열대야

같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은

자백을 받는 것 같았다 아악, 아악 여자는

할딱인다 그외 어떤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몸속으로 그의 송장이

들어가는가 한 남자가 어딘가 숨어 있다

지문과 번호가 등록된 정체불명의 남자

숨을 멈춘 채 가면을 쓰고 있는 나는

돌처럼 비명을 쳐다본다 강 건너편

어두워졌다 밝아지지 않는 불빛의 축축하고

검고 단단한 공간 속으로 여자의 피륙은

해지고 있었다 유리창은 어둠 속에서 반짝

이고, 비명은 어딘가로 소멸을 시작했다

너무나 깊고 밝은 어느 무명뼈인가

둔탁한 마찰이 계속 가해지고 있을 때

심장은 바닥으로 철컥, 철컥 내려앉았다

남자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유리창을 태양처럼 쳐다보았다

엷은 신음 뒤에 여명이 오고 그 여명 뒤에

찢어진 새벽 물이 도착하고 있었다

고단한 하룻밤의 육체가 나를 뚫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