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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윤재민 尹在敏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4. 1985년생.
shoobidoo@daum.net
힙스터의 정치학: 그녀에게 쇼파르를 허(許)하라
김사과론
OCCUPY THE REAL
미국 청년들이 주도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라는 묘한 이름의 시위야말로 2011년 서구세계에서 벌어진 가장 주목해야 하는 사건임에 분명하다. 청년들은 점령 장소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정치적 구호와 카니발적 일탈이 기괴하게 뒤섞인 이 새로운 형태의 시위는 어느 철학자의 적확한 언급대로 싸구려(cheap)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하는 불안한 시위임에 틀림없다. 노심초사했는지 그는 덧붙여 말한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인 것이다.”1)
이러한 언급은 이번 월가 시위의 중심에 있는 힙스터(hipster)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쿨’한 흑인문화를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영위하는 백인’을 뜻하는 말이었던 힙스터는 이런저런 문화적 어원변화를 겪다 2000년대 들어 ‘스키니진, 무기어 자전거, 유럽식 담배, 미국식 장식품(예를 들어 나이키 마크), 질 좋은 차와 커피, 인디음악, 독립영화 등을 즐기며 아는 척하기, 아닌 척하기, 주류에서 벗어난 대안문화, 냉소, 실없음, 쿨함을 추종하는’2) 실없고 나약한 비주류 중산층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정착해 오늘에 이른다. 이에 더해 2000년대의 힙스터들은 주류에 저항하는 급진적 정치의식을 지니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을 현실세계의 정체(政體)와 연관시키는 데 무능력하거나 무기력하며 이를 문화적 원한감정(ressentiment) 따위의 상상적 소비로 대체한다. 요컨대 이들은 자신을 온전한 주체로 아로새길 유의미한 상징계적 맥락을 잃어버린 채 상상적으로 주어진 기호만 소비하며 의미의 의미화 자체를 거부하는, 최신판 포스트휴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발 딛고 사는 세계란 과연 어디일까. 아무것도 의미화되지 않고 모든 것이 부유하는, 2000년대 힙스터들의 이 기괴한 세계야말로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슬라보예 지젝이 모든 미국인들을 초대했던 바로 그곳, 실재계의 사막이다.3) 세상의 모든 상징과 상상이 이루어지는 불가해한 토대이자 상징계의 불가해한 구멍으로서의 바로 그 실재계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2000년대의 힙스터들은 앞 세대가 아로새긴 역사의 음각에 굴러떨어진 채 실재계의 사막을 겉도는 유목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이들이 일으킨 월가 시위는,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소거당한 채 실재계로 추방당한 이들이 이 실재계의 궁극적인 소유를 선언하는, 새로운 시대의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들은 상상과 상징이 누비는 공간이자 이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실재’가 자신들의 유일무이한 무기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의 힙스터들은 이렇게 선언해야 한다. 힙스터들이여, 당신들이 점령하고자 하는 것은 케케묵은 월스트리트 따위가 아니다. 드디어 구질구질한 실재계에서의 십년만기 주택담보대출 파기를 선언할 때가 도래했다. “실재계를 점령하라(Occupy the real)!”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이 역동적이며 윤택한 기적의 땅, 서울에도 실재계를 겉도는 힙스터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때론 역사의식이 부재한 시대의 쓰레기로, 무한한 가능성이 숨겨진 방황하는 청춘으로도 불리지만, 아무런 몫 없이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상상적으로 정치와 문화를 소비하는, 실재계의 몫 없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2000년대 뉴욕의 힙스터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
기괴한 정념과 폭력에 끊임없이 휘말리며 희망도 목적도 없는 삶의 악무한을 반복하는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을 탐구하는 것은 2000년대 한국의 힙스터를 탐구하는 데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사과는 자신의 소설에서 외롭고 고립된 서울의 힙스터들을 호명해왔다. 이 글은 그 외로운 호명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 될 것이다.
배설
김사과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열증적 히스테리를 마구잡이로 세상에 배설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기인하는 상상적 환청을 통하거나(「영이」), 고추장의 매운 맛에 집착하며 친구를 괴롭히거나(「과학자」), 열등감에 사로잡혀 친구를 죽이거나(『미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불안들은 아무런 내외적 정합성 없이 갑작스럽게 어느순간 배설된다.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깜짝 놀란 이나는 할머니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나의 손을 깨물었고 또다시 깜짝 놀란 이나가 두손으로 할머니의 목을 움켜잡았다. 가느다란 열개의 손가락에 힘을 주자 할머니의 얼굴 빛깔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이나는 평소 자신의 팔이 발레리나의 팔같이 길고 미끈하다고, 그중에서도 프리마돈나의 팔로서 젤로 늘씬하고 우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런 팔로 할머니의 목을 조르고 있으니 발레리나가 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표정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져가고, 이나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4)
길을 지나가다 우발적으로 차에 깔린(이 자체도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할머니를 발견한 이나는 우발적으로 할머니를 살해한다. 이나가 할머니를 죽인 이유 따윈 소설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나 자신조차 자기가 왜 할머니를 죽였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정합적 판단능력이 결여된 금치산자처럼 말이다. 더욱 난감한 사실은 할머니를 죽인 이후의 일이다. 이나는 마치 할머니가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할머니와 대화한다.
이제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계속해서 할머니가 나를 쫓아다닐 테니까요. 도망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래서 나는 성숙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인정하기로 했어요. (…) 매일같이 하얀 설탕가루 매연을 내뿜는 공장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마트에서는 유기농 인증을 받은 야채로 만든 샐러드를 팔고 있어요. 한팩에 사천팔백원밖에 안해요. 어때요, 배가 고프세요? 사다드릴까요?5)
자신이 살해한 할머니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가장하며 자신이 벌인 행위를 끝까지 회피하려고 하는 이나의 행위와 사고방식은 사회구조 속에 갇힌 자신(혹은 동세대)에 대한 자조 섞인 고백(“그러나 내 삶은 여전히 뿌옇게 모호한 채로 남아 있겠죠, 저 빼곡한 창문들 중에 내 것이 될 창문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저것들 중 어느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저것들과 함께 늙어갈 거예요.”)6)으로 마무리된다.
자기가 벌인 일련의 행위를 방기하는 것은 배설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숭고한 인간성과 상관없이 밖으로 배출되는 더러운 똥을 마주 대하듯, 이나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끊임없이 회피할 뿐 아니라 이를 구조적 문제로 돌리려 애쓴다. 배설적 인간이 행하는 반달리즘적 구조비판은 결코 공동체에 유의미한 사회비판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의 구조에 아무도 만질 수 없는 똥을 던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비판은 발화자가 일정부분(사실 엄청난) 책임을 갖는 한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00년대 힙스터들의 사회비판 또한 마찬가지다. 극에 달한 소비문화 속에서 정치적 급진성을 추구하는 힙스터들의 책임감 없는(행위와 비판이 모순된) 몰지각과 뻔뻔함은 이미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내 생각에 힙스터적 성격이 경멸받는 이유는 오늘날 힙스터가 이미 주류 사람들의 하위문화를 표방하기 때문이다. 힙스터는 사회적 지위를 낮추거나 탈퇴하는 그룹들—배를 곯고 있는 예술가나 대학원생, 네오 보헤미안이나 채식주의자, 자전거족이나 스케이트 펑크, 노동계급이 될 사람들이나 탈인종주의적인 개인—과 겹치며, 실제로는 저항적인 하위문화와 그 반대편에 있는 권력 양쪽 모두에 맞춰 자신을 조정하며 둘 사이를 부단히 오간다.7)
이나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진 않지만, 소비문화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않은 채 정치적 급진성을 문화-기호로 표출하는 힙스터 문화에도 배설은 상존한다.
폴라로이드의 원초적인 프레임으로 피사체를 포착하는 유르겐 텔러(J. Teller)나 의도적으로 날것의 싸운드를 레코딩한 초기 페이브먼트(Pavement)의 음악은 그 자체로 나름의 예술적 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이들에 대한 힙스터들의 사랑은 예술적 평가와 상관없이 힙스터 고유의 성격을 구현한다. 완고한 자존심으로 디지털문화와 하이 파이싸운드를 거부하는 유르겐 텔러와 페이브먼트의 태도는 힙스터들이 이 조야하고 허술한 작품들을 사랑하는 이유다.8) 힙스터들은 태도를 표명하기보단 태도를 취향한다. 이는 힙스터들이 조롱받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주류에 반발하는 문화를 향유하면서 온갖 저항과 반항의 제스처를 취하니 말이다.
조야한 것들을 취향하고 이를 향유하는 힙스터들의 태도에는 앞서 말한 배설적 행태, 즉 자신이 저지른 일을 책임지지 않으면서 이를 무책임하게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왜곡된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은 주류문화에 반발하는 태도에 따른 부산물(사실 이러한 부산물들은 대부분 그들에 의해 침소봉대된 경우가 다반사다)을 옹호하며 이에 따르는 태도와 부산물들을 (소비로서) 자기화하려 애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취향과 태도를 먹기(소비)만 할 뿐, 말하려고 하지 않는 ‘쿨’한 태도이다. 마치 자신의 입이 오직 먹는 기능만을 위해 있는 것인 양 말이다. 자신들이 향유하는 취향과 태도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힙스터 문화에 내재한 ‘배설’의 행태를 추동하는 근본 메커니즘이다.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T. More)가 창조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어원에서 드러나듯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인 동시에 모든 인간적 맥락이 소거된 불편한 세계로서, 분명히 추구해야 마땅하지만 결코 완전히 맞닿을 수 없는, 인류가 상상해낸 가장 기괴한 세계 중 하나다.
토머스 모어는 법·종교·군사적으로 모든 것이 완벽한 유토피아에 비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당대의 영국을 소설에서 우회적으로 비판하지만, 실상 이러한 비판은 당대 영국체제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임을 주목하자.
라파엘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그 나라의 법률이나 관습 중에 불합리한 것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군사전략, 종교, 예배, 형식도 그렇지만 특히, 유토피아의 사회 전체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 즉 돈을 제거한 공공생활은 매우 불합리해 보였다. 돈을 사용하지 않는 공유제도는 본질적으로 귀족정치의 최후를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나라에서나 진정한 영광으로 여겨지는 모든 권위와 고귀함, 그리고 존엄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9)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을 그리는 동시에 이상향에 대한 비현실적인 위화감을 토로하다 종국에는 현 체제를 긍정하는 것으로 수렴하는 토머스 모어의 모순적 태도를 보라.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급진적 태도를 보이면서 이에 대한 현실적 난망함을 배설하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체제 순응적 나르시시스트로 퇴행하는 힙스터들의 면모와 유사하지 않은가. 어쩌면 토머스 모어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힙스터일지 모른다.
다시 김사과 소설로 돌아가보자. 『풀이 눕는다』의 화자 ‘나’는 부족한 게 없는 가정형편 덕분에 서울이라는 유토피아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이를 혐오하는, 구제불능의 힙스터이다.
발음하기도 힘든 복잡한 이름의 음식들이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 부모님의 얼굴에는 언뜻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나 역시 그 행복을 느꼈지만 그것은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는 행복이었다. (…) 그녀 덕분에 나는 아무나 살 수 없는 곳에 살면서 아무나 입을 수 없는 티셔츠를 입고 매일 아침 칼슘과 마그네슘이 제거된 부드러운 물로 머리를 감을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10)
모든 것이 갖춰진 완벽한 세계, 아무런 의심 없이 현실을 유토피아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가족들 속에서, ‘나’는 마치 유토피아에 떨어진 토머스 모어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유토피아의 모든 물질적·정신적 번영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를 극도로 혐오한다. 자신이 향유하는 것에 대한 혐오의 제스처는 ‘나’의 행동을 설명할 유일한 방도일 것이다. 그녀는 문학상 시상식에서, 애인 ‘풀’의 공모전 갤러리에서, 친구의 파티에서 끊임없이 향유하며 혐오를 배설한다. ‘나’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나 언행을 책임지는 법이 없다. 소설의 가장 큰 줄기인 ‘나’와 풀의 연애에서조차 ‘나’의 행동과 언행은 도저히 종잡을 길이 없다. 주류 밖으로 비켜선 풀의 아웃사이더적 면모에 끌려 연애를 시작한 ‘나’는 풀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나’는 “돈은 이렇게 버는 거야. 그리고 쉽게 써버리는 거지. 그리고 다시 쉽게 버는 거야. 그렇게 사는 거야. 그런 게 삶이야”11)라고 풀에게 말하다가도 금방 “너는 절대로 파괴당하면 안돼. 너는 포기하면 안돼. 짓밟히더라도, 살아남아야 해.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이유야”12)라고 돌변하여 풀을 채근한다.
어째서 ‘나’는 모든 것이 갖춰진 유토피아 안에서, 정확히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유토피아를 이토록 혐오할 수 있는 것일까. 이는 바로 ‘나’의 현실인식의 문제, 즉 세계를 완전한 이상향으로 인식하는 ‘나’의 유토피아적 세계인식 자체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역사상 최초의 힙스터,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논하며 느낀 불편함을 주목해야 한다. 토머스 모어에게 유토피아란, 추구해야 마땅한 것이긴 하나 결코 그 자체가 되어선 안되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일 뿐이었다. 최초의 힙스터 모어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이에 적당한 거리를 취하는 반면에, 현재의 힙스터 ‘나’는 현실 그 자체를 유토피아로 인식한다. ‘나’에겐 유토피아와 현실 간의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나’뿐 아니라(실상 김사과 소설의 모든 화자는 ‘나’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김사과 소설 속 모든 힙스터적 인물들의 공통적인 현실인식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현실과 유토피아를 구분하지 못함에 따라, 현실에 연루된 자신의 문제를 대안 없는 절망적 배설행위로 표출한다. 어렴풋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만은 인식하면서 말이다.
히스테리
힙스터가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먹는 입’을 고수하고 이에 따른 배설행위를 지속하는 것은 실상 그들의 ‘말 자체’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소비행위 자체를 혐오한다. 이러한 히스테리적 행위-인식은 오늘날의 공정무역, 착한소비 같은 독특한 방식의 소비-마케팅문화를 힙스터가 사랑하는 원인일 것이다. 소비행위를 통해 자신의 윤리의식마저 고취시킬 수 있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이 얄팍한 소비 트렌드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모든 것이 갖춰진 세계에서 나름의 변혁을 좇고자 하는 힙스터의 굴절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힙스터문화를 창조해나가는 예술가와 트렌드세터를 보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적 완성이나 자기수행이라기보단 히스테리적 배설행위로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히스테리적 배설이란, 소비(향유)와 윤리 혹은 급진적 변혁 둘 다를 포기하지 않는 한에서 나타나는, 오늘날 도처에서 확인 가능한 현상이다. 이는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의 기원이나 생산관계 자체를 지우려는 몸짓. 김사과의 첫번째 장편 『미나』의 등장인물 수정은 이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또는 가장 유치한 방식으로) 체현하는 인물일 것이다. 김사과 소설의 여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수정은 남부러울 게 없는 유토피아 속의 소녀이자 바로 ‘그 사실 자체 때문에’ 히스테리를 일삼는 힙스터적 인물이다. 수정은 자유분방한 미나에게 끌려 미나의 모든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추종하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 수정은 미나를 통해 폴리 진 하비나 리즈 페어 혹은 피오나 애플이나 비요크를 잘 알게 되고13) 이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취향이 미나에게서 온 것이라는 정신착란에 괴로워하다 황당하게도 미나를 살해하고 만다.
사실 『미나』는 빈약한 내용에 오로지 힙스터적 원한감정만으로 가득한 다소 실망스러운 작품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미나』 는 김사과의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순도 높은 힙스터적 정념을 표출한다. 통상의 기준에서 볼 때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구조지만, 수정이 미나를 살해하는 동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충동적인 살해야말로 자신이 향유하는 이런저런 문화-콘텐츠의 생산양식 자체를 은폐하려는 힙스터의 히스테리적 몸짓 그 자체를 나타낸다. 기원이나 생산관계만 은폐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유토피아의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그들은 마치 빅토리아시대의 유미주의자인 양 행동하기 위해 자신들이 향유하는 문화의 기원 자체를 소거하려 애쓴다. 이는 앞서 말한 공정무역이나 착한소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아니면 문화와 공모한 모든 역사성과 정치경제학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시대 포스트휴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수정의 미나 살해는 후자의 가장 극단적인 배설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의 기원이나 생산관계의 문제를 정직하게 응시하며 이를 바꿔보려는 나름의 시도. 로컬음악씬의 자립운동14)이 대표적일 것이다. 대부분의 힙스터들은 자신들의 배설적 히스테리의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단지 이를 그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뿐. 물론 이는 로컬음악씬의 활동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행하는 배설적 행위를 어떻게든 새로운 기원이나 생산관계로 전환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활동이 보통의 힙스터와는 다른 방향성을 갖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들 또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한에서, 다시 곧잘 히스테리로 빠지곤 하지만 말이다.
쇼파르(Shofar)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배설로 점철된 김사과 소설에서 단 하나 명확한 것은 소설 속 배경음악처럼 언급되는 음악이다. 『풀이 눕는다』에서 주석으로 깔리는 음악은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의 모든 배설적 히스테리를 달래려는 듯 넘쳐흐른다. 굳이 주석으로뿐 아니라, 쏘닉 유스와 비요크, 조이 디비전 등의 다양한 음악이 내내 소설 속에서 해석되거나 묘사조차 되지 않은 채 향유되고 소비된다. 대책 없는 힙스터의 배설적 소비행태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힙스터는 음악에 집착한다. 특히 주류문화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음악에 대한 힙스터의 열광은 분명 유별난 구석이 있다.
우리는 밥 말리의 노래에 맞춰 나른하게 흔들렸다. 그건 정말 근사했다. 문득 우리가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우리는 춤추고 있었다. 풀의 그림도 춤추고 있었다. 싱크대와 침대와 냉장고와, 그리고 밥 말리도 모두 함께 춤추고 있었다. 난 고개를 숙여 그에게 키스했다. 그건 가장 긴 키스였다. 그리고 절정.15)
언제나 불안해하며 좌충우돌하는 ‘나’가 유일하게 안락과 안정을 찾는 때는 음악을 틀어놓고 풀과 섹스를 하는 순간뿐이다. 섹스 하나만으로, 음악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모든 것이 전부 갖춰지는 순간에 ‘나’는 모든 불안과 배설적 행위를 그친다.
그렇다면 배설적 행위와 음악의 관계란 정확히 무엇인가.
내게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계속 쓰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겠다. 다 쓴 다음에 나는 울겠다. 왜냐하면 팔이 아프니까. 다 쓴 다음에는 나는 팔이 아프겠다. 왜냐하면 울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고 있으니까.16)
영이는 목소리에 사로잡혀 쓰고, 아프고, 말하고, 죽인다. 이는 앞서 살펴본 힙스터의 경우와 같은, 배설적 행태에 대한 언술이다. 그렇다면 영이를 배설적 행위로 이끄는 ‘미지의 목소리’란 무엇일까.
영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나’(들), 미나와 수정, 이나 등등, 김사과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떤 미지의 목소리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환청이든 음악이든 말이다. 이 ‘목소리들’은 그녀들의 불안을 치유하기도 하고 때론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면서 이들의 행위를 추동한다.
근면한 업무능력으로 상사의 총애를 받는 회사원 ‘한’은 보통사람과 다른, 약간은 삐뚤어진 언행으로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성실함과 열등감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지닌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러던 어느날, 한은 부지불식간에 온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시시한 것이었나를 알게 됨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무런 여과 없이 체험하게 된다. 이후 한은 자신의 인생과 부조리에 대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근본적인 해결책을 감행한다.
마침내 한이 입을 열었다. 열린 한의 입에서 무언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소리조차 아니었다. 그건 마치 지진과도 같았다. 한이 혓바닥을 움직일 때마다 그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17)
한의 ‘말도 소리도 아닌’ 발화의 정체는 김사과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이 연루된, 미지의 목소리와 그에 따른 히스테리적 행동의 관계를 통해서만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한의 행태는 불안을 소거하는 방식에서 다른 김사과 소설의 인물들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미나, 영이, 이나, 나(들)가 불안을 소거하기 위해 힙스터 취향의 인디음악 같은 목소리들(음악)에 의지한다면, 한은 모든 불안을 단순히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해버린다. 다소 황당한 이 신(神)적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서사적 도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전자의 인물들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유토피아의 악무한 속에서 끊임없는 히스테리적 배설행위로 불안 자체를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에 비해, 후자인 한의 경우 이 모든 불안의 악무한을 단숨에 끝내 세상의 모든 규칙을 정지시키려는 카이로스적 제스처를 취한다. 이러한 한의 행위는 영이를 불안에 떨게 하는 불가해한 모든 ‘미지의 목소리’를 종식시키는 궁극적 제스처이자 영이가 소설 속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의 궁극적 형태이기도 하다. 한은 힙스터의 배설적 행태의 악무한을 추동하는 모든 미지의 목소리의 무화(無化)를 선언함으로써 다시는 그것이 울려퍼지지 못하도록 온세상을 단 하나의 목소리로 뒤덮으려는 것이다. 마치 유대교 의식에서 모든 이교의 신들을 잠재우기 위한 ‘단 하나의 목소리’, 쇼파르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단 하나의 목소리로 온세상을 뒤덮는다는 한의 시도는 터무니없다. 그는 다른 힙스터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
한의 ‘너무나 많은 것을 원하는’ 열망과 그에 따른 시도는 자본주의 유토피아 속 향락과 근본적인 세계변혁을 동시에 바라는 힙스터의 욕망의 극적 발화형태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욕망이나 열망을 교묘히 지연시키며 체제를 유지하는 오늘날의 부르주아 자본주의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힙스터처럼 노예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길항하는 광기어린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의미한 사회적 몫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힙스터에게 남은 선택지는 지금처럼 아무런 사회적 몫도 없이 배설이나 하는 루저로 살아가거나, 스스로 자신의 사회적 몫을 쟁취하는 것뿐이다. 물론 후자의 선택은 한의 경우처럼 간단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몫이 없는 자들이 그것을 얻기란 기존의 몫을 가진 자들과의 격렬한 인정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월스트리트로 돌아가보자. 힙스터는 언제나 세상의 모든 것을 원해왔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의 조롱을 받아왔다. 이전 세대의 지적 절충주의자들이 자신의 진짜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선취한 자기위안과 멜랑꼴리로 자신의 불온함을 달래는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대의 힙스터는 욕망에 대한 아무런 타협 없이 자신의 토대인 황량한 실재계 자체를 점령하는 선택을 감행했다. 힙스터가 그간 자신의 행위와 당위를 그 어떤 식으로도 의미화하지 못한 실재계의 주민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자. 이제 그들은 사회적 몫과 의미 자체를 휘발시키는 실재계라는 누빔점 그 자체로 ‘세계의 상징’과 맞선다. 이러한 힙스터의 투쟁은 실재 자체가 도처에 범람하는 이 시대, 실재계의 주민으로 전락한 모든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이 서 있는 실재계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선언하는, 새로운 시대의 ‘투쟁영역의 확장’ 선언이다. 힙스터는 그동안 그들을 옭아맸던 실재계의 무의미함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상징체계를 실재계의 영역으로 초대하고 있다. 실재계의 영역 안에서 그간의 모든 상징체계는 부지불식간에 정지하며 그간의 모든 의미는 안착하지 못한 채 기괴하게 부유한다. 그들은 실재의 심연이라는, 그들의 ‘삶 자체’를 세계에 현현하여 부조리한 상징세계의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과연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이 투쟁의 진정한 루저는 누구로 판명날 것인가.
이는 바다 건너 뉴욕만의 문제는 아니다. 김사과의 소설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실재계의 주민인 힙스터는 이 땅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그녀들은 아직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듯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자신의 궁극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불안을 잠시나마 달래줄 미지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궁극적인 욕망을 좌절시키는 ‘만물의 이치’의 중지 선언, 실재계란 이름의 쇼파르 소리임이 분명하다. 그녀들은 이미 쇼파르를 집어든 지 오래며, 이제 모든 것은 그녀들의 선택에 달렸다. 그녀들이 쇼파르를 입에 대는 순간, 그간의 모든 복수(複數)의 불안들은 사라지고 오직 단 하나의 명확한 일자(一者)-그녀의 목소리만이 세상에 울려퍼지리라. 그녀의 쇼파르 소리는 온세상을 뒤덮어 이 세상의 모든 몫 없는 자들을 호명할지니. 그러니 이제 세상이여, 그녀에게 쇼파르를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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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젝 뉴욕연설 전문) 진정 사유재산을 위협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이혼했다」, 『프레시안』(2011년 10월 18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018111141).
2)『위키피디아』 참조.
3)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창비웹진』 4호(2001년 1월, http://www.changbi.com/webzine/content.asp?pID=53). 이 글에서 사용하는 ‘실재계’는 라캉의 정신분석 용어인 ‘the real’을 번역한 것이다. 최근 들어 ‘the real’에 대한 번역어로 ‘실재계’보다 ‘실재’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이는 추세지만, 이 글에선 ‘the real’의 공간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실재계’란 용어를 사용한다.
4) 김사과 「이나의 좁고 긴 방」, 『02(영이)』, 창비 2010, 73면.
5) 같은 책 89면.
6) 같은 책 91면.
7) n+1 엮음 『힙스터에 주의하라』, 최세희 옮김, 마티 2011, 34~35면.
8) 물론 힙스터들의 취향과 문화는 너무나 방대하고 다양하여 단순히 ‘조야하고 허술한 예술’에 대한 열광으로 일반화할 순 없다. 다만 힙스터들의 이러한 취향이 저항과 반항을 소비하는 배설의 제스처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9)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원창엽 옮김, 홍신문화사 2006, 181면.
10) 『풀이 눕는다』, 문학동네 2009, 19~20면.
11) 같은 책 131면.
12) 같은 책 147면.
13) 『미나』, 창비 2008, 268면.
14) 로컬씬에서의 자립음악운동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최근 한국에서도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주목할 만한 단체가 발족했다(www.jaripmusic.org 참조).
15) 『풀이 눕는다』, 문학동네 2009, 43~44면.
16) 「영이」, 『02(영이)』, 창비 2011, 23면.
17) 「정오의 산책」, 『02(영이)』, 창비 2011, 185면.
평론 | 심사평
올해 평론부문 응모작은 작년보다 두배 이상 늘어난 24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읽는이를 즐겁게 긴장시키는 수준급의 글들이 적지 않았다. 최종심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한 작품은 다음 4편이다.
「소설에 대한 소설에 대하여: 최제훈의 『일곱개의 고양이 눈』」은 장르소설의 문법을 빌린 대상 작품을 메타소설의 관점에서 접근한 글이다. 안정된 문장력에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도 수준급이며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논지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모리스 블랑쇼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엄밀한 논증 없이 비약하는 것 또한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림과 조각으로 승화한 소설: 체온을 지닌, 소설 언어의 음악에 가까운 울림(신경숙의 『외딴 방』과 『엄마를 부탁해』를 중심으로)」는 다소 장황한 제목이 보여주듯이 할 말은 무척 많지만 미처 정돈이 덜 된 글이다. 핵심적인 논제와 연관된 기본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엄밀하게 구사하는 것은 이 글의 뚜렷한 장점이다. 그러나 기존의 평가를 가감없이 추인한 상태에서 사후적으로 맥락을 추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서술방식이 문제다. 견실한 학구에 어울리는 비평적 감식안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궁으로 가는 길: 이제니 『아마도 아프리카』」는 유려한 에세이 비평이다. 이제니의 「모퉁이를 돌다」에 대한 섬세한 해석에서 출발하여 시의 존재론, 비평의 본질론으로 한발 한발 착실하게 전진한다. 표면적 전언을 따라가는 데 급급하지 않고 시가 탄생하고 소멸하는 순간에 대한 내밀한 공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을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문장도 갖추고 있다. 과도한 신화적 비유를 자제하고, 기성 평론가의 것이 아닌 자기만의 개성적인 화법으로 밀고나갔더라면 더 좋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힙스터의 정치학: 그녀에게 쇼파르를 허하라」는 발랄한 문화비평이다. 이 글은 김사과 소설에 나타난 독특한 인물형을 ‘힙스터’로 호명하고, 정치적 급진성을 문화적 소비로 대체하는 이 최신판 포스트휴먼의 출현이 갖는 문제적 맥락과 문학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작품분석이 소략하고 논리적 비약이 더러 있지만, ‘88만원 세대’와 ‘강남좌파’ 사이의 빈 공간을 포착하는 예민한 시대감각과 이를 자기 식으로 개념화하려는 도전적인 패기는 이 글만의 고유한 미덕이다.
마지막 두편의 글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없는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심사위원들은 「힙스터의 정치학」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 글이 보여준 발랄한 패기와 가능성이 대산대학문학상의 취지에 좀더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한국평단의 개성적인 목소리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최원식 진정석
평론 | 당선소감
지루하고 무기력한, 실패로 점철된 한해였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도중에 날아든 당선소식은 이 철저한 실패를 결정지은 마지막 화룡정점이었습니다. 제게 찾아온 이 완전한 실패를 철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저는 새로운 한해를 감내할 자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고마운 분들이 떠오릅니다. 어머니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당신들이 대체 왜 저를 낳아 사랑을 베풀고 그간의 마음고생을 기꺼이 인내해온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에 대해 의문을 품은 채로 오롯이 제 길을 걸어나가겠습니다. 불안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나와의 연루됨을 서슴없이 선택한 권해림양, 사랑합니다. 언제나처럼 뚜벅뚜벅 힘차게 같이 견뎌내고 싶습니다. 더불어 항상 말 안 듣는 저를 귀여워해주시는 김은희 어머니와 여울누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하나뿐인 동생 재경과 수십명의 일가 친인척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합니다. 미래를 저당잡힌 채 뛰어난 자질과 넘치는 재능을 썩히고 있는 어돈, 그간의 마음고생으로 잘생긴 얼굴이 폭삭 삭아버린 대현, 어떤 선택이든 나는 당신들을 응원합니다. 언제나 제 앞에 넘어서야 할 벽으로 서 계시는 동국대 국문과 선생님들, 더불어 부족한 글을 어여삐 봐주신 최원식 선생님, 진정석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정진하겠습니다. 어디선가 하나같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기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지나갑니다. 우리들은 언젠간 반드시 이뤄낼 것입니다. 답답하리만치 가고자 하는 길만을 따라 걷는 후배 창훈, 더불어 우스꽝스러울 만치 진지하여 항상 나를 웃기고 짜증나게 하는 후배 재영, 종관. 후배인데도 불구하고 저만치 앞서 있는 두호. 변치 말고 발전하길. 나완 확연히 다르지만 그 때문에 항상 생각나고 찾게 되는 민기형, 그리고 잘 모르는 사이지만 수상소감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하는 성준씨. 가끔 만나 두런두런 재미난 얘기 나눕시다. 지금껏 제 말과 행동에 상처입은 이들도 생각납니다. 제가 이제껏 벼려온 말과 사유는 결국 당신들의 생채기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미안함을 전합니다.
윤재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