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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분노와 경이

오늘의 장편소설과 새로운 경이

 

 

허윤진 許允

문학평론가. 평론집 『5시 57분』이 있음. hdthoreau@hanmail.net

 

 

놀라운 이야기

 

이야기 속의 가상세계를 압도하는 충격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연일 벌어지는 나날이다. 9·11테러 이후에 현실이 가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은 것이 되었다. 현실은 바야흐로 우리가 가상세계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상상력을 역으로 모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이라고 믿기에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흔히 ‘거짓말 같다’ ‘소설 같다’ ‘영화 같다’ 등의 비유적 표현을 쓰곤 한다. ‘소설 같다’거나 ‘소설 쓰고 있네’ 같은 표현은 어떤 상황이 낯설다고 말하는 데 가장 적합한 관용어구다. 과연 이 관용어구는 놀라움의 표현으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갈망은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 충동과 발화본능은 반드시 문자를 중심으로만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체인 서사 자체는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사라지지 않겠지만, 서사를 표현할 수 있는 매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문학이 오래 누려왔던 서사의 왕권은 바야흐로 인접 장르들로 활발하게 이양 중이다. 첨단 기술이 흑백의 활자가 아니라 총천연색의 입체 영상으로 서사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시대에, 권력을 자식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이 쓸쓸한 서사의 왕은 누구와 더불어 어디로 갈 것인가? 남은 것은 아무런 독자도 청중도 갖지 못한 이야기꾼이 늙은 왕처럼 폭풍우 속에서 읊조릴 광기어린 독백뿐인가?

현대소설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고유명사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해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의 시대에는 새로움이라는 것이 전통에 비해 부수적인 가치였고,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통을 잘 반복하는 일이었다. 예술작품에서 새로움이라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게 된 것은 컨베이어벨트 시대 이후일 것이다.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신제품을 계속해서 소비해주는 층이 있어야 산업시설이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창작품을 계속해서 소비해주는 층이 있어야 예술제도가 유지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예술의 혁명군으로서 지녔던 전위의 정신에 반드시 강박증적인 생산-소비의 이분법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전위가 예술의 신상품을 홍보하는 가장 좋은 명찰과 완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완벽한 고유명사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는 새로운 서사는 사실 할머니의 옷장에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결혼식 문화에서 신부는 ‘옛것’으로도 자신을 치장해야 한다. 예컨대 어머니의 진주 목걸이라든가 할머니의 레이스 장갑 같은 것. 최근 각광받는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때로는 50년대로, 60년대로, 70년대로 달려가는 것은 ‘옛것’의 힘과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 「전통과 개인적 재능」(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1921)에서 T.S. 엘리엇은 예술가(시인)가 처해 있는 당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가 영원성에 가닿고 전통으로 남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감각과 맥락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는 전통 없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당대에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는 이곳에서 이미 살았던 죽은 이들이다.

우리가 서사 하면 떠올리게 되는 주요 장르인 소설이 서사의 왕국에서 현재의 지분을 차지한 것은 오랜 일이 아니다. 소설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내면과 작가의 문체라는 깊고 내밀한 심연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시에 주인공이 위치하고 있는 세계의 복잡성을 잊었다. 프랑스의 누보로망(nouveau roman)이 우리에게 남긴 큰 교훈 중 하나는 내면의 미시적 세계와 그것을 추적하는 미시적 문체는 찬란하리만치 아름답지만, 이때 한 인간이 지니는 어쩔 수 없는 지평의 한계로 말미암아 소설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좁은 길만 달리게 된다는 점이다.

쇠락해가는 듯한 서사의 왕국에서 우리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떠올린다. 그것이 가장 영화로웠던 한때는 문학이 환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시절일 것이다. 여기에서 환상은 오늘날 하나의 장르로 규정되는 판타지(fantasy)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로 귀화한 동구권 출신의 문학비평가이자 이론가 츠베땅 또도로프(T. Todorov)의 관점을 빌리자면 환상은 어떤 사건이 현실의 합리적인 법칙으로 다 설명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즉 자연의 법칙밖에 모르는 사람이 초자연적 양상을 띤 사건에 직면해서 체험하는 모종의 망설임인 것이다.1) 이때 환상에 반응하는 방식에 따라 그는 에드거 앨런 포우(E. A. Poe)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어떤 기괴함을 느낄 수도 있고, 독일의 메르헨(Märchen, 동화)을 읽을 때처럼 어떤 경이를 느낄 수도 있다.

아랍 문화권에서 구전되다가 필사된 이야기의 판본을 프랑스 학자 앙뚜안 갈랑(A. Galland)이 번역한 『천일야화』라든가, 청나라 시대의 서생 포송령(蒲松齡)이 창작한 괴기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 일본의 국학자 우에다 아끼나리(上田秋成)가 중국의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아 창작한 『우게쯔 이야기』(雨月物語) 등을 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구적 가능세계란 정말 다양한 경로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예컨대 자연에 깃든 정령을 믿는 중국의 도교적인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국화꽃 남매」 같은 작품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국화꽃의 정령이 술에 취하면 한줄기 국화로 변해버린다. 『우게쯔 이야기』에 수록된 「기비쯔의 가마솥 점」이나 「뱀 여인의 음욕」 등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 여인들은 때로는 원령(怨靈)의 모습으로, 때로는 뱀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남성 인물과 독자들을 아연실색게 한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독자의 눈에 『요재지이』나 『우게쯔 이야기』 『금오신화』 같은 작품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이라는 가능세계가 현실과 ‘닮아서’가 아니라 ‘달라서’ 매료되곤 한다. 캐나다의 문학비평가 노스럽 프라이(N. Frye)가 문학의 장르를 구분한 방식에 따르면, 주인공과 독자가 맺는 관계성에 따라 서사문학의 양식을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는데, 현대의 사실주의적인 소설은 대개 주인공과 독자가 거의 대등한 지위를 갖고 있으며 독자가 주인공과 심리적으로 동화하게 되는 양식(하위모방, low mimetic)에 속한다.2) 산술적으로 나누어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대 사실주의 소설이라는 개념은 서사문학에서 약 1/5의 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이런 허구적 가능세계의 잠재력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소설’(fiction) 개념 대신 근대의 합리적 이성과 시간 의식에 근거한 ‘장편소설’(novel/roman)이라는 개념에 우리 당대의 문학이 구태여 몰두해야 할 필요가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지속되는 원개념으로서의 장르가 있지만, 소설이라는 양식은 분명히 시대성을 지니는 역사적 장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역사적 장르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부침이 있고, 변화하며, 한때 문학에서 중요한 양식이던 단가(ode)나 민요(ballad)처럼 덜 우세한 장르로 위축되고 약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소설의 개념을 본질화하게 되면 그 범주에 들어올 수 있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경직되게 구분할 수밖에 없고, 장르를 쇄신하는 작품이 등장했을 때 수용하기도 어렵다. ‘순문학’ ‘본격문학’ ‘문단문학’ 같은 용어는 역사적인 것으로, 독자들이 어느날 여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순간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당대의 작가들이 출간한 소설에 ‘본격문학/장르문학’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적용하기에는 하나의 가능세계가 포괄하는 현실과 환상의 영역이 너무나 방대하다. 원래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잡식성 아닌가.

소박하게 요약하자면, 우리가 근현대의 소설에서 창출해낸 가장 중요한 세계는 결국 한 사람의 심리이고 내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내면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협소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 여기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는 허구적 가능세계로서의 픽션일 것이다. 판타지나 SF를 통해서 문학에 입문하고 문학을 형상화하는 젊은 독자층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실의 증거이리라. 심리적 주체로서의 개인을 넘어 다시 새로운 세계관과 공통감각을 모색함으로써, 어쩌면 우리는 ‘타락한 시대의 서사시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시대의 타락에서 도약하는 서사시로서의 소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SF나 판타지가 비록 관습을 반복하는 형태로라도 구조와 체제의 문제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근대의 소설이 점차로 잃어왔던 문화사회학적 상상력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본다.

또도로프는 1970년 『환상문학 서설』에서 환상문학이라는 것이 자연적 법칙으로 움직이는 세계에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될 때 독자가 자연/초자연 사이에서 망설임을 느끼는 경험에서 생성된다고 보았다.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에서 독자를 동요하게 하는 감정적 경험은 크게 괴기와 경이로 나뉜다. 공포보다는 매혹에 가까이 있는 경이의 경험은 현대적으로 보면 카프카(F. Kafka)의 「변신」이나 고골(N. Gogol)의 「코」에 잘 나타나 있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 2012)은 이런 맥락에서 경이의 연속이다.) 이런 작품들은 현대문학에서 환상이 보편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 독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다. 현대의 독창적인 소설 작품들은 허구로서의 문학에서 중요했던 환상의 경험을 적극 차용하고 있다. 우리의 시대에도 (장편)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은 이처럼 허구 서사의 오랜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또도로프가 순수한 경이와 구별한 ‘기계적 경이’의 개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기계적 경이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을 기계를 비롯한 과학적 장치들로 설명하는데, 마법 양탄자나 요술램프 등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또도로프는 기계적 경이가 장르적으로는 현대의 SF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우리가 경이로운 경험을 통해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고 할 때, 이미 과학기술에 의해 결정된 세계는 오로지 관습적인 경이만 줄지 모른다. 과학문명이 주는 경이를 뛰어넘는 경이는 어디서 올 수 있을까? 구병모(具竝模)의 『방주로 오세요』(문학과지성사 2012)와 배명훈(裵明勳)의 『신의 궤도』(문학동네 2011)는 기계적 경이뿐 아니라 이처럼 결정돼 있는 관습적 세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또다른 경이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이다.

1970년. 그리고 지금은 2012년. 그 사이에 우리는 첨단 과학기술이 인간의 상상력을 얼마나 빠른 속도로 현실화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스마트폰 속 가상세계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SF적 상상력은 시대의 무의식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인 박식함과 유려한 문체를 지닌 소설가 김연수(金衍洙)가 최근 장편 『원더보이』(문학동네 2012)에서 ‘초능력’이라는 모티프나 평행우주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성과 과학의 신봉자인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에 비해 안전하고 풍요롭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인간은, 여전히 불안한가. 우리는 어째서 여전히 남의 이야기를 찾아 읽고 있는가. 우리는 세계에 관한 엄청난 양의 정보를 매일같이 습득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필요한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헛것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견고하게 세워놓은 근대적인 삶의 기틀은 사실 태풍 같은 한숨 한번에 날아가버릴지도 모르는 배부른 돼지들의 집일지 모른다.

 

 

천출(賤出)

 

구병모의 『방주로 오세요』와 배명훈의 『신의 궤도』는 매우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두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모두 신분이 문제가 된다. 『방주로 오세요』에서 그려지는 세계에는 운석이 온 적이 있다. 지구와 충돌한 운석이 퍼트린 정체 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지상의 문명은 폐허가 되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폐허를 복구할 비용을 ‘방주시’라는 낙원을 건설하는 데 대부분 써버렸다. 이 세계는 외부의 어떤 요인으로부터도 완벽하게 보호받는 천상낙원과,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지상계가 이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방주시의 초일류학교인 방주고등학교에 지상 출신의 쌍둥이 남매 마노와 루비가 입학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아이들은 ‘지상의 아이들’에게 선심 쓰듯이 주어진 특별전형을 통해서 입학했고, 이런 지상의 아이들은 방주고등학교의 전체 인원 중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방주시의 사람들인 ‘여기 사람’과 ‘지상의 사람’ 사이에는 마치 신과 인간, 적어도 천사와 인간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지상의 아이들은 그러니까 날 때부터 ‘천출(賤出)’인 것이다.

구병모는 이런 신분 차이에 대한 의식을 비유적으로 여러번 강조해서 보여준다. 마노가 방주시에 처음 가족과 함께 방문했을 때 반해버린 소녀가 다친 마노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주는 장면은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 속에서 마차에 앉은 귀부인이, 말발굽을 피하다 진흙탕에 나동그라진 평민에게 무심히 손수건 한장과 은화 한닢의 동정을 베푸는”(34면) 것 같았다.

『신의 궤도』의 주인공 은경은 봉건적인 의미의 천출에 더 가깝다. 창조주의 딸로 그려지는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본부인에게서 낳은 ‘경라’라는 언니가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여러 여자들 중 한명이었다. 은경이 러시아의 비행예술학교를 다닐 때 ‘적출(嫡出)’인 경라는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기도 한다. 은경이 비행학교에서 사랑했던 친구를 닮았으며 신의 궤도를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수도사인 나물은 또 어떠한가? 나물은 검은 피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던 예언자 출신인 그에게 피부가 검은 아이도 예언자가 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피부가 검은 수도사도 있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은경이 애초부터 세계와 화해하는 삶을 살 수 없었듯이, 나물도 그러했다.

미래의 도시인 방주시, 미래의 행성인 나니예를 각각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두 소설에서 이처럼 천출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중심에 부각되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도 『방주로 오세요』와 『신의 궤도』가 개인의 이야기 층위를 뛰어넘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두 작품에서는 인간의 내면, 심리 묘사가 드물게 나타난다. 이 작가들의 관심은 개인의 미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분명히 계층의 문제, 사회구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려는 야심을 지니고 있다. 배명훈은 연작소설 『타워』(오멜라스 2009)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떠한 사회적 구조를 가지는지를 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의 구조를 통해 이미 보여준 바 있다.

배명훈은 인간의 행위가 개인의 차원에 국한해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의 상위에 존재하는 조직단위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서는 거기 속한 개인의 행위 동기나 양식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이 그의 소설에서 주로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 행위를 설명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 여러 층위의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한편의 거대한 서사이고, 따라서 인간 운명의 극적 구조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낙원처럼 보이는 구병모의 방주시가 사실은 얼마나 거대한 악의 구조인지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 구조에 완벽히 동화될 수 없는 개인들이 그 속에 ‘잠입’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과 개인, 개인과 체제, 체제와 체제가 서로 갈등을 일으켜 구조의 모순이 외현되기 때문이다. 배명훈의 나니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장엄한 스페이스오페라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자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요청된다.

 

 

노올자!

 

우라사와 나오끼(浦沢直樹)의 역작 만화 『20세기 소년(20世紀少年)』에서 우리는 우정에 기반한 공동체가 배타성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같이 놀 수 없는 ‘친구’를 소외시키고 나아가 ‘괴물’로 만드는지를 보게 된다. 타인을 초대하지 않는 공동체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 내밀한 세계 바깥에 있는 ‘외계인(外界人)’에게 배타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고, 그 공동체를 사랑하는 외계인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구애를 영원히 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구애를 하는 이 외계인은 내밀한 공동체 쪽에서는 바이러스로 뒤덮인 운석만큼이나 공포스럽고 끔찍한 존재일 수 있다. 우정과 사랑에 있어서 나와 너의 자유의지가 어긋나는 것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20세기 소년』에서 ‘노올자’(びましょう)라는 외계인 친구의 반복적인 외침은 어쩌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구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같이 놀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함께 논다는 것은 유아기적이고 퇴행적인 수사 같지만, 인간의 유희충동이 오래된 인류학적 본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함께 논다는 것’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방주로 오세요』에서 방주시 출신 학생회장인 2학년생 나일락은 지상의 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기 위해서 음모를 꾸민다. 방주고 안에 있는 단순한 소모임 같지만 사실은 불공평한 계층구조를 변혁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모임인 ‘프로네시스’를 나일락이 그토록 증오하는 것은 그가 미움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배제하는 자는 배제함으로써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에 광풍처럼 밀어닥친 혐오 정치의 구조였고, 나찌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운동의 구조였다. 누나 루비에게 해를 가하겠다고 나일락이 협박해올 때, 마노는 프로네시스에 잠입하라는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프로네시스는 일종의 역성혁명을 위한 결사조직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초대하는’ 공동체다. 분식집 주인을 어머니로 두고 있는 가난한 학생 윤시온은 마노를 기꺼이 이 모임으로 받아들여준다. 방주고의 내부 구조를 밖으로 뒤집어 보여주기 위해서는 모종의 테러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 프로네시스의 구성원들은 학교에 폭발물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프락치 노릇을 한 마노로 인해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신의 궤도』에는 신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조직이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이론신학회이며, 다른 하나는 관측신학회이다. 이론과 실천이라는 인간의 두가지 화두를 연상케 하는 이 조직들은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음에도 세계(=우주)의 패권을 두고 음험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또다른 세력이 있다. 나니예의 행성관리사무소. 이 사무소는 행성 나니예 남반구의 실질적인 지배체제다. 이 체제의 우두머리인 황소장을 위협하는 숙적은 유목 비행기들을 이끄는 ‘칸’인 ‘지난’이라는 인물이다. 이 경쟁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합종연횡이 일어나는데, 황소장은 신학회들이 기반해 있는 천문교 세력을 등에 업고 남반구를 평정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체제 수준에서 볼 때 배명훈의 세계에는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상호확증 파괴’의 계약에 기초해 있고, 한쪽이 파괴와 전쟁을 선언하면 다른 쪽도 얼마든 파괴와 전쟁을 선언할 수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는 순간, 그 속에서 개인들은 오로지 자기보전과 이익추구의 동기로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방주로 오세요』의 마노는 각종 테스트를 통과해 평범하다는 점 때문에 프락치로 ‘선택’되었을 때 분노했다.

 

마노는 온 잇새와 땀구멍으로 새어나오는 분노를 더이상 감추지 않았다. 이 분노가, 사람 간 관계와 신뢰를 갖고 놀면서 비겁하게는 살기 싫다는 인간 보편의 소신 때문인지, 채점 결과로 사람을 고르는 일반 사회의 논리가 학생들만의 공간에까지 노골적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데 대한 거부감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마노 자신의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데 대한 실망인지 확실치 않은 채로. (67~68면)

 

놀이가 없는 구조, 배제만 있는 구조 앞에서 우리가 분노하고 절망할 때, 그 정념의 실상은 복합적이다. 우리는 배제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데 절망하고, 배제의 논리가 나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데 절망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 존재가 배제의 논리에 흡수될 수밖에 없다는 데 절망한다.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 발자끄(H. Balzac)의 『나귀 가죽』에서 주인공 라파엘이 도박장에서 파산하고 죽음을 선택하려 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풍요의 확률이 지닌 기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회구조를 구성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알기에는 현대사회의 제도가 너무도 불투명하다. 관료화된 제도 안에서 개인은 싸워야 할 적을 볼 수가 없다. 김애란(金愛爛)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편의점이나 편혜영(片惠英) 소설 속의 사무실이 공포스러운 것은 유통과 순환을 책임지는 자가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구병모와 배명훈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 적은 소설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하거나 체제의 구조가 되어 온다. 그리하여 갈등은 더 극적인 것이 된다. 미움과 분노는 약자가 강자에게, 강자가 약자에게 품을 수 있는 적법한 정서적 현상이 된다.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해. 확실하게,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밟아버리려면. 믿음을 줬던 사람이 내부에서 배신을 때렸다는 걸,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방법으로 알아야 해. 살아 있는 동안 두번 다시 누구하고도 연대하거나 뭉쳐다닐 꿈 따위 꾸지 못하도록.” (152면)

 

『방주로 오세요』의 일락은 마노를 이러한 목적으로 쓰려고 한다. 전체주의 운동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힘을 얻는다. 믿음을 바탕으로 성립된 관계에 치명적인 배신과 불신의 불씨를 던지는 것 말이다. 미움과 질투와 실망의 불은 지옥의 불보다 더 강하게 타올라서, 시간을 태우고 존재를 태우고 희망을 태우기 때문이다. 이 처절한 화염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진실은, 진실에 대한 경외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은 죽어서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았다

 

독자들은 『방주로 오세요』와 『신의 궤도』를 읽으면서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기술적 상상력에 대해 큰 감흥이나 경이를 느끼기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 현실이 기술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도 빠르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주로 오세요』의 지문인식 엘리베이터라든가 『신의 궤도』에 나오는 인체냉동 기술, 놀라운 인공지능 기계/생명체 등은 영상화된 SF에서 더 화려한 형태로 많이 경험한 소재다. 현대의 유식한 독자들에게 초자연적인 경이는 미신적인 것이고, 기계적 경이는 진부한 것이다. 그 앞에서 모든 이야기는 빛을 잃고 초라해진다.

만일 우리에게 서사를 통한 혁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 올까? 우리는 우선 연인의 얼굴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주로 오세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마노가 방주시에 입성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방주시에 놀러왔던 날 마주쳤던 한 여자아이였다. 소년은 첫눈에 반해버린 소녀를 찾기 위해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기사도문학의 구조가 얼핏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2학년 여자선배 윤다나를 만나고 나서, 이 선배가 자신이 찾던 그 소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그의 첫사랑은 사실 같은 프로네시스 안에서 그가 약간은 무시했던 유달리였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편리한가. 소년은 방주시라는 정치경제적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 속에서, 연인이 아닌 그 환상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연인을 (재)발견했을 때 희열과 경이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희열과 경이가 사실은 가짜였다는 것을 알고 나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연인의 얼굴이 생각보다 초라하고 볼품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발견하고는 죄 없는 연인에게 분노한다.

『신의 궤도』의 여주인공 비행사 은경은 러시아 유학시절 코스모마피아라는 조직 출신의 바클라바를 사랑했다. 하지만 바클라바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해 그녀 아버지 회사의 기밀을 빼냈다. 그녀가 일종의 간첩으로 몰려 죽음을 맞게 되자 아버지는 자신의 직권을 이용하여 그녀를 냉동시켜 죽음을 피하게끔 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은경은 냉동기술을 비롯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의 평범한 인간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은경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인공지능 생명체임이 밝혀진다. 은경은 이권자들의 명령에 따라 죽었다 살아나기를 거듭한다.

은경이 잡지에서 나물 수도사의 사진을 보고 그에게 반한 이유는 바로 바클라바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은경이 다시 깨어났을 때 목표 대상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먼저 주어진 01의 ‘정보’였다. 이 슬픈 사실은 어쩌면 사랑에 관한 뛰어난 비유가 아닐까? 우리의 존재는 사랑해야 할 대상을 알고 있어서, 우리는 존재의 나침반을 조종하여 그 대상에게로 늘, 거듭, 날아간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은 인간이 지상 위에 존재한 이후로 늘 사랑이었다. 그리고 연인의 얼굴은 언제나 경이의 대상이었다. 사랑의 이야기는 경이로 시작되어 경이로 끝난다. 그리고 중간에는 필연적인 고통의 플롯이 있다. 마노처럼 자신의 오인(誤認)을 깨닫는 뼈아픈 각성의 시퀀스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함으로써 얻는 절망의 시퀀스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죽음의 시퀀스도 있다. 나물이 신의 궤도를 이론화한 도식을 은경이 실수로 훼손했을 때, 그녀를 믿지 못하고 오해한 그가 그녀를 칼로 찔렀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심을 사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그렇게 연인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다시 살아나서 자신을 죽인 연인을 또다시 사랑한다는 것은 낯설고도 감탄스러운 일, 그러니까 경이로운 일이다.

소설에서 인물이 자신에게 어떤 파국이 찾아오든 순전하고 순진하게 어떤 대상과 행위를 선택하고 그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일은 그 자체로 윤리적이다. 은경과 나물은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자신들이 추구해온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신의 궤도에 진입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은경은 우아한 궤도비행을 할 수 있는 조종사이고, 나물은 신의 궤도를 이론적으로 계산해낸 신학자이자 이론가이다. 그 둘은 마치 한몸처럼 연합함으로써만 완전해진다. 이론적 계산이 없는 비행은 불안하며, 실천적 비행이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

하나의 소설에 인물들이 더불어 존재하는 이유는, 이 언어적 공동체 안의 ‘공존’을 통해서 새로운 행위로의 도약이 가능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은경은 인공지능 생명체로서 자신의 창조주를 알기 원했다. 인간이 신을 알기 원하듯이. 나물 역시 천체와 같은 신을 알기 원했다. 그들은 함께 진정한 앎을 얻기를 원했고, 그 결과는 엄청난 빛을 내뿜는 폭발로 이어졌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권력자들이 계획한 항성파괴무기 실험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 영원의 지평으로 들어가는 지복(至福)의 순간이었는지 여기에서 선명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존재의 완전한 포기와 헌신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방주로 오세요』에서 프로네시스의 지도자 윤시온은 정치혁명이 실패하고 나서 학교 건물에서 뛰어내려 식물인간이 되었다. 마노가 배신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배신을 시킨 조직과 당한 조직이 모두 그를 외면했을 때, 그는 시온이 입원한 병실로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배신을 한 자가 배신을 당한 자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최대의 수치와 모욕을 감행하겠다는 놀라운 윤리적 실천이다. 그는 시온의 손에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나가 미처 보지 못했다. “자기의 눈물이 떨어진 그 자리, 거기서 작고 가벼운 떨림이 일어나 눈에 띄는 움직임으로 조금씩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244면)

지상에서는 부자가 빈자를, 빈자가 부자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배신한 자를 배신당한 자가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배신당한 존재가 몸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널 용서한다고. 그래서 네가 주었던 죽음 속에서 나는 다시 일어나겠다고. 사랑은 죽었던 우리에게 경련 같은 경이로 찾아와 우리를 다시, 살게 할 것이다. 이 지옥에서 보내고 있는 한철을, 우리는 서로의 존재 안에서 가까스로 피해간다. 놀랍게도.

 

“진짜로 영원히 헤어지는 줄 알았잖아.”

나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팔을 벌려 은경의 몸을 꼭 끌어안을 뿐. 줄 하나로 간신히 지켜낸 아슬아슬한 신의 궤도 위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신의 궤도』 30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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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츠베땅 또도로프 『덧없는 행복: 루소론/환상문학 서설』, 이기우 옮김, 한국문화사 1996, 124면.

2) 노스럽 프라이 「도전적 서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95~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