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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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金隆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kluung@hanmail.net

 

 

 

고스트헬멧

 

 

울지 마 당신 덜그럭, 턱뼈가 웃음을 찍어낸다니까

사는 게 지겹다며 죽은 듯 잠든 분들 머리맡에서 덜그럭덜그럭

달을 가지고 놀다 보면 알게 된다니까

서울역이나 수원역 대합실은 난리도 아냐

어젯밤에도 누군가의 꿈이 달빛에 찔렸는지 사고를 쳤더군

야윈 뼈마디에 달라붙은 살을 발라먹고 쪽쪽 피까지 빨아먹고

달랑 해골만 남겼더군

흔해빠진 집이나 마누라, 골때리는 대통령선거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악어가죽 구두 내지르는 당신이나 질질 슬리퍼 끄는 나나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징글뒹굴

한세상을 굴러먹는 셈인데

쯧쯧 밥은 먹었냐? 암만, 귀신도 밥은 먹어야 산다

추석이나 설이 가까워지면 밥그릇 엎어 무덤 지은 어머니 생각에

잇몸 시리겠지만 울지 마 제발, 틀니까지 달아난다니까

노숙자 무료급식 따위로 오래전에 굶어죽은 당신이

죽지 못해 산다는 말 따윈 되새김질하지 마

잔칫상에 올라앉은 돼지머리 하나 떠올리면 살맛이 난다니까

저기, 꽃샘추위에 얼어죽은 분에게 잠시 빌려 써도 돼

이 바닥을 굴러먹기엔 가장 안전하고 속 편한

헬멧이야 배기통 터진 오토바이처럼 붕붕

떠오를 수 있다니까

 

팔다리를 날려도 우는 법이 없다니까 해골은

전생에 돼지머리 눌린 듯 킬킬

웃고 산다니까

 

 

 

고릴라

 

 

고릴라는 방금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강남 뱅뱅사거리 신호등에서 밥 생각도 지겨운 오후 4시가

소똥처럼 포장되고 있는 맥도날드 체인점 앞에서 구름이나 뻐끔대고 있을 것이다

펑퍼짐한 납작코에 눈썹이 치솟아 드림성형외과 간판은 한순간

입을 쩌-억 벌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듯 내 눈꺼풀에 침을 발랐지만

고릴라는 고릴라를 모르는 척

한눈에 척 알아본다

 

서부아프리카 삼림지대에서 서울 한복판으로 장소를 옮긴다고

바람의 머리칼이 빠지거나 피부색이 뽀얘지겠는가

고릴라, 바나나 대신 이름을 던져주면

떼굴떼굴 지구 밖으로 굴러나갈 것 같은 콧구멍과 헬멧처럼 부풀어오른 정수리로

천둥벼락이라도 노릇노릇 구워낼 수 있을 거다 고릴라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릴라다

 

애인이 사는 15층 임대아파트 막힌 변기처럼 떠오른 구름 사이로

요리조리 궁둥이 옮겨다 놓는 침팬지나 오랑우탄과는 노는 물이 다르지

아무래도 입보다는 꽉, 쉽게 조일 수 있는 항문이 훨씬 잘 어울려 바나나는

뒤가 구려 이를테면 아무 생각 없이

개구리를 견인하러 가는 올챙이 꼬리 같아

너무 정치적이지

 

끙끙 이팝나무라도 기어올라 목을 걸고 싶지만 핑글 어지러워 자꾸

새빨간 거짓말 같아 세상이, 너무 인간적이지

두 발로만 중심을 잡기엔 몸싸움이 거친 국회의사당 앞이야

boomtown! boomtown! 콧대를 높이거나 턱뼈라도 깎아내기 위해

로또를 긁어대는 애인 손거울 속에서도

고릴라가 보여

 

안녕, 뒤돌아보지 마

 

불끈 움켜쥘 수도 없는 손바닥으로 텅텅

너럭바위 같은 제 가슴이나 펑펑 울리고 다니는

고릴라들

 

공룡처럼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는

퇴화하는 길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