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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재학 鄭載學
1974년 서울 출생.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가 있음. buchanan@dreamwiz.com
공모(共謀)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었을 거야 차 트렁크 열고 시동 좀 걸어놔 간신히 1층까지 왔는데 아파트 현관 앞에 순찰중인 경찰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자루가 찢어져 그의 멍든 허벅지 살이 드러났다 하하 이건 고구마입니다 우리는 서둘러 트렁크에 실으려 했다 한번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림자 하나가 칼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옆의 그림자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우리는 자루를 펴보였다 자루 안에는 지푸라기와 고구마가 가득했다 경찰관과 우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구마 하나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방금 찐 고구마인데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네 고맙습니다 경찰관이 고구마를 한입 물자 썩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내 눈은 지독한 안개를 앓고 있다
버스 안에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차창 밖의 사람들
유적처럼 정지해 있고
시계의 초침이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버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안개 가득한 사방에서
갈매기 소리만 들렸다
진(鎭) 너머에는
풍금과 해금이 만든 바다가 있다
바람이 불고 비단 현 두 줄이 떨리면
공명상자에서 바다가 쏟아졌다
풍광,
연둣빛 등대
바다의 돌은 달을 종교로 삼는다
독한 안개 속
내 눈동자의 남로(南路)에서
아이는 하루 종일
들어오는 모든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은 내 눈의 무게를 달래며 포좌에 누웠다
등대 위, 그물로 짜여진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이봐, 달은 이제 그만 마시게
버스는 등대를 지나치고
나는 바닷물이 되어 바닥 전체에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