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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모스 오즈 『시골생활 풍경』,비채 2012
두려움에 떨면서도 떠날 수 없는 그곳
손홍규 孫洪奎
소설가 munhac@empas.com
하나의 이름이 하나의 사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떠올리면 묘하게 씁쓸하다. 적대감과 공감이 뒤섞인 아련하고 낯선 정서가 생겨난다. 상대방 없이 악수하는 기분이며 가해자 없이 폭행당하는 기분이다. 아모스 오즈(Amos Oz)를 처음 접했을 무렵에도 까닭 없이 허둥대야 했다. 그의 소설에서 이스라엘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예루살렘, 텔 아비브, 하이파는 이스라엘에 속한 도시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소설에서는 다른 어떤 도시로 치환해도 상관없을 우울하고 기이하며 현대인의 보편적 불안이 깃든 흔한 장소에 불과하다. 그가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특별할 것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뗄 때, 분쟁지역의 삶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해낸 경이로운 서사를 만나리라 기대했던 희망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하물며 팔레스타인인들의 신산한 삶을 섬뜩하리만치 냉정한 시선으로 포착했던 가싼 카나파니(G. Kanafani)를 오래전부터 알았음에야 아모스 오즈가 시종일관 밋밋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는 새로운 종류의 폭력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거였다.
이런 혼란은 아모스 오즈가 직접 밝힌 작가로서의 태도를 접한 뒤에도 여전하다. “흔히 분쟁지역의 문학은 세계의 다른 한편에서 알레고리로 읽히곤 한다. 그렇지만 내 작품은 알레고리가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 실존을 담았을 뿐이다”(8면 작가의 말)라고 했던 그에게 선뜻 동의하지도 못하거니와 “제가 에쎄이나 저널과 소설을 구분하는 기준은 ‘내 내부에 몇개의 목소리가 존재하느냐’입니다. 내가 하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피력하고 싶을 때는 저널이나 에쎄이를 통해 직접 이야기합니다. ‘정부는 꺼지라’는 식이죠. 하지만 내 속에 여러 목소리가 존재할 때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을 쓸 때는 비록 그 인물이 악인이라 하더라도 모든 캐릭터와 공감하면서 글을 써야 하니까요”(매일경제 인터뷰 2010.11.29)라고 했던 그를 쉽게 부정할 수도 없다. 이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보다 아모스 오즈라는 소설가가 더 문제적인 존재임을 수긍하는 것이다.
연전에 소개된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에서 작중인물 자이체크 교수의 입을 빌려 “개인과 민족의 삶에는 분명 침묵이 말의 혐오스런 오용인 순간들이 있소”라고 말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아모스 오즈야말로 침묵의 쓰임새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숭고함과 파렴치함을 철저하게 구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태생부터 분열과 균열을 품은 존재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사태라면 아모스 오즈는 그 사태가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이하고 또 기이하다.
『시골생활 풍경』(Scenes from Village Life, 최정수 옮김)은 여덟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연작소설이다. 텔 아비브 근처 가상의 소읍 텔일란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병치했을 뿐인데 읽어갈수록 촘촘하고 섬세한 하나의 이야기가 전면에 떠올라 차라리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공간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하다. 특히 현대적인 연작소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셔우드 앤더슨(S. Anderson)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Winesburg, Ohio)와 비교하면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가 조지 윌러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직조해 만들어낸 ‘성장을 위한 탈출’의 서사라면 『시골생활 풍경』은 고향인 소읍을 떠나지 않고 혹은 귀환하여 일상을 감내하며 낡아가는, 이미 성장해버린 조지 윌러드의 서사다. 필연적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와인즈버그는 통과의례의 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으나 탈출을 감행할 의사도,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텔일란은 ‘삶의 공포’가 집약된 공간이다.
「땅파기」에서는 남편과 사별해 홀몸이 된 딸과 함께 사는 여든여섯 살의 전직 국회의원과 그들의 집에 일꾼으로 얹혀사는 아랍인 청년이 등장한다. 낡은 집의 지하에서 들려오는 땅을 파는 듯한 소리를 맨 처음 알아챈 사람은 노인이었다. 아무도 노인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이윽고 아랍인 청년이 그 소리를 듣고 마지막으로 딸이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딸이 듣게 되는 소리는 땅 파는 소리가 아니라 ‘바닥의 타일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다. 그 시각의 어둠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녀는 몸을 일으킨 뒤 깊은 밤의 고요함에 둘러싸인 채 서 있었다. 그녀의 집 마당을 묘지로부터 구분 지으며 줄지어 선 사이프러스들을 휘젓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희미한 산들바람의 기미도 전혀 없었다. 귀뚜라미와 개들조차 잠시 침묵에 빠졌다. 어둠은 짙고 숨 막혔으며, 모든 것 위에 열기가 무겁게 덮여 있었다. 라헬 프랑코는 몸을 떨면서 그곳에, 흐릿한 별들 밑 어둠속에 혼자 서 있었다.”
어느 늦여름 자신이 상속자임을 주장하는 낯선 사내의 방문을 받게 되거나(「상속자」), ‘폐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낡은 집을 사들이려던 부동산 중개업자가 그 집의 끔찍한 지하실에서 뜻밖의 평온함을 느끼게 되거나(「길을 잃다」),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아내를 찾아 마을을 헤매던 면장이 상처 입은 손에서 피를 흘리며 벤치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채 보슬비를 맞으며 아내를 기다리거나(「기다리기」), 부모가 잠든 침대 아래서 아들이 권총자살을 했던 집에서 음악회가 열리고 공군 비행기들이 적의 표적을 폭파시키고 안전하게 기지로 돌아왔다는 라디오 뉴스가 가볍고 일상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그곳, 비밀을 엿보듯 사고가 일어났던 버려진 침실의 침대 아래를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단편들은 하나의 장소, 즉 슬픔과 고통을 간신히 억누르는 그 어두운 침대 밑으로 수렴된다(「노래하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낡고 무너져가는 옛집들과 그 안에서 똑같이 낡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별빛과 보슬비와 바람소리조차 적대적이다. 텔일란의 고요는 위태로운 고요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집은 빈집보다 공포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텔일란은 아모스 오즈가 인간의 내면에 펼쳐진 추상적인 풍경을 끄집어내 형체를 부여한, 언제까지나 두려움에 떨면서 누구도 떠나지 못한 채 거주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