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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소설의 자리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배제되고 고통받는 다수의 세상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민중이라는 집단적 표상과 관련지어 형상화하려는 문학적 움직임 속에는 그 민중의 자리를 역사적·사회적으로 주체화하려는 의지가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역사의 변화를 이해하고 기획하는 커다란 밑그림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대로다. 그러나 세기말의 세계사적 격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 유동적 근대의 상황,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의 현실 등과 마주치게 되면서 종래의 민중 표상으로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담아내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민중 정체성과 관련된 세상의 변화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집합적 실체로서 민중의 표상이나 개념에 일정한 관념화의 여지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재(先在)하는 우월한 개념이나 표상의 도움 없이 현실의 모순과 마주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문학적으로 특별히 답답할 이치도 없지 않을까. 문제는 언제든 문학이 그 자신의 질문을 찾아내게 마련인 당대의 구체적 현실이 사회적·경제적 고통의 양을 확대하며 숱한 공공의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의 전선이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반면, 그 반대의 상황을 기대하고 상상하기 힘들어진 오늘의 상황에 있을 것이다.

2000년대 한국소설의 현장에서 공동체나 사회의 조력 바깥에 놓인 무력한 개인의 고립과 관련된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은 이제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반지하방이나 고시원 쪽방에서 임시직으로 희망 없는 나날을 이어가는 젊은이들의 일상이 소설의 유력한 배경이 된 지도 오래다. 강제적 명퇴나 실업으로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 있기 일쑤고, 그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 벽에 걸려 있다 한들 놀랄 사람은 많지 않다. 가족서사는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지속의 상상력을 잃고 붕괴와 해체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무한 경쟁사회의 압력이 고스란히 전이된 학교의 황폐화와 학원폭력의 현실 역시 이즈음의 소설에서 자주 인용되는 암담한 세상의 상징이다. 그리고 재앙의 상상력, 종말론적 세상을 암시하는 서사에 이제는 다들 얼마간 익숙할 정도다. 그러나 그간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나 시민운동의 성장, 개개인의 의식의 열림 등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자본이나 시장으로부터의 일방적인 패주(敗走)로 설명할 수 없듯이, 일견 무력하고 암울한 색채가 지배적인 한국소설의 분위기 역시 ‘사회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감각과 이해를 반영하는 한편, 그 개별의 구체적 자리에서는 주눅 들지 않는 상상력으로 불우한 세상을 견디고 타자의 아픔을 향해 고단한 자아를 개방하는 공감의 순간들을 찾아내왔다. 민중 현실을 다룬 지난 연대의 소설에서 많은 헤아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대상화하는 작가-지식인의 시선이 종내 일정한 관념적인 편향을 드러낸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약자의 전선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의 영역을 넘어 전면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어쩌면 오늘의 작가들은 그들 자신을 포함해 그 전선의 실체를 매번 새롭게 의식하고 그려갈 수밖에 없다.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부각되었던 탈현실의 상상력을 거론할 때도, 괴물스러운 현실 그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미학적 모험의 측면과 함께 이성적 인식이나 조절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난 듯한 신자유주의 세계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한 작가들의 곤경을 고려에 넣어야 할 것이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현실에 맞서 새로운 비극론의 수립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인상적인 통찰을 전해준 바 있다. 그것은 시스템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라는 사실이다. “사회체제가 일정한 소수집단을 경멸하고 배제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이러한 배제의 장면을 얼마든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반면, 계급 분석을 해보면 놀랍고 충격적이게도 사회체제가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게 다수를 배제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서 별다른 충격을 받은 바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 뿐 아니라 역설적이기도 하다.”(『우리 시대의 비극론』, 이현석 옮김, 경성대출판부 2006, 509면) 2003년의 보고서다. 그런데 2000년대를 사는 많은 한국인들이 이 점에 대해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계급 분석 이전에 나날의 현실에서 이미 넘치도록 체감하고 있는 사실이어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가 소설에서 만나는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는 바로 그 배제되는 다수의 자리에서 씌어지는 다수의 현실인 셈이다. 그리고 앞서도 이야기했듯 최근 한국소설에서 이같은 고통의 현실을 읽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김애란(金愛爛), 조해진(趙海珍), 공선옥(孔善玉)의 근작들 역시 예외가 아닌 듯하다. 물론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고통에 감응하는 가운데 이들 작품이 힘겹게 찾아낸 개성적이고 창조적인 소설언어의 자리가 될 것이다.

 

 

2. 세계의 실패를 떠맡는 무력한 개인의 자리: 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김애란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은 조로증을 앓는 아들과 그 아들의 급속한 노화와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젊은 부모를 등장시켜 아주 특이한 슬픔과 고통의 서사를 전개한다. 그런데 소설의 초점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이라는 기막힌 운명의 비극에 있지 않다. 김애란은 육친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타자적 거리를 사이에 두고 슬픔이라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이 발휘할 수 있는 공감의 가능성과 한계를 묻는다. 그 질문은 아들 한아름의 일인칭 시점으로 발화되는 장편의 서사 전체에 기이한 질병을 앓고 있는 열일곱 소년의 것으로 보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의 조숙하고 명랑한 시선과 어조에 아이러니의 형태로 새겨져 있지만, 열일곱 젊은 부모가 처음 몸을 섞는 원초적 장면을 상상하며 써놓은 한아름의 소설 속 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에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 여름의 이야기는 이른바 ‘타자-되기’라는 소설 상상력의 가장 기본적인 용처가 슬픔과 기쁨을 포함하는 타자의 전존재를 향한 도약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 도약은 제거되기 힘든 타자성에 대한 부분적인 외면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 이야기가 한아름이 죽음으로 건너가기 전 남긴 유고(遺稿)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순간에 부여되는 이야기의 권위 속에서 한아름은 죽음을 거슬러 자신의 탄생 지점으로 가고, 거기서 차후 진행될 비극조차 어찌해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의 환희를 복기함으로써 그 자신을 포함한 부모의 운명을 감싸고 위로하는 어떤 순간을 찾고 있다.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에 담긴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보편적 불행과 슬픔으로 바로 연결짓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상호부조와 연대의 공간으로서 사회의 공적 영역이 붕괴되는 지점에서 개인들에게 박탈되고 있는 것은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리적 자원만이 아니다. 탈락과 배제의 불안, 공포 앞에서 심화되는 개인의 고립은 유대와 연민, 공감과 관련된 마음의 영토 자체를 앗아가고 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런 상황에 대한 강력한 항의이면서, 연민이나 공감의 능력과 관련된 소설의 기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장편에 이어 올해 출간된 김애란의 세번째 소설집 『비행운』(문학과지성사 2012)은 바로 그 공감의 시선으로, 고달프고 막막한 세월을 지나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다양한 지점에서 발굴해낸다. 소설집의 제목인 ‘비행운’은 이륙하는 비행기 뒤에서 생겨나는 구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하루의 축」에서 오십대 중반의 공항 청소노동자 기옥씨의 벗어날 길 없는 고단한 나날에 대비되는 막연한 동경과 탈출의 이미지로 제시되지만, 그 기옥씨의 이야기를 포함해 소설집에 나오는 많은 이들의 불행과 관련지어 의미를 새겨보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여기에는 ‘행운’과 너무도 무연한 사연들이 넘쳐난다. 이 편재한 불행의 이야기들에서 아픔의 정도를 가릴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두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에 실린 「자오선을 지나갈 때」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시간의 간격을 생각하며 「서른」에 그려진 악화되고 있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현실에 더 깊이 전율하게 될 것 같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는 서른번에 이르는 취업낙방 경력을 가진 스물여섯살의 대졸 여성이 학원강사 취업면접을 마치고 재수학원 시절의 추억이 어린 노량진을 지나며 “7년이 지난 2005년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 것일까” 자문하며 ‘나아짐’을 모르는 청춘의 시간과 아프게 대면하는 이야기다. 노량진 재수학원 시절 함께 기거했던 독서실의 선배 언니에게 10년 만에 쓰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서른」은 「자오선을 지나갈 때」와 비슷한 시선의 구도를 갖고 있지만, 소설 화자 ‘나’가 겪은 그 10년은 ‘지나감’이나 ‘나아짐’ 같은 말을 떠올리기조차 무망하게 젊은 세대의 참혹한 추락의 현실을 증언한다. 열몇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보통의 기준에 다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언저리에 금이라도” 밟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다단계 판매조직에 발을 들이면서 파탄의 수렁으로 빠져들어갔던 ‘나’의 지난 10년이 세목에 바탕한 뛰어난 사실감의 언어로 고백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무언가가 되고자 했고, 무언가가 되리라 믿었던 청춘의 시간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거나,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라는 탄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참담하게 소진되어 있다. ‘나’의 물음은 “어찌해야 하나”와 “내가, 무얼, 더”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다단계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끌어들었던 보습학원 제자 혜미가 자살시도 끝에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최소한의 윤리적 요청 앞에서도 ‘나’는 한없는 죄의식에 그저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샘 여기 분위기 쩔어요. 원래 이런 건가염. 샘 배고파요. 밥 사주세염. 샘 왜 제 문자 씹어요. 샘 전화 좀. 샘 어디세요. 샘 전화 한번만. 샘 저 좀 꺼내주세요……” ‘나’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혜미의 문자 메시지다. ‘나’는 이 절박한 호소를 외면했거니와, 뒤늦은 참회의 응답이 지금 선배 언니에게 쓰고 있는 고백과 고해의 편지인 셈이다. 그러나 이 편지 역시 조그만 자취방에서 공책만한 크기의 열리지 않는 창으로 저 바깥의 침묵하는 도시의 새벽을 바라보며 쓰고 있는 간절한 구원의 호소라는 점에서는 혜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고립무원의 단절감은 창의 풍경을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우주선 스푸트니크호의 유리벽에 코를 박은 개의 시선에 겹치는 ‘나’의 상상 속에 절실히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이 편지가 부쳐지더라도 수신인인 선배 언니가 딱히 할 수 있는 응답을 떠올리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8년 만의 임용고시 합격 소식을 알리며 선배 언니가 어렵게 주소를 알아내 보내온 소포에는 노량진 시절 선배 언니에게 합격을 기원하며 건넨 만원짜리 빵집 카드와 그 선물에 대한 오래 묵힌 고마움의 언사가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응답으로 씌어지고 있는 이 편지에서 작은 희망 속에 선의를 나누던 그때 그 시간의 온기를 다시 기억하기에는 ‘나’의 ‘서른’이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잘 지내요, 언니. 언니가 정말 잘 지내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미의 평범한 인사말이 더없이 아프고 간곡하게 들리는 이 편지에 응답해야 하는 자는 선배 언니도, 아마도 편지의 진짜 수신인일 혜미도 아니다. 누구나 아는 대로 그 자리는 ‘나’가 빠져든 다단계 조직의 구조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몫을 빼앗고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실패한 시스템으로서 우리 사회 전체다. 그러나 사회는 그 실패를 떠맡지 않는다. 실패를 감당하는 것은 ‘나’나 혜미 같은 무력한 개인일 뿐이다. 더 끔찍한 것은 피해자-가해자의 연쇄를 강요하는 구조의 환상 속에서 ‘나’에게는 혜미에 대한 죄의식을 온전히 떠안을 자리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망각과 부인, 회피의 환상이 불가피하다. 혜미의 병실 방문을 주저하고 망설이는 대목에서 소설의 편지를 끝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타협이 아닌가. 그럴 때 누군가는 「서른」의 편지가 그 내용의 참혹함에 비해 너무 세련되고 매끈한 화법으로 씌어져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죄의식, 스스로에 대한 절망으로 찢겨나가고 있을 ‘나’의 현실은 언제든 소설의 자리에서 보면 과잉의 실재일 수밖에 없을 테다. 재앙의 현실을 얼마간은 알레고리의 힘을 빌려 그려낸 또다른 노작 「물속 골리앗」의 방식이 차라리 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이유다.

 

 

3. 타자의 고통, 공감과 연민의 윤리: 조해진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의 불편한 타자가 되어버린 탈북인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차례 소설로 다루어졌다. 그중 강영숙(姜英淑) 장편 『리나』(랜덤하우스코리아 2006)가 암시적으로 탈북의 소재를 취하면서도 경계 넘기를 통한 정체성의 탈주라는 현대적 주제를 펼쳐보였다면, 정도상(鄭道相) 연작소설 『찔레꽃』(창비 2008)은 ‘충심’이라는 여성의 탈북에서 남한 정착에 이르는 험난한 여로를 치밀한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보여준 바 있다. 조해진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는 탈북 후 중국 연길에서 어머니가 사고로 죽자 어머니의 시신을 불법 장기밀매 조직에 넘기고 손에 쥔 얼마간의 돈으로 벨기에 브뤼쎌로 밀입국을 감행, 기적적으로 난민 지위를 얻은 로기완이라는 북한 젊은이의 행적을 방송작가인 여성 화자 ‘나’가 따라가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소설의 일차적인 초점은 유령 같은 존재로 낯선 유럽 땅에 스며든 스무살 북한 청년이 브뤼쎌에서 겪은 고립무원의 불안과 공포, 굶주림의 시간을 삼년 뒤 그곳으로 찾아간 화자가 그가 남긴 일기를 들고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일기를 토대로 로기완의 시간을 꼼꼼하게 복원하는 것 이상으로, 소설 화자 ‘나’의 이야기를 통해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아픔을 전면적으로 껴안는 일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러니까 소설은 사회적 이방인이자 타자인 로기완이라는 탈북인 ‘이니셜 L’의 이야기이면서 타자의 아픔 바깥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의 시련 속에 두게 된 방송작가 ‘이니셜 K’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화자인 방송작가 ‘나’의 고뇌와 자문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시대 소설의 윤리를 둘러싼 작가 조해진의 물음을 겹쳐보게 된다. 제목은 ‘로기완을 만났다’이지만 정작 소설은 ‘왜 로기완을 만나야 했는가’를 묻고 있는 셈이다.

사정은 이렇다. 오른쪽 얼굴에 커다란 혹이 있는 열일곱살 여고생 윤주(병을 앓던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가족을 떠났으며, 여동생은 행방불명 상태로 그녀는 반지하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다)의 사연을 방송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과욕으로 윤주의 치료시기를 놓쳐버렸다는 자책에 빠진 소설 화자 ‘나’는 타인의 아픔을 적당히 대상화하고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는 세상의 어떤 흐름에서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심각한 회의에 부딪힌다. 이 무렵 ‘나’는 벨기에를 유령처럼 떠도는 탈북인 로기완의 기사를 접하고, 거기서 자신을 벨기에로 향하게 할 로기완의 한마디를 만난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자책과 자학의 상황을 삶의 의지로 돌려놓은 누군가의 사연을 직접 확인하는 게 절실히 필요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브뤼쎌에서 로기완의 시간을 하나하나 되짚는 동안 ‘나’는 자신의 벨기에행이 정작 대면해야 할 아픔과 진실로부터의 도피를 대가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악화된 윤주의 현실이고, “가식적인 연민”이라는 외면하고 싶은 자신의 맨얼굴이다. 그리고 여기에 벨기에에서 은퇴한 한국인 의사 박의 사연이 덧붙여진다. 로기완이 난민 지위를 얻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 박은 모종의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을 떠나 유럽에 정착한 인물로, 오년 전 말기암에 걸린 아내의 안락사를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집행해야 했던 아픔이 있다. ‘나’는 박을 통해 다시 한번 타인의 고통 앞에 선 인간의 한계와 윤리적 난경을 본다.

간단히 요약해본 대로, 작가는 단순히 로기완이라는 탈북인의 고통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재현과 공감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윤리의 자리를 다양한 지점에서 묻고 있다. 그러나 ‘나’의 회의와 좌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 윤리는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한계 안에 있는 것이어서 쉽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추상적 윤리의 해답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윤리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무엇을 발견해내느냐 하는 점이겠다. 로기완이 숙소에서 들고 온 빵을 무료 화장실 변기에 앉아 몰래 먹어야 했던 상황을 일기에서 읽은 ‘나’는 그 상황을 재연해보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몇번 씹지도 못하고 입안의 것을 토해내고 만다. 이 대목의 결벽증적 강박이 로기완의 고통을 향한 ‘나’의 진심을 절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소설은 전체적으로 이 ‘진심’의 언저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보다는 베를린 공항에 홀로 남은 로기완이 브로커로부터 브뤼쎌이라는 낯선 행선지를 받아드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새길 점이 더 많은 듯하다. “그런데 로의 어깨를 잡아주던 브로커의 그 손은 따뜻했을까. 로에게 순간적인 위로라도 주긴 했을까. 그러나 더이상은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이 상상의 한계를 수락하는 이면에 타자의 대상화라는 연민의 타락 가능성과 싸우는 ‘나’의 치열한 자기성찰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 시대 소설의 윤리를 둘러싼 의미있는 반성을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로기완의 일기를 따라가며 로기완의 시간을 다시 쓰는 ‘나’의 작업이 한 탈북인의 행로에 대한 사실적 보고를 넘어 ‘나’의 자기치유의 시간과 섬세하게 겹치는 점이야말로 이 소설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수술 과정에서 잃게 된 윤주의 오른쪽 귀를 세상의 아픔을 듣는 ‘나’의 귀로 보존하려는 환각의 결의는 아마도 작가 조해진의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기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부정하는 고통 역시 살아가는 과정에 포함되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이미 알아버린” 사람들이 윤주나 로기완만이겠는가. ‘나’가 아프게 깨달은 것처럼 세상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그저 눈을 닫는 것만으로도 “무심한 폭력”에 가담한 셈이 된다면, 세상의 고통에 대해 문학이 견지해야 할 공감과 연민의 윤리는 ‘진심’을 넘어선 더 가혹한 시험대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4. 작은 연대의 가능성, 위로의 서사: 공선옥 장편 『꽃 같은 시절』

 

공선옥의 소설에는 언제든 고단하고 억울한 삶의 사연들이 그득하다. 장편 『꽃 같은 시절』(창비 2011) 역시 육십대가 젊은 축에 속하고 이주 여성들이 새로운 구성원으로 등장한 오늘의 농촌 현실을 배경으로 석재공장의 불법 가동에 맞서 업체 및 관청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시골 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영희와 철수 부부는 재개발 사업으로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생계수단인 식당과 살 집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시골마을의 빈집에 들어와 살게 된 도시 철거민 출신의 뜨내기 외지인이다. 승인받지 않은 쇄석기의 가동으로 소음과 먼지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게 되고, 처음엔 어정쩡한 동조자로 시위에 참여하던 외지인 영희는 점차 주민들의 싸움을 앞장서 이끌게 된다. 영희는 대책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맡아 열성적으로 투쟁을 주도하지만 종내는 과로가 겹쳐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맨다. 공장과 관청을 상대로 한 주민들의 싸움 역시 아무 소득 없이 끝나고, 주민들은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벌금형을 받는다. 작가의 말대로 “순하고 약한 사람들의 순하고 약한 항거”는 너무도 간단하게 무시된다. 어떤 거창한 대의나 신념과는 무관하게 도시 출신의 평범한 젊은 주부가 칠팔십대 노인이 주축이 된 시골 주민들의 절실한 호소가 짓밟히고 무시되는 모습을 보고 분노와 서러움의 싸움에 뛰어드는 과정이 공선옥 특유의 핍진한 언어로 그려지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영희의 마음의 흐름은 아주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왠지 모를 낯선 서러움 때문에 방문을 닫고 바람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자니, 속이 상할 때면 늘 그렇듯이 눈물이 나온다. 참 희한한 일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일 말고, 혹은 가족의 일 말고 타인들의 ‘고난’ 때문에 서럽다거나 눈물이 날 만큼 속이 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지금, 이장의 땀에 밴 후줄근한 남방이, 휘청거리는 힘없는 걸음걸이가 영희를 울리고 있다.”(61면) 주민들의 시위 모습이나 경찰에 소환된 주민들의 신문 장면 등에서 상황의 부당함과 부조리를 우스꽝스러운 현실로 만들어버리는 농민들의 천진하고 의뭉한 웃음의 순간에는 삶 그 자체에서 포착한 공선옥 문학 고유의 활력이 뚜렷하다. 작가는 용산참사의 현장인 남일당 이야기나 4대강 공사와 관련된 삽화를 중심 서사와 이으며 시대 현실의 전체상 속에서 이들의 싸움을 조망하려고 한다. 실패한 싸움이었을망정 낯모르던 이들과 따뜻한 연대를 이루고 세상에 처음 자신의 목소리를 알렸던 주민들에게, 소설의 제목처럼 ‘꽃 같은 시절’의 화관을 얹어주려 한 작가의 작의(作意)도 납득이 간다. 영희가 사는 집에서 육십년 넘게 살다 세상을 떠난 집주인 무수굴댁의 시선과 목소리는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지점으로,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사연을 넘나들며 신산한 삶의 비애를 폭넓게 감싸고 있다. 가령 무수굴댁이 옛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가운데 산밭에서 이웃 여인네와 함께 나누는 대화에는 ‘거미 소리’가 등장한다. “무수꿀성님, 칡낭구 가지 새로 내려오는 거무가 닝꽁닝꽁닝꽁니잉, 안허요이?” “자네 집 밭에 거무는 닝꽁닝꽁닝꽁니잉 헌가? 우리집 밭에 거무는 지꾸지꾸지꾸지잉 허그만.” “소리 없는 것들의 온갖 소리”를 듣는 이 대목(79면)이 소설 전체에서 가지는 상징적 함의와는 별도로 우리는 공선옥이 옮겨주는 언어만으로도 어떤 감흥에 이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익숙한 소설적 구도다. 우리는 주민들의 억울한 사연에 쉽게 공감하고 분노한다. 삶의 형편에서는 전혀 나을 게 없는 외지인 영희가 주민들의 싸움에 자신의 힘을 보태는 모습에서 인간 유대의 작은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은 가슴 뭉클하다. 주민들은 패배하고 영희는 쓰러지지만 그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조선 어미’ 무수굴댁의 품이 있다. 무수굴댁은 ‘혼엄마’들의 목멘 노랫소리로 영희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이를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분노와 슬픔을 안은 채로 얼마간 안심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위로의 소설적 처리는 익숙한 서사적 관습은 아닌가.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든 우리 시대의 소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몫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단순한 사실의 지시나 보고 이상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꽃 같은 시절』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작가는 남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평생을 뿌리내리고 살아온 주민들에 대해 이미 일정한 문학적 답을 마련해둔 가운데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그 답은 우리도 얼마간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다. 단순화된 대립 구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현실 연관의 복잡하고 꼼꼼한 추적이나 인물들에 대한 탐사의 깊이는 제약될 수밖에 없다. 『꽃 같은 시절』에서 우리는 석재공장의 소음이나 먼지로부터, 그리고 힘겨운 싸움으로부터 놓여난 주민들의 평온한 삶을 바라게 되지만, 인간 진실의 깊은 시련들에 전율하고 반응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소외되고 밀려난 힘겨운 삶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서 공선옥 문학이 보여준 강도는 민중문학의 전통 안에서도 특별한 바가 있었다. 정형화된 인물형이나 소설 화법에 대한 반발 속에서 공선옥 소설이 들려주었던 개개의 아픈 사연들을 기억하는 만큼, 익숙하고 소박한 삽화적 보고에 그친 듯한 『꽃 같은 시절』의 소설적 탐구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어떤 고착된 심상을 현실에 투사하려는 손쉬운 유혹을 거절하는 가운데 인간 현실의 구체를 좀더 복잡하고 폭넓은 연관과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발견하는 일은 이즈음 한국소설에 더 절실히 요구되는 리얼리즘의 요청인지도 모르겠다.

 

 

5. 증언 불가능한 공백을 생각하며

 

김애란의 「서른」에서 우리는 무언가가 되리라고 믿었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으며,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탄식하는 서른살 여성의 편지와 마주한다. 우리 시대의 청년 현실을 반영하는 그 참혹한 편지에 대해 마땅한 응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조해진은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낯선 유럽 땅을 유령처럼 떠돌아야 했던 한 탈북인의 시간을 뒤따르는 가운데 타자의 고통과 대면하는 공감과 연민의 윤리를 집요하게 묻는다. 그리고 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시골 주민들의 투쟁기를 전하면서 약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불의의 세상을 고발하는 한편, 작지만 따뜻한 공동체적 연대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민중적 생명력의 너른 품을 환기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만연한 세상의 고통에 눈을 돌리고 발화되기 힘든 약자의 목소리에 자신의 상상력과 언어를 내어주는 것은 문학 본연의 자리다. 가령 김려령(金呂玲) 장편 『우아한 거짓말』(창비 2009)을 보면 ‘청소년 문학’의 영역에서도 우리 시대의 그늘진 현실과의 심각한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천지’라는 한 여중생의 충격적인 자살은 그 아이의 착하고 여린 심성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화연’이라는 친구의 악의적이고 교묘한 괴롭힘이 일차적인 원인이지만, 가해 아이의 경우를 포함해서 붕괴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가족 현실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작가는 아이들이 그 나이에 빠지기 쉬운 과장된 자기연민이나 자기기만의 심리적 미궁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도 아이들의 고립을 가정이나 학교를 둘러싼 어둡고 착잡한 현실의 맥락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천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엄마와 언니, 그녀를 힘들게 했던 두 친구에게 각기 편지를 남기는데, 그 편지들에 적힌 ‘용서’라는 단어를 읽는 일은 참으로 괴롭다. 김애란의 「서른」에서 ‘나’는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천지를 떠나보내고 남은 『우아한 거짓말』의 아이들은 어떠할까?

소설의 사사화(私事化)나 왜소화에 대한 일각의 우려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즈음의 한국소설에서 현실과의 긴장을 유지하며 상상력과 서사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분투해온 흔적을 발견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은 일인 듯하다. 돌아보면, 그간 다양한 개성이 분출하는 가운데 ‘현실’ 그 자체를 욕망과 환상의 구조를 통해 재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것’에 대한 환멸과 거부, 내면성에 대한 반발, 혼종성, 반인간의 시선, 만화적・우주적 상상과 묵시록적 비전, 파편적 알레고리와 판타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야와 감각을 동반한 소설 미학의 실험이 있었다. 다른 한편 이 글에서 살펴본 작가들의 경우처럼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소설미학에 충실하면서도 세상의 고통에 감응하는 서사와 상상력의 심화를 일구어온 흐름 역시 여전히 한국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소설미학의 다양한 모험은 단순히 형식적인 실험과 모색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대한 또다른 발견과 인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 물신화를 경계하면서도 언제든 장려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예컨대 김애란의 「서른」이 일견 특별한 서사적 실험을 수반하지는 않지만, 사실에 충실한 내면의 고백을 이어가는 가운데 무력한 개인들이 감내하고 있는 존재의 찢김이나 현실의 어둠을 무섭게 환기해내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서사적 모험은 편지의 도착을 유예시키고 그 응답의 자리를 윤리적 난문으로 만드는 바로 그 지점에 있을 텐데, 이때 소설의 화자 ‘나’가 고백하고 있는 사실들은 이미 그 자체로 회피와 망각의 환상과의 힘겨운 싸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조해진이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연민과 공감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서사의 내용과 구조로 밀어붙이는 지점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습적 상상력이라는 혐의가 없진 않은 대로 공선옥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무수굴댁의 시선 안에서 남도 사투리의 가락을 최대한 살려내며 『꽃 같은 시절』의 서러운 싸움을 감싸는 대목에는 특별한 언어적 활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에서 유대인 집단학살의 생존자들이 남긴 증언의 기록을 검토하는 가운데 ‘증언’의 윤리학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다. 증언의 아포리아는 증언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증언은 깊은 곳에 증언될 수 없는 무언가를, 살아남은 이에게서 자격을 내려놓게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 ‘참된’ 증인, ‘온전한 증인’은 증언하지 않았고 증언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맨 밑바닥에 떨어졌던 사람들, 즉 이슬람교도들, 그러니까 익사한 자들이다.”(51면) 그런 만큼 증언은 “공백으로부터 생겨나는 소리, 고독한 이가 말하는 비언어, 언어가 그것에 응답하고 언어가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비언어이다.”(58면) 아우슈비츠라는 극한의 상황에 대한 논의이고, 쉽게 인용하여 전유하기 힘든 맥락을 품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 증언의 아포리아를 단서로 삼아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우리 시대 소설의 자리를 좀더 근본적으로 성찰해볼 수도 있다. 가령 증언의 언어가 비언어의 공백과 맺고 있는 한계상황을 소설과 관련지어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소설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알아들을 수 없고 무의미한 중얼거림만이 남을 수도 있다. 당연히 이것은 소설이 감당하기 힘든 자리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좀더 강력하게 환기하는 소설의 언어와 상상에 관해서라면 논의의 여지는 있다. 「서른」에서 문자메시지로 남아 있는 혜미의 절규는 ‘나’의 자리에서 보면 그 문자 바깥 ‘비언어’의 영역을 넘치는 고통으로 공백화하고 있다. 이때 「서른」의 편지가 어쩌면 너무 매끄럽게 씌어지고 봉합되어 있지 않은지 묻는 것은, 바로 그 또다른 소설 언어의 가능성을 향한 질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