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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
여기 사람이 있었다
르뽀, 죽음의 증언 그리고 삶을 위한 슬로건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묵시록의 네 기사』 『눈먼 자의 초상』이 있음. nomadman@hanmail.net
1. 림보의 한가운데서
“나를 거쳐서 길은 황량한 도시로/나를 거쳐서 길은 영원한 슬픔으로/나를 거쳐서 길은 버림받은 자들 사이로.”1) 나는 단떼가 막 지옥문 앞에 도착해 읽은 문장과 최근 몇년간 한국에서 벌어진 잔인한 정치적・경제적 폭력의 참상 그리고 그로 인해 완전히 바스러진 삶과 죽음에 대한 참혹한 증언들을 어쩔 수 없이 몽따주하게 된다. 날것으로 육박해오는 것 같은 현실을 가공(架空)의 말로 버팀목 삼아 가까스로 견뎌내야 했다. 고통스러운 증언이 있고, 그 증언을 듣는 고통스러운 침묵이 있다. 하나의 고통이 다른 고통을 침묵 속에서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런데 참혹한 살풍경에 대한 생존자와 기록자의 증언은 어떻게 말의 까마득한 공백을, 침묵의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를 언어도단에 빠뜨린 몇몇의 르뽀르따주(이하, 르뽀로 약칭)는 자연사나 돌발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연사나 돌발사로 처리되고 마는, 철저하게도 그리고 처절하게도 정치적인 죽음에 대한 증언이었다.
해고노동자인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파트 베란다로 걸어가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란 없다는 듯이 그 너머로 추락해버린 아내의 마지막 침묵, 망루에서 화염에 휩싸인 철거민들과 경찰의 끝내 들리지 않는 비명, 해고는 살인이고 철거는 죽음이며 이 모든 재난은 산재라는 도처의 피 묻은 절규, 해고에 저항하면서 죽어간 노동자들을 애도하는 추도사를 읽는 어느 목소리의 흐느낌, 법정에서 들려오는 심판의 목소리와 유가족의 항의, 한숨, 울음소리.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었지만 그렇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시인이 지옥의 입구 아케론강에서 들었던 온갖 “알 수 없는 수많은 언어들, 끔찍한 얘기들,/고통의 소리들, 분노의 억양들, 크고 작은 목소리들,/그리고 손바닥 치는 소리들”(3곡, 25~27절). 어떻게 저 소리들은 듣지 않으려 해도 끊임없이 들리고, 또 산 자가 죽은 자를 죽은 자가 산 자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서로 부르며, 우리의 억울한 죽음을 너희가 살아 반드시 증언하라고 호소하는 돈호법의 형태를 띠고 있는가. 또한 그 돈호법은 도무지 외면하려 해도 끝내 보지 않을 수 없는 고르곤의 얼굴과 마주하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단떼의 지옥을 비스듬하게 거슬러야 한다. 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옥을 관상(觀想)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지옥을 빼닮은 현실 한복판에서 현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이상 단떼의 지옥은 하느님에게 영원히 버림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에 태어난 선인(善人), 신성모독꾼, 협잡꾼과 사기꾼, 고리대금업자, 정치적 죄인이 영원히 고통받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의 끝 모를 어둠은 천국을 감도는 과도한 광채와 찬양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완전히 투명한 빛으로 감싸여 천사들의 끝없는 할렐루야로 가득 찬 천국은 이제 후안무치한 1%의 자본가와 그의 하수인들이 희희낙락거리며 거주하는 그들만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과도하게 밝은 빛으로 둘러싸여 천사들의 합창소리를 들으며 천국의 권좌에 앉아 있는 하느님-자본에게 선고를 받아 죽어도 빚을 갚지 못하고 영원히 속죄해야 하는, “벌거벗은 지친”(3곡, 100절) 영육들이 오히려 지옥에 있다. 자본의 써치라이트와 할렐루야로 눈부시고 시끄럽기만 한 천국에서 무저갱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면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문학은 그 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보이지 않는 얼굴을 얼마만큼, 어떻게 보고 듣는 것일까. 그런데 어쩐지 아케론강과 화염으로 둘러싸인 진짜 지옥 사이에 있는, 흥미롭게도 수많은 문사(文士)가 거주하는 제1지옥, “희망 없는 희망”의 림보(limbo)에서는 “단지 한숨소리”만이 “영겁의 허공을/언제까지라도 떨게 하고 있었”다(4곡, 42절, 26~27절). 지옥의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실어증에 걸린 단떼처럼 한국문학도 말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하여 겨우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거기서 본 이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해야 할 긴 얘기가 날 앞으로 떠밀고,/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으니”(4곡, 145~47절). 참으로 보고 들어야 할 이야기는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한마디도 제대로 발음하기 힘들다. 이러한 말할 수 없는 무기력을 그저 무관심과 무능함으로 간주하고 목청 높여 탓해야 하는지, 아니면 섣부른 현실참여에의 욕구를 미적 변용의 힘으로 적절히 제어하는 도중에 문학에 값하는 것의 도래를 천천히 도모해야 하는지.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미적 자율성과 문학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시대의 참상에 대한 증언은 미와 형식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너무 직접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그럼에도 ‘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또한 진실은 아닐까.
다큐멘터리 필름,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어쩌면 문학보다도 ‘말이 사실에 미치지’ 못함에도 거기에 도달하려는 현실대응력에서는 더 민첩하고 핍진할지도 모르겠다. 용산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두개의 문」(2012)에서 용산철거민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원은, 어쩔 수 없이 멀리서 불타는 망루를 비추던 카메라가 용산참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게 너무 없다는 굉장한 무력함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력함이라고 해도 그것이 재현의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재현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목소리들은 계속 들려온다. 대물림한 빚을 떠안은 딸이 한 아버지에게 다른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제발 좀 죽여주세요. 제발 우리 아버지를 죽여주세요. 저를 가엾게 여기신다면 제발 우리 아버지 좀 죽여주세요. 제 눈앞에 우리 아버지 시체를 보여주세요. 하느님 아버지, 제발 좀 죽여주세요.”(영화 「화차」, 2012). 차라리 저주인 이 목소리는 곱씹을수록 더할 나위 없는 신성모독이다. ‘하느님 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이 목소리에서 다른 두 아버지는 어느새 한 아버지로 합체된다. 그 순간, 소원은 저주이자 독신(瀆神)이 된다. 빚을 대물림하는 아버지, 자식을 채무자로 만드는 무능력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시체-아버지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시체’를 눈앞에 보여주지 못하면, ‘하느님 아버지’ 당신도 ‘아버지 시체’다! 결국 돈 때문이다. “돈.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사랑, 명예, 폭력, 분노, 증오, 질투, 복수, 죽음.”(영화 「피에타」, 2012) 사채업자 아들에게 엄마가 말한다. 엄마의 대사가 곧 이 영화다. 아들은 자신에 의해 불구가 된 채무자들이 저주하던 방식대로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 식으로 어머니와 아들은 속죄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라는 채무의 신-아버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빚진 자들을 결코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화차」에서 자식은 부모의 빚을 떠안고, 「피에타」에서는 자식의 빚을 부모가 떠안는다. 단떼가 묘사한 스틱스강의 소용돌이처럼 빚은 분노와 불안에 떠는 채무자들을 삼켜버린다. 그럼에도 왕국의 찬란한 빛과 찬송의 영광은 지상 최후의 채권자인 자본이라는 하느님으로 귀속된다. “이제 우리는 자본이라는 신에게 빚을 진” 것이다. 앞서 일별한 영화들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연속된 금융위기 이후 현대 자본주의의 주체 형상은 ‘빚을 진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되는 것처럼 보인다.”2)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읽게 될 여러 르뽀는 이 빚진 인간들의 또다른 벡터인 해고노동자와 철거민의 삶과 죽음, 투쟁을 강렬하게 증언한다는 데서 영화만큼이나 문학을 앞서는 것 같다.
2. ‘르뽀문학’에서 르뽀로
근래 몇몇 논평이 주목한 것처럼, 80년대 한국문학의 장에서 기존의 보도방식에 맞서 특히 노동현장의 삶에 대한 증언과 폭로를 통해 잠시나마 문학 계급장을 달았던 르뽀가 최근에 집중적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다.3) 2000년대에 한정해 말하자면, 오수연(吳受姸)이나 김곰치 등의 작가들이 이라크전쟁에서부터 새만금 방조제 건설, 평택의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현장에 이르는 투쟁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르뽀를 써왔지만 문학 장(場)에서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1~2년 사이에 쏟아져나온 르뽀는 하나의 글쓰기 장을 형성할 만큼, 지난 5년간 이명박정부의 집권하에 일어났던 용산참사, 두리반 투쟁으로 알려진 도심 재개발과 철거, 얼마 전 스물세번째 노동자의 죽음을 불러온 평택 쌍용차 노동자들의 해고, 4대강 공사와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유해물질 중독에 의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잇따른 병사(病死)와 후유증, 정리해고를 철회하기 위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선 김진숙(金鎭淑)과 희망버스로 상징화된 연대투쟁, ‘월가를 점령하라’라는 슬로건의 월가의 반자본주의 투쟁 등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또 2009년에 창간된 반년간 잡지 『리얼리스트』는 “순도 높은 언어를 길어올리는 문학적 실천과 약자를 향해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이루며 가야 한다”4)는 기치 아래 동시대의 사회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르뽀를 집중적으로 싣고 있다.
‘시와 정치’에 대한 최근의 논쟁이 환기하는 것처럼, 르뽀의 융성과 그에 대한 논의도 문학에서 ‘80년대적인 것의 귀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리얼리스트』의 창간사와 거기에 실린 르뽀 등을 읽다보면 80년대의 실천적 글쓰기 또는 실천적 문학장르인 ‘르뽀문학’에 대한 논의를 아무래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문학에서 르뽀는 무엇보다도 독재정권의 언론 통제와 조작에 맞서는 대안적인 언론의 기능과 더불어 질문이 봉쇄된 사회의 막힌 숨통을 터준다는 데서 “숨쉬기 운동”인 동시에 “질문 양식”의 글쓰기, “사회적 상상력과 역사적 상상력”을 함께 일깨우는 “르뽀문학”으로 논의된다.5)
특히 80년대적 문화 게릴라 전술의 일환으로 방금 인용한 내용이 서문으로 실린 무크지 『르뽀時代』(1983)는 창간호만 남겼지만, 르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탐구를 촉발시켰다는 데서 다시금 상기될 필요가 있다. 『르뽀시대』에 기대어 말해보면, 80년대의 르뽀는 대략 세 층위에서 ‘르뽀문학’으로 정위(定位)된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앞서 말한 것처럼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왜곡을 일삼는 주류언론에 맞선 대안 언론으로서의 기능. 둘째, 기존 문학의 직무유기에 대한 ‘외곽’의 비판을 담당하는 전술로서의 문학. 『르뽀시대』에서 시인 황지우(黃芝雨)가 언급하듯이, 르뽀문학은 “오늘날 우리의 문학이 거의 자포자기하고 있는 지금 이곳의 삶의 현장을 문학의 또다른 장르로써 표현”하고 “언론과 문학의 일부에서 묵인되고 있는 어떤 직무유기”(199면)를 일깨우는 역할을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채광석(蔡光錫)은 이와 관련해 “현장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발의 의식화’”(333면)가 르뽀문학의 중요한 전제이며, 이때 ‘발의 의식화’는 민중의식을 르뽀 작가가 부단히 자기화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셋째, 문학장르로서의 위상 정립. 르뽀는 “직접 전달 효과가 큰 사실성 장르”로 다른 문학장르에 비해 상상력의 제약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본질에 보다 접근하는 장르로서의 의미”가 부여되어야 하는 실천적 문학장르, 곧 ‘르뽀문학’인 것이다.6) 공지영(孔枝泳)이 『의자놀이』 서문에서 “처음으로 문학 아닌 책”을 썼다고 말하면서 르뽀라기보다는 “사실 에세이”라고 굳이 명명한 것을 보면(5면), 확실히 80년대의 르뽀문학과 차이나는 르뽀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얼마간 실감할 수 있겠다. 거기에는 “현실이 다 그러니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107면)라는 픽션에 대한 회의가 암암리에 들어서 있다.
르뽀에 대한 최근의 두 논평7)은 80년대 르뽀문학에 대한 논의를 얼마간 이어받으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학자인 김원(金元)은 최근 1~2년간 출간된 르뽀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2000년대 르뽀의 특이점을 잡아낸다. 그는 70~80년대의 르뽀의 목적이 주로 ‘폭로’에 맞춰진 데 비해 2000년대의 르뽀는 비가시적인 유령과 같은 사회적 써발턴(subaltern)이 겪는 차별 그리고 그들의 트라우마와 고통을 기록하는 한편 비가시화되는 써발턴을 정치적 의제의 한가운데로 가시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여전히 르뽀의 가장 큰 기능은 80년대 르뽀문학과 같은 ‘폭로’다. 그렇지만 “관찰자나 지배적 질서의 공범자로부터 벗어나기와 성찰성”, 그리고 써발턴의 목소리를 적극 “들어주기”가 기왕의 르뽀문학과 변별되는 최근 르뽀의 특징이다(202면). 그것은 장르적으로 ‘정전으로서의 역사서사와의 충돌과 거리두기’를 수행하는 ‘비(非)정전문학’이다. 한편 2000년대의 르뽀는 미학적 재구성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되 문학과는 변별되는 “글쓰기로서의 정치성을 발현해야 한다”(93면)는 손남훈(孫南勳)의 논의도 있다. 그에게 80년대 르뽀문학이 염두에 두었던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성에 육박하는 ‘리얼’에의 충동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리얼’은 “체험과 경험의 빈도수”가 아닌 “삶의 지배적인 벡터와 그 역능들에 대한 르뽀 기록자의 적확한 시선이 간취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된다(88면). ‘벡터’는 삶의 다양하고도 복잡한 욕망들이 상호 교섭하는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이 되겠고, 그 벡터를 그려내는 언어는 전달 내용보다는 그것이 환기할 맥락이 주목되는 언어다. 욕망의 다기(多岐)한 복잡성을 그려내는 만큼 그에 따른 굴곡과 변형이 따르는 언어를 세심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80년대식 르뽀문학이 “왜곡된 사실, 숨겨진 진실을 곧고 바르게 펴주는” 글쓰기였다면(『르뽀시대』 9면), 오늘날의 르뽀는 씨뮬라끄르와 음모론에 맞서 “진실이 없음에도 진실에 다가서려는 모순적인 글쓰기”여야 한다는 것이다(손남훈, 78면).
두 논의를 종합하면 최근 르뽀는 80년대의 르뽀문학처럼 지금 여기의 삶의 현장에 여전히 충실한 동시에 기존 정전 문학과는 차별된 방식으로 미학적 가능성을 타진하되 타자, 써발턴의 목소리에 들어 있는 욕망의 복잡성을 고려하고 한낱 관찰자가 아닌 기록자의 자기성찰과 자기연루를 끊임없이 윤리적으로 수행하는 글쓰기다. 물론 80년대 르뽀문학과 최근 르뽀에 대한 논의를 읽으면서 여전히 그 차이만큼이나 유사성이 두드러짐을 재확인할 수도 있겠다. 역사의 주체인 80년대 민중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264면)인 2000년대 써발턴으로, 르뽀문학 작가가 갖춰야 했던 민중의식의 자기각성은 써발턴의 목소리를 듣는 르뽀 기록자의 자기반성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고자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을 때” “르뽀의 감동”이 올 수 있다는 황지우의 우려(『르뽀시대』 199면)는 르뽀의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전치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 삶과 죽음의 의자놀이
누군가 말한 것처럼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는 부채를 자산으로 증식하고 독점하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지배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강화와 맞물리며, 이때 국가는 “가능한 한 최소의 통치”가 아닌 “가능한 한 최소의 민주주의”라는 무시무시한 형태로 나타난다.8) 도심 재개발의 비극을 상징하는 용산참사, 해외자본에 의한 매각과 기술 유출로 참극이 시작된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의 부당해고와 정치적 죽음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바로 자본과 결탁한 국가가 공동체의 최소한의 형태인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등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통치마저 무시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핵심적인 사건들이다.
이 글이 다루는 르뽀에 기록된 죽음과 철거, 해고, 질병에 따른 개인과 공동체의 파탄과 망실에 대해 기록자들은 그 누구도 이 사태에서 예외가 아님을 없음을 증언하고 있다. 용산 4구역에서 7년간 도서대여점을 운영하다가 하루아침에 쫓겨나 참사 현장에 있었던 박선영씨는 말한다. “비정규직이 또다른 철거민인 거 같아요. 일터에서 쫓겨나고 집을 얻지 못하면 또 세입자가 되는 거고 그렇게요.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들이 철거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요.”(『여기 사람이 있다』 218면) 비정규직이 곧 철거민이며, 1%의 ‘그들’을 제외한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에 대해 시인 송경동(宋竟東)은 극명한 점층법의 언어로 이어받는다. “철거는 단지 집을, 가게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철거는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다. 먼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삶의 기본적인 평화를 갈구했던 가난한 마음과 의지를 철거한다.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철거한다. 다음으로는 관계를 철거한다. 10년, 20년 가꾸어온 삶의 공동체, 이웃들과의 관계를, 세계와의 관계를 철거한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에게서 물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잔인한 일이다. 나무를 흙에서 뽑아내 따로 살라는 말과 같다. 아이들에게서 친구를 빼앗는 것이며, 낯익고 친숙한 모든 풍경으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그것은 삶의 죽음이다.”(『꿈꾸는 자 잡혀간다』 195~96면)
삶의 죽음, 죽음의 삶. 자본의 이윤증식을 위한 무자비한 철거와 끝없는 해고 가운데 삶은 죽음과 그 어느 때보다 친숙해지며, 인간은 그가 거주했던 세계뿐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낯선 존재가 된다. 아마 우리 시대의 그 어떤 문학보다 리얼할 법한 웹툰 속의 연쇄살인범(황준호 「인간의 숲」, 2012)과 좀비의 형상(모래인간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2012)은 이처럼 관계의 파괴와 출구 없는 삶의 미래를 호러의 형태로 극단화한 것이리라. 공지영의 표현을 빌리면, 삶은 누가 먼저 그 의자에 앉게 되느냐에 따라 고용과 해고,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의자놀이’에 내몰리는 생존(survival)이다. 어쩌면 단 한번의 자산관리와 자기경영의 실수로도 도무지 복구 불가능하게 훼손된 채 영원한 빚쟁이의 형벌을 선고받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의 말로(末路)가 대중문화에서 좀비의 형상으로 극화(劇化, 極化)되는 것은 아닌지. 조만간 우리는 정통소설보다는 호러소설이나 웹툰에서 삶과 죽음의 의자놀이를 더욱 잘 체감할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서 『의자놀이』를 좀더 읽어보겠다.
이 책에서 논란이 되면서도 문제적인 부분을 하나 짚는다면, 그녀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 방식이 이중구속(double bind)으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게 아닌가 묻는 일종의 정신분석적 해석이다. 공지영이 언급하는 이중구속의 사례(89면)는,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다가가자 막상 아들을 껴안지도 않고 거부하는 어머니와 그 때문에 혼란해하는(‘안아달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 아들의 모습에서 환기된다. ‘넌 내 말을 듣지 마.’ 이것은 명령인가 명령거부인가, 그리고 그 거부는 명령인가 아닌가. 그 명령에 따라야 할지 말지 도무지 결정이 불가능한 이중구속. “상하이차는 파업 후 쌍용자동차를 인도의 마힌드라사에 넘겼다. 상하이차로서는 만족스러운 해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면 한진중공업은 조남호 회장이라는 대상으로 상징적 대치상황이 정리된다. 현대자동차 하면 정몽구 회장, 삼성 하면 이건희 회장 같은 식이다. 그런데 쌍용자동차에는 대상이 없다. 그들은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 같다. 유령과 싸우면 싸우는 사람이 제정신을 잃게 된다.”(166면)
공지영에 따르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누구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해고에 직접 책임이 없는 대리인을 궁극의 적으로 삼을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누가 책임자이고 적인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요 사인(死因) 가운데 하나가 공권력의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인 이유도 여기서 약간 짐작할 수 있겠다. 파업에 따른 손실과 실직의 고통은 고스란히 해고자와 그들 가족의 몫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책임 당사자가 모호하다는 것이 적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결론으로 곧장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호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가) 대 노동(자)라는 ‘대치상태’의 한 축인 자본이라는 추상적 실체의 모호함일 뿐이다. 해고책임을 소거하는 당사자가 바로 자본이며, 마힌드라사에서부터 기업의 인수합병을 승인한 국가, 어쩔 수 없다며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면서 용역을 고용했던 노무관리자들이 자본의 대리인들, 책임의 당사자들, 적(敵)들인 것이다.9)
공지영의 정신분석적 논평은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해고사태에서 보인 ‘의자놀이’가 누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지적했다는 데서 유용해 보인다. 이중구속은 이중배제를 낳는다. 타자의 모호한 메시지를 받는 나는 메시지의 배후를 찾지 못해 분열되거나 그 메시지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되거나 하는 식으로.10) 해고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공지영의 논평을 동심원으로 확대해가면, 정리해고가 삶의 해고가 되는 이 세계는 메시지를 분열로 체험하는 우울증자와 그것은 아무래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냉소주의자의 두 진영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미친 의자놀이는 자본의 운동처럼 계속된다. 그렇게 전자는 이 세계에서 죽은 자—배제된 자, 후자는 어쨌든 산 자—살아남는 자가 된다.
공지영이 우려했듯이, 쌍용자동차 분향소 앞을 자기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이 잠재적 냉소주의자들은 미래의 우울증자이기도 하다. 누구도 거기서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는 르뽀 작가조차도. 최근의 르뽀에 기록자의 자기연루의 목소리가 두드러지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죽음과 병고의 증언을 기록한 한 저자는 이렇게 심경을 토로한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삶의 희극과 비극을 논하는 건 그 삶을 지켜보는 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지켜보는 자가 아니라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희극과 비극으로 자신의 삶을 평하거나 감상에 젖지 않았다.”(『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13면) 최근 르뽀에서 기록자가 환기하는 무력함, 한숨, 추도시를 낭송하면서 어느 시인이 토로했던 괴로움은 기록자조차도 자신이 증언한 사건에서 결코 예외가 아님을 역설하는, 상황에 대한 자기연루의 증거가 아닐까.
4. 르뽀, 증언과 슬로건의 글쓰기
이쯤에서 르뽀를 최근 몇년 동안 진행되었던 ‘문학의 정치’ 논쟁과 결부시킬 필요가 있겠다. 특히 논쟁의 중심점에서 거의 해석의 압도적인 지평으로 참조되었던 자끄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논의는 르뽀와 그리 손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랑씨에르가 ‘문학의 정치’는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한 것을 다시금 상기해보자. 그러면서 그는 ‘문학의 정치’로 오해될 몇가지 사례를 배제한다. 랑씨에르를 통해 우리는 정치적 배제와 포함의 산술(算術)을 익힌바, 배제는 언제나 포함하는 배제다. 그가 ‘문학의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에는 “작가가 저술을 통해 사회구조, 정치적 운동들, 또는 다양한 정체성들을 표상하는 방식”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르뽀는 랑씨에르가 ‘문학의 정치’가 아니라고 배제했던 바로 그 글쓰기에 포함될 것이다. 르뽀는 ‘문학의 정치’가 아니라 단지 ‘정치의 문학’일 뿐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러한가. 랑씨에르는 ‘문학의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11) 여기서 랑씨에르의 논의는 ‘문학의 정치’를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만 한정 짓지 않을 여지를 남긴다. 그는 ‘정치와 문학’의 분리와 결합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에 ‘사회구조나 정치적 운동들을 작가가 저술을 통해 표상하는 글쓰기 방식’인 르뽀가 포함되지 말아야 할 이유란 딱히 없다. 랑씨에르가 ‘글쓰기의 민주주의’로서 문학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도 한편 고려해보자. 그것은 무엇보다도 들리지 않는 소음을 들리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기입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문학의 정치’이다. 이 또다른 ‘문학의 정치’는 문학/비문학의 경계를 지우며, 작가/비작가의 위계마저도 무시한다. 플로베르(G. Flaubert)의 『보바리 부인』만큼이나 평등을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의 산물인 노동자들의 시와 산문,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입하는 르뽀도 ‘문학의 정치’를 구현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보바리 부인』만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시와 산문, 르뽀를 배제한 ‘문학의 정치’를 말해온 것은 혹시 아닐는지.
우리가 읽는 르뽀가 반드시 죽음과 그에 대한 추도사로 채워진 것만은 아닐 텐데,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는 자전적 이야기, 추도사, 인터뷰, 르뽀 등의 묶음으로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규정될 수 없는 장르혼성에서 흘러나오는 김진숙의 목소리는 얼마나 혼성적인가. ‘자본’과 그에 복무하는 ‘미디어’를 다음과 같이 신명난 언어로 풍자할 때, 그녀는 노동자이면서 작가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밀어내는 것도 자본이고, 이제 와서 아빠 힘내시라고 노래 불러주는 것도 자본이고, 집도 사고 차도 사야 하는데 당신이 아프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주는 것도 자본이고, 사고가 나면 남편보다 먼저 달려와주는 것도 자본이고,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도 자본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자본은 이제 안아달라고 부르짖습니다.”(『소금꽃나무』 220면) 김진숙의 언어에서 자본의 전능함은 반드시 전능함만은 아니게 되며, 이는 자본의 틈새에서 숨쉴 수 있는 삶과 그를 위한 언어가 깃드는 최소한의 둥지가 된다.
랑씨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구분한다. 치안은 거기, 85호 크레인 위, 남일당, 대한문에는 아무것도 볼 게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저 크레인일 뿐이며, 그곳은 선량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통행공간일 뿐이다. 이에 반해 정치는 거기, 85호 크레인 위, 남일당, 대한문에는 해고와 철거가 죽음이라고 부르짖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있고, 그것은 계속 들려야 하며 명명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읽은 르뽀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의 정치’를 수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르뽀를, 문학적 글쓰기/비문학적 글쓰기라는 ‘감성의 분할’을 문제 삼는 글쓰기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학이 자신의 문학성을 고집하고 위계화하는 ‘감성의 분할’ 방식 자체에 대해, 문학이 치안으로서 존재할 수도 있는 방식에 대해 르뽀가 의문을 던지는 기능을 할 수 있지 않나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12) 이것은 예를 들면 최근에 보다 직접적이고도 정면 돌파의 방식으로 당대 현실의 사건을 적극 삽입한 손아람의 『소수의견』(들녘 2010), 주원규의 『망루』(문학의문학 2010), 김현영의 『러브 차일드』(자음과모음 2010), 그리고 간접적인 환기의 방식으로 김연수(金衍洙)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 2012) 등이 그랬던 것처럼 용산참사나 한진중공업 크레인 시위 등을 픽션의 형태로 분절하며 변형할 때, 즉 논픽션이 픽션화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미적 변용의 정도를 측정할 때도 유용하다. 논픽션을 픽션화하는 작품들이 반드시 즉물적이거나 소재주의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사건 등을 언급하려는 조급성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며, 픽션들이 반드시 전자보다 덜 소재주의적이고도 다면적인 전위의 방식으로 ‘문학의 정치’를 구현하고 있다고 볼 근거도 없다. 물론 리얼한 것에 대한 논픽션의 조급한 요구가 언어와 형식을 세심히 고려하는 픽션에 대한 미학적 방기로 나타날 수 있다. 그만큼 미적인 것에 대한 픽션의 요구가 합의의 불문율이 되어 재현에의 노력에 대한 성마른 기각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13) 그보다 당장의 솔직한 심경은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파업 등은 문학으로 재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미학적 고려가 갈수록 굳어져가면서, 끝없이 무너져내리는 현실과 그렇게 목소리를 잃어가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하거나 환기하기를 회피하는 무능력의 합의로 은밀하게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다.
이쯤에서 현실에 대한 미적, 정치적 실천의 첨병으로서의 르뽀 글쓰기와 관련해 증언과 슬로건의 언어를 특별히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정치적, 문학적 치안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면서 삶이 비참한 생존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증언, 그리고 사건과 파장의 역학 속에서 사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언어를 뜻하는 슬로건. 먼저, 증언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증언에 대해 정식화한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증언은 말을 못하는 자가 말을 하는 자에게 말하게 만드는 곳에서, 말을 하는 자가 자신의 말로 말함의 불가능성을 품는 곳에서 발생하며, 그렇게 침묵하는 자와 말하는 자”는 “불가능한 식별역에 들어서게 된다.”14) 우리가 읽은 대부분의 르뽀는 보고와 폭로이면서도 말하기 힘든 것을 말하는, 말하기가 그것의 불가능성을 내포하는,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의 역설인 증언이었다. 그것은 사건 당사자의, 자신의 삶이 살아남음이 된 자의, 실어증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의 증언과 그의 증언을 이어받은 기록자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증언은 증언의 발화 가능성과 불가능성, 재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이접(離接)이다. 그래서 증언은 재현과 같은 미학적 미메시스(mimesis)의 문제를 다시금 숙고하게 만든다. 또 증언은 단지 르뽀 같은 논픽션의 발화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필자는 일전에 사회적 폭력의 망각을 물질화하는 황정은(黃貞殷) 소설의 중핵에 증언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15)
그리고 르뽀로부터 배울 수 있는 언어의 두번째 사용법인 슬로건. 우리는 슬로건을 단지 선동적인 정치적 주장을 담은 부담스러운 명령문, 프로파간다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등이 프랑스의 불법체류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내세운 ‘여기 살면, 여기 사람’(On est ici, on est d’ici)이라는 슬로건은 영토와 인종, 국민이라는 개념 전체를 일거에 의문에 부치는 탁월한 정치적 개입이자 언어의 전술이다. 이 슬로건은 “내가 살던 데서 살고, 장사하던 데서 계속 장사하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고 터무니없는 요구인가요?”(『여기 사람이 있다』 240면)라는 용산철거민 지석준씨의 반문과 공명한다. 이처럼 슬로건의 언어는 호소이면서 정치적 반문의 언어, 공명의 언어이자 다른 언어를 생성하는 증폭의 언어다. 2011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던 ‘월가를 점령하라’ 투쟁의 현장을 담은 고병권(高秉權)의 르뽀에는 슬로건을 정식화하는 대목이 있다. “김진숙씨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사건, 그의 절규가 만들어낸 파장에 참여하면서 어느 시인은 자신이 받은 절규,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시로 번역하고 전달 증폭시킨다. 모두가 파장, 즉 운동을 통과함으로써 스스로 전달의 매체, 증폭과 번역의 기계처럼 작동한다.”(『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221면) 이것이 바로 “발화가 정세의 사태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개입”16)이 되는 슬로건이다. 지금까지 르뽀를 읽으며 만날 수 있었던바, 삶이 한낱 생존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저항이 곧 증언이라면, 슬로건은 적극적으로 삶의 정치를 구축하는 연대의 언어 프로젝트다. “우리는 솔직히 말해서 인간이기 이전에 실험동물이었어요.”(『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235면)라는 노동자들의 증언은 우리는 더이상 자본에 의해 “처분 가능한 존재”(『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267면)가 아니라는 항의의 슬로건과 이제는 한몸이다.
5. 여기 사람이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용산역에 갈 기회가 있었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용산참사 현장에 들렀다. 포장마차와 집창촌이 들어서 있던 역전 사거리의 건물들마저 철거된 용산역 부근은 참사 이후에도 여전히 도심 재개발에 따른 온갖 사회적 증상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내장한 장소로 보였다. 용산참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건물인 남일당마저 철거된 그 빈 자리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인간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하느님의 무심한 눈길을 닮은, 화려한 씨티타워 세채가 뿜어내는 적막한 불빛 아래 놓인 참사의 현장은 주차장과 잡풀 가득 찬 공터로 남겨져 있었다. 건설사들의 이권다툼으로 용산재개발이 늦춰질 뿐 아니라 백지화마저 검토되고 있다는 최근의 보도를 접한 터라, 분노는 더욱 치밀어올랐다. 겨우 잡풀로 가득한 공터와 임시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다섯명의 무고한 철거민과 한명의 젊은 경찰의 목숨을 앗아간 것인지, 입이라도 달려 있다면 무슨 변명이라도 해봐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스마트폰 카메라로 현장을 담던 중 간이철판으로 담장을 줄줄이 세운 곳에서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사람이 있었다.” 그랬다, 여기 망루에는 분명 사람이 있었다. 남일당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에게 ‘거긴 아무것도 없으니 그냥 지나가시오’ 말하는 경찰들의 공허한 목소리와는 달리, 거기에는 분명 ‘사. 람. 이. 있. 었. 다.’ 남일당 빈터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여전히 무엇인가가 ‘더’ 있다. 남일당의 불탄 자리, 김진숙이 내려온 85호 크레인 위, 월가의 주코티 공원. 비어 있어도 결코 비어 있을 수 없는 빈 자리들, 이 비어 있음 주위를 떠도는 언어들. 우리는 단떼가 묘사한 아케론 강가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계속 들어야 하며, 또 반문할 따름이다. “지금 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3곡, 32~43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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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떼 알리기에리 「지옥편」 3곡, 『신곡』, 1~3절. 인용은 『신곡』,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7, 26면. 이하 『신곡』의 「지옥편」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곡수와 절수만 표시한다.
2) 마우리찌오 라짜라또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2, 60, 67면.
3) 이 글에서 읽을 르뽀는 다음과 같다. 조혜원 외 『여기 사람이 있다』, 삶창 2009; 희정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아카이브 2011; 공지영 『의자놀이』, 휴머니스트 2012; 고병권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그린비 2012. 그밖에 르뽀가 포함된 다음 텍스트도 본문에서 언급한다.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송경동 『꿈꾸는 자 잡혀간다』, 실천문학사 2011. 이 책들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제목과 면수를 표시한다.
4) 『리얼리스트』 창간사, 삶창 2009, 2면.
5) 오효진 외 「어둠을 져갈 한마리의 속죄양」, 『르뽀時代』, 실천문학사 1983, 10면. 이 책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면수를 표시한다.
6) 김도연 「장르 확산을 위하여」, 성민엽 엮음 『민중문학론』, 문학과지성사 1984, 125면.
7) 김원 「서발턴의 재림: 2000년대 르포에 나타난 99%의 현실」, 『실천문학』 2012년 봄호; 손남훈 「‘리얼’을 향한 르포르타주의 글쓰기」, 『오늘의문예비평』 2010년 가을호. 이 글들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필자명과 면수를 표시한다.
8) 마우찌치오 라짜라또, 앞의 책 217면.
9) 이것이 르뽀 작가 이선옥이 공지영의 『의자놀이』에 대해 정당하게 비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선옥 「22명의 죽음, 미운 놈은 미워하며 살자」, 『프레시안』 2012.5.10.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510112034
10) 대리언 리더 『광기』, 배성민 옮김, 까치 2012, 111면. 공지영이 제시하는 이중구속의 사례는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다.
11) 자끄 랑씨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9면. 인용한 구절들은 모두 같은 면이다.
12) 여기에는 일전에 필자가 르뽀를 논평했던 방식에 대한 자기비판이 포함된다. 필자는 소설(픽션)의 우위를 암묵적으로 가정한 채 르뽀를 “현실 그 자체를 알리려는 단일하고도 계몽적인 의도로 언어를 재현의 수단과 기능으로 일정하게 제한”하며, 르뽀에 의해 재현된 “현실은 그 낱낱의 세목이 아무리 다양하고 풍부하더라도 언어가 붙잡으려 따라다니는 개별적 사실의 집합에 머무를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개별 르뽀 텍스트에 대한 비판을 될 수 있어도 르뽀 글쓰기 장르 자체에 대한 비판이 될 수는 없다. 졸고 「연대의 환상, 적대의 현실」, 『눈먼 자의 초상』, 문학동네 2010, 238면.
13) 일부 수긍할 만한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김예림 「‘존중’ 없는 사회의 대중문화, 그 욕망과 미망에 대한 단상」, 『문학과사회』 2012년 여름호 참조.
14)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2, 181면.
15) 졸고 「인형과 꼽추난쟁이」, 『문예중앙』 2010년 겨울호 참조.
16) 장자끄 르쎄르끌 「정확함의 사도 레닌, 혹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 『레닌 재장전』, 이재원 외 옮김, 마티 2010, 4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