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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
‘청춘’의 시인, 우리 시대의 전위가 되다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2006년 『문예중앙』에 평론 「아이들, 가족 삼각형의 비밀을 폭로하다」를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 『얼굴 없는 노래』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예외들』이 있음.
진은영 陳恩英
시인.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등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가 있음.
내가 진은영 시인에게 처음 받은 서명본은 그녀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이다. “새로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쓰인 첫 장에는 “2009년 봄”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그러니 그녀와 나의 “우정”의 역사는 이 두번째 시집 이후의 시간이 전부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의 첫 장에서 그녀는 나를 “소중한 동지”로 부르고 있다. 두번째 시집과 세번째 시집 사이에 “우정”이 “동지”로 바뀌었다. 길지 않은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와 나 사이의 사적 인연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가 그녀의 이번 시집 『훔쳐가는 노래』의 특징과 시인 진은영의 현재 정체성을 가늠하게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 이삼년간 진은영은 한국시단과 평단의 가장 핫한 아이콘 중 하나였다. 그녀는 시인이자 실천가였으며, 시의 정치성 논의를 촉발시킨 탁월한 문학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녀는 조용하고 가냘파 보이지만,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적 퇴행에 대한 위기감이 급속하게 확산되어가던 이 국면에서, 일관되고 열정적으로 자기 신념에 따른 시적 모험을 전개했으며, 용기있는 이 모험을 첨예한 이론적 발언과 병행함으로써 자기 시론을 가진 드문 시인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그녀의 ‘시론’은 두번째 시집 이후에 세상에 발표했던 변화하는 시들과 한몸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이 기간에 그녀는 퇴행적 정치상황이 초래한 사회적 위기현장에 직접 서서 시인의 날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아마 낯선 이미지가 산재해 있는 첫번째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을 시단에 상재했던 2001년만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그녀의 지금 모습과 이번 시집에 담긴 일련의 시적 형상들을 뜻밖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훔쳐가는 노래』에는 첫번째 시집에서 보았던 낯선 이미지와 창조적인 감수성이 여전히 번뜩이며, 두번째 시집에서 풍기는 ‘70년대 산(産)’(그녀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청춘 연가의 아우라와 그것이 거느린 아름다운 비유들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이 시집이 두번째 시집 이후에 수행한 시인의 정치사회적 고민과 치열한 사유, 그리고 열정적인 실천이 어우러진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부여한 ‘동지’라는 명칭 역시, 이러한 그녀의 전방위적인 문학적 실천 과정에서 우리가 형성하게 된 어떤 정신적 연대감에 대한 표현이었으리라.
함돈균 새 시집의 제목이 ‘훔쳐가는 노래’입니다. ‘훔쳐가는’과 ‘노래’는 익숙한 말인데, 정작 그 단어로 이루어진 ‘훔쳐가는 노래’라는 제목은 낯설군요. 여기에 대한 질문을 적잖게 받으셨을 듯한데, 과연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요. 아니, 그렇게 물어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군요. 첫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두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로, 그리고 이제 『훔쳐가는 노래』로 옮겨오는 시적 세계의 변화를 제목과 관련하여 간단히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진은영 괴테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세계로부터 가장 확실하게 도피하는 방법으로 예술만한 게 없고, 세상과 가장 확실하게 결합하는 방법으로도 예술만한 게 없다.” 첫번째 시집은 세계로부터 도망치는 제 나름대로의 방식 같은 거예요. 천진난만한 전지전능함으로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고 그 사물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제목에 그대로 담았어요.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그러니까 시작은 겨우 일곱개지만 점점 표제어들이 증식해가는 자기만의 사전을 만들고 싶었지요. 낡은 세상과는 절연하고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은 결의에 차 있던 시간이었어요. 그러고는 이미지의 소도시를 세우고 거기에 사랑하는 동료 몇몇을 불렀어요. ‘우리는 매일매일’ 이미지를 먹는, 식탐이 심한 종족처럼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이와 조금 다르게 ‘훔쳐가는 노래’는 세상과 결합하는 방법으로 예술만한 게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시기에 쓴 것들입니다.
함돈균 흥미롭네요. 자기만의 사전을 갖고 싶어서 세상과 절연한 이미지의 소도시를 세우던 시인이, 결국에는 시가 세상과 만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시적 변화라니요. ‘신적인’ 존재로서의 시인이 ‘인간적인’ 존재로서 ‘속(俗)’의 세계로 하강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웃음) 하지만 제가 보기에 진은영 시에는 이미 이전부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이 잠재되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자기만의 단어로 된 사전 속에 낯선 이미지의 소도시를 세우려고 했지만, 그 이미지들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깨끗하게 빛나는 조약돌 같았거든요. 일종의 ‘향일성(向日性)’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진은영 세번째 시집에서 적극적으로 표현된 욕망들이 사실 앞선 시집들에서도 숨어 있었다는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수줍음이 많은 아이처럼요.(웃음)
내가 얘기한 이전 시집에 잠재된 ‘향일성’ 이미지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진은영의 두번째 시집에 실린 「멜랑콜리아」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여기에서 “아이스크림”은 “그”가 그려놓은 자기만의 단어로 된 사전 속의 이미지이지만, 이 이미지에는 이미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원(願)이 스며 있다. 아이스크림은 달콤한 감각 자체를 정체성으로 삼는 이미지인데, 이 정체성은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 닿기 전에는 결코 실현될 수도 확인될 수도 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은밀한 향일성 이미지야말로 진은영의 시가 낯설면서도 친근하며, 일정한 수준의 가독성을 유지하면서도 녹록지 않은 철학성과 사회성을 겸비하게 된 비밀이 아닐까. 이번 시집 『훔쳐가는 노래』에서는 다만 아이스크림이 닿고 싶어하는 “누구”의 정체성이 좀 더 분명해진 측면이 있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작고 비리하고 시시하게 반짝”이는 ‘밥상머리의 멸치’(「멸치의 아이러니」)로 바뀜으로써 생활이 좀더 직설적인 화법과 실감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함돈균 그래서 그런지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진은영 시집은 단연 인기가 있어요. 진은영의 시에는 그 세대 젊은이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어떤 세대적 감수성이 강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시대상의 변화와 별개로 그 시기를 사는 젊은이 특유의 ‘청춘 연가’ 같은. 진은영의 이전 시집에는 항상 번호가 매겨져 있는 ‘청춘’이라는 이름의 연작시가 있었고, 이번에도 예외 없이 「청춘4」라는 시가 들어 있죠. 진은영에게 ‘청춘’은 무엇인가요. 그와 관련하여 하나 더 물어본다면 이번 시집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시어 중 하나가 ‘슬픔’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에서의 전반적인 ‘청춘 송가(頌歌)’의 느낌이 이번 시집에서는 ‘청춘 비가(悲歌)’ 쪽으로 다소 색깔이 바뀌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이는 “그런 종류의 실패들, 그런 종류의 상처들”을 “알 만큼 가볍게 어른이 되었”(「자스민-B에게」)다는 시인의 자각 때문일까요.
진은영 매혹 속에서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의 『삼십세』를 정신없이 넘기면서 그 나이 넘어서까지 결코 살아 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시절이 청춘이죠. 혹은 결핵환자였던 카프카의 말대로 남들이 재채기로 증명한 진실을 나는 폐로 증명해야만 하는 시절 같은 거요. 얼마 전까지도 가벼운 감기처럼 넘어가야 할 일들을 폐병처럼 앓았던 기분이 들어요. 그런 때면 서른살이 오래전에 지나가버렸다는 게 너무 낯설기만 하고. 결국 어리둥절하게 “청춘은 가버린 것 같다……”고 중얼거리게 되는 거예요. 저만 그런 건 아니고 다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어른이 되는 일의 가벼움은 이중적이죠. 슬픔으로 출렁거리는 이 세계를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가볍게 들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시늉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 그런 일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에 어른이 된 시늉을 ‘가볍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어른은 없어요. 세상을 들어올리는 헤라클레스조차도 이곳의 슬픔을 고스란히 들어올리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 뿐이에요. 결코 믿지 않는 것을 정말 믿는 것처럼 시늉을 하는 이의 슬픔만큼 큰 슬픔도 없을 거예요. 어른이 된 크나큰 슬픔 같은 거. 그러니까 청춘의 비가보다는 청춘과 작별하는 사람의 비가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얘기를 듣고 보니 이번 시집 말미에 붙은 ‘시인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거기에서 시인은 “카프카(F. Kafka)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기도로 하느님이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며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스개 같은 이 얘기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감기처럼 넘어가야 할 일들을 폐병처럼 앓았던” 시인의 이력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 감동적으로 들렸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시는 삶이 가장 깨끗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청춘’ 그 자체의 형상이자, 청춘의 정신이 그것에 의지하여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순결한 기도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시 중에는 “눈의 흰 입술들처럼/그때 우리는 살아 있었다”(「훔쳐가는 노래」)라는 진술이 있는데, 인터뷰를 하고 보니 이 시구가 실은 ‘청춘과 작별하는 사람의 비가’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정말 청춘과 작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시인의 말’ 마지막 문장에서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런 ‘어리석은 습관’이야말로 청춘의 상징이 아닌가.
함돈균 ‘청춘’에 대한 얘기를 하자니 한 시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에 붙은 작가의 말에서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崔勝子)에게”라고 적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기형도(奇亨度)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시가 눈에 띄어요. 저는 굳이 이 시가 아니더라도 이번 시집에서 시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선사하는 시인은 기형도라고 느꼈어요. 기형도라는 ‘기분’에 깊이 젖어 있는 시집이라고 생각했지요. 저와 가까운 작가들이 모인 사석에서 이번 시집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 이 시집의 첫인상을 ‘기형도가 쓴 광장의 시’ 같다고 했거든요. 2000년대 학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70년대 산’ 젊은이들에게 최승자나 기형도는 청춘의 불멸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래도 2012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그는 내 안에 갇혔다”라는 구절을 만나니 조금 뜻밖이기는 합니다.
진은영 기억 못 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자리가 2009년 기형도 20주기 추모시 낭송회예요. 그 시는 거기서 낭송하기 위해 썼고요. 그날의 만남 때문에 함돈균씨의 전화를 받고서 그해 ‘6・9작가선언’에 참여하게 되고, 또다른 많은 작가들과 연쇄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지요. 그러니 우리의 만남도 실은 영원히 젊은 시인인 기형도가 만들어준 인연이라고 할 수 있어요.(웃음)
기형도가 죽은 해에 대학생이 되었어요. 문학회에 들어갔는데 일주일 뒤엔가 연세대, 이화여대, 고려대 문학회 연합 행사가 이대 소극장에서 열렸죠. 봄의 심야극장에서 숨을 거둔, 사랑하는 친구 기형도의 첫 추모시 낭송회였죠. 그때 아주 젊은 원재길(元在吉), 성석제(成碩濟) 시인을 보았던 기억이 나요. “내 친구 기형도는 사실 너무 명랑해서 녀석의 서글픈 시를 보고 있노라면 이 녀석, 혹시 시에다 농담을 쓴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 슬픈 표정으로 말한 후 기형도 시를 낭송했던 것도 떠오르고요. 대학시절 내내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1)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읽었어요. 회장을 맡고 있던 동아리 방으로 가서 혼자 읽고 있으면 선배가 들어와 말했어요. “은영이는 시간도 많아, 시집이나 읽게!” 이 엄혹한 시절에 무슨 낭만적인 문학적 포즈냐, 그런 핀잔이지요.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그 동아리 이름이 ‘노동해방의 불꽃, 풀무’였는데 그 뜨거운 풀무질로도 마음속에 문학에 대한 어두운 열정이 다 타서 없어지지 않았어요. 선배의 구박에도 옆구리에 낀 시집들만 바뀌어갔지요.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에서 이성복(李晟馥)의 『남해금산』으로, 다시 황지우(黃芝雨)의 『나는 너다』에서 김정환(金正煥)의 『기차에 대하여』로…… 뭐 이런 식이었어요.
그렇게 대학시절 내내 두개의 다른 영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어요. 20주기 추모시 낭송회가 만들어준 사건들의 연쇄작용을 겪는 지난 이삼년간 저는 일종의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시대착오)을 경험했어요. 대학시절 이후 분리된 장소에서 서로 침해하지 않은 채 각자 생활을 하던 두 영혼의 랑데부가 일어난 것 같은 느낌. 스무살을 다시 고스란히 살고 있는 느낌. 그 시는 스무살의 기분이 내 안에 갇혀서 나도 모르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는 탄식 같은 거죠.
함돈균 그래서 말인데요, 이 시집은 분명히 회고담 성격은 아닌데도 ‘-었지’ 같은 어미 ‘기억’ 등의 시어가 적지 않게 등장하면서, 어떤 과거를 향한 시인의 시선이 분명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좀체 듣기 어려웠던 시인의 사랑 얘기가 언뜻 언급되기도 하고,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같은 시에서는 할머니, 아버지 얘기도 나오고요. 상대적으로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 고백에 가까운 얘기들이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는데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이를 시작(詩作) 행위와 관련하여 일정한 관점 변화로 볼 수도 있는지요.
진은영 어떤 것을 쓴다는 게 그것을 사는 것이잖아요. 최승자 시인의 「참, 소나 나나」라는 시를 좋아해요. “가엾기도 해라/되씹기는 게으른 자들의/그림자 밟기 놀이 아니겠는가/참, 소나 나나”라는 탄식이 나와요. 소들의 되새김질처럼 시인은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과거를 정처없이 씹고 있는 거지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매우 회고적인 부류의 사람이에요. 그 만남, 그 사람, 그 사랑의 의미가 무엇이었나 끝도 없이 질문하면서 늘 하나의 행동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살아요. 태생적으로 그런데다가 몸이 약한 사람 특유의 나태함이 더해진 거죠.
예전에도 저는 항상 지나간 날들에 대한 시를 썼어요. 그런데 그런 종류의 상처, 그런 종류의 실패로부터 그다지 멀리 있지를 못했어요. 그대로 쓸 수가 없었어요. 붕대로 상처를 겹겹이 둘러싸는 사람처럼 은유로 상처를 싸매고 흰 붕대를 뚫고 나오는 흐릿한 핏자국 같은 것만 보여주는 식이었어요. 상처는 흉하지만 붕대는 거기 상처가 있다는 걸 알려주면서도 하얗고 깨끗한 표식이니까. 그러다보니 등단 무렵 어느 술꾼 시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네 시들, 이상해. 술향기가 나는데 술이 어디 있는지 찾아서 마실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노래하니까 결국 알아듣는 사람들은 저와 비슷한 부류뿐이었던 것 같아요. 비슷하게 흠집이 난 영혼들은 서로의 잘 들리지 않는 말도 첫 단어의 입술 모양만으로 알아차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비슷한 흠집과 상처란 게 무슨 대단한 사건의 체험이라기보다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탄성이나 강도에 관련된 것인데…… 고통을 발산적으로 표현하고 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은 아주 잘 익은 빨간 사과처럼 그저 가지에서 따내기 위해 건드리는 손톱에도 푹푹 생채기가 나는 과민한 상태인 거 같아요. 누구든 청춘에는 예민함과 과잉이 있잖아요. 그래서 함돈균씨 말대로 이십대 독자들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직도 조금만 말하는 시, 말하다 만 시, 아름다운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시가 저에게는 익숙하고 즐거워요.
그렇지만 많은 게 달라졌어요. 아동학대 수준으로 매질을 했던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아무 대책이 없던 부모님. 이제 그분들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는 아니죠. 상처와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제가 강해졌다고 말하긴 힘들고요. 거기로부터 멀어졌고 극복해야 할 사태 자체가 사라졌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상처 속에 새겨진 인물과 사건을 똑바로 쳐다볼 만큼 멀리 있게 되었어요. 게다가 지난 이삼년 동안은 다른 이들에 대해 듣고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자기 상처만 정색하고 들여다본다고 병이 낫지는 않아요. 남의 상처나 삶에 한눈 팔고 정신을 빼앗기는 일이 필요해요. 무슨 대단한 대의나 윤리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단은 자신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러면 자기로부터 충분히 멀리 갈 수 있어요. 특별히 시작 관점이 변했다기보다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냥 생이 자꾸 변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슬픔의 작은 섬」에서 진은영은 “시인은 연인에 대한 미묘하고 병적인 묘사로 신문에 날 것이다/그래도 좋으리/사소한 슬픔은 흔들리는 거울 위로 흘러내리고”라고 적었다. 그녀는 ‘과일 따는 손톱에서조차 푹푹 생겨나는 생채기’를 지닌 시인의 신경과민에 대해 말했지만, “사소한 슬픔”에 “흔들리는 거울”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존재는 또 무엇일까. 시인에게는 “사소한 슬픔”이야말로 존재의 진실이 감각의 형식으로 거주하는 자리일 것이다. 진은영 시인은 슬픔과 상처로부터의 ‘거리’를 얘기하지만, 이것이 정서적 거리나 객관화를 의미하지 않음은 물론일 것이다. ‘술향기가 나는데 어디에 술이 있는지 알 수 없다’던 시적 정황에서 ‘이제 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정황으로 바뀌었다면, 오히려 이번 시집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생의 구체적인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함돈균 이제 이번 시집의 핵심 중 하나라고 할 수도 있는 ‘시와(의) 정치’에 대한 간단한 질문을 하려 합니다. 「그 머나먼」에서 시인은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이미지의 변조나 수사도 없이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는 이 담백하고 직진적인 화법을 발견할 때, 비로소 진은영 표라고 할 만한 독특한 정치적 질감이 살아나지요. 이론적으로도 첨예한 논리를 구사할 수 있는 역량이 있고, 시적으로도 인상적인 직유와 이미지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시인 진은영이 ‘혁명’을 말할 때에는 이토록 간결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어린이의 소망처럼 훨씬 더 진정성있고 간절한 기도로 들리기도 하고요. “멀리 있”으며 “나의 상처”라고 고백된 이번 시집의 중요 시어인 ‘혁명’이란 진은영 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요.
진은영 대학시절 내내 시집보다 사회과학 서적을 더 열심히 읽었어요.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위험한 가계, 1969」) 스무살엔 기형도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울컥했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고등학교 때는 등록금을 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등록금을 못 낸 사람은 방과 후에 남아야 했는데 선생님이 저만 따로 불러 똑같이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대학에 와서도 아버지의 사업실패는 계속되었어요. 정말 미웠어요. 아버지가 떼어먹은 체불임금을 한푼이라도 받기 위해 초초하고 원통한 얼굴로 집앞 골목길에 몇날 며칠을 서 있는 어린 노동자를 자주 보았어요.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파렴치하고 악한 사람처럼 느껴져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정치경제학비판 이론에서는 ‘저 도저한 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세상은 사악한 무리와 소수의 선인으로 나뉜 것이 아니다. 네 아버지는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영세자본가일 뿐이다. 이런 걸 고작 한두살 더 많은 선배들에게서 배우고 있는데, 아, 진짜, 『자본론』에서 천사들이 몰려나와서 구원의 팡파르를 불어주는 기분? 저에게 혁명은 그런 거예요. 아버지 같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했고, 또 그런 아버지들 때문에 고통받았던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웃는 세계이기도 했고요. 선악이라는 모호한 인간의 신비 대신 명료한 다른 진실을 보여주는, 아주 멀리 있지만 소망할 만한 세상 같은 거요.
함돈균 아, 그렇군요. 정치경제학이 그런 구체적인 가족사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되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웃음) ‘혁명’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더 들어보고 싶지만, 세부적인 얘기들은 이후의 비평들을 통해 해석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겨두고요, 이와 관련한 마지막 질문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후 『훔쳐가는 노래』가 나오기까지 근 삼년 동안 시인 진은영이 보인 실천적 행보와 시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이 기간에 진은영 시인은 ‘시와(의) 정치’ 논쟁을 촉발시킨 화제의 평문을 발표하시기도 했고, 그러한 생각들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주목할 만한 학술논문을 내보였습니다. 또 용산참사와 노무현대통령 서거로 촉발된 젊은 작가 중심의 시국선언인 ‘6・9작가선언’은 물론이고, 두리반, 쌍용차,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 다양한 사회적 현안들에 직접 참여해서 생생한 작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데에도 망설임이 없으셨습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관심이 가는 건, 이러한 실천과 맞물린 듯이 보이는 이번 시집에서의 진은영 표 ‘정치시’의 존재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그 머나먼」처럼 한편의 연가 같은 아름다운 정치시도 있고, 「우리에게 일용할 코를 주시옵고」 같은 흥미로운 비유와 예리한 냉소가 여기저기 번뜩이는 시도 있습니다. 「Bucket List—시인 김남주가 김진숙에게」는 아예 우리 시대의 정치사회적 위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을 또 한명의 기념비적인 저항시인의 목소리로 직접 불러내고 있습니다. 「있다」라는 시에는 정치체에서 존재망실의 상황에 처한 사회적 약자-배제된 자들을 형이상학적인 성찰이 담긴 암시적 진술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망각은 없다」 「오래된 이야기」는 문장의 이면에 ‘진실’을 숨기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화법적 풍자와 알레고리를 보여준 인상적인 시작법으로 발표 당시에 이미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멸치의 아이러니」 역시 “시인의 순결한 양식”과 “시민의 순결한 양식” 사이의 갈등과 아이러니를 자기고백적 형식으로 녹여낸 낯선 화법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거리로」라는 삼행짜리 짧은 시 역시 6・9작가선언 당시 대한문 앞에서 낭송되었던 ‘한줄 시국선언문’이었지요.
서로 성격이 조금씩 다른 이런 정치시들은 진은영 개인에게는 사회적 실천성이 담지된 미학적 실험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시에서는 범상치 않은 얼굴을 지닌 새로운 정치시의 출현을 예감하게 했습니다. 담론적 층위에서 보자면, 시인의 전방위적 실천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런 시들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퇴행 상황과 맞물려 ‘시인(詩人)의 실천과 시민(市民)의 실천은 어떻게 같으며, 다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다시 도래하게 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진은영 시인의 미학적 정체성이 아무래도 작가의 사회적 참여를 주도했던 종래의 ‘리얼리즘’ 계통의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는 사실도 여기에 일정한 관련이 있을 테고요. 진은영 시인은 시인과 시민의 분열이라는 난처한 상황을 일정하게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지양하고 극복하는 입장에서 이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떠십니까.
진은영 시인과 시민의 분열 또는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몇번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들뢰즈(G. Deleuze)의 뱅센느 대학 강연을 인용하며 답하곤 합니다. “그(야스퍼스)는 두 유형의 상황을 구분했습니다. 한계 상황들, 그리고 단순히 일상적인 상황. ‘한계 상황들이 언제나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미리 알 수 없는 상황들이다’라고 야스퍼스는 말했습니다. (…) 우리는 모릅니다. 한계 상황은 정말로, 마지막 순간에—때때로 매우 느리게 찾아오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를 내가 배우는 그런 상황입니다. 내가 더 나쁜 방향으로든, 더 좋은 방향으로든 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우리가 미리 그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네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한 채 죽고, 그것을 모를 것입니다.”
들뢰즈는 이런 아이디어를 반복합니다.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미리’ 알지 못한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미리’ 알지 못한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의 존재론에 대한 공교화(工巧化)만으로는 해명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문학적 한계나 정치적 한계와 만나고 그 한계 상황에서의 활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없는 것을 결정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인이 하는 그 어떤 것이 바로 ‘시가 할 수 있는 것(시의 역랑)’을 공교화합니다.
어쩌면 아이러니는 시인과 시민이 아니라 시인과 비(非)시인, 시민과 비(非)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직업윤리를 가지고 가족을 돌보며 결혼생활을 안전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 미리 금이 그어지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민적 진리로 구획된 삶을 넘어 또다른 삶을 살고자 애쓰기도 하죠. 이 삶은 우리에게는 시민적 윤리를 지닌 삶으로 불리지만 어떤 이들에게 좌경, 용공의 단어로 표현되는 삶, 불법적인 비시민의 삶입니다. 용산에 가서 철거민들과 함께 용역들에게 저항하고 두리반 건물을 불법적으로 점유하는 일은 기존의 시민적 토포스를 넘어 비시민적 삶의 영역을 새로운 시민의 삶으로 만드는 일이죠. 그 순간 우리는 시민과 비시민의 아이러니를 삽니다. 시인이 문학제도 안에서 수행되는 선분적 흐름에 자기 활동을 수렴시킬 때, 시인의 삶은 시민의 삶만큼 안전합니다. 시인의 아이러니는 시인이 지금껏 비시적인 것이라고 불려온 것(문체실험이든 사회적 영역에서의 문학적 실험이든)을 추구하고 이 비시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저의 정치시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서 저는 그 아이러니를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진은영과의 인터뷰는 그녀가 단지 맑고 투명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만이 아니며, 열정적인 윤리를 지닌 ‘시민-실천가’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주었다. 그녀는 시인-시민이자 비범한 사유를 겸비한 ‘철학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철학자다!) 하지만 비평가로서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스스로를 시인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몇년간 본의 아니게 ‘문학평론가’가 되어버린 상황을 무척 당혹스러워했고, 시 창작에 몰두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어든 데 대해 많이 괴로워했다. 무엇보다 ‘한명의’ ‘전적인’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의 시에는 그녀의 정체성이 분명히 반영되어 있다. 그녀의 지적이고 열정적이며 투명한 감수성을 담은 말들은 아름다운 노래와 낯선 말, 그 어느 하나라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긴장된 시적 모험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훔쳐가는 노래』는 시인으로서 일정한 단계를 정리하는 잠정적 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진행형에 있는(있을) 실천적인 모험의 궤적으로 읽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2009년 이후 한국문단에 큰 이슈로 부각된 ‘시와(의) 정치’에 관한 한 평문(「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에서 이 논쟁의 최초 기원으로 1960년대의 시인 김수영(金洙暎)을 지목한 바 있다. 김수영은 “정치의 작전이 아닌/애정의 부름을 따라서”라고 말했다. 김수영에게 그 부름이 지시하는 곳은 진정한 정치의 방향이었고, 그 방향은 지금 여기의 ‘미학공동체’ 속에 현존하는 시의 ‘한계’를 확장하는 일과 구별되지 않았다. 김수영은 이를 ‘현대(성)’라고 불렀다.
그녀가 서명해서 건네준 『우리는 매일매일』 첫 장에는 “새로운 우정의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인생은 한줄의 보들레르에 불과한 것을, 류노스케가 말했다지”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라서 그 시집을 들여다볼 때마다 곱씹어보곤 하였다. 그래서 난 이번 시집에 실린 그녀의 시들이 하나씩 발표되는 일련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 말의 의미를 그녀의 문학관과 결부해 짐작해보기도 했다. 보들레르(C. Baudelaire)는 현대성을 다름아닌 전위(avant garde)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전위는 자기 시대(현대)에 대한 첨예한 긴장과 질문을 유지하는 존재를 뜻했다. 김수영에게나 보들레르에게나 현대성은 모두 ‘자기 시대의 한계’에 대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이었다. 그 관점에서 보자면 “문체실험이든 사회적 영역에서의 문학적 실험이든” “비시적인 것을 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서 ‘한계’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시집은 ‘전위’에 속한다. 그것은 곧 이 시집이 스스로 ‘현대시’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은영에게 그것은 그의 시가 영원한 ‘청춘’의 시로 남는 방식이기도 하다.(2012.9.21. 인문까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