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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진희 李眞喜
1972년 제주 출생. 2006년『문학수첩』으로 등단. leeyeon@hotmail.com
요구르트
쇠로 만든 구두가 발가락을 조여, 샛노란 먹구름이 꾸역꾸역 몰려와, 불어터진 국수 같은 꿈속 시외버스터미널 골목엔 뱀탕집 포장마차 호프집 여인숙 여관 동시상영관이 스크럼을 짜고 하, 하 웃어
동네 계집애가 스크럼 뒤편 어두운 공터에서 어떤 일을 당하고부턴 점심도 저녁밥도 방 안에서 꼼짝없이 식은 국수, 쉴 새 없이- 국수기계를 돌리는 엄마, 끓어오르는 국수, 와글와글 공터에서 마구 자란 까마중처럼 눈알 까만 어린 동생들, 줄- 줄줄-
식당에 딸린 방, 흑백 텔레비전조차 없는 갑갑한 방, 그해 처음 연탄을 피운, 그런 방, 우리들 다같이 엎드려 아무리 머릴 짜내도 재밌는 놀이가 생각 안 나, 그냥 졸려, 방바닥이 슬슬 달아올라, 쇠로 만든 구두, 샛노란 먹구름, 엄마 뱃속 같았으면 하던 방, 그 방에서 추방당하기 직전, 젖먹이 막내가 깼어, 울었어, 자지러지게
툭, 툭툭, 얘, 웬 잠이 그리 깊니, 요구르트를 사오렴, 사왔는데, 이런 빨대를 빠트렸구나
빨대를 가지러, 호프집을 지나 포장마차 지나 뱀탕집 옆 구멍가게까지 거슬러 가는 길, 가도 가도 이상하게 먼 길, 핑그르르— 꿈같았어, 요구르트도 빨대도 미지근한 달콤함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덤으로 주어진 것 같은 시간, 그 시간, 흘리지 않도록 빨대, 콕, 꽂아 마신 요구르트, 어쩜, 엄마가 짜놓은 젖이었을까
루미놀1
목련
꽃샘추위 무렵, 사립 여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흔들, 흔들, 흔들리는
단발머리 앳된 계집애들의 무수한 주먹
튀김만두
씹을수록 구미 당기는 소문
더러운 바람, 더러운 구름, 더러운 기름에 튀겨졌으나
판매율 단연 최고
번들번들
집게 모양을 한 엄지와 검지, 오물거리는 입술
사진관 사내의 눈알
딸랑, 문이 열린다 실내가 어두침침하다
꽃무늬벽지
촬영실 안쪽 새로 도배한 벽
탐문수사 하던 형사들의 의심을 산 결정적 이유
증명사진
풀어헤쳐진 앞섶, 피로 물든 젖가슴
갈래머리 여고생이 사진관 바깥에서 인화될 때마다
대기가 뿌옇다
꽃샘추위
소도시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되었다는 알몸 변사체
매점으로 몰려가는 파랗게 언 종아리들
잽, 잽, 잽을 날리는 목련 봉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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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미놀: 혈흔 감식에 쓰이는 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