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적대적 공존’을 넘어서
한때 무라까미 류우(村上龍)의 소설에 호감을 가진 적이 있다. ‘매혹적이되 달콤한 고독’을 선사하던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와 달리, 그에게서는 갈 데까지 가보려는 ‘몸’의 본능, 또는 ‘코인로커’에서 태어난 비주류의 영혼이 느껴졌다. 그는 자족적인 반성이나 우울, 또는 세계에 대한 잘 제어된 비판 같은 것과 무관해 보였으며, 개인의 삶과 불가해한 세계 사이에 펼쳐진 어둠의 영역에 안주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 각주가 필요해진 것은 몇해 전에 나온 그의 장편 『반도에서 나가라』를 읽고서였다. 이 작품은 북한 특수부대 출신의 ‘반란군’이 일본 큐우슈우의 후꾸오까를 점령한다는 설정의 근미래 소설이다. 9명의 특수부대원이 후꾸오까돔의 프로야구 개막전에 난입해 로켓포를 쏘며 수천명을 인질로 잡는 영화적 액션으로 ‘사건’은 발생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정치나 국가라는 개념 속에 처음부터 소수자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는 단순하며 잔혹한 사실”을 읽어달라고 적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한번도 본국에서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는” 전후 일본과 일본인들의 ‘나약한 평화주의’에 경종을 울리려는 의지가 읽히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소위 ‘평화바보’가 된 자국민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느껴지는데, 이 소설의 다층적 의미망에서 일본 재무장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또는 실망을 읽어내는 일은 ‘정당한 오독’에 해당한다.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이 작가가 간혹 보여주던 ‘근육질’의 글쓰기가 정치적 관점에서도 그 징후를 보인 것이라는 쪽에 심증을 두게 된다.
2005년작인 이 소설의 시간배경은 2010년과 2011년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2013년 5월초 현재, 개성공단 잠정폐쇄가 상징하는 남북의 갈등은 위태로운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일본에서는 시행 66주년을 맞은 ‘평화헌법’의 개정과 자위대의 ‘정규군’화를 요구하는 내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베정권은 헌법 96조에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되어 있는 개헌 발의요건을 과반수로 낮추어 언제든 ‘평화헌법’을 수정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라고 한다. 작년 보수 자민당이 집권한 효과가 나타나는 셈이다.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세계 각국이 우려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일본의 ‘재무장’과 군국주의적 의지가 북한을 발화점으로 삼고 있다는 데 있다. 북한이 한미군사훈련을 계기로 전쟁위협을 반복하고 남한이 북의 언동에 같은 톤의 공격적 비난으로 일관하는 한, 남북은 일본의 재무장을 비난하면서 오히려 이를 재촉하는 꼴이 된다. 남북의 대결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일본의 군사적 재무장에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도 북한에 대해 강경대응만을 주문하거나,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식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그것은 총기사용을 통해서만 자기방어가 가능하다는 미국식 악순환과 다를 바 없다. 빈번히 발생하는 대량살상이 미국의 총기소지 정책과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런 상식적 의문에 덧붙일 것은, 총기 규제 여부라는 ‘고정점’에 미국 내의 인종 및 계급 갈등 등 많은 문제들이 더불어 묶여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남북관계가 주요 ‘고정점’ 중 하나인 이유도 유사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남북의 대치상황이 남북 양쪽의 기존 체제 안정에 기여한다는 점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흔히 ‘적대적 공존’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에는 확실히 흥미로운 데가 있다. ‘적대’ 자체가 ‘공존’의 조건이라는 역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령 ‘북한의 위협’은 보수신문에는 일종의 ‘호재’인 측면이 있다. 그것이 보수신문의 이데올로기적 존재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극우’와 ‘종북’이 적대하면서 서로를 반영하는 관계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적대하기 때문에 공존을 유지하는’ 이 역설의 세계에는 그러나 놓치기 쉬운 진실이 숨어 있다. 이 ‘공존’에는 임계치, 즉 스스로 붕괴할 파국의 계기가 항상 내재한다는 점이다. ‘적대적 공존’이 표면적으로 취하는 ‘적대’라는 형식은 단지 형식인 것만은 아니다. 적대의 ‘형식’은 어느 순간에 ‘실제로’ 파국을 불러올 수 있으며, 그 파국의 계기는 뜻밖에 우연적이거나 사소할 수도 있다. 최근처럼 예측불허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보수언론에서는 ‘안보 불감증’과 ‘전쟁 불감증’을 자주 문제 삼지만, ‘불감증’을 경고하는 이들 목소리가 오히려 전쟁위험을 높여줄 가능성조차 있어 보인다.
남북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평화적 공존으로 전환, 재구성하는 일의 중요성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것만이 남북 지배층과 군부의 소모적인 ‘존재증명’을 중지시킬 수 있는 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남과 북의 사회적 체질을 바꿀 수 있는 유력한 계기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화바보’들에 대한 무라까미 류우의 우려와 냉소를 뒤집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재무장 ‘바보’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가 정말 ‘평화바보’가 되자고 말이다. 물론 상황에 무능력한 ‘바보’가 아니라, 평화라는 가치에 목 맨 ‘바보’ 말이다.
여름호 특집은 본지가 지속적으로 개진해온 ‘문학과 정치’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주제이면서 언제나 새로운 현실조건 아래 회귀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라는 제목 아래 한기욱, 강경석, 송종원의 글과 좌담을 싣는다. 한기욱의 평론은 ‘우리시대의 「객지」들’이라는 상징적인 제목 아래 “한 세대 이상을 격한” 황석영과 김애란 문학의 수직 비교를 시도한다. 70년대 문학과 2010년대 문학의 통시적인 공약수를 전제로 하되, 시대적 변화에 따른 변별성을 놓치지 않고 있다.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필자의 믿음이 글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데, 그것은 “섣부른 낙관도 절망도 하지 않고” 이 시대를 통과하고자 하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이어지는 강경석의 글은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라는 암시적 제목을 택해 우리 시대의 소설들이 어떻게 현실과 조우하고 있는지를 탐색한다. ‘모든 것의 석양’이란 “‘1987년’이 스스로에 가한 좌절, 즉 빈곤이라 불리는” 것인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면서 나아가 정신적인 면까지 포괄한다. 정소현, 김이설, 황정은의 근작이 현실의 어둠 속에서 취하는 개성적인 자세들을 단단한 어조로 탐구하고 있다.
특집의 셋째 글에서 송종원은 진은영, 김중일의 시편을 대상으로 시와 역사인식의 문제를 파고든다. “섬광처럼 스쳐지나가는 어떤 기억”이라는 벤야민적 순간은, 버려진 과거의 시간들을 거쳐 “다른 시간의 도래”라는 역사의 운동과 조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 헌정되는 것이 바로 시라는 점을 곡진한 필치로 전달하고 있다. 소설가 손홍규, 정지아, 시인 함성호가 참여한 좌담에서는 평론가 정홍수가 사회를 맡아 ‘문학과 현실참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137인 선언, 르뽀집 집필, 제주 강정평화책마을 만들기 등에 참여해온 세 작가들이 글쓰기와 현실참여의 문제에 대해 현장에서 느낀 바를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문학과 정치현실의 첨예한 접점에 서 있는 작가들이 어떤 고뇌와 마주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집과 연관한 읽을거리로 문학평론란의 루카치론이 있다. 지난호 바흐찐의 장편소설론에 이어지는 글이다. 독문학자 김경식이 작성한 글을 통해 우리는 루카치가 “결산이 끝난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문학지형을 이해하는 데 유의미한 이론가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특히 근대문학이나 장편소설을 둘러싸고 ‘종언’과 ‘부흥’ 담론이 교차하는 현시점에서 루카치의 장편소설론은 주요한 참조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바흐찐과 루카치를 잇는 이론적 탐색은 다음호에서도 계속될 예정이니 기대해주시기 바란다.
이번호 작가조명의 주인공은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을 상재한 함민복 시인이다. 그를 ‘멸종 위기에 처한 고귀한 생명체’라고 표현한 인터뷰어는 그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온 김소연 시인이다. “가난을 노래하며 견딘 시인이 아니라, 가난을 지켜낸 시인”의 면모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문예지의 가장 중요한 지면은 역시 창작란이다. 이번호에도 고형렬, 이가림에서 박준, 이지호에 이르는 시란이 곧 우리 시의 섬세한 풍향계가 되어주고 있다. 특히 소설란에 성석제의 장편을 연재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다. 작가 특유의 활기 넘치는 소설세계가 독자들을 만족시키리라 믿는다. 김연수, 박솔뫼, 천정완 등 고유한 개성을 지닌 작가들의 단편 역시 일독을 권한다.
정론에서 주목할 만한 지면은 우선 대화란이다. 본지 백영서 주간이 중국의 저명한 정치사상가 쑨 거와 「비대칭적 한중관계와 동아시아 연대」라는 제목 아래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중 양국의 비대칭적 상호인식,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들, 중국 사상계의 최근 토론주제들,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적 변화가 응축되어 있는 ‘핵심현장’에 대한 논의가 긴장감 있게 펼쳐진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단지 지역학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서구적 시각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인식’의 발생지다.
‘논단과 현장’에서는 서재정의 「북의 3차 핵시험과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의 전망」이 눈길을 끈다. 최근 남북문제를 넘어 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북한 핵문제의 해법을 탐구한다. 필자는 군사적 압박과 경제제재가 불러온 부정적 결과들을 차분하게 설명한 뒤, 궁극적으로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백영경의 「지식의 정치와 새로운 인문학」은 ‘공공성(公共性)’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인문학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는 글이다. 필자는 여기서 ‘지식의 정치’라는 흥미로운 개념으로 자연과학을 포함하는 과학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권, 성과 정체성, 생명과 죽음 등 인문학적 지식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 변호사 박성철의 「헌법의 품격, 재판관의 자격」은 현재 법률가에게만 열려 있는 헌법재판관의 문호를 개방하고, 궁극적으로는 헌법재판관이 ‘시적 정의’의 구현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담은 글이다. 여기서 ‘시적 정의’란 물론 주관적 정의라는 뜻이 아니라 약자와 소수자의 상처를 보듬는 행위의 다른 이름이다.
이밖에도 고은의 『바람의 사상: 일기 1973-1977』 등 주요 신간에 대한 전문가의 평을 담은 촌평과 본지가 주목한 이 계절의 시, 소설 단행본을 다룬 문학초점, 그리고 영화 「지슬」을 대상으로 한 문화평도 읽을거리다. 다음호부터는 문화평이 두 꼭지로 늘어날 예정이라는 점도 예고해둔다. 더불어, 올해 마감일이 5월 31일로 변경된 창비신인문학상과 6월 20일 마감인 사회인문학평론상에 예비작가들의 많은 응모와 관심을 기대한다. 통권 160호를 간행하는 감회가 깊다. 한결같되 나날이 새로워지면서 끊임없이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
李章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