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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북의 3차 핵시험과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의 전망
서재정 徐載晶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자문위원 및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 통일외교분과 위원 역임. 주요 저서로 『한미동맹은 영구화화는가』 『한반도의 선택』 등이 있음.
jsuh8@jhu.edu
*이 글은 2013년 2월 15일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원고를 그후 상황전개까지 포함하여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원고 수정에 좋은 의견을 준 토론회 참가자와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에게 감사한다.
북은 2013년 2월 12일 오전 3차 핵시험을 강행했다.1) 이후 한반도는 격랑에 휩싸였다. 곧 이어 시작된 한미연합군사훈련에 오바마 행정부는 전례없이 B-2 전략전폭기 등을 동원했고, 유엔에서 북에 대한 국제 제재를 강화했다. 한국에서는 정부도 북의 핵시험에 강력히 대응했을 뿐 아니라 유력 정치인이 한국의 독자 핵무장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등 분위기가 험해졌다. 북은 이에 더욱 강경하게 반발하며 미국 본토에 대한 핵선제타격을 운위하는가 하면, 정전협정은 물론 남북불가침합의 등도 백지화한다고 선언했다. 한반도에서 정전상태를 유지할 제도와 통로가 모두 제거된 일촉즉발의 위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항해는 커다란 암초에 좌초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최대의 위기상황을 맞았다.
이후 4월 중순 들어 미국이 예정되었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연기하고, 존 케리(John Kerry) 국무장관이 아시아 순방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며 다소 진정국면으로 들어서긴 했다. 중국도 우 다웨이(武大偉) 6자회담 특사를 미국에 파견하며 대화의 가능성을 적극 모색하고 나섰고, 러시아도 대화와 외교로 돌아서야 한다고 재촉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 사이 개성공단을 둔 강(强) 대 강의 대치가 또다른 불씨가 되고 있다. 북이 연평도사건에도 닫히지 않았던 개성공단의 통행을 제한한 데 이어 근로자 철수조치를 취했고, 이에 한국정부도 인원 철수를 단행, 개성공단은 실질적 폐쇄의 상태까지 치달았다. 향후 한국과 미국 및 북한의 대응에 따라 새로운 대화의 기회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상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반도는 비핵화와 평화를 두고 심각한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북이 3차 핵시험을 강행하게 된 원인과 그후 3~4월 한반도 안보상황이 최악의 위기로 치닫게 된 이유를 분석한다. 특히 북과 한・미 양국의 군사안보적 상호작용이 위기를 초래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2절에서는 최근 상황에 대한 분석을 지난 20년의 경험과 비교하며, 북과 한・미 양국의 관계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을 찾아본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한반도 위기의 해결책은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에 있음을 제시한다.
1. 북의 3차 핵시험과 한미군사동맹
북은 왜 핵무기를 개발하는가? 최근 들어 북은 왜 핵위협을 극단화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네가지 정도의 설명이 있다.2) 첫째, 북의 핵무기를 군사수단으로 보는 설명이다. 둘째, 북의 핵무기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북의 핵무기는 협상의 도구라는 주장이다. 넷째는 북의 핵무기를 상징적 표상으로 보는 입장이다.
첫째, 군사적 도구라는 설명은 핵무기가 공세적 도구라는 주장과 방어적 도구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전자는 대남 군사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며 적화통일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핵위협을 휘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3) 이에 비해 후자는 북이 전략적 수세에서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주장은 북의 이러한 목적 설정과 정책 추진이 외부와의 상호관계 없이 ‘주체적’으로 이뤄진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은 왜 3차 핵시험이 2013년 2월에 이뤄졌고, 3~4월에 북의 핵위협이 전례없이 고조됐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래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북의 행위, 특히 핵무기와 관련된 활동은 미국 및 한국과의 전략적 상호작용을 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둘째, 핵무기를 북의 국내정치적 역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개연성은 있어도 그 근거가 취약하다. 특히 김정은(金正恩)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정권장악이 취약하다든지 내부에 강경파와 온건파 간 갈등이 있다는 물증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또 외부 위협을 정권안정에 이용할 수는 있지만 왜 핵위협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쓰는 것인지, 왜 그 시점이 2013년인지 명확한 근거가 없다. 북의 내적 동인만으로 북의 핵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첫째 설명과 같은 한계를 노정한다.
셋째, 외부와의 협상용이라는 설명은 그 협상의 목적이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한 레버리지라는 주장과,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평화조약 체결을 압박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이 설명은 북과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위의 두 설명보다는 진전된 것이다. 하지만 핵무기가 경제지원과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등가성에서도 맞지 않고 지난 20년의 경험과도 어긋난다.4) 정치적 협상의 수단이라는 주장은 북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외교의 목표로 내세웠다는 사실에는 부합하지만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핵선제공격을 위협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핵무기가 국제적 위상을 높여준다든가 북 정권의 ‘존엄’을 과시하는 상징물이라는 ‘극장국가’적 설명도 설득력이 약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 내에서 핵보유국가로 인정받은 국가의 위상이라면 몰라도, NPT체제 밖에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국제질서의 ‘이단아’로서의 위상만을 심화한다. 북 내부적으로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상징조작이 이뤄지고 있지만, 굳이 핵무기를 동원해야 하는 이유도 명확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설명은 핵위협의 시점이 왜 2013년인지에 대한 구체적 해명이 되지 않는다.
종합하자면 기존의 설명은 북의 핵활동을 북의 내적 요인(군사적, 국내정치적, 또는 문화적)에 국한해 인식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거나, 상호작용에 주목을 해도 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북의 3차 핵시험과 2013년 봄 핵위협의 과정을 분석하며 북과 한・미 양국의 군사안보적 상호관계에 주목한다. 적어도 북의 핵활동은 북의 내적 동인만으로 추동된다기보다는 미국 및 한국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즉 북은 미국의 주동으로 유엔 대북제재가 강화되는 것에 핵시험으로 대응하고, 이어서 3월부터 시작된 한미군사훈련이 자신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고 이에 대해 최대한 강경하게 반발한 것이다. 국제정치학에서 말하는 억제정책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이를 객관화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북과 미국은 서로의 행동이 상대방의 안보불안을 심화하는 안보딜레마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3차 핵시험은 이명박정부와 오바마 1기 행정부가 지난 4년간 확고한 공조 속에 추진해온 ‘전략적 인내’에 대한 대응이었다. 또 2012년 4월 북의 로켓 발사시도 이후 외교가 실종되고 악화 일로를 걷던 북미관계의 논리적 귀착점이기도 하다. ‘전략적 인내’는 세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었다. ① 핵억제력과 재래식 군사력을 이용한 군사적 압박의 강화 ② 유엔 제재를 중심으로 한 봉쇄 ③ ‘급변사태’를 상정한 저강도 전쟁이 그것이다.5) 즉 북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에 우선 군사적으로 대응하고, 제재를 통해 북이 대량살상무기를 제조할 경제적 능력을 봉쇄・약화시키며, ‘급변사태’를 계기로 근원적인 정치적 해결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군사적 압력과 경제봉쇄라는 도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와 다르지 않지만, 국제주의의 틀 안에서 북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다음 절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정책은 과거 미국정부의 대북정책보다 강도가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에 대응하여 북은 군사력도 강화했고, 경제적으로 반등의 전기를 만들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내부체제를 공고화했다.6) 특히 대량살상무기 능력의 신장이 눈에 띈다. 북은 유엔 안보리가 의장성명으로 북의 인공위성 발사를 규탄하자 핵시험으로 대응했고, 결의 1874호가 채택되자 “새로 추출되는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안보리 결의 2087호에 대응해서는 3차 핵시험을 단행하고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다종화”를 선언했다. 또한 사거리가 3천~4천km가 될 것이라고 추정되는 무수단 미사일을 2007년 공개한 데 이어 2012년에는 대륙간탄도탄으로 추정되는 KN-08 신형 탄도미사일을 선보였다. ‘전략적 인내’에 대응하여 북은 장거리핵미사일을 확보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7) 북은 이미 2012년 10월 국방위원회 성명에서 “미국본토까지 명중타격권에 넣고 있다”며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돌이켜보면 2012년 2월 29일 북미합의가 이뤄졌을 때만 해도 북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이 이토록 성장하는 것을 외교적으로 막을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글린 데이비스(Glyn Davies) 대북정책대사와 김계관(金桂寬) 외무성 제1부상의 베이징 회담에서 매우 중대한 합의가 이뤄졌었다. 북은 북미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장거리미사일 발사 △핵시험 △우라늄 농축활동을 포함한 영변 핵활동에 대한 유예(moratorium)에 합의했다. 또 영변 우라늄 농축활동 유예를 검증하고 모니터하며, 5MW 원자로와 관련시설의 불능조치를 확인하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팀 복귀에도 합의했다.
이 절호의 기회는 지난 4월 북의 광명성 발사시도 이후 무산되었다. 미국은 이를 장거리미사일 발사로 규정하고 2・29합의를 북이 위반했다고 반발, 유엔 안보리에서 이를 “강력히 규탄”하고 제재대상을 확대하는 의장성명의 채택을 주도했다. 북은 이를 “정당한 위성발사권리를 침해하는 적대행위”로 규정하고 2・29합의에 “더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북의 핵활동과 장거리미사일 발사를 유예시킬 수 있는 합의는 불과 두달을 넘기지 못하고 파탄됐다.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은 되레 북을 핵무장과 미사일 발사로 밀어넣는 역효과를 낸 것이다.
그럼에도 북은 작년 7월 중순만 해도 6자회담 재개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박의춘(朴義春) 외무상은 7월 14일 프놈펜에서 개최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외무장관회의에 참석, 호르 남홍(Hor Namhong) 캄보디아 외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6자회담을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북이 공개적으로 6자회담의 재개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동까모’(김일성 동상을 까부수는 모임)의 동상파괴 시도를 적발한 북은 20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에서 이 시도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며 경계를 높이기 시작했다. 7월 29일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이 시도를 “국가정치테로(terror)”라고 규정하고 “핵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군사력 전반을 끊임없이 강화”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이틀 후 외무성도 대변인 담화에서 “미국의 적대시정책에는 핵억제력강화로 대처”하겠다며 이러한 입장을 재확인했다.8) 경색되기 시작하던 북의 입장은 8월 다소 유보적인 모습으로 잠시 완화됐다. 8월 중순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와 중앙정보국 관리의 비밀방북이 그 계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9) 그후 10월에 발표된 국방위원회의 성명에 비춰보아 당시 미국 관리들이 “미국의 적대시정책”에 관한 북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비밀회동 후 8월 31일 외무성이 발표한 비망록은 핵무장 강화라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평화적 해결의 길도 아직 열려 있다며 7월말보다 완화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망록은 “핵문제 해결의 기본장애는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에 “두가지 길”을 제시했다. 즉 “대조선적대시정책”을 중단하고 북과 평화의 관계를 건설하거나, 적대시정책을 유지하고 북의 핵능력이 “현대화되고 확장”되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두가지 길”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북의 입장은 10월 7일 한・미 양국 정부가 ‘미사일 지침’을 개정, 한국이 미사일 사거리를 800km까지 연장하여 북 전역을 사정권에 넣도록 하면서 급변했다. 새로운 미사일 정책선언을 발표한 직후인 10월 9일 북 국방위원회는 이 미사일 선언이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을 확인해줬다며 “반미대결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두개의 길” 중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선택했으므로 북도 “군사적 대비태세를 백방으로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미국본토까지 명중타격권에 넣고 있다”며 “핵에는 핵으로, 미싸일에는 미싸일로 대응할 모든 준비가 다 되어있다”고 나섰다.
“두가지 길” 중 평화적 해결의 길이 차츰 닫히는 상황에서 한국이나 미국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이 길을 되살리는 대신 오히려 군사적 조치를 강화했다. 한・미 양국군은 10월 24일 제44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북의 모든 위협에 대한 전방위 대응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는 조치를 선택했다. 또 12월 12일 북의 은하 3호(광명성 3호를 탑재한 추진체) 발사에 대응하여 유엔 안보리 결의 2087호를 채택, 북에 대한 제재 대상을 확대했다.
북 외무성은 유엔 안보리가 결의 2087호를 채택하자마자 그 다음날인 1월 23일 “핵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인 군사력을 질량적으로 확대강화하는 임의의 물리적대응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24일에는 국방위원회가 “미국을 겨냥”하여 “우리가 진행할 높은 수준의 핵시험”을 선언, 핵시험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북이 3차 핵시험을 감행할 조짐들이 보이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은 외교적으로 긴장완화를 모색하기보다는 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3월초에 예정된 군사훈련 준비에 들어갔다. 유엔이 제재결의를 채택한 후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북은 결국 2월 12일 3차 핵시험을 감행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북의 3차 핵시험은 유엔의 제재결의에 직접적으로 대응한 것이지만, 지난 1년간 북과 한・미의 관계가 악화된 것이 그 배경이다. 그나마 2・29합의나 미국의 비밀방북 등의 대화시도가 관계의 급속한 악화를 늦추기는 했지만 국제제재와 이에 대한 반발이라는 구도를 전환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핵시험을 단행한 주체는 북이므로 일차적인 책임은 북에 있지만 북은 한국 및 미국과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정책적 선택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북이 타진한 대화의 가능성을 한・미가 무시하고 줄곧 강경정책을 선택한 것은 북이 3차 핵실험을 선택하는 데 전략적 상호작용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10)
2. 3차 핵시험 이후의 긴장격화
3차 핵시험 이후 한반도는 급격하게 긴장이 상승, 전쟁의 가능성마저 우려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외교의 실종과 유엔 제재가 3차 핵시험으로 귀결됐다면, 대북 군사력 시위를 통한 억제력 확보는 북의 강경대응을 초래했다. 그 결과는 유례없는 군사적 긴장격화였다.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실시되던 3월과 4월 동안 한국과 미국의 군사적 조치가 그에 상응하는 북의 군사적 대응을 부르고 북의 군사적 조치는 한・미의 군사적 대응을 낳는 상호작용이 한반도의 위기를 고조시켰기 때문이다.
3월 1일 독수리연습이 시작되어 미 증원군 병력이 미 본토와 태평양지역, 일본 등에서 한국으로 출발하자 7일 북 외무성 대변인은 성명을 발표, 미국의 군사훈련에 대응해서 미국에 대한 “핵선제타격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천명했다. 북 최고사령부가 5일 키리졸브연습이 시작하는 11일부터 정전협정을 백지화할 것이라고 선언한 데 이어, 8일에는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한국의 독수리연습 참여에 대응하여 “불가침에 관한 합의와 비핵화 공동선언들을 백지화”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키리졸브연습이 시작한 다음날인 1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서해 최첨단에 위치한 월내도방어대를 시찰했다. 그는 여기서 “적들을 (…) 모조리 불도가니에 쓸어넣으라”는 강경발언을 하고, 포 작전규정에서 타격순차와 진압밀도를 한・미 양군의 최근 동향에 대응하여 조정하는 동시에 해상 작전규정도 “침범할 때는 강력한 조준격파”하는 것으로 강화했다.
3월 18일 한국을 방문한 애슈턴 카터(Ashton Carter) 미 국방부 부장관이 “B-52 전략폭격기가 19일 한반도에서 비행훈련할 것”이라고 하자, 20일 북 외무성 대변인은 “전략폭격기가 조선반도에 다시 출격한다면 적대 세력들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대응했다. 실제로 3월 25일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에서 출발한 B-52 전폭기가 강원도까지 날아와 모의 폭탄을 투하하는 폭격연습을 실시하자, 그 다음날인 26일 북은 전략로케트군부대와 장거리포병부대를 포함한 모든 야전포병군집단을 1호 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켰다. 그리고 27일 남북연결 군통신선 8회선을 모두 차단했다.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B-2 전략 폭격기 두대가 미국 본토 미주리 화이트맨 공군기지를 출발해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비행, 군산 앞바다 직도사격장에 훈련탄 8개를 투하한 3월 28일이었다. 상대방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군사작전에서 가장 먼저 출동하여 적군의 대응력을 초기에 무력화하는 B-2 스텔스기가 출격하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그날 밤 바로 최고사령부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전략미사일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하는 ‘미사일 기술준비공정계획서’에 최종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의 조선중앙통신은 이례적으로 이를 신속히 전하며 북 미사일이 미국 본토와 하와이, 괌 등을 타격하는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공개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북의 ‘위협’과 행위는 한・미와의 전략적 상호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11) 한・미 양국이 억지를 위해 군사력을 과시한 것처럼, 북은 한・미 양국을 억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과시한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한미군사연습 때와는 달리 북이 이번에는 유례없이 강경하게 대응하며 긴장상태를 최고조로 높인 이유는 무엇인가? 3차 핵시험 이후 한・미 당국이 북에 대한 압박을 전례없이 강화했다는 점과, 북의 자신감이 높아졌다는 것이 최악의 조합을 이뤘기 때문이다.12) 특징적인 점은 이전의 부시 행정부가 일방주의적 군사력 사용을 시도했다면 오바마 행정부는 유엔과 동맹을 중시하는 국제주의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역시 결국 경제제재와 군사적 수단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와 다르지 않으며, 국제사회를 동원하는 데서 좀더 세련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이런 시각에서 북의 3차 핵시험에 대응하여 통과된 유엔 안보리 결의 2094호가 이전 결의와 달리 유엔헌장 7장을 제재조치의 근거로 명시했기 때문에 북의 위기의식을 높였다는 만수로프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3) 유엔헌장 7장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위반 및 침략행위에 대응한 행동’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국제평화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는 7장 중에서도 41조와 42조는 각 국가가 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치를 거론하고 있다. 41조는 주로 비군사적 조치들로서 경제관계의 부분적 내지 전면적 중단, 철도 및 해상, 항공, 우편, 전화, 라디오 등 통신・교통의 중단과 외교관계의 단절 등을 허용한다. 42조는 “이러한 조치들이 부족할 것이거나 부족하다고 입증됐다고 안전보장이사회가 판단하는 경우 안보리는 국제평화와 안보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육・해・공군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군사력 사용을 명시하고 있다.
결의 2094호는 유엔헌장 7장을 근거로 제시하고 41조에 의거한 조치들을 취하도록 했다. 41조를 언급한 것은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압박이고, 군사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로 기능한다. 더구나 이러한 안보리 결의가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인 2013년 3월 8일 통과됐다는 사실은 북의 위협인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결의에 들어 있는 소위 ‘트리거(방아쇠) 조항’이 유엔 안보리가 군사적 행동을 허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북이 주목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14)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 초부터 지금까지 북에 대한 유엔의 압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왔다. 2009년 4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의 2009년 4월 5일(현지시간) 발사를 규탄”하는 안보리 의장성명만을 채택했으나, 북의 2차 핵시험이 있은 후인 6월 12일에는 안보리 결의 1874호로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안보리 결의 1874호는 이전의 결의 1718호보다 금융제재의 범위와 강도도 증대되고 선박에 대한 공해(公海)상의 검색 등 부시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취했거나 시도했던 조치들을 유엔 차원에서 채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013년 3월 7일 채택된 안보리 결의 2094호에는 공해상에서 북 선박이 검색을 거부하는 경우 유엔 회원국은 그 선박의 입항을 거부하도록 의무화하고 금지품목 적재가 의심되는 항공기의 이착륙 및 영공통과 불허를 촉구하는 등 북을 외부세계와 단절시키는 강한 조치들이 포함됐다. 오바마 행정부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실질적으로는 부시 행정부의 현실주의적 일방주의보다 북에 대한 제재와 압력을 강화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한편 북의 인공위성 발사는 국제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전 미국정부는 이를 국제적인 문제로 삼지 않았고, 2006년 7월 15일 유엔 안보리 결의 1695호가 채택되기 전까지는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제재도 없었다.15) 그에 비해 오바마 행정부가 인공위성 발사를 유엔에 상정, 제재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보다 더 강경한 대북정책을 구사한 것이다. 그나마 2009년 4월과 2012년 4월에는 중국 등의 반대로 북의 “발사를 규탄”한다는 안보리 의장성명만 발표했다가, 2013년 1월 22일에는 안보리 결의 2087호를 채택하여 압박을 강화했다.16) 2012년 12월의 로켓 발사가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었음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이 발사가 과거의 안보리 결의들(1718호와 1874호)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또다른 제재 결의를 채택한 것이다.17) 북은 이제 인공위성을 발사해도 과거의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이 되기 때문에 추가적 경제제재를 받는 세계 유일의 국가가 됐다.
북에 대한 압박은 인권 측면에서도 진행됐다. 유엔 안보리에서 경제제재 결의안이 논의되는 것과 동시에 제네바에 위치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2013년 3월 14일 북한인권 결의안이 제출되어 21일 통과됐다. 이 결의는 북 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한 조사위원회 설립 등 전례없이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조사위원회가 북의 인권유린이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규명하도록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최근 들어 정권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는 국제사회의 ‘보호를 위한 책임’(R2P)을 발동시켜 국제사회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18) 예를 들어 2011년 3월 17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 1973호를 채택, 리비아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허용했고, 18일 리비아 정부가 이 결의를 준수할 것이라고 발표했음에도 19일 프랑스의 공습을 필두로 다국적군의 군사개입이 이뤄졌다. 이어서 나토의 군사작전으로 확대되고 프랑스와 영국 등의 특수부대 지상작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카다피 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 따라서 북한인권 결의안 채택은 북의 입장에서는 군사적 개입을 우려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 셈이다.
이렇게 국제적 제재를 강화하며 군사적 추가조치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유엔 결의들이 채택됨과 거의 동시에 키리졸브 및 독수리연습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북의 위기의식을 최고조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훈련의 강도가 전례없이 높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2013년 훈련에는 B-2 전략폭격기가 미 본토에서 직접 날아온 것을 비롯해서 일본 오끼나와 후뗀마 기지에 배치된 수직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리가 처음으로 동원됐다.19) 또 호주군 전투병력이 이 훈련에 참가, 유엔사령부 회원국이 전투병력으로는 처음으로 한미연합 야외기동훈련에 동참하기도 했다.20)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틀 안에서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강화한 것이었고, 그 범위와 강도는 오히려 부시 행정부 때보다 더 넓고 강해졌다. 이것이 북이 과거보다 강하게 반발한 외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3. 군사력, 경제제재 및 비정치적 교류협력을 넘어서
지난 20여년의 경험은 명확한 교훈을 준다. 군사적 압박이나 경제제재 같은 강경책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화와 교류는 적어도 북의 핵프로그램 동결 및 불능화에 성공하는 등 비핵화와 평화에 기여했다.21) 하지만 평화의 문제를 뒤로 돌리고 비핵화에 우선순위를 둔 지금까지의 협상과 합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완성하는 데까지 가지는 못했다.
부시 행정부가 취했던 군사적 압박정책은 북의 핵프로그램을 군사화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22) 또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오바마 행정부와 이명박정부가 함께 추진한 제재정책은 북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확장・발전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23) 제재정책을 국제화한 유엔 결의 1695호 직후 북은 1차 핵시험을 단행했고, 국제적 제재를 강화하는 유엔의 조치에 대응해 2차・3차 핵시험을 실시했다. 경제제재가 시행된 지난 5년여간 북은 플루토늄을 무기화하고 새로운 우라늄농축시설을 설치했다. 그리고 경수로 건설에 착수하여 완공을 향해 치닫고 있다.
이 우라늄농축시설이 북이 주장하는 대로 경수로용 저농축우라늄(LEU) 생산에 이용된다면 매년 2톤 정도의 저농축우라늄을 만들 수 있지만 무기급 고농축우라늄(HEU) 생산에 사용된다면 매년 무기급 고농축우라늄 30~40kg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24) 2012년부터는 매년 핵무기 1~2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수로마저 완공되어 핵무기 제작에 전용된다면 북은 2015년부터는 매년 핵무기를 10기 생산할 수 있고, 2016년까지 핵무기를 최대 25기까지 추가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25) 비핵을 앞세운 제재정책의 결과물은 북의 핵능력 신장이었다. 북은 열심히 우라늄농축시설을 가동하고 경수로를 건설하고 있는데, 이를 동결하기는커녕 북의 핵활동을 감시・확인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제재정책의 현실이다.
제재를 강화한 유엔 안보리 조치가 2차・3차 핵시험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처럼, 한국과 미국이 3~4월 군사력으로 전쟁억지력을 과시하려 한 것은 북의 강력한 군사력 시위를 불러왔다. 한・미와 북의 이러한 군사력 시위가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다 결국 개성공단에까지 불똥이 튀어 실질적 폐쇄상태가 되다시피 했다. 군사력 시위로 상호간 억지효과를 발휘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3~4월의 경험은 군사력 시위로 유지되는 전쟁억지는 결코 평화가 아님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26)
이에 반해 제네바합의와 6자회담이 보여주듯이 외교와 합의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제네바합의는 1994년부터 2002년까지 북의 핵프로그램을 동결시켰다. 또 2003년부터 시작된 6자회담은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금융제재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하다 BDA 문제가 해결된 2007년부터 2008년 사이에 핵프로그램을 동결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불능화하고 핵활동에 대한 전면적 신고까지 나가는 데 성공했다.
북은 1979년 영변에 5MW 실험용 원자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86년 완공하고 가동을 개시했다.27) 1981년에는 영변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태천에서 200MW의 원자로 건설에 착공했고, 1986년에는 다시 영변에 50MW의 원자로를 짓기 시작했다. 북은 이 공사를 1996년까지 마칠 예정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완공하지 못했다. 1994년 체결된 제네바 기본합의에 따라 실험용 원자로의 운전과 원자로 건설이 동결됐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의 관점에서 이 원자로 건설동결은 사실 실험용 원자로 운전동결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북이 건설 중인 원자로들을 완공하여 가동했다면 엄청난 양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8) 미 의회연구소(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는 중앙정보국을 인용하며 이 두 원자로가 완공됐다면 연간 275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29) 이는 대략 핵무기 25~40기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이 원자로들이 1998년부터 가동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수구언론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1998~2007년 동안 북은 무기급 플루토늄을 2750kg 생산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은 정작 북이 핵무기 250기~400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10년이었다. 제네바합의는 북이 이러한 플루토늄 제조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그리고 6자회담은 이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불능화하고 폐기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북과 합의를 이룬 덕분에 비핵화에서 엄청난 진전을 봤을 뿐 아니라 합의를 이루기 위한 협상과정도 한반도의 평화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외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며 협상이 이뤄지는 동안에는 북이 미사일 발사나 핵시험 같은 도발적 행위를 자제했기 때문이다. 이는 부시 행정부에서 근무했던 보수적인 학자도 인정한다. 1984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의 도발과 협상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빅터 차 교수는 “지난 27년간 북한은 미국이 참여한 협상 도중에 도발을 벌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의회에서 증언한 바 있다.30)
그렇지만 협상과 교류를 중심으로 한 관여정책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부족했다. 비핵화와 평화의 문제를 분리하여 평화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는 통에 위기가 발생할 여지를 항상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네바합의도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6자회담도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를 언급했지만 실행에서는 비핵화의 후순위로 밀린 것이 현실이다. 그 결과 제네바합의도 부시 행정부가 ‘선제공격 독트린’을 채택하여 위협을 느낀 북의 반발로 붕괴됐고, 6자회담도 유엔 제재로 압박하는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위기감을 가진 북이 반발하며 무산됐다. 한반도 평화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비핵화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동시에 한반도의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항상 불안 요소가 존재하므로 평화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즉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서는 더이상 두 문제의 연관성과 정치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또 이 글에서 밝힌 것처럼 북과 한・미는 상호적대적 의존관계 속에서 비핵화와 평화의 문제로 상호적대성을 재생산하는 분단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한반도 비핵화 평화’는 동요하는 분단체제를 비적대적 상호의존으로 수렴할 수 있는 틀이기도 하다.
‘비핵화〓평화’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지금까지의 통념을 뒤집어 생각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선 군사력 행사, 군사적 압박 및 제재 등을 강조하는 현실주의는 지금까지 북의 핵능력을 오히려 강화시켰다는 역사적 경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북이 비핵화를 하면 받을 수 있는 댓가를 제시함으로써 북의 우선적 행동을 유인할 수 있다는 기능주의의 한계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현실주의와 기능주의를 넘어서 평화가 북의 핵무장을 해제할 수 있다는 평화주의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북이 지금까지 자신의 핵무장을 정당화한 근거는 미국의 핵위협과 적대정책에 대한 ‘억제력’이었다. 따라서 평화를 제시하여 그 근거를 허무는 것이, 북의 핵무장을 해제하는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비핵화를 이루어 평화를 누리자고만 할 것이 아니라,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동전의 앞뒷면으로 보자는 것이다. 평화 없는 비핵화란 없고, 비핵화 없는 평화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은 이상주의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어쩌면 유일한 현실적 제안일 수 있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에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이와 유사한 제안을 한 바 있다.32) 또 북도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북의 조국통일평화위원회와 외무성 및 국방위원회는 입을 모아 앞으로 “조선반도비핵화를 논의하는 대화는 없을것”이라고 선언했지만, “앞으로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는 있어도”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북은 아직까지 평화와 안정에 대한 대화의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33) 그뿐 아니라, 말로는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핵무기 포기의 가능성을 제도화하고 있기도 하다. 북이 4월 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제정한 ‘자위적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데 대하여’라는 법은 일면 핵무기 보유를 제도화하는 것이지만, 제1항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는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으로 가증되는 적대시정책과 핵위협에 대처하여 부득이하게 갖추게 된 정당한 방위수단”이라고 규정, “적대시정책과 핵위협”이 제거되면 핵무기의 근거도 없게 된다고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34) 북은 대외적으로 핵위협을 휘두르며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수사를 쓰고 있지만, 제도적으로는 ‘비핵화〓평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이 공식적으로 열어놓고 있는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라는 기회의 창에 한반도 비핵화라는 어젠다를 넣으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욱식(鄭旭湜)은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4자 한반도 평화포럼에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를 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 제안에서 주목할 부분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서로 분리된 것이거나 시간적인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융합’의 대상으로 보자”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평화협정에 북한의 핵폐기 대상, 방법, 시한을 명시하는 것”을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35)
그의 제안을 더욱 발전시켜 평화협정에 한반도 비핵지대화를 융합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36) 즉 북의 핵폐기뿐 아니라 핵무기 보유국가들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까지 추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비핵화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는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미국이 확장억제라는 방식으로 핵무기 사용을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북의 핵폐기는 최소한 미국의 핵불사용 공약과 맞물리지 않으면 대칭성을 이룰 수 없다.37) 또 북・미의 핵대립은 아직도 계속되는 전쟁상태에 근원적인 이유가 있으므로 한반도 비핵지대화는 한반도 평화체제와 결합될 때 비로소 안정성을 획득할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으로는 남・북・미・중이 4자회담에서 북・미평화조약+남・북비핵평화선언+중・미비핵평화보장선언을 동시체결하는 ‘2+2+2’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38) 이 모두를 포괄하는 틀이 ‘한반도 비핵평화조약’, 이를 이루는 과정이 ‘신뢰프로세스’, 이를 토대로 동북아 평화협력체제를 만드는 것이 ‘서울프로세스’의 내용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비핵평화체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39) 북이 대한민국이나 미합중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외교와 협상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미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비핵화 평화체제를 위한 대화가 불가능하다.40) ‘북한붕괴론’이나 ‘레짐체인지(regime change)론’이 북의 위기의식을 자극한 근본적 이유라는 점에서 주권존중과 내정불간섭이라는 원칙은 현 시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과거 이러한 원칙들이 선언 수준에서 천명됐을 뿐 제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기가 되풀이되었던 경험은 이러한 원칙들을 조약의 형태로 제도화해야 할 필요성을 시사한다.41) 단 설령 한반도 비핵평화조약을 체결하더라도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러한 제도가 통일을 위한 과정이라고 명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대목은 한반도의 비핵화는 통일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이다.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어떤 방식의 통일도 전망하기 불가능하다. 첫째, 군사적 수단의 통일은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공히 비현실적 방안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한은 더군다나 어불성설이다. 둘째,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한 평화적 통일도 실현하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그 어느 국가도 통일 한반도가 핵국가가 되는 것을 지지・협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화는 통일을 위해서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필요조건이다.
김종엽(金鍾曄)은 개성공단 철수 등 2013년 봄 일련의 사태를 “분단체제가 더 깊게 동요하고” 있는 징후로 진단한다.42) 적대적 상호의존성이 약화되면서 분단체제가 상호의존 없는 적대의 강화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긴장을 제고하는 현 국면의 분단체제 동요는 비핵화를 놓고 북과 한・미가 겨루는 첨예한 적대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비핵화 평화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적대의 완화를 통해 분단체제의 동요를 비적대적 상호의존으로 해소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평화적 통일은 이러한 제도를 만드는 일과 함께 이뤄질 것이다.
한반도 비핵평화조약이라는 결과물은 국가간 체결과 비준으로 성사될 수 있지만, 그것이 시민사회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각국 정부가 비핵화와 평화로 나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을 추동할 수 있는 세력은 시민사회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자국 정부와 국민을 설득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가 동전의 양면 같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국가를 추동하는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 또 각국 시민사회의 초국가적 연대를 통해 국가간 소통을 도와줘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민사회 활동은 분단체제의 동요가 비핵평화체제로 해소되도록 하는 힘이자, 한반도 비핵평화체제가 적대도 없고 상호의존도 없는 분단의 영구화로 가는 것을 막는 힘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남북을 잇는 시민사회의 활동은 분단체제의 동요가 비적대적 상호의존으로 수렴되도록 하는 내용물이 될 것이다.
실패가 확인된 군사적 압박이나 경제제재에 미련을 갖는 것은 비과학적일 뿐 아니라 상황을 악화시키는 명백한 패착이다. 이제는 대화의 가능성을 살려야 할 때다. 4개국 한반도 평화포럼에서 ‘한반도 비핵화 평화체제’를 논의하고 이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현재의 위기를 벗어날 유일한 출구로 보인다. 4개국이 이 출구를 찾아나가도록 추동할 힘을 가진 주체는 시민사회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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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의 ‘nuclear weapon test’를 한국에서는 ‘핵실험’으로 번역하고 북에서는 ‘핵시험’이라고 부르고 있다. 강호제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이중 ‘핵시험’이 더 적합하다고 지적한다. 이 글에서는 강호제의 지적에 따라 ‘핵시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실험은 이론이나 가설의 검증을 위한 것이고, 시험은 검증된 이론을 익힌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핵무기의 근거가 되는 이론은 이미 검증이 된 것이므로, 북이 시행하는 것은 이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험인 것이다. 강호제 「북한은 ‘핵시험’, 우린 ‘핵실험’… 용어 다른 까닭은?」, 프레시안 2013.2.28.
2) 빅터 차는 북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이유를 ‘훈장’ ‘방패’ 및 ‘칼’로 비유한 바 있다. 즉 상징적 가치, 방어적 도구, 공격용 무기의 세가지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이밖에도 몇가지 설명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Victor Cha, “North Korea’s Weapons of Mass Destruction: Badges, Shields or Swords?,”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 117, No. 2 (2002), 209~30면.
3) 이는 북이 로동신문 등 매체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한 주장이다. 역설적으로 한국 국방부와 군 관련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4)Charles Kartman, Robert Carlin, and Joel S. Wit, A History of KEDO: 1994-2006 (Stanford: Center for International Security and Cooperation 2012) 및 Joel S. Wit and Jenny Town, “How to Talk Kim Jong Un Off the Ledge: Is John Kerry Ready to Deal with North Korea?,” Foreign Policy, April 12 2013.
5)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북정책: 다층적 복합적 상호의존과 그 대응」, 『내일을 여는 역사』 2012년 겨울호 74~93면 참조.
6) 지면사정상 이 글에서는 북의 정치・경제상황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으로의 권력이양과 노동당 및 국가기구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데 큰 이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는 대형발전소 건설이 완공되고, 제철 및 화학공업 개비가 완료되면서 소비재 및 농축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7) 북의 “소형화・경량화”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무수단 미사일과 KN-08 미사일의 사거리와 정확도도 확인된 바는 없지만, 북의 핵・미사일 능력이 확대・발전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8) 북은 이를 단순한 동상파괴 기도가 아니라 자국 내부에 소요를 발생시켜 외부의 개입을 유도할 저강도전쟁 시나리오로 보고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졸고 참조.
9) 조숭호・이승헌 「백악관인사 8월 극비방북… 美대선 관련 거래?」, 동아일보 2012.11.29. 국방위원회는 2012년 10월 9일 발표한 성명에서 “최근 우리와 공식 및 비공식석상에서 만난 바 있는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와 중앙정보국의 중진정책작성자들도 미국의 대조선적대시정책은 없다고 하였다”며 8월 비밀회동의 내용을 시사했다.
10) 북의 대화 제의가 이른바 ‘위장평화공세’였을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의 대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북의 진정성을 확인할 기회 자체를 상실한 셈이다.
11) 김관진 국방장관은 B-2 스텔스 폭격기 등 미군의 최첨단 무기가 최근 한반도 상공에서 훈련을 진행한 것에 대해 “키리졸브 훈련과는 별도로 유사시 한미연합전력의 우위를 보여줌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억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북은 핵위협을 극대화함으로써 한・미를 억지하려고 한다. 김유대 「김관진 “개성공단 만약의 사태시 군사조치”」, 뉴스1 2013.4.3.
12) 북의 자신감은 앞에서 언급한 정치적・경제적 안정화와 핵 및 미사일 능력의 성장(또는 그렇다고 믿는 것)에서 비롯했다고 보인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2013년 2월 결정서에서 “조성된 엄중한 정세에 대처하여 (…) 강도 높은 전면대결전”을 벌이겠다고 이미 선언한 것에 비추어 보아 3~4월의 “강도 높은” 대응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구체적 내용과 수위는 한・미의 행위에 조응하여 결정된 것이다.
13) 결의 2094호가 유엔헌장 7장을 처음으로 적용했다는 만수로프의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와 1874호도 유엔헌장 7장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북의 위기의식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Alexandre Mansourov, “North Korea: Turning in the Wrong Direction,” 38 North, April 10, 2013.
14) 결의 2087호는 “추가 발사나 핵시험이 있다면 중대한 조치(significant action)를 취할 것”이라고 추가 조치의 가능성을 열어놓았고, 결의 2094호에도 “추가적인 중대한 조치”를 취하기로 하는 트리거 조항이 들어갔다. 이에 비해 1718호나 1874호는 “추가적 조치가 필요하다면 추가적 결정이 요구될 것”이라고 추가적 조치를 제한했다.
15) 1998년 8월 31일 광명성 1호(북은 그 추진체를 ‘백두산’이라 명명)를 발사했을 당시 미국 등은 이 추진체를 대포동 1호로 명명하고 미사일로 규정했지만 유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6자회담 도중 BDA 금융제재가 부과되고 2006년 6~7월에 ‘용감한 방패’와 ‘환태평양 해군연합훈련’이 실시되자 북은 2006년 7월 5일 미사일 7기를 연속 발사했고, 북 외무성은 “우리를 표적으로 한 대규모의 군사연습”에 대응한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발사했다며 이 로켓이 미사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북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 1695호가 7월 15일 채택됐고, 이에 반발한 북은 10월 8일 1차 핵시험을 단행했다. 당시 미국과 북의 적대적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졸고 「북한의 무력시위만 문제인가」, 프레시안 2006.7.7 참고.
16) 우주기술위원회뿐 아니라 동방은행과 금룡무역(조선광업공사의 별칭), 토성기술무역회사, 연하기계연합기업소 등도 제재 대상으로 규정됐다. 인공위성 발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우주기술위원회뿐 아니라, 연하기계연합기업소처럼 다양한 공작기계를 제조하여 북 산업의 전반적인 현대화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업체가 제재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눈에 띈다.
17) 2012년 2・29합의에서 북은 “장거리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예”에 합의했다. 북은 2012년 4월에 발사한 인공위성은 “장거리미사일”이 아니므로 이 합의를 위반한 것이 아님에도 미국이 이 합의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8) ‘보호할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은 2001년 ‘개입과 국가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가 도입한 원칙으로 2005년 유엔 세계정상회담에서 채택되고 2009년 유엔 총회에서 추인됐다. 그러나 아직 국제법의 지위는 획득하지 못했으며 그 정확한 정의와 적용 범위, 개입 방식과 절차 등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Philip Cunliffe, ed. Critical Perspectives on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Interrogating Theory and Practice (New York: Routledge 2011) 및 Cristina G. Badescu, Humanitarian Intervention and the Responsibility to Protect: Security and Human Rights (New York: Routledge 2011).
19) 박병진 「美 해병대 ‘오스프리’ 韓・美 연합훈련 첫 참가」, 세계일보 2013.4.18.
20) 정아란 「한미 해병대 상륙훈련에 호주 전투병력 첫 참가」, 연합뉴스 2013.4.20.
21)Alexander Vorontsov, “War and Peace on the Korean Peninsula,” 38 North (Washington, DC: 2013).
22) 졸고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와 한미동맹」, 『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330~51면.
23) 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북정책」 74~93면.
24)Siegfried S. Hecker, “Redefining Denuclearization in North Korea,”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December 20, 2010.
25)David Albright and Christina Walrond, North Korea’s Estimated Stocks of Plutonium and Weapon-Grade Uranium, 2012 (Washington, DC: Institute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Security).
26) 갈퉁(J. Galtung)은 ‘긍정적 평화’(positive peace)와 ‘부정적 평화’(negative peace)를 구별한다. 전쟁억지 상태인 한반도는 부정적 평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27) 아래는 졸고 「북한 ‘핵개발’, 현재적 과거의 대차대조」, 프레시안 2012.9.27에서 재인용.
28) 1993년 미국 정보당국은 북이 핵시설을 가동하면 2000년까지 핵무기 60~100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보유할 것으로 추산했다. Joel S. Wit and Jenny Town, “Dealing with the Kims,” Foreign Policy, February 21, 2012.
29)Mary Beth Nikitin, North Korea’s Nuclear Weapons: Technical Issues, CRS Report for Congress. (Washington, DC: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2012), 7면.
30)Victor D. Cha, Testimony before 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Committee on Foreign Affairs, Washington, DC, 2011.
31) 이 표는 지난 20년간 시도됐던 대북 비핵화정책의 성격과 그 결과를 도식적으로 정리한다. 복합적인 현실을 단순화하는 위험이 있고, 특히 1998년에서 2007년까지는 한국정부가 ‘햇볕정책’이라는 관여정책을 시도한 시기 중 미국의 정책과 엇박자를 낸 부분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북의 핵정책은 미국의 대북정책에 강하게 대응하고 있어,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켈리 차관보가 방북한 2002년부터 제네바합의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북정책의 본질적 성격은 군사적 압박이라고 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또 2003년부터 시작한 6자회담은 2005년 9・19공동선언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냈지만, 그와 동시에 BDA 문제로 실질적 효력을 얻지는 못했다. 결국 BDA 문제가 해결된 2008년부터 짧은 기간이지만 불능화와 신고에 있어서 많은 진전을 이뤘다.
32)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북 수교 △평화협정 체결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2009년 2월 13일, 7월 23일과 11월 21일 등 모두 세차례에 걸쳐 표명했다. 정세현은 “그때마다 ‘비핵・개방・3000’을 내세우며 북한의 선 비핵화를 요구한 이명박정부의 반대로 결국 진전을 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결국 대화협상 트랙은 국제제재 트랙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오바마 1기 대북정책의 기조에서 사라졌다. 정세현 「5월 한미정상회담, ‘박근혜 해법’을 제시하라」, 프레시안 2013.4.21.
33) 「조선외무성, 유엔안보리 결의에 대한 성명 발표」, 조선신보 2013.1.23.
34) 동시에 이 법은 “적대적인 핵보유국들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는데 따라 호상존중과 평등의 원칙에서 핵전파방지와 핵물질의 안전한 관리를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 협조한다”고 하여, 미국과의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으면 핵확산방지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위협도 포함하고 있다.
35) 정욱식 「북 ‘중요한 결론’, 핵실험 이상일 수도...」, 프레시안 2013.2.4.
36) 할퍼린도 이와 유사한 제안을 한 바 있다. Morton H. Halperin, “How to Resolve the North Korean Nuclear Crisis,” Keynote address at Conference ‘South Korea and the U.S. Pivot to Asia,”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C, April 3, 2013. http://www.wilsoncenter.org/sites/default/files/mortonhalperinspeech.pdf (accessed on April 4, 2013).
37) 마찬가지로 북의 핵감축과 미국의 핵감축을 맞바꾸자는 북의 ‘핵군축’ 주장도 대칭성에 어긋난다. 하지만 이 협상의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잠정적으로 북의 지위를 ‘가역적 핵포기국’으로 하자는 제안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 김치관 「북한에 ‘가역적 핵포기국’ 지위를 부여하자」, 통일뉴스 2013.1.28.
38) 신종대는 이와 유사하게 “북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진전, 한반도 평화협정이라는 (…) 세 바퀴를 동시에 구동시켜 해결을 모색하는 일종의 ‘삼륜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종대 「북한의 위기공세와 남북관계」, 『한반도포커스』 2013년 5・6월호.
39) 제네바합의 이전에 북・미 대표단은 1994년 6월 11일 “각 측의 주권을 상호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합의했고, 2000년 북미공동선언에서도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내정불간섭의 원칙”을 재확인한 바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협상을 위해 국가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기존 정권의 정당성 인정이나 정책 지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심지어 전쟁선포조차도 상대 국가의 실체를 인정한 위에서 이뤄지는 행위다.
40)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 1장 1조에서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명시했다. 기본합의서는 쌍방 총리가 서명하고 난 후 조약체결권자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의 최종 재가를 거쳤다. 또 정원식 총리가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여 보고했으며, 대통령의 재가문서를 국무총리와 전 국무위원이 부서하는 절차를 완료했다. 북에서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연형묵 총리가 보고하였고, 중앙인민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승인하였으며, 김일성 주석이 이를 최종적으로 재가했다. 남과 북이 이러한 절차를 밟은 것에 비해 북과 미국은 주권 상호존중을 선언 수준에서만 인정하고 합의나 협정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지 못했다.
41) 관계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아서 제도화에 실패한 것인지, 제도화가 되지 않아 관계정상화를 이루지 못한 것인지 분리하여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평화체제 정착도 전쟁 당사국의 종전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평화협정 체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북미관계 개선도 미국 또는 북한 고위관리(또는 최고 통치자)의 상호방문, 연락사무소 개설, 외교관계 체결 등 차근차근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양자를 단계적으로 결합해가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지금까지 점진적 방법이 실패했으므로 최고수준에서 제도화를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척할 근거도 없다.
42) 김종엽 「더 깊게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포용정책 2.0」, 한겨레 2013.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