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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헌법의 품격, 재판관의 자격
박성철 朴城徹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지성 소속. scpark@jipyong.com
우리는 최근 헌법재판관 공백사태를 여러번 겪었다. 일년 넘게 공석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과반이 넘는 다섯자리가 텅 비는 일까지 경험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소장 후보자는 국회 동의를 거치기도 전에 낙마했다. 앞뒤 양옆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자진사퇴했다. 꼬리를 무는 자격시비 사유는 듣기에 민망했다. 헌법재판소도 함께 초라해졌다. 헌법의 위신마저 손상됐다.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상처가 깊다. 새살이 돋는 자리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오길 희망한다. 1987년 개헌으로 본격화된 헌법재판이 스물다섯해를 넘기고 있는 지금, 우리는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 새 재판관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헌법의 품격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는 재판관의 자격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하나, 법률가(法律家) 아닌 사람
굳이 법률가 중에서 재판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재판’이라는 표현에 사로잡힌 탓이 아닐까. 본질을 덮는 허명(虛名)에 속고 있다.
법령과 공권력행사가 헌법에 반하는 게 아닌지 검토하는 작동기제에 반드시 ‘재판’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건 아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에서는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헌법위원회’에 부여했다. 법조인 아닌 부통령이 위원장을 맡았다. 국회의원 다섯명이 위원으로 들어갔다(1948년 헌법 제81조). 1952년 헌법에서도 민의원의원 3인, 참의원의원 2인을 헌법위원으로 정했다. 프랑스에서도 헌법평의회(Conseil constitutionnel)라고 직역되는 위헌법률심사기관을 두면서, 구성원 자격을 법률가로 제한하지 않는다. 전직 대통령이 당연직 재판관이 된다. 법조인 아닌 학자, 외교관, 의사, 도지사, 장관, 공기업 법무담당자 같은 여러 경력의 인사들이 재판관으로 봉직하며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법률가 아닌 로제 프레이(Roger Frey, 1974~83년 재직)가 소장의 소임을 매우 잘 수행한 것으로 추앙된다.
헌법재판을 사법(司法)의 범주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건 침대에 몸을 맞추려는 격이다. 정사각형 거푸집에서 정제돼 나온 조각만으로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세상을 원형대로 묘사하려면 여러 빛깔을 띠는 유리, 금속, 조개껍데기, 깨진 자투리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우리 헌법도 헌법재판권을 사법권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지 않는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고 하면서(헌법 제101조 제1항), 헌법재판소 관장사항은 따로 정한다(헌법 제111조). 제3장에 국회, 제4장에 정부, 제5장에 법원을 담고 있는 것과 구별해 제6장에 헌법재판소를 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을 법원의 재판과 같게 취급하는 건 헌법에도 맞지 않다.
헌법재판의 본질과 기능을 보더라도 사법의 틀 안에 묶을 수 없다.
위헌심사의 결과는 때로 입법과 같은 현상을 만든다. 법률 전부위헌 또는 일부위헌 결정은 법률을 폐지하거나 삭제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정위헌 결정은 법조항의 내용을 헌법에 합치하도록 개정하는 것과 동등한 가치로 평가된다. 어떤 법률을 만들지 않은 게 위헌이라는 입법부작위(立法不作爲) 위헌 결정은 국회로 하여금 법률을 제정하게 한다. 새로운 입법행위나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국회 입법을 적극적인 입법작용, 위헌법률심판을 소극적인 입법작용이라고 부른다.
재판관은 간혹 입법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법조인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헌법재판관 역시 법률가만 할 수 있다고 진입장벽을 설치하는 데 수긍할 이유가 없다.
헌법재판에는 ‘정치’도 스며 있다. 판단근거가 되는 헌법부터 정치성을 지닌다. 공동체 내 정치적 합의와 타협의 산물인 헌법이 정치를 외면할 수는 없다. 골격규범으로 개방된 체계를 지니고 있는 헌법의 뼈 사이에 살을 붙이며 공동체 의사와 질서를 형성하는 해석작업은 정치작용일 수밖에 없다.
법령의 위헌여부를 판단할 때 흔히 동원되는 과잉금지원칙이라는 잣대 또한 정치성을 품고 있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데(헌법 제37조 제2항), 가장 자주 논란이 되는 게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라는 문구다. 비례의 원칙 또는 과잉금지원칙이라 불리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려면, 입법목적이 정당하다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입법자가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절한 수단을 택하고, 피해를 가장 덜 주는 수단을 골라야 한다. 입법으로 달성되는 공익이 침해되는 사익보다 커야 한다. 국회가 고른 수단이 적합한지, 피해를 최소로 하는 방법인지, 공익이 더 큰지를 판단하는 건 현실 속 문제다. 상황에 구속되는 정치영역이다. 비례의 원칙이란 참새를 대포로 쏘지 말라는 뜻인데, 참새인지 독수리인지, 소총인지 대포인지는 정치적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은 입법, 행정, 사법 중 어느 하나라고 단언할 수 없다. 복합적 성질을 지니는 제4의 국가작용으로 설명된다. 법조인이 독점할 이유가 없다. 재판이라는 이름을 보고 너무 쉽게 법률가에게만 자리를 내주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재판’이라는 개념정의는 거칠고 부정확하다. 슬픔에 빠진 동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데 치유의 기능이 있다고 해서 ‘의료행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면허를 받은 의료인이 아닌데도 이웃을 위로해도 되는지, 무면허 의료행위가 되는 건 아닌지 불안에 시달리는 셈이다. 규격에 어긋난 파편일지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병상련의 위안이 된다. 빈틈을 절묘하게 메워 모자이크 작품을 완결하는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
둘, 판사 또는 검사로만 구성하지 않았으면
아쉽게도 당장은 법률가 아닌 사람에게 재판관 자리를 내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법조인 아닌 사람에게 개방하려면 법률을 고쳐야 한다. 우리 헌법은 헌법재판관에게 법관의 자격을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는데(헌법 제111조 제2항), 법원조직법은 판사, 검사, 변호사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법관을 임용하도록 한다(법원조직법 제42조). 헌법재판소법에서도 마찬가지 자격을 요구한다. 법관의 자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때까지는 법률가에게 양보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판사나 검사 경력이 없는 사람 중에서도 임명하길 바란다. 공소를 제기하고 판결을 선고하는 일은 마치 법률이라는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가꾸는 일과 같다. 반면 위헌심사를 하는 건 독나무의 뿌리를 뽑는 것이다. 판사나 검사에게 위헌결정을 맡기는 건, 혼신의 힘을 다해 나무를 가꿔온 정원사에게 나무를 잘 안다는 이유로 벌목을 주문하는 것처럼 가혹한 일이다.
헌법재판의 핵심기능은 규범통제, 즉 헌법에 반하는 ‘법규범’을 무효로 돌리는 일로,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를테면, “미성년자에게 잔인성을 조장할 우려가 있거나 미성년자로 하여금 범죄의 충동을 일으킬 수 있게 하는 만화”를 불량만화라고 하면서, “불량만화를 판매, 대여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미성년자보호법이 있었다. “아동의 덕성을 심히 해할 우려가 있는 책을 아동에게 판매하는 등의 행위”를 처벌하는 아동복지법도 있었다. 검사는 불량만화 혐의가 있는 만화책을 압수하기도 하고,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판매, 대여를 했는지 수사해 기소한다. 법관은 공소사실이 인정되는지, 법률이 금지하는 불량만화에 해당하는지 심리해 판결을 선고한다.
이 대목에서 시각을 뒤집고 시야를 넓혀 미성년자보호법, 아동복지법의 효력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위헌심사다. “잔인성을 조장할 우려”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고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잔인하다는 건 인정이 없고 모질다는 뜻인데, 처벌근거로 삼기엔 유령처럼 실체가 모호하다고 따지는 일이다. 윤리·종교·사상적 배경에 따라 잔인하다는 판단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고, 여기다 ‘조장’ 및 ‘우려’까지 덧붙여지면 처벌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흐려진다고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실제 헌법재판소는 이런 청구를 받아들여 처벌조항이 무효라고 했다. “덕성을 심히 해할 우려”라는 기준도 흐리터분하기 짝이 없다. 덕성은 윤리가 품성으로 인격화된 것을 뜻하는데, 윤리나 도덕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역사인식이나 종교관, 가치규범에 따라 자율적인 구속력을 지닌 내면적인 당위여서 일의적으로 확정된 의미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 거기다 심한 것과 심하지는 않은 것을 나눌 경계도 애매하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는 죄형법정주의에서 파생되는 명확성원칙에 어긋나 처벌법규가 위헌으로 무효라고 했다.
그동안 판사와 검사는 “이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항의에 “법을 모르는 건 용서받지 못한다”고 꾸짖고, “너는 사실을 말하라, 나는 법을 말하겠다”는 태도로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손에 들고 있던 저울과 칼은 법전을 정성스레 빚어 만든 것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법전의 어느 페이지를 찢어 던지라는 건 자기부정을 강요하는 지나친 일일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 재판관은 모두 판사나 검사 경력자 중에서 임명되었지만, 많은 위헌결정을 내렸다. 바뀐 역할과 직분에 충실해 훌륭한 위헌결정을 내린 재판관이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재조(在朝)로 쌓은 고유한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령, 서울광장을 전경버스로 에워싸는 차벽을 설치해 통행을 금지한 공권력행사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올 때 공안검사로 일했던 재판관이 반대의견을 낸 것을 우연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구성원 다양성의 빈곤은 개인의 역량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결함이 아니다. 다양성은 다른 방향에서 진행되어온 상이한 삶의 궤적이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재야(在野)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 세상의 숨소리에 더 가까운 화음을 만들려면 산과 들을 아우르는 공론장에서 인재를 등용해야 할 것이다.
셋, 시적 정의의 횃불을 밝힐 수 있는 사람
진정 바라는 재판관이 있다면, 시적 정의(詩的 正義, poetic justice)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길 갈구한다.
토머스 라이머(Thomas Rymer)가 쓴 『비극소론』(A Short View of Tragedy, 1693)에서 유래한 ‘시적 정의’는, 시인의 마음에만 가둘 수 없는 판단의 좌표다. 속세의 지혜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 대한문 앞 군중 속 나부끼는 깃발에 붉은 한자로 박힌 “詩的 正義”처럼, 거리의 구호로, 시장으로, 법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행이나 악행에 비례해 상과 벌을 내려야 한다는 ‘시적 정의’는 보통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표현되곤 한다. 선과 악을 나누는 걸로 오해해선 안된다. 무엇을 권하거나 어떤 것을 벌하는 데 본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비례(比例)”라는 문구에 있다.
선(善)과 악(惡)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경계인들을 보고 바로 그 위치에 합당한 공감과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소설 속 문장처럼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서기엔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다. 그들을 도마에 올려 함부로 내려치지 않는 태도를 ‘시적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50.01%와 49.99%를 선악(善惡), 승패(勝敗)로 나누지 않고, 0.01%의 미세한 차이를 인지하고 공감하며 그 차이에 걸맞게 대해주는 정의로움이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 인권을 제한할 때는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야 한다”고 정하는 원리와 같다. 시적 정의는 헌법상 비례의 원칙, 과잉금지원칙과 궤를 같이한다.
시인은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절감하는 방식으로 정의(正義)를 말한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것들에는/하늘이 감당하지 못할 무게가 있다/한 방울의 비/한 송이의 눈/한 장의 꽃잎/한 티끌의 재/한 올의 새털…/이 모든 가벼운 것들은/그 무게로 하여 지상으로 낙하한다”(홍사성 「슬픔의 무게」)고 노래한다. 보잘것없이 떨어지는 하찮은 존재의 슬픔을 감지하는 데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이 시작된다.
이해인 시인은 시적 정의를 ‘눈물꽃’이라고 일컫는다. “잘 울어야/눈물도/꽃이 됩니다//나를 위해 울지 말고/너를 위해 울 때//너무 오래 울지 말고/적당히 울 때//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으로/감동하거나 안타까워서 울 때//허영심을 버리고/숨어서 울 때//죄를 뉘우치는 겸손으로/착하게 울 때//눈물은/진주를 닮은/하나의 꽃이 됩니다/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강물꽃/눈물꽃이 됩니다”
내가 아닌 너를 위해, 과장하지 않고 적당히, 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으로, 감동하거나 안타까워하며, 허영심을 버리고, 죄를 뉘우치는 겸손으로, 그렇게 함께 우는 게 시(詩)가 꿈꾸는 정의다.
영국에서 무척 존경받는 알프레드 데닝(Lord Alfred Denning) 판사는 법관이 갖추어야 할 최대 덕목으로 ‘시적 상상력’을 거론했다. 철학자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책에서 시인과 판사가 하나 되는 세상이라야 공적 영역에서 정의가 세워진다고 말했다.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 없는 법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파했다. 시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판사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
판사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팽이가 돈다/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아이가 팽이를 돌린다”(김수영 「달나라의 장난」)고 한가로이 말할 수 있을까. “나 이번 生은 베렸어/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황지우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라고 되뇌는 일이 있을까. “고요 속에는/개 줄에 목이 묶여 기어가는 아버지와/365일 하혈하는 병든 밤과/부지런히 늪을 짓는 거미가 산다”(박연준 「시를 쓴다」)고 잠잠한 공기를 느낄 수 있을까.
재판관보고 시인이 되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시인을 재판관으로 임명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시대와 불화를 겪을 때 작가 개인의 상상력은 공공의 상상력으로 탈바꿈한다. 공적 상상력은 사회질서의 변모를 모색한다. 타자를 가련히 여기는 공감이 규범세계에 투영될 때 사회적 연대로 확산된다. 가진 걸 잃지 않으려 두 손을 꼭 쥐고 있으면 서로 맞잡을 수가 없다. 가난한 시인의 빈손이 공감과 연대를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마음으로 시적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재판관을 깊이 소망한다.
헌법재판소 문은 ‘소수자’가 두드린다. 권세와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다수결의 원리가 지배하는 국회에서 의견을 관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패배한 소수자다. 큰 수레를 멈추려고 그 앞에 앞발을 들고 선 사마귀처럼, 소수자는 외롭다.
“법이 원래 그래” “공익을 위해 네가 희생해야겠다”는 냉소와 근엄은 소수자를 의지할 곳 없이 더 쓸쓸하게 한다. 헌법재판소는 마지막 피난처다. 그 안에 몇송이 눈물꽃이 피어 있다면, 꽃잎에 “너도 참 힘들겠구나. 나라도 그렇겠다”고 쓰여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지친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