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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사실, 역사, 그리고 시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21세기 오감도(烏瞰圖), 21세기 소년 탄생기(誕生記)」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1.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1)

 

시편을 특징짓는 것은 말을 초월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시편의 본성을 유일하고 환원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탐구하게 만들며, 동시에 시편을 다른 역사적 사건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회적 표현으로 여기게끔 한다. 말로 씌어진 시편은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시편에 근거를 제공하고 또한 역으로 시편이 근거를 제공하는 공동체와 역사가 없다면 시편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2)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말이다.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시편들이 언어 안에서 쓰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부정성이나 전복성이란 명명으로 자주 거론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두곳이다. 첫째, 시편이 역사에 근거를 제공한다는 말. 둘째, 시편이 말 너머를 향하며 역사는 시편의 의미를 고갈시키지 못한다는 말. 사실 이 두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연쇄적이다. 빠스는 첫번째 물음에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가 없었다면 그리스라는 역사적 실재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한다. 경험의 추상화를 거부하는 시편들이 원초적 경험과 그것이 쓰인 이후에 오는 행동과 경험의 총체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빠스는 시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시작하며 발생하는 독특한 시간성을 보유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시는 흘러간 과거를 재현하는 장르가 아니라 그 과거에 잠재하거나 현재와 관련한 다른 시간을 계시(revelation)하는 역사성(historicity)을 지닌 장르로 파악한 것이다.

저 다른 시간을 계시하는 성격은 두번째 물음에 관련해서도 중요한 맥락을 지닌다. 빠스는 이미지와 리듬을 포함하는 시의 언어가 어떤 한정된 것을 지시하는 언어적 성격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시의 이미지와 리듬이 일상의 언어보다 앞서 있는 무엇이라고 여겼으며, 시의 언어는 특정 역사적 시점 이전에 있으며 새로운 경험을 비추는 기능을 보유한다고도 말했다. 우리의 감각을 포획하고 있는 직선적 시간관이나 도구적 언어관은 빠스의 저 말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게다가 유동적인 그의 사고가 다소 반복적이고 정적인 언어로 표현된 점도 이해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그의 말과 유사하면서도 좀더 동적인 언어를 빌려보도록 하자.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위험한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 유물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다.3)

 

벤야민(W. Benjamin)의 말이다. 주의해서 보아야 할 지점은 역시 두 부분이다. “위험한 순간”이라는 표현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이라는 언급. 위험한 순간이라는 표현 속에는 현재의 위험을 얼마나 강렬한 강도로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되물음이 잠겨 있다(물론 저 말은 당대의 위험 상황, 가령 나치당의 집권과 전쟁 발발 등을 지목하는 면도 있다). 빠스에 비해 벤야민은 항상 위험함과 위급함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곤 했다. 그에게 역사는 늘 긴박한 싸움이었으며, 주의와 집중을 요하는 시간이었다. 또한 그는 저 주의와 집중의 시간에 이미 있었으나 적당한 사용처를 알지 못했던 과거의 사유와 힘들이 이미지의 형태로 재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나타난 과거의 이미지를 낚아채 과거로부터 현재가, 동시에 현재로부터 과거가 새롭게 충전되는 순간, 다른 시간이 도래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법하다. 그리고 이 다른 시간의 도래야말로 빠스가 말한 시편들의 움직임, 즉 고정된 의미로서의 역사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말 너머를 향한 운동성과 맞닿아 있다.

많이 에둘러왔지만, 옥따비오 빠스와 발터 벤야민의 저 말을 떠올린 건 실은 근간에 읽은 한 싯구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이제 막 얼굴을 드러내는 무엇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구절을 옮긴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아닌 것들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말하려는 힘.

—이장욱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 부분

 

당연한 말이겠지만, 저 시에 쓰인 “이명박(李明博)”과 “박근혜(朴槿惠)”는 특정 인물을 지시하고 한정하는 언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니다. 거기에는 한정된 정의로 해결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맥락이 혼돈스럽게 얽혀 있다. 가령 저 이름들의 주위로 모여드는 사건의 이름들이 있다. 용산참사, 4대강파괴, 쌍용자동차사태, 강정마을 등등의 명명,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건의 이름들까지. 이 모든 사실들이 이명박과 박근혜가 아니면서 그들을 말할 수 있는 목록이다. 아마도 저 목록은 그들이 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기술했던 역사서술의 항목에서 은폐되거나 축소되기 쉬운 사실들일 것이다.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시는 감정을 누설하는 표현 하나 없이 우리를 아프고 화나게 만드는 사실들을 상기시킨다.

시인들이 사실4)에 좀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앞선 빠스의 언급처럼 시란 늘 역사와 공동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근간의 사정은 사실에 관심을 두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이 관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한동안 문단비평에 등장한 문학과 정치에 관한 담론이 기여했을까. 혹은 한 시인의 투철한 현실의식의 발로일까. 분명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간극과 결합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알아버린 내용에 자극을 받은 면도 있을 것이고 한 개인의 정치의식이 작동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급박하게 시인들의 감각을 찌르고 들어온 사실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보면 시가 사실들에 붙들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우리의 시가 근거를 두고 있는 역사의 의미망이 어느 때보다 심하게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쓰러지기보다 부서지는 것

부서지기보다 타오르는 것

 

오창부 엄인섭 김영훈 김고운 김동선 임무창 최군재 김현욱 황대원 서성철 조영하 강종완 고대근 김철강 강명호 민변호 이윤형

 

붉은 새들이 아스팔트 찬 바닥에 앉아 죽음의 깃털을 다듬을 때,

 

오로지 저들이 펼쳐 읽는 계명들;

 

너희는 연약하니 주저앉는 소처럼 무너질 것이고 너희는 가난하니 구럼비 파도처럼 부서질 것이고 너희는 아름다우니 용산의 불꽃처럼 타오를 것이고, 그리하여 너희는 노동자니

 

(…)

 

폭죽처럼 총성이 울리고;

신부의 몸을 찢고 빛나는 황금을 꺼낸다 검은 넥타이 검사들의 박수와 함께

축제처럼 총성이 울리고;

붉은 피로 건배를,

저 도살의 수족으로 꿈틀대는 언론과 함께

 

멈춰버린 순간에 시곗바늘은 가장 먼 어둠을 가리킨다 어느 해 하천에서

한꺼번에 뒤집힌 물고기의 방향으로,

 

그러고도 아직 불러야 할 이름들—이윤정 정형기 박종대 강희남 윤용현 이성수 한대성 양회성 이상림 이병렬—그러고도 다 부르지 못할 이름들……

 

—신용목 「학살미사」5) 부분

 

2012526일 대한문 분향소 앞에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 스물두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다. 이 시는 그때 그 자리에서 낭독되었다. 비통한 죽음과 관련한 이름과 납득할 수 없는 사건들의 이미지가 시의 자리에 회집하고 있다. 난폭한 세계의 끝에 서 있는 기분을 지우기 힘들다. 친밀하면서도 개별적으로는 특별한 삶의 이름들이 국가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고인의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이 황망하다. 게다가 시에 쓰인 다양한 이미지들이 극단화된 감각의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명명들과 이미지들 사이에서 납득할 수 없는 정황에 분노를 공유하든 혹은 그러지 않든 간에 우리의 삶의 공간이 상당히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시인은 더 큰 재난이 닥치기 전에 이 불합리와 부조리한 사실들을 서둘러 말해야 한다고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혹은 시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앞선 이장욱(李章旭)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과 시는 “거의 새로운 세계가/돌아올 것”을 느끼고, 자신이 “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사실로 물들어서” 돌아올 것을 감지한다. “거의”와 “새로운”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느껴지는 어떤 불길함, 이 불길함이 시로 하여금 사실로 물들기 이전의 예감과 불안과 공포를 말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말함으로써 역사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말의 물꼬를 터내는 일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그 시도는 이미 시작되었다.

 

 

2. “아무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에게 이 흰빛의 어둡고 붉은 향기를”6)

 

진은영(陳恩英)은 이번 시집에서 “문득 시작해놓은 시”(「아름답게 시작되는 시」)를 꿈꾸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낭만주의적인 열정 속에 문득 엄습한 영감으로 쓴 시라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시, 문득 무언가에 자연스러운 흐름이 가로막힌 시라는 해석이 더 어울린다. 가령 「멸치의 아이러니」에서처럼 ‘시인의 말’에 접속했던 시인이 어머니로 대표되는 ‘시민의 말’에 가로막혀 시적인 흐름을 전환해야 하는 순간이야말로 “문득 시작해놓은 시”의 모습에 가깝다. 시인이 거의 강박적으로 갈등하기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는 “수음처럼 또다시 은밀해지려는 나의 슬픔”과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고백」)에 대한 말 사이에서 갈등 중이고, 또 이 모든 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있다」)와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이 모든 것」)은 환멸의 순간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시의 흐름이 점멸을 겪을 때마다 시에는 난파당한 세계의 조각들이 불현듯 지면 위로 모습을 보인다. 하나의 조각이 소실한 또다른 조각을 유추하게 만들고, 그 조각에 몸을 싣고 있던 목소리들을 불러온다. 물론 이 목소리는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나와 타인의 삶이 연동할 수 있는 이미지나 리듬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쉽사리 들리지도 기록되지도 않는다.

 

구름이 물방울들, 발 없는 영혼들의 몽유병이라는 거

청춘의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청춘이 끝난 뒤에도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

어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는 거

나무들, 나무들의

회색 밑둥 아래로 슬픔의 기름이 흐른다는 거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

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

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

꽃들이 시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

 

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

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

어디선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모두 떠나간 자동차 공장에서

 

아이들은 유리로 된 껌을 씹고

아 아 아 웃으며 지나가는 아가씨의 순결한 옆구리에서

창이 튀어나오고

필름을 넣지 않은 사진기의 눈빛으로

네가 그 풍경을, 나를 철컥철컥

찍어댄다는 거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의 흰 달을

비 갠 거리, 핏방울

싸움꾼이 잠시 후면 늙어간다는 거

 

종이의 깊은 속에서 가래가 끓고, 그 거품들

너의 왼뺨이 오른뺨보다

따듯하다는 거

내가 네 연인의 연인을 사랑했다는 거

벼락 맞은 한밤의 나무처럼

 

태양이 동그랗고 노란 나뭇잎이라는 거

그래서 매일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새삼 5월을 노래할 필요가 없다는 거

1월에도 12월에도 평등하게, 사이좋게

죽음이 흰 유방 열두개를 전부 드러낸 채 거리를 뛰어가고 뛰어갔으니 

—진은영 「지난해의 비밀」 전문

 

제목에 관해 먼저 이야기하자. 왜 이 시의 제목은 “지난해의 비밀”일까. 왜 ‘지난해’가 ‘비밀’이란 말을 동반해야 할까. 과거가 너무 쉽게 과거가 되기 때문이다. 또 지난 일들이 너무 쉽게 비밀이 되어서다.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불구화된 역사의식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와 ‘너’ 사이에 의미의 교차점을 이룰 ‘세계’라는 터전이 사라진 채 파편적 사건들이 의미없이 취급되거나 의미를 포착할 수 없는 일로 다뤄지는 비극이 ‘비밀’이란 말 속에 잠겨 있다는 말이다. 이 비밀의 비극성으로 인해 시의 호흡은 가지런한 듯 불편하다. 쉼표의 활용과 행과 연의 분절이 자연스러운 호흡을 끊어놓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불편함은 시인이 “울음도 아니고 웃음도 아닌” 사실의 무게만을 지면에 올리고자 구축한 리듬일까. 쉽게 비밀이 되어 망각되거나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충격적인 사건들의 기억이 “낮달”처럼 흐릿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더 큰 충격을 받으면서, 시인은 그렇게 “사실의 씨앗”을 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그런 날에는」).

제목은 또다른 뉘앙스도 포함한다. 지난해에 비로소 알아버린 사실을 폭로한다는 맥락이 거기에 스며 있다. 구시대의 고통이고 아픔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여전하다. 해서 그에 대항하는 싸움도 진행 중이며, 또한 다시 아이들을 통해 고통이 미래로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말한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예전보다 더 절망적이라고 감지한지도 모른다. 5월의 노래를 열두개의 달이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는 표현은 벤야민적 의미에서 ‘예외상태(Ausnahmezustand)’가 상시가 되어버린 현실을 떠올리게까지 한다.

그런데 폭로되지 않고 비밀스럽게 남은 한 존재가 더 있다. “너”라는 존재가 그렇다. 이 ‘너’의 단속적인 출현이 시의 흐름을 가장 부자연스럽게 만든다. ‘너’는 문득 출현하여 나를 회한에 빠뜨리고, 충격에 몰아넣거나, 죄의식 현장으로 이끌고, 상실감에 젖게 한다. 침묵한 채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이 ‘너’에게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가 감지된다. 시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할지라도 시인은 저 ‘너’를 결코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의 화자와 ‘너’의 관계성이 이 시가 기록한 다른 사건들과 자신의 관계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의 영역에 부지불식간에 침범해오는 너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너도 그리고 저 사건들도 나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각, 시인의 ‘너’가 시인에게 일러준 비밀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이 비밀은 ‘타자’나 ‘윤리’의 이름을 빌어 빈번히 이야기되는 것이나, 이 시의 이미지처럼 우리에게 고통과 불편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실어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너’에 대한 지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이 시인에게 배고픈 아이와 죽은 사람과 창에 찔린 아가씨를 더 말해야 한다고 강요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신이 조금은 덜 자유로워지고 조금은 더 불편해지는 쪽으로 시적인 행로를 이동 중인지도 모른다.

 

늙은 여인들이 회색 두건의 성모처럼 달려와서

언덕 위 쓰러지는 집을 품안에 눕힌다

 

라일락이 달콤하고 흰 외투자락을 날리며 달려와

무너져가는 저녁 담을 둘러싼다

 

면식 있는 소매치기가 다가와

그의 슬픔을 내 지갑과 바꿔치기해간다, 번번이

 

죽은 사람이 걸어다닌다 꽃이 진다 바람이 분다 여름이

파란 얼음처럼 마음속으로 미끄러진다

 

하늘의 물방울 빛난다

내가 사랑했던 이가 밤새 마셨던

—진은영 「오월의 별」

 

다시 5월이다. 이 5월은 시간의 흐름이 반복적으로 지나치게 하는 단지 그런 시점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지 과거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 회상하는 형식의 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채 침묵 속에서 뒷걸음질치고 싶은 시간이며 동시에 경악하고 싶은 순간이다. 과거가 깨어나 현재의 모든 것에 타격을 입히는 현장에 시인은 자신을 들여놓고 있다. 부재하면서도 현전하는 목소리들로 꽉 찬 그 시간에 시인은 “부드러운 인내심”(「후크」)을 발휘한다. ‘부드러운 인내심’이란 부드럽게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전율을 견디고 있다는 말이다. 전율 없이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을 적기 위해, 자신의 의견이 역사가 살아나는 소리를 듣는 일을 방해할까 시인은 자신을 방어하는 것마저 최대한 자제한다.

어머니와 같은 여인들이 언덕 위의 무덤을, 무덤 속의 과거를 자신의 “품안에 눕힌다.” 부드러운 꽃잎이 “무너져가는 저녁 담을” 감싼다.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이 이미지를 시인 또한 모를 리 없다. 망월동이라는 이름의 한 풍경이 그 이미지 속에서 살아 있다. 이미지가 살리는 것은 그 풍경만은 아니다. 국가의 폭압 속에 사라졌던 인물들 또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소매치기도 그중 한명이라고 추정된다. 국가권력의 폭압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언급조차 되지 않던 얼굴이 거기서 출현한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이의 얼굴을 시인은 알아챈다. 왜일까. 여전히 자본과 결탁한 이 국가에서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너무 빈번히 출현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희생당한 얼굴이 누구나의 얼굴이 품은 잠재적 모습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소매치기가 다가와 바꾼 것은 슬픔과 지갑만은 아닌 것이다. 죽은 얼굴을 미완료된 죽음의 얼굴로 바꾸어놓았고, 산 자의 얼굴을 죽음의 그림자가 비추는 얼굴로 바꾸어놓았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죽은 사람이 걸어다닌다”는 말 속에서 겹쳐 있다. 저 표현과 그 다음의 구절들은 무너짐과 사라짐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운동성이 발생한 증표이기도 하다. 진은영은 이 시를 쓰면서 위험한 소멸과 망각의 현장에 다시 생성과 기억의 불씨를 댕기는 언어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주체성(subjectivity)의 경험을 시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벤야민의 한 언급을 훔쳐오자.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인 것이다.”7)

진은영은 새 시집에서 우리가 경험한 사건과 아픔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아니 그것을 되살리고 반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성을 갱신해가려는 투명한 의지를 자주 내비춘다. 흥미롭게도 그의 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연적 요소들은 저 의지를 크게 방해하지 않은 채 동참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염려했던 것보다 ‘시민의 자리’와 ‘시인의 자리’는 그리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8)

 

 

3. “거짓된 눈물의 역사”9)

 

김중일(金重一)은 첫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에서부터 기억과 시간이라는 테마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가령,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래시계’라는 소품은 그가 순간순간 빛깔과 모양을 바꾸며 찾아드는 시간에 유독 예민했음을 증명한다. 시인은 흡사 기억의 파수꾼 같았다. 의미를 바로 알아낼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엄습해오는 어떤 순간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늘 다음과 같이 긴장했다.

 

나는 꽃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무수히 많은 꽃들을 두려운 눈으로 둘러봤어. 내가 어쩌다가 그곳을 지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독히도 추운 곳이었어. 나는 벌벌 떨면서 끝내 찾아가지 않고, 얼어버리거나 스러질 듯 말라버린 꽃다발 하나를 벽난로 속에 던져넣었어. 불길 속에서 빨갛게 다시 피어나는, 그 화력(花力)이 잠시잠깐 나의 몸을 녹여주었지.

 —김중일 「국경꽃집의 일일」 부분

 

국경꽃집의 꽃들은 그를 사로잡은 기억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언어가 그것들에 다가가는 시간은,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무상한 흐름의 영역을 홀로 탐사해야 할 고독의 여정을 필요로 하나, 정념과 사유와 착란이 뒤섞인 기억이 순간적으로 언어로 화할 때마다 시인은 알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므로 꽃은 그가 시의 나라로 이주할 수 있는 통로였으므로 그의 시집은 ‘국경꽃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 시집에서 기억의 타자성(otherness)에 자신을 개방했던, 일종의 적극적 수동성(active passivity)을 경험한 시인은 두번째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에 이르러 역사의 형상을 발굴하는 일과 관련한 어떤 능동성을 실험한다.

 

우리가 함께 매일매일 무수히 구부렸던

숫자들을 모두 도로 감쪽같이 펴놓아야지

 

물고기처럼 평생 물거품과 키스해야지

—김중일 「기념일」 전문

 

구부러진 숫자들이 활력을 잃고 주눅이 든 시간대를 비유한다면 그것을 편다는 말은 공허한 시간을 중지시키고 일상에 갇힌 나날을 “기념일”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기념일”이란 제도적인 이벤트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에서 비롯된 기념일이다. 제도적 이벤트가 사건이 있고 그것을 지배층의 구미에 맞게 의미화하는 방식이라면, 김중일의 기념일은 선언이 있고 이후 발생할 사건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와 관련한다. “매일매일”의 일상에 갇혀 있는 왜소한 주체의 나날에서 벗어나 그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의 틈을 발견하고 그와 접속을 희망하는 시인은 시간과 역사를 배역으로 하는 연극을 올린다. 그런데 이 연극이 좀 특이하다. 새로운 시간의 활력을 선사할 이미지나 리듬을 발견할 수 있는 극을 기대하기 쉬우나, 실상은 “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희극의 첫 막”(「물고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

 

얼굴 없는 내레이터는 역사에게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보다 왜소하시군요?

역사는 코앞까지 내려온 둥근 달을 멀뚱히 바라본다.

—김중일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

 

김중일의 두번째 시집을 읽고 다시 그의 첫 시집을 보면, 두번째 시집에서 다룬 것들을 첫 시집에서도 이미 다루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그는 첫번째 시집에서도 ‘역사’를 직접적으로 시에 끌어들이고 싶었으나 대신 ‘엽사’(「엽사」)라는 우회를 택한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 시에서 역시 방금 인용한 시처럼 역사는 왜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10) 「기념일」이라는 시를 잘못 본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말을 잘하지 못하고, 누구의 질문에도 딴청을 부리는 듯한 역사의 모습은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하찮아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이미 그를 늙은 역사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 표현과 형상은 어떤 새로운 역사의 모습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을 어른거리게 한다.

그런데 이같은 희극적인 역사의 모습은 어떤 공격성이 우회된 표현인지도 모른다. 희극이 공격성(aggressivity)을 표출하는 방식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전언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왜소해진 역사의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왜소해짐으로 이미 강력하게 우리에게 질문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 역사는 왜 왜소해졌으며, 역사는 정말 종말에 이른 것이 맞는가. 희화된 역사의 모습에 당신은 동의할 수 있는가, 혹은 그 모습은 당신의 삶과는 무관한 것인가 등등. 이 질문들을 동반하며 시인은 본격적으로 역사라 불리는 단어의 주위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여러 맥락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소규모 건축사무소 소장인 형은,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 ‘눈물’의 평면도를 스케치하고 있다. 선대의 기억까지 소급하는 지난한 설계작업.

형이 이번 공모전에 출품할 프로젝트 제목은 ‘강변의 포클레인과 화마가 휩쓸고 간 눈물 혹은 거짓된, 눈물의 역사’이다.

밤. 우리 형제는 한이불을 덮고, 서로의 발뒤꿈치를 쓰다듬었다. 잠든 마을의 길고 피곤한 꿈속에서 역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형! 그를 불렀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새까만 털과 콩알 같은 눈동자의 작은 개처럼 나는 형의 발등을 핥았다. 거실에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제목의 판화 한점이 혼자 훌쩍이며 내걸려 있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

 

역사는 이빨에 오랫동안 피를 묻히지 않았다. 역사는 힘쓰는 게 힘들다. 하루만 지나도 음식에 쥐떼가 들끓던 그해 겨울. 역사는 한때 스스로 이 마을의 징후가 되고 싶어했다.

마당에는 형에게 고용된 베테랑 철거반 땅거미들이 어둑한 집 안으로 스며들어, 과묵하고도 은밀하게 마당으로 짙게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를 뜯어내고 있었다. 관짝 같던 그림자의 일부가 뜯어지자 그 틈새로 역사의 부릅뜬 그러나 늙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끔벅거렸다.

역사는 나이를 거꾸로 먹는 족속. 그가 우리를 낳고도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아슬아슬한 일.

형, 우리가 이곳에 뾰족한 이파리들처럼 돋아난 이후, 마당 위로 삼십년간이나 내리고 있는 검붉은 새벽을 이제는 정말 저녁이라고 불러야 할까.

강변에 누운 상한 고기 빛깔 박명은 하늘의 속을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우리가 우리의 집을 버리기 위해, 아직은 다시 세워야 할 새벽.

(…)

케케묵은 뗏장 같은 그림자가 벗겨지자 그곳에는 더이상 어떤 상징도 아닌 ‘새벽’ 한 줌이 유골함 속에 담겨 있다. 꽃나무마다 온통 하얗게 머리가 센 봄의 끝머리였는데, 참새는 전깃줄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다.

(…)

식탁을 마저 치우고 우리 형제는 다시금 움푹 파인 텅 빈 마당 한가운데로 나갔다. 우리 형제가 이번 생에 겨우 어쩌다가 세운 허공이라는 유적. 저마다 혈관 속에 한구씩 누인 허공이라는 시체.

지구는, 태양으로 매일 저글링하던 역사가 하품하며 흘린 감정 없는 한 방울 눈물, 우주의 차가운 열기 속에서 조금씩 천천히 흔적도 없이 말라붙을 것입니다,라고 나는 밤에 썼다.

—김중일 「거짓된 눈물의 역사」 부분

 

분량상 시의 중반부터 일부를 옮겼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두 형제 사이의 대화가 시의 전반부를 채운다. 시인은 누구의 편에도 쉽게 손을 들어주지 않은 채 이 두 입장의 길항이 어떤 길을 열어젖힐지를 지켜본다. 서로의 역사감각을 인정하는 형제애의 공간을 열어둔 것이다. “검게 탄 눈물 한 방울” 같은 고등어를 먹으며 형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흘리는 눈물의 질량은 머물던 공간과 비례한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하지만 동생은 거기 동의하지 않는다. “독재자나 학살자 혹은 부자들”에게까지 그 주장이 적용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물은 그들을 적대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형은 그들을 적대하는 역사적 입장과 거리를 둔다. 그 용어들에 사로잡힌 사고가 “강변의 포클레인과 화마가 휩쓸고 간 눈물”을 제대로 역사화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이 보기에 그런 태도는 역사를 구성하는 특정 지배담론(master narrative)의 어휘에 사로잡힌 상태일지 모른다.

형의 생각과 말은 얼핏 현실의 처참함으로부터 거리를 둔 이상한 방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처참함이 아니라 눈물의 언어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에게는 독재와 학살에 대한 생각의 혼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이 있다. 형은 감정이입을 통해 손쉽게 역사를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중이다. 벤야민은 역사철학 일곱번째 테제에서 감정이입의 역사서술을 “심장의 나태, 즉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한 역사적 이미지를 붙잡는 데 절망함으로써 생겨난 태만이라는 병”11)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감정이입의 역사서술법이 쉽게 승리자의 마음 상태에 도취되어 거짓서사 형태의 역사주의가 되기 쉽다고 진단하였다.12)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떠올리는 형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눈물의 역사라는 말 자체가 이미 역사를 허구화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눈물로부터 역사를 분리해내자, 역사의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에서 역사는 처음에는 늙고 병든 상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시가 진행되면서 역사는 젊음과 늙음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벗어난 어떤 시간적 초월의 자취를 지닌 형상으로 그려진다. 아슬아슬하게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무너지면서 멈춘 듯했던 역사가 다시 약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너지고 뜯기는 그 자리에서 이상한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하고 그 현기증 속에서 급격한 비약이 발생한다. 죽은 “새벽”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형의 철거작업은 이 유골을 위한 일종의 제의적(祭儀的) 의식(儀式)이었던 것일까. 어떤 시간성 혹은 그 시간과 관련한 세상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제의 말이다.

변화하는 시간에 물들지 않은 어떤 초월적 시간성을 영접하고 그를 통해 오염된 시간을 정화하는 듯한 제의적 시간감각은 비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삶을 시에 투신하는 시인에게는 여전히 자연스러운 감각의 일종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시인에게만 익숙한 감각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특정 삶의 형식에 바치면서도 지금 여기와 다른,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저 제의적 감각은 꿈이든 무의식의 형태로든 남는다. 그러나 이 제의(ritual)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형의 제의를 옆에서 지켜본 동생이 덧붙인 말을 보라. 동생은 형의 제의에 역사가 하품으로 응대하고 있을 거라 적어놓고 있다.

역사에 대한 생각과 꿈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이 오히려 말의 충만함이 되살렸는지 시인은 리듬을 바꿔 다시 쓴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

 

새벽잠에서 깨어난 지 오래됐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지 오래됐는데

잠보다 길고 어둡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맞닥뜨린, 내 옆에 모로 누운 허공의 어정쩡한 자세

나 어렸을 때 병이 깊어 복수 찬 배를 땅에 질질 끌며

마당 한바퀴 돌고, 집 버리고 나가 죽은

그 작던 강아지만한 눈물 한 방울이

오늘 밤 내 발등에 떨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따뜻하고 축축하게 삶은

작은 행주 같은 혀로 내 발등부터 닦아낸다

먹고 살고 죽는 저 높은 식탁 위에 물얼룩처럼 묻은 나를

말끔하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거짓된 눈물의 역사」 부분

 

잠에서는 깨어났지만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목소리가, 이제껏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에게만 의지하고 있는 하나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으로 이 시는 끝이 난다. 이 이미지는 시에 그려진 꿈속의 갈등과 좌절을 종합하는 어떤 결말이라기보다, 역사라는 말이 품은 또다른 극점의 모습에 가깝다. 거기에는 우선 서사화된 눈물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로 의미화하지 못했던 눈물이 한 방울 있다. 이 눈물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기호가 아니라 따뜻하고 축축한 물질이다. 그것은 어떤 역사적 설명도 시도하지 않을, 혹은 서술할 수 없는 한 평범한 개인의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 손쉽게 제거당할 운명에 놓인 대상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 눈물은 서사를 지향하든 초월을 지향하든 그런 역사적 담론이 오가는 자리에서 “물얼룩”처럼 사소하게 취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눈물을 닦아낼 때 사라지는 것은 눈물만이 아니라 평범한 나의 존재감이기도 하다.

김중일은 역사라는 거대한 상대를 앞에 두고도 주눅 들지 않은 채 그것의 다양한 측면들을 시의 이미지로 불러세우고 있다. 그의 시는 역사란 무엇이다 내지 어떠하다는 확정된 답은 제시하지 않지만 우리가 극복할 역사적 상들을 끊임없이 깨부수며 역사로부터 도피하지 않은 채 왜소화된 주체의 일상에서부터 벗어난 시간대를 경험하는 중이다.

 

 

4. 사라지는 시간을 구하라

 

진은영은 거리에서 또는 상처의 현장에서 파편화된 세계와 마주하며 망각되는 사실들을 붙잡고, ‘나’를 넘어서는 공동의 주체성의 자리에 유인된다. 상실한 세계를 재구축할 만한 이미지를 부드럽게 받아적는 과정은 시인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기보다 그를 전율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소로 걸어들어가게 한다. 전율과 불편함은 시인을 더 자극하여 운좋게 자신이 아니었지만 언제든 자신이 될 수 있는 고통에 찬 목소리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옮기려 더 애쓰게 만든다.

김중일은 ‘역사’라는 씨앗을 시 속에 퍼뜨리는 중이다. 거대한 관념일 수 있는 그 상대의 다양한 이미지를 발굴하고 그 가운데서 명확한 실체를 찾기보다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개별적 질문의 형태로 만든다. 그리고 그 개별적 상들을 우애롭게 소통시키는 과정 속에서 뜻밖의 이미지를 더 발굴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김중일에게 이미지란 세계를 닮은 시적 결과물이 아니라 세계를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사유의 대상인 듯하다.

한 사람은 역사를 증언 중이고 또 한 사람은 역사를 사유 중이다. 증언과 사유는 여전히 시 속에 갇혀 있으나, 잃어버린 시간에 더 예민해지는 순간에 이르거나 혹은 우리가 어떤 사실과 기억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두 시인의 증언과 사유가 시 밖으로 풀려나는 일은 순식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그런 기대조차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또 위험한 상태에서 낚아채야 하는 섬광 같은 과거의 기억에 이끌리고 있거나, 무력해진 역사가 힘을 얻도록 새로운 역사의 이미지를 발굴하거나, 혹은 역사에 대한 특별한 방식의 질문을 발명하기에 급급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다급해 보인다면 당신이 너무 느긋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당신도 어서 사라지는 시간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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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장욱 「사실만을 말하려는 힘」, 『position』 2013년 봄호 97~98면.

2) 옥타비오 파스 「시와 역사」, 『활과 리라』, 김홍근김은중 옮김, 솔 2007, 242면.

3) 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2010, 345~46면.

4) 사실이란 개념은 여러모로 모호하다. 이글에서의 ‘사실’은 지배세력의 역사로부터 소외받은 진실이나 비밀 정도의 의미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낯익은 사건과 이름들을 환기시키는 강렬함과도 밀접하게 관련한다.

5) 이 시의 전문은 프레시안 2012년 5월 24일 기사 「쌍용자동차, 학살미사를 멈춰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진은영 「자스민」(『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에서 인용.

7) 발터 벤야민, 앞의 책 346면.

8) 최근 한 인터뷰에서 시인 스스로 이 두 자리의 결합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시인시민의 구분 이전에 먼저 사유해야 할 것은 시인과 비()시인, 시민과 비()시민이라는 경계라고 언급하며, 시민적 윤리에 따라 시민에서 비()시민으로의 이행과 문학적 실험 혹은 문체실험에 따른 시인에서 비()시인으로의 이행 사이에 유사한 운동성을 지목했다(「‘청춘’의 시인, 우리 시대의 전위가 되다」, 『창작과비평』 2012년 겨울호 440~41면).

9) 김중일 「거짓된 눈물의 역사」,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 2012, 78면.

10) 기억과 경쟁하는 엽사의 모습을 그린 이 시는 마지막에 이런 엽사의 외침으로 끝이 난다. “이것 좀 봐 하루/이 쓸모없이 늙은 것아 짖어봐 한번쯤은 날 보고 짖어봐……” 이 시에서 ‘하루’는 언어유희를 동반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엽사가 끌고 다니는 개의 이름이면서 시간적 의미의 하루이기도 하다.

11) 벤야민, 앞의 책 346면.

12) 그런 면에서 김중일의 다음 구절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나의 이상형은 털 없이 매끄러운 피부에 가급적 눈물의 숱이 적은 평범한 사람입니다”(「눈물이라는 긴 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