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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안상학 安相學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그대 무사한가』『안동소주』『오래된 엽서』『아배 생각』등이 있음. artandong@hanmail.net
문근영을 생각타가
임병호, 그는 평생 이 악물고 살았다
통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김종태의 처남인 까닭으로
중앙대 재학중 고문을 당하고 학교를 등졌으며
해병대 제대하고는 시를 쓰며 살았다
몇차례 자살미수 후유증으로
바지에 오줌을 흘린 적 있지만 똥은 묻힌 적 없었다
준수한 외모는 약간 무너졌지만
서늘한 눈빛은 더욱 깊었다
어금니 무너지도록 이 악물고 살았다
한번도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이 악물고 술 마시고
이 악물고 노래하고
이 악물고 시를 썼다
기가 차도 혀를 내두른 적 없었고
웃음이 나도 목젖을 보인 적 없었다
밥과 안주를 먹는 것도 당연히 본 적 없지만
안되는 말도 못 부를 노래도 없었다
시낭송에 호통까지 이 악물고 했다
목젖이 떨리며 우렁우렁 울려나오던 목소리
거리에서 시를 들려주는 동안
몇권의 시집을 냈으며
늘 몇잔 술에 명정에 들어 이 악물고 살다
몇해 전 노동절에 이 악물고 죽었다
팔레스타인 1300인
그들은 전사하지 않고 학살당했다
사자가 얼룩말을, 매가 들쥐를 잡아먹듯
개나 소나 잡아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
먹지도 않는 인간을 인간이 죽이는 것은
자연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므로 이쯤 되면
자연스럽다는 말은 인간에게서 거두어야 한다
자연스럽지 못한 인간의 역사 앞에서
나는 인간의 무딘 어금니를 증오한다
사자가 얼룩말을 제압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제압할 수 없는 퇴화된 어금니의 역사에는
다수를 향한 살기를 품은 칼의 발전사가 내장되어 있다
사자 같았다면 최소한 대량학살은 없었을 것이다
명백히 인간이 자행한 칼의 역사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귀여운 발톱을 증오한다
매가 들쥐를 낚아채 올리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포획할 수 없는 퇴화된 발톱의 역사에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살의를 품은 총의 발전사가 암장되어 있다
매 같았다면 최소한 무차별 학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명백백 인간이 자행한 총의 역사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말보다 더 낭만적이겠지만
먹지 않으려면 죽이지 마라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이 땅이라면 땅을 죽여라
오래된 신화나 낡은 종교나
고리대금의 자본이나 석유냄새 나는 배후나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거나 값싼 민족주의거나
혹은 집 없는 설움이거나
사람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상찬은 없다
바이블에서 가르치듯이
네 손에서 하나 되는 것은 죽임이 아니라 평화다
미안하게도 디아스포라는 이제
세계를 떠도는 모든 사람들의 대명사로는 부적절하다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이 땅이라면 발 딛고 선 땅을 죽여라
실로 몇천년 전 황망한 시온의 꿈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날카로운 어금니를 기르고
매서운 발톱을 세우는 것이 훨씬 평화에 가깝다
절망한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절망
이마에 총 맞은 팔레스타인 소년의 주검
상처를 틀어막은 아비의 손을 슴벅슴벅 비집고 나오는
어린 삶의 무표정한 최후 진술
어느 때 어디서고 불쑥불쑥 나타나는 절망
총구를 당기는, 미사일의 단추를 누르는 귀여운 손톱
학살게임을 하며 미소 짓는 병사의 새하얀 송곳니
군홧발 속에 가지런한 발톱
내 몸에도 남아서 총칼의 진보를 인정하고 있는
그들의 발톱과 송곳니를 닮은 나를 절망한다
먹지도 않을 인간을 인간이 죽이는 것은 학살이다
땅을 먹으려거든 땅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네 손 안에 하나 되는 평화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