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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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金昇一

1987년 경기 과천 출생. 200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에듀케이션』이 있음. seed1212@naver.com

 

 

 

남아공 사람이 한국시를 쓰려고 쓴 시

 

 

고디머는 그날 어떤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내 사진을 찍었으리라. 물론 사진사는 고디머의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다. 만델라가 죽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얼마 안 있어 서울에서 남아공 보도사진전이 열릴 것이다. 거기에 그 사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진은 고디머의 독사진이 아니다. 그 사진은 남아공의 문인들이 한데 모여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진으로 소개될 것이다. 존 쿳시와 비슷하게 생긴 네덜란드 사람 하나가 그 사진을 구경할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은 왕년에 꽤 유명한 테니스 선수였다. 한창 존 쿳시에게 빠져 있는 젊은 시인 한명이 그 사진 앞에서 네덜란드 사람을 발견할 것이다. 혹시 당신은 쿳시가 아닌가요? 네덜란드 사람의 이름은 쿳시이다. 이런 우연이. 쿳시가 남아공 특별전을 보러 한국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젊은 시인은 기쁠 것이다. 그는 쿳시에게 묻는다. 이 사진 속에 당신도 계시죠? 내가 왜 이 속에 있어요? 있다고 들었어요. 젊은 시인은 쿳시에게 쿳시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인은 쿳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진 속에는 이름 모를 아프리카 작가들의 얼굴만 한가득할 것이다. 쿳시는 젊은 시인에게 다른 사진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할 것이다. 저는 사진 속의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젊은 시인은 쿳시를 찾지 못할 것이지만 자신이 쿳시의 사진이라고 믿고 있는 사진 앞에서 쿳시를 기다릴 것이다. 어떤 남자가 젊은 시인의 옆에 설 것이다. 그는 한국 문인들의 술자리마다 어떻게 알고 항상 찾아오는 불청객 아저씨일 것이다. 불청객 아저씨는 유명한 시인만 알아보기 때문에 젊은 시인이 누군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인은 불청객 아저씨를 알아볼 것이다. 이 아저씨는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고 소설가지. 그러나 이 아저씨가 시인이고 소설가라 할지라도 이 아저씨가 불청객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아저씨를 불편해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 불청객은 아주 작고 아주 비밀스러운 문인들의 모임에도 나타났다. 어떤 시인의 부친상에도 나타났다. 술자리에서 여자를 성희롱했다는 소문도 있다. 젊은 시인은 생각할 것이다. 이 아저씨는 왜 다음 사진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남아공 문인들의 술자리 사진이다. 불청객은 한국 문인들의 술자리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외국 문인들의 술자리도 좋아하는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이 불청객은 어느 출판사의 술자리에 갔다가 쫓김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 전시회장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남아공 문인들의 술자리 사진 앞에 앉을 것이다. 새벽일 것이다. 겨울이라 추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할 것이다. 플랜더스의 개 같은 일이라고 떠들 것이다. 고디머는 여기까지 구상한 다음 자기가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사진은 엄밀히 말하면 남아공 문인들의 술자리 사진이 아니다. 이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사과 주스다. 그 사진 속엔 내가 없다. 젊은 시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젊은 시인은 쿳시가 자신을 귀찮아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인은 생각할 것이다. 사진 속의 쿳시는 무엇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백인에 대해? 흑인에 대해? 젊은 시인은 자기가 남아공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청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가득할 것이다. 그때 갑자기 사진 앞의 불청객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불청객은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우는 것이다. 남아공 문인들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서 우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시인은 불청객이 왜 우는지 영문을 모를 것이다. 한국의 젊은 시인은 왜 영문을 모르는 것일까? 나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른다. 왜 한국의 시인은 단순한 사실조차 추측하지 못하는 것일까.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한국의 시인은 불청객을 몰래 따라다닐 것이다. 불청객은 삼일 후에 사진 앞에서 죽을 것이다. 한국의 시인은 그 여정을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은 한편의 한국시가 될 것이다.

 

 

 

대단원의 막

 

 

문인들은 가끔 당신 얘기를 해요

문인들의 술자리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와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남아공 문인들이 사과 주스를 먹고 있는

사진 앞에서 당신은 죽었습니다.

 

출판사 송년회의 맥주 집에서

아무도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쉽사리 당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취한 사람이

당신의 멱살을 잡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술자리에서 쫓겨나면 어디로 갑니까?

종로6가의 어느 맥주 집에서 외양이 비슷한 남자들이

잔을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술자리 불청객들의 술자리로 보였습니다.

 

미술계의 불청객이, 연극계의 불청객이, 불청객들이

송년회를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당신의 뒤를 밟아 들어간 맥주 집에서 나는

불청객들의 불청객이 된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불청객들과 악수를 하고 다녔습니다. 불청객들의 대장처럼 보였습니다.

악력이 무척 강했습니다. 그날 새벽 안국동에서 당신이 죽었습니다.

문인들은 가끔 당신 얘기를 합니다. 나는 듣기만 합니다.

 

입 닥치고 시 쓰면서 살았습니다.

당신이 그때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이 시를 쓸 수 없었겠지.

이딴 시를 왜 썼냐고 찾아올까봐, 맞을까봐, 죽을까봐, 무서워서 못 썼을 거야.

내가 오늘 이 시를 쓰는 것은 내가 이제 많이 늙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불청객 대장 놈도 이미 벌써 쳐 늙어서 죽었겠지요.

문인들이여, 제가 아주 젊었을 적 이야깁니다.

끝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