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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3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전문영 全文英
1984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 재학중. cestpureperte@gmail.com
사과를 기다리며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다신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발바닥이 깨끗하게 펴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라는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스코틀랜드 야드
1
어디긴 어디야, 도로 위지
라는 말을 끝으로 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런던 경시청 건물은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위치해 스코틀랜드 야드로 불렸다
하지만 이사한 건물들마저 모조리 스코틀랜드 야드라고 불리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런던 전역이 스코틀랜드 야드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2
게임 스코틀랜드 야드의 규칙
—도둑 Mr. X는 택시, 버스,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돌아다닌다
—경찰은 Mr. X를 스코틀랜드 야드 안으로 데려가야 한다
3
남동생은 유도에서 낙법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마치 메쳐지거나 넘어지길 고대하는 사람처럼
물론 칼을 사고 베이지 않으면 베일 때까지 신경 쓰인다
그래도 칼이 나를 베려고 작정하면 낙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데
아무리 말해도 동생은 내게 낙법을 가르치려 들었다
낙법은 몸이 땅에 닿기 전
손이나 팔로 먼저 바닥을 딛는 기술이다
즉, 몸에서 손과 팔을 떼어놓는 것이다
네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이제 역전앞이란다
그래도 네가 보이지 않는 건
나는 역전이고 너는 역전앞이기 때문이다
역전은 낙법을 배우면서 앞을 떼어버렸고
역전앞은 역전의 공격이 두려워 관망 중이다
신중한 동생은 경기에서 결코 낙법을 쓸 일이 없었다
마치 낙법의 바깥에 영영 내던져진 사람처럼
어쩌면 낙법은 동생 앞을 내내 서성였고
동생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너도 낙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역전앞에서 쓰러지는 순간이 곧 역전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쓰러지면서까지 닿으려 할 때 역전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4
Mr. X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경찰에게 붙들렸다
경찰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순간
Mr. X는 본능적으로 낙법을 취하고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자신의 전부인 손을 몸에서 떼어놓았다니!
그래도 경찰이 그를 두고 돌아가려 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Mr. X가 이유를 묻자 경찰이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있소
곧 지하철이 도착했지만 Mr. X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면
낙법도, 낙법의 바깥도 소용없어졌다는 얘기였으니까
팬시
편재적이라는 말 알아?
그건 문방구의 다른 이름이다
문을 열면 오른쪽엔 소년이 왼쪽엔 소녀가 있고
공룡이 소년을 편들고 곰돌이가 소녀의 뒤에 선다
1000원에 스티커, 색연필, 줄넘기로 빼곡해지는 생활!
공책을 고를 때는 위에서 두번째 공책을 빼낸다
그게 제일 위에 놓인 공책보다 조금 낫다는 건 내가 발견한 법칙
나처럼 머리 잘 굴리는 애는 좀처럼 없다
공책 표지는 한 소년의 일생을 예고한다
“제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렌지 더벅머리의 제이는 바람개비를 불고 있다
곧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그 바람에 실려 저도 날아갈 것처럼
그 다음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교실에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아무도 제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들을 때
쑥 하고 꺼져내리는 느낌으로
벌써 공책 한권을 다 썼다
제이의 삶이 한번 훌렁 뒤집히면 뒤표지다
거기서 제이는 헬멧을 쓰고 구호를 외치는 중이다
“제이는 초콜렛을 좋아해!”라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고 아직 믿고 있다
공책이 쌓이면 소년들은 제이의 얼굴을 하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중얼거리다가
문방구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도로 주변을 얼쩡거린다
모범이 택시라면 한대 훔칠 기세로
트램폴린
넌 너네 나라에선 외국인이 아니지
그래도 여기에선 네 서툰 한국어가 어설픈 환심을 사고
식당 주인은 호수 옆의 트램폴린을 권한다
단순하고 거대한 그 문자 앞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면
트램폴린은 아무런 은유도 없이 우리 사이에 들어온다
그간의 악행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우리도 선의를 갖고 트램폴린을 묘사하고 싶어진다
나는 먼저 느낌을 갖고 간다
부드럽게 그 위에 동작을 얹고 뛰어보지만
트램폴린 위에서 또 트램폴린 흉내를 낼 수는 없다
트램폴린의 감성이 납작해질 때까지 기다려보지만
곧 반동이 내 입을 틀어막고
나는 떨어져 내린다
너는I 일단 뛴다bounced
그리고 느낌을 잡으려고 애쓴다
천천히slowly
그러나 너의 귀납적인 스타일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 난 트램폴린 위에on the trampoline 있었지, 하고
네가 다시 번뜩 깨달은 순간 문장은 끝나버린다
트램폴린은 네 관심이 지루하고
너의 문법에는 더더군다나 흥미가 없다
물새는 어떻게 자신이 물속에 들어가면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걸 알까
그깟 트램폴린 때문에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될 줄은 몰랐다
걸음을 디디는 내내 트램폴린 생각뿐
지구가 어색해졌다
우리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라서
의혹을 품으면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다
거기엔 우리가 갖지 못한 외국의 탄성만이 팽팽했다
--
* 에드워드 사이드가 즐겨 인용한 생 빅토르의 글 “The man who finds his homeland sweet is still a tender beginner”에 대해 널리 퍼진 오역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
웃지 않는 공주
모였으면 일단 웃고 시작하자.
웃으면 서로 가까운 느낌 그 다음엔
서로를 알아가든 말든
오늘의 공주님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
얼굴이 빨개지는 게 무서워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빨간색과 빨개지는색을 잉크에 녹여 노트에 감금한다
어느날 공주님은 자기 얼굴을 감시하려고 눈알을 뽑아냈는데
실수했다, 눈알을 거꾸로 끼워버렸다! 이제 보이는 건 온통 빨간 세상
멍청한 게, 그게 자기 얼굴인 줄 알고 놀라서 빨간색을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얼굴만 더 빨개졌다
공주들 사이에선 입을 가리고 웃는 게 대유행이다
웃음이 바닥나면 그 나머지는 무시무시해진다는 전설 탓이다
그렇다고 진흙탕을 구르며 웃음을 구걸하던 때는 지났다
아 근데 쌍년이, 주먹을 먹이면
빨간색의 나머지 경치가 펄쩍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멍만 떠오르고 미소는 희미한 점선이다
공주님, 네가 웃어야 우리도 웃으면서 실수를 하는데*
시시해지면 표정이 닳는다 얼굴을 치우고
바이크에 오르면 거리는 겁도 없이 얼굴을 들이미는데
도로, 편의점, 주유소, 모두 어디서 본 듯하고
그렇게 가까운 기분이면 바로 웃는 느낌
그런데 거리는 어떻게 웃는 걸까 우리가 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웃는 낯으로 사거리를 척 꺼내들고 우리를 멈춰 세울까
거리가 이렇게 웃음을 남발하면 이제 곧 거리에 남는 건 웃음의 나머지
아, 쫄려서 속도 높인 거 아냐! 이러면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로 보일 줄 알았어
하지만 빨리감기로 웃는 얼굴만 잔뜩 보게 되고
기한 지난 놀이공원 티켓처럼 막막하게 웃기로 했다
거리가 진흙탕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
이젠 공주가 아니어도 무조건 웃어야 된다는 얘기였거든
다 같이 웃으면 무섭지 않거든
웃어.
이거 웃긴 얘기야.
--
*인형의 얼굴 속에 웃음이 있기에,
우리는 웃으면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조지프 브로드스키 「순수와 경험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