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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염상섭의 중도적 민족노선
그의 50주기를 기념하여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 영남대 명예교수. 저서로 『한국문학의 반성』 『민중시대의 문학』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 『문학과 시대현실』 『자유의 역설』 등이 있음. mwyom@ynu.ac.kr
*이 글은 경향신문사・한국작가회의・국제어문학회가 공동주최한 ‘2013 염상섭 문학제’ (2013.6.21)에서 기조발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임.
1. 들어가는 말
다들 알고 있듯이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은 남긴 작품의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소수의 연구자 아니면 통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동안 염상섭 논의가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만세전』(1924) 『삼대』(1931) 등 몇몇 이름난 작품에 집중되거나 특정 시기에 국한되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다가 전집의 발간(민음사 1987)과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행사를 계기로 『사랑과 죄』(1928) 『무화과』(1932) 『효풍』(1948) 『취우』(1953) 등의 장편과 단편소설로 논의가 확장되었으나, 그럼에도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순히 분량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일반 독자에게만이 아니라 전문 연구자에게도 염상섭의 문학세계는 다니기 편치 않은 자갈밭이다. 아마 오늘의 독자에게는 이 현상이 더 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 나 자신도 염상섭의 작품을 일부밖에 읽지 못한 부실한 독자의 한 사람이다. 그의 문학을 논하는 글도 조금밖에 쓰지 않았다. 『만세전』의 뛰어난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장편소설 『삼대』에 다루어진 시대적 변화의 의미를 등장인물의 갈등구조를 통해 분석해본 평론이 「식민지적 변모와 그 한계」(『한국문학』 3호, 현암사 1966)인데, 실로 오래전의 일이다. 이 글은 후일 「식민지적 근대인」으로 개제하여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작과비평사 1979)에 실었다.
어찌 보면 『만세전』과 『삼대』는 염상섭 소설 가운데 예외적인 위치에 있다. 그의 대다수 작품들이 독자에게 경원되어온 것과 달리 이 작품들은 국민적 교양소설이라 할 만큼 많이 읽히고 있을뿐더러 평론가들에게도 집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내가 글을 쓸 무렵은 그런 붐이 일기 전이었다. 당시 나는 식민지사관의 극복이라는 지식인사회 일각의 새로운 흐름에 공감하고 그 방면 독서를 시작하면서, 그런 과제가 일제강점기 문학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찾아보려고 하였다. 『삼대』는 그런 문제를 점검하기에 아주 적합한 텍스트라고 여겨졌다. 다들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화론’은 오늘날까지 매우 논쟁적인 화두로 남아 있는데, 당시 내가 받아들인 ‘식민지적 근대’는 근년에 일부에서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반대로 일제의 강압적 식민통치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봉건적 퇴행조차 수반되었던 반동적 근대화, 말하자면 근대화의 ‘왜곡’을 강조하는 개념이었다. 내가 보기에 『삼대』는 구한말부터 식민지 초기까지를 살았던 전환기의 인간적 전형들이 어떻게 ‘식민지적 왜곡’의 도정을 밟았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자 애썼는지 하는 문제를 드물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었다.
유신독재 시대의 한복판에서 맞은 해방 30주년의 의미를 음미하기 위해 쓴 글이 「8・15 직후의 한국문학」(『창작과비평』 1975년 가을호)이다. 역시 오래전이다. 이 글에서 나는 김동인 채만식 이태준 김동리 계용묵 황순원 이선희 등 여러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검토했다. 그 주안점은 우리 민중이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어떤 고난을 겪었고 8・15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며 8・15가 우리 민중에게 실제로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지, 대상 작품들에 그려진 바를 통해 따져보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8・15가 우리 민중의 삶에 가져온 것은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또다른 고통일 뿐이라는 것이 다수 작가들의 문학적 증언이었고, 그런 점에서 8・15는 미완의 해방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위의 여러 작가들 작품과 함께 다룬 것이 염상섭의 연작단편 「이합(離合)」과 「재회」(1948) 및 「그 초기」(1948)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나는 염상섭이 분단시대 초기의 정치사회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그리고 분단상황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장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검토하고자 했다. 그 작품들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외세에 의해 분단된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진정한 자기실현의 공간을 발견하지 못하는 ‘실존적 방황’의 정서가 염상섭 문학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런 점이 그를 비관적인—나아가 염세적인—회의주의자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2. ‘만연체’ 문장의 사회적 기원
염상섭의 문체가 만연체라는 점은 두루 지적된 바로서, 거의 같은 시기에 문단에 등장하여 여러 면에서 대척적인 위치에 있었던 김동인(金東仁, 1900~51)과 비교해보면 그 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알다시피 김동인의 문장은 대체로 단문이어서 짧고 속도감이 있으며, 대상의 특징을 간명하게 포착하는 데 능란하다. 장면의 전환도 빠르고 명쾌하며 인물의 묘사도 예리하고 직접적이다. 김동인의 소설이 잘 읽히는 것은 주로 그런 기술적인 면과 연관될 것이다.
반면에 염상섭의 문장은 이와 아주 다르다. 그의 길게 늘어진 복문들은 대상을 곧바로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맴돌면서 여기저기 건드림으로써, 독자가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작가의 붓끝은 인물 행동을 서술할 때나 심리 추이를 묘사할 때나 결정적 포인트를 단숨에 타격하지 않고, 주변의 다양한 국면들과 연관된 복잡한 실타래를 끈질기게 추적할 뿐이다. 등장인물 간에 길게 이어지는 대화들 역시 독자의 편안한 집입을 가로막는다. 상황의 다면성을 남김없이 포획하려는 작가의 거의 신경증적 집착은 독자의 선명한 이해를 방해하고 대상에 대한 통일적 영상을 해체하는 미학적 딜레마를 낳는 것이다.
동지 추위에 영하 17도 3부 타던 것이 이틀지간에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데 오늘은 아침결부터 고드름이 녹아내리더니 한나절 절쩌거리던 진고개 어구는 석양판이 되니까 벌써 먼지가 날릴 듯이 뽀송뽀송하고 날씨는 여전히 푸근하다.
이것은 장편소설 『효풍』의 첫 문장이다. ‘엊그제까지 심하게 동지 추위를 하더니,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오늘은 날씨가 확 풀렸다’는 내용인데, 위에 보이는 바와 같은 늘어진 문장 때문에 독자로서는 묘사의 목표 자체가 몽롱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몽롱 효과의 발생에 관여하는 것이 묘사의 상세함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몇개의 단위로 분해해보면: ‘이틀 전 동지 때는 영하 17도 3부까지 추웠다’ ‘내일은 크리스마스란다’ ‘오늘은 날씨가 풀려 아침엔 고드름도 녹아내렸다’ ‘진고개 어구는 한나절 질척거리더니 저녁엔 뽀송뽀송해졌다’—이렇게 적어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부분들 자체에는 실상 특별히 애매한 구석이 없다. 그렇다면 염상섭 소설문장의 독특한 불투명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위의 예문에서처럼 상이한 요소들이 한 문장 안에 잡다하게 군거(群居)하고 있어 인상의 분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각각의 요소들은 소설의 도입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저마다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복선으로 활용되거나 중심적 배경이 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도 단일한 서술초점의 부재가 상황의 불투명, 즉 독서의 불편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건대 사물을 관찰하는 주인공 화자의 시선 안에 어떤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를 넘어서는, 염상섭 문학의 더 깊은 차원에 대한 고찰을 요하는 문제일 것이다.
염상섭 소설의 화자인물 내지 시점인물이 갖는 공통점은 그들이 회의주의자라는 데 있다. 이 용어가 지나치게 단정적이라면 삶의 순간들마다 거듭되는 입장 선택의 유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특정의 이념에 투철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고수해야 할 어떤 철학적 원칙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인물들의 근원에 자리잡은 존재로서의 작가는 생활과 이념, 작품과 세계관의 일치를 추구한 완벽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평생 일정한 정도의 내적 균열을 지니고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과 관련하여 「문학소년 시대의 회상」이란 글이 주목된다.
신문학에 있어서는 이 시대 사람들이 개척자의 소임을 맡는 수밖에 없으니까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겠지마는, 자국(自國)의 고유한 문학 속에서 자라나지 못하고 전연 문화적 혹은 문학적 이민(移民)으로 나가서 외국문화・타방(他邦)문학 속에서 성장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자기 문학을 세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요 불명예하기도 한 일이다.
역시 염상섭 특유의 길게 헝클어진 문장인데, 그러나 꼼꼼히 따져 읽으면 자신의 문학적 출발에 관한 중요한 자기인식이 표명되어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이 글이 언제 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주동(梁柱東, 1903~77) 편 『민족문화독본』(문연사 1955)에 실려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염상섭은 불과 15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23세까지 체류하면서 중등학교와 대학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주로 일본 작품의 독서를 통해 문학에 입문했다. 초창기의 문인들 다수가 일본유학 경험자들이라 해도 염상섭처럼 한창 예민한 청소년기를 8년씩이나 일본에서 보낸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뒤에도 1926년부터 이태 동안 일본문단에 데뷔해볼 생각으로 다시 일본에서 거주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동시대의 문인들 누구보다도 일본어 구사에 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위에 인용된 진술은 그런 사실들이 그의 내면에 하나의 상처로 또는 일종의 죄책감으로 남아서 은연중 그를 속박하고 있었음을 증언한다. ‘자국의 고유한 문학 속에서 자라나지 못했다’는 문학적 이주민의식 같은 것이 그의 무의식을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중해야 할 의무감으로 다가오는 고유문화와 정신세계 깊숙이 침윤된 외래문화 사이에서 그는 다소간에 자기분열의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런 것들이 그의 만연체 문장으로 그리고 회의주의적 세계관으로 나타났으리라 짐작된다.
3. 민족의식의 발생과 발전
일찍이 이재선(李在銑) 교수는 『만세전』이 일제 총독부당국의 검열과 해방 후 재출판을 거치는 동안 여러차례 개작되었음을 상세히 고증하여 적잖은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1)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격변이 심했던 우리나라의 경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미학적 수정’과는 다른 차원에서 개작과 첨삭이 행해지는 수가 적지 않았고, 이것은 불가피하게 정본(定本)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세전』처럼 개작된 작품을 가지고 작가의 시대인식을 논한다면 이재선 교수의 지적대로 1948년의 텍스트가 아니라 1924년의 텍스트를 근거로 삼는 것이 정당하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서 『만세전』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큼 좀 낫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하는 등,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 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이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것은 일본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던 주인공 이인화가 아내 위독의 전보를 받고 귀국길에 오른 셋째날 승선수속 도중 심한 수색을 당하고는 분해서 하는 생각이다. 위의 인용은 1948년판 수선사본에 근거한 『만세전』(창비 2005, 『20세기 한국소설』 2)에서 옮긴 것인데, 이재선 교수에 의하면 바로 이 대목에 검열당국의 ‘삭제’ 날인과 ‘금(禁)’이란 붉은 색연필이 그어져 있고, 이런 대목들이 연재 3회분 전체의 삭제와 『신생활』지 폐간에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교수가 찾아낸 1922년의 연재원본과 위의 인용을 비교해보면 마지막 문장(“적개심이나 (…) 유일한 수단이다”)이 추가된 것 이외에도 부분적으로 조금씩 수정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전체로 볼 때에는 작가가 표현상의 이유로 문장을 깁고 다듬은 것이지 정치적인 이유로 빼거나 보탠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비평가에게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이교수가 해결한 서지(書誌)상의 혼란이 아니다. 더구나 1920~30년대의 독자・비평가에게는 개작문제란 생기기도 전이었다.
『만세전』의 화자인물은 아직 학생 신분이고 스스로 자인하듯이 “우국지사”인 것도 아니다. “망국 백성”이라는 것을 항시 잊지 않고는 있으나 적극적인 의미에서 민족주의를 추구한 적이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주인공 이인화는 당시의 좌파 평론가들이 극력 비판하던 부르주아 출신이고 루카치 소설론에서 말하는 ‘중간적 개인’이라 할 만한 존재인데, 어쩌면 작가가 그런 인물을 관찰자-서술자로 선택했기 때문에 1919년 만세운동 직전의 조선 풍경은 민족 또는 계급이념을 의식적으로 표방한 동시대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보다 더 통렬하고 전면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후일 임화(林和)가 문학사 연구에 몰두할 때 근대소설 20년을 개관하는 논문에서 염상섭의 비관적 현실인식을 ‘페시미즘’으로 명명하고 “그의 청춘기를 대표하는 장편 『만세전』은 이러한 페시미즘으로 충만되어 있는 걸작이다”2)라고 지적한 것은 그런 점에서 정당한 평가였다.
『삼대』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는 “새로운 뜻을 뼈로 삼고 조선의 현실사회의 움직이는 모양을 피로 하고 중산계급의 살림과 그들의 생각을 살로 붙여서 그리려는 것”(조선일보 1930.12.27)이라고 작의(作意)를 밝히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그려낸 ‘조선 현실사회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결국 작품을 다시 읽어서 점검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삼대』 역시 해방 이후 만만찮게 개작이 이루어졌음을 상기하면서 이 작품에 드러난 작가의 사회의식에 관해 잠시 언급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려 한다.
알다시피 이 작품에서는 봉건체제의 몰락과 근대적 전환의 양상이 한편으로는 봉건지주인 할아버지 조의관과 타락한 개화신사인 아버지 조상훈을 거쳐 양심적 지식인 조덕기에 이르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 부르주아 조덕기와 청년 맑스주의자 김병화의 대립으로 나타나 있다. 염상섭 나름으로는 당대의 사회변화와 이념분열을 포괄적으로 그리고자 시도한 것이었고,3) 이런 점이 『삼대』를 대표적인 리얼리즘 업적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소설의 중심인물이자 “중산계급의 살림”을 대표하는 덕기는 대학진학을 앞두고 “법과보다는 경제과나 상과를 하면 어떻겠니?”라고 묻는 부친에게 법과를 택하겠다고 답하면서 “법과 중에도 형법에 주력을 써서 장래에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자기 입장을 정리한다.
덕기는 무산운동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냉담히 방관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제일선에 나서서 싸울 성격도 아니요 처지도 아니니까, 차라리 일 간호졸 격으로 변호사나 되어서 뒷일이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덮어놓고 크게 되겠다는 공상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책상물림의 뒷방 서방님으로 일생을 마치기도 싫었다. 제 분수대로는 무어나 하고 싶었다.4)
염상섭의 문학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이것은 매우 중대한 발언이다. 당시까지 그는 기성문단을 대변하는 보수논객으로 활약했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인식되고 있었다. 하기는 위에 인용된 덕기의 생각과 『만세전』에 서술된 이인화의 관찰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연속성이 있다. 그렇다면 비판적 관찰자로서의 이인화나 무산운동의 후원자가 될 것을 결심하는 조덕기는 보수진영의 가장 활발한 논객 염상섭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물론 인화나 덕기가 설사 염상섭 자신의 투영이라 해도 그가 사상적으로 좌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치열한 논쟁의 적방이었던 무산계급운동에 대해 포용적 자세를 분명히한 것은 사실이다. 이제 시기적으로 『만세전』과 『삼대』 사이에 위치한 단편소설 한편과 그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비평적 논란들을 살펴봄으로써 『삼대』에 이르는 염상섭의 문학적 사유가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 따라가보자.
4.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경합하는 지점에서
“상섭은 당시에 비평가로서 자임하고 있었지, (…)소설가로 출세할 자기를 예상치 않았기에(…)”(「조선근대소설고」, 1929)라고 김동인은 염상섭에 관해 회고한 적이 있다. 김동인이 여기서 말한 ‘당시’란 염상섭이 소설가로 등장하기 이전인데, 이때 두 사람은 김환(金煥)이란 분의 소설 「자연의 자각」(1920)을 둘러싸고 비평가의 역할에 관해 잠깐 논쟁을 벌인 바 있었다. 염상섭이 “범죄를 탐구하는 재판관” 같은 비평가의 객관적 역할을 주장한 데 대해 김동인은 “활동사진 변사” 같은 작품 해설자로서의 비평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논쟁 직후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로 김동인에게 소설계의 새로운 ‘강적’이 출현했음을 알렸고, 그러고 나서도 소설로 완전히 전향한 것이 아니라 활발하게 평론을 집필했다. 예컨대 그는 카프가 결성되고 평단의 중심이 박영희(朴英熙)・김팔봉(金八峯) 등 좌파에게로 옮겨간 시기에도 「계급문학을 논하여 소위 신경향파에 여(與)함」(조선일보 1926.1.22~2.4) 같은 도발적인 제목의 논설을 발표했다. 물론 카프 측의 즉각적인 반론이 나왔다. 염상섭의 논문연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박영희는 「신흥예술의 이론적 근거를 논하여 염상섭 군의 무지를 박(駁)함」(조선일보 1926.2.3~2.19)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논쟁의 내용 여하를 떠나 당시 젊은 문인들이 얼마나 열의에 가득 차 있었는지 짐작게 하는 일화이다.
그런데 지금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박영희가 염상섭을 비판하면서 터무니없이 과격한 용어와 노골적인 인신공격을 퍼붓는 중에도 작품의 예를 들어 자신의 논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점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설익은 관념들이 줄줄이 펼쳐진 ‘이론’의 대목보다 염상섭의 단편 「윤전기」(1925) 분석을 통해 구체적 논증을 시도한 ‘비평’의 대목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부분으로 읽힌다. 「윤전기」 자체는 『만세전』에 비할 수 없이 떨어지는 소품이지만, 이후에도 이 작품을 중심으로 이론적 쟁점들이 교차했기에 비평사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 이 점을 차례로 살펴보자.
「윤전기」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다. 신문사는 경영난으로 두세달 넘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했고, 견디다 못한 공무국 노동자들은 태업 중이다. 하지만 신문사에는 경영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원 회의에서 선출된 위원들이 경영을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는데, 작품의 시점인물인 편집국의 A가 야간관리를 맡고 있고 다른 편집국원은 밤 10시까지 돈을 구해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출타중이다. 공무국 직원들은 일손을 놓은 채 불만을 터뜨리며 A에게 항의한다. 하지만 A는 사주(社主)가 아닐뿐더러 형편이 크게 더 나은 사람도 아니다. 그도 집에 “장근 넉달 동안에 단돈 일원도 들여간 일이 없고” “사흘 전에 나올 때에 쌀이 떨어졌다던 말”을 아내에게서 들은 처지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A는 신문 발행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 대목에 개진된 그의 생각은 아마 작품의 핵심에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신문이 아무리 중하여도 먹어야 하지!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굶고라도 신문을 죽여서는 아니 되겠다는 것은 허영심에서 나온 말인가? 야심인가? 달관인가 봉공심인가? 훌륭한 영혼에서 나온 의지의 활동이라 할까? 누구에게 물어볼까? 예수는 무어라고 하였나? 카알 맑스는 무어라구 하였누? 아니 세상에서는 무어라구들 하는구? ……하지만 신념만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포화(포괄—인용자)할 수 있는 것이다!(『조선문단』 1925년 10월호)
이렇게 생각하는 편집국 간부 A와 공무국 노동자 간에 갈등이 지속되다가 마지막 순간에 인천 지국에서 돈이 도착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은 화해로 끝난다.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거칠게 항의하던 공원(덕삼이)은 눈물을 글썽이며 A에게 용서를 빌고, A도 “우리의 지금 하는 일이 노자관계(勞資關係)로 싸우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하여도 끝끝내 그 야단들을 하더니……” 하며 덕삼이의 손을 잡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영희는 「윤전기」를 “부르주아의 충복인 A와 공장 사람들”이 임금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과정을 철저히 A의 관점에서 그린 작품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A는 자본주와 사(社)를 대표하는 인물인바, 지극히 오만한 태도로 노동자를 조소하고 있다는 것이 박영희의 비난의 요지이다. “우리가 지금 노자관계로 싸우는 게 아니라”는 A의 말은 교활한 속임수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요컨대 자본가와 노동자의 싸움에서 A는 자본가의 앞잡이며, A의 눈으로 신문사 태업사태를 그린 작품으로서의 「윤전기」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문학이라는 것이다(조선일보 1926.2.16~17).
그러나 이것은 좌파적 도식에 맞추기 위한 억지 해석이다. 연보에 따르면 염상섭은 1920년 선배 진학문(秦學文, 1890~1948)의 추천으로 언론계에 입문한 이후 주간지 『동명(東明)』 편집주간(1923), 시대일보 사회부장(1925), 조선일보 학예부장(1929) 등을 역임했다. 여러 언론사를 전전한 셈인데, 그때마다 그가 경험한 것은 만성적인 경영난이었다. 「윤전기」를 집필하던 1925년 9월 염상섭은 시대일보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 신문도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제호와 사장이 몇차례 바뀐 끝에 결국 폐간되었다. 그러니까 「윤전기」는 시대일보・조선일보 등 식민지시대 우리말 언론기관들이 처한 열악한 경제상황의 문학적 반영으로서, 계급적 모순을 자본가 편에서 그린 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단선적인 판단이다.
알다시피 박영희는 1933년 카프를 탈퇴하고 나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유명한 논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동아일보 1934.1.2~11)을 발표했고, 몇해 뒤에는 「전쟁과 조선문학」(『인문평론』 1939년 10월호) 같은 글에서 “일본정신의 예술화와 문학화”가 세계문학의 새로운 이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 파쇼체제에 굴복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굴곡을 겪고 난 뒤에 집필한 『현대조선문학사』(1948)에서도 「윤전기」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그 문학사에서 「윤전기」의 스토리를 간단히 개관한 다음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리하여 프로문학에서 중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노동자와 자본가와의 투쟁에 대하여 민족적으로 협조 일치하여야 할 것을 암시하는 한편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공식적인 투쟁을 풍자하였다.”(『사상계』 1959년 2월호)
같은 카프진영에 속해 있으면서도 박영희보다 더 진전된 미학적 사고를 전개한 비평가는 김팔봉이다. 그는 「변증적 사실주의」(동아일보 1929.2.25~3.7)라는 글에서—‘양식문제에 대한 초고’라는 부제가 시사하듯이—당시 좌파비평의 흔한 병폐인 유물론적 도식의 기계적 적용에서 한걸음 나아가 문학예술의 고유한 형식원리에 대해 고민하였고, 그 고민을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해 이론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프로문학 이론의 관념성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고, 결국 박영희의 뒤를 이어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프 초기를 대표하는 가장 균형 잡힌 비평가였다. 「윤전기」의 공과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미학과 유물론의 적절한 결합을 시도한다.
작자는 이 작품에 있어서 어디까지든지 사실을 사실대로 A의 심리라든지 직공들의 분요(紛擾)를 묘사하려 하였다. 이 작자의 태도는 리얼리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결(작품의 결말—인용자)은 노자협조의 감격에 눈물짓는 센티멘털한 장면으로 끝을 맺어버렸다. 이 실로 무슨 까닭인가? (…) 현재의 A의 처지는 준(準) 경영자다. (…) 그 역시 그가 종사하는 신문사에서 돈을 뜯어다 쓰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정도에 있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이러한 중간적 처지는 그로 하여금 노자협조로써 문제를 해결케 하였다. 실로 이 점에서 작자의 소부르적 편견은 정체를 노현(露現)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되었다.(홍정선 엮음 『김팔봉문학전집』 I, 문학과지성사 1988, 70면)
작품의 리얼리즘적 성과와 작자의 계급적 한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한 대단히 날카로운 분석이다. 그러나 김팔봉의 이 해석으로도 A가 신문사를 살리고자 애쓴 이유가 온전히 밝혀졌다고 할 수는 없다. 앞의 인용문에서 A가 “허영심에서 나온 말인가? 야심인가? 달관인가 봉공심인가?”라고 자문했던 것의 정체, 즉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포화(포괄)할 수 있는” 신념의 내용은 여전히 불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윤전기」는 8・15 이후 간행된 단편집 『해방의 아들』(금룡도서주식회사 1949)에 다른 5편의 작품과 함께 처음 수록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여기 수록된 「윤전기」도 『조선문단』 발표작 그대로가 아니고 상당한 수준에서 개작된 것이라는 점이다. 개작의 전모를 검토하는 것은 또다른 과제이지만, 앞의 인용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 일단을 짐작할 수는 있다.
신문이 아무리 중하여도 먹어야 하겠지마는, 굶고라도 신문을 죽여서 안 되겠다는 것은 허영심도 야심도 아니다. 누구고 간에 다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을 가망이 없는, 그 발행권(發行權)의 취소가 무서운 까닭이다. 적당한 경영자가 나서기까지 발행권을 유지하는 것이,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일반 사원은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치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해방의 아들』 191면)
대폭적인 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비로소 작가는 ‘굶어서라도 신문을 지켜야 하는’ 까닭이 총독부의 신문발행 허가권 때문이라고, 혹은 그것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의무 때문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로써 염상섭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시대정신의 내용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합하는 근대사의 이념적 교차로에서 민족노선을 분명히 선택한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민족통합노선의 침몰
일제강점기 염상섭의 문학활동은 1936년에 마감된다. 이듬해 창간되는 만선일보(滿鮮日報)의 편집국장직 제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인데, 이번에도 언론계 선배 진학문의 천거였다. 만선일보는 괴뢰국 만주에서 발행된 조선인 상대 조선어 신문으로서, 일본 관동군 보도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주간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 한계 안에서나마 만선일보가 “할 말을 하는 창구로서의 존재가치”를 발휘했다고 후일 염상섭은 회고했고, 당시 염상섭 밑에서 기자로 일했던 소설가 안수길(安壽吉, 1911~77)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점은 신문의 성격에 비추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어쨌든 그는 2년 남짓 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단둥(당시의 安東)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거기서 해방을 맞아 잠시 거류민단 부회장 노릇을 했다. 초겨울쯤에는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왔고, 1946년 봄에는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실로 격동의 시대를 가로지른 1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렇다면 이 엄혹한 시대를 염상섭은 어떤 정신적 좌표에 의지하여 살았고 어떻게 그것을 작품화했던가. 해방 시기 염상섭의 입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는 그가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뒤인 1946년 10월 가톨릭계 경향신문 창간에 간부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시인 정지용(鄭芝溶)이 주간이고 그가 편집국장이었다.5) 10월 6일 창간호에는 사장 양기섭(梁基涉, 1905~82) 신부의 공정보도를 천명하는 창간사와 경제평론가 배성룡(裵成龍, 1896~1964)의 논설문 「좌우합작의 전망」 및 이승만과 여운형의 축필(祝筆)이 1면을 장식하고 있어, 좌우익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이 신문이 어떤 노선을 추구했는지 짐작게 한다.
하지만 염상섭과 정지용은 1947년 8월 2일자로 경향신문을 떠난다. 정지용 시인은 원래 언론경력도 없고 체질적으로도 신문사 주간이 맞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염상섭은 언론계의 베테랑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1948년 1월부터 자유신문에 장편 『효풍』을 연재하는 동시에 또다른 신문 신민일보 창간에 적극 참여하여 다시 언론계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신문들은 경향신문보다 좀더 분명하게 남북합작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특히 신민일보는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에 앞장선 김구와의 인터뷰를 크게 실어 이승만과 미군정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때문에 염상섭은 며칠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러나 물론 그가 좌파로 전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염상섭을 권영민(權寧珉) 교수는 ‘중간파’로 규정했고(『염상섭전집』 제10권 해설, 민음사 1987), 김재용(金在俑) 교수는 1930년 전후의 신간회운동과 해방시기 남북협상운동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에 이룩된 민족통합노선의 구현으로 보고 그 노선에 적극 호응한 염상섭의 문학적 성과로서 『사랑과 죄』 『삼대』 및 『효풍』을 분석한 바 있다.(「염상섭과 민족의식」, 문학과사상연구회 엮음, 『염상섭문학의 재인식』, 깊은샘 1998) 나는 대체로 이런 견해에 찬성한다. 하지만 중간파란 말은 어감이 좋지 않다.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신간회운동과 좌우합작・남북협상운동은 단순히 좌와 우의 중간 또는 양자 간의 단순한 절충을 추구했다기보다 양극단의 비현실적 편향을 넘어서 민족의 자주적 통합을 추구한 노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8・15 이후로 말하면 김규식・안재홍・조소앙, 말년의 김구 등 중도우파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좌파 및 홍명희 같은 순수중도파를 아우르는 인맥인데, ① 외세에 대한 자주적 태도, ② 평화통일과 외국군 철수 주장, ③ 토지개혁과 정치구조 개혁 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절충하는 모습, ④ 식민지 잔재의 청산을 통한 자주독립의 실현, 요컨대 “좌우의 대립 속에서 특정 이데올로기를 취하기보다 좌우를 결합할 수 있는 노선과 정책개발”에 주력하는 노선이었다.(윤민재 『중도파의 민족주의운동과 분단국가』, 서울대출판부 2004, 5~6면) 생각건대 염상섭은 『만세전』 시기 이후 일관되게 이런 노선을 따르는 입장이었다.
그의 온건한 정치적 성향은 대체로 소설에도 반영되어 있다. 나는 해방시기의 격동과 수난을 다룬 두 작품을 최근에야 읽었는데, 소련군 진주 직후 북한지역의 힘들고 불안한 민중현실이 노련한 리얼리스트의 눈길로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오랜 절필 이후의 첫 발표작인 「해방의 아들」(『신문학』 1946년 11월호, 발표시 제목은 「첫걸음」)에는 작가가 단둥에서 신의주로 건너와 살던 때의 경험이, 그리고 「38선」(『38선』, 금룡도서주식회사 1948)에는 온갖 고초와 위험을 겪으며 38선을 넘기까지의 과정이 실로 생동하게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두편 모두 상당히 긴 단편인데, 특히 후자(「38선」)는 염상섭 문학 전체를 통틀어서도 「만세전」에 버금가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해방의 아들」은 작가가 신의주에 머물던 때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민들은 소련군 진주에 따라 결성된 인민위원회・여성동맹 같은 조직에 재빨리 편승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불안하게 시국을 관망하고 있다. 거리에는 태극기와 소련기가 함께 걸려 있고, 일본인 집들은 조선인의 차지가 되고 있다. 일인들은 숨죽인 채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중이다. 당시의 어수선한 국경도시 풍경을 잠시 구경하자.
사실 옆집 일인들은 조석이야 끓여 먹겠지마는 하루 온종일 또드락 소리도 없고 드나드는 기척도 아니 냈다. 앞문에 붙인 김 모라는 문패는 접수가옥의 선취권을 표시하는 것일 것이요, 동시에 이 집은 이 시가의 어느 집에나 써붙인 카렌스키 돔(조선인의 집)이란 확적한 표시도 되는 것이겠지마는, 그래도 캄푸라쥬의 효과가 적을까 보아서 문설주에는 어느때 보나 벌써 후락해진 태극기와 소련의 붉은 깃발이 좌우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해방의 아들』 3면)
이런 가운데 화자인 홍규는 작가의 분신답게 ‘중간에 엉거주춤한’ 태도이면서도 차츰 더 분명하게 민족주의적 입장을 드러낸다. 그런데 홍규네 이웃에는 하야시란 일인이 있는데, 그의 집에 머무는 젊은 여인은 소문과 반대로 그 일인의 조카이다. 하야시의 하소연에 따르면 조카사위는 ‘어엿한 조선사람’임에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일본인 행세를 해왔고, 그래서 지금 단둥에 떨어져 이리 못 건너오고 있다. “조선사람 편에서 미워할 것은 물론이요 일본인 측에서도 탐탁히 여겨주지 않고 만인(滿人)도 좋아 않는” 그 조카사위를 단둥에서 이곳 신의주로 데려다달라는 것이 하야시의 간절한 청이었다. 홍규는 단둥 교민회에서 활동한, 말하자면 유지인데, 그가 보증해서 피난민증만 발급받으면 압록강 다리를 통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홍규는 자기 볼일 겸해서 그의 조카사위를 데려오는데, 이 작품의 몸통은 ‘마쓰노’로 행세하던 그 젊은이가 본명 조준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일화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실했던 민족의식의 회복이라고 부를 만한 과정으로서, 어떤 점에서 작품 「해방의 아들」은 민족주의적 이념의 과도한 강조가 문학의 리얼리즘적 성취에 손상을 가한 예라고 할 수도 있다.
「38선」은 신의주를 떠난 피난민 부대가 사리원부터 개성까지 남하하는 동안 겪는 우여곡절을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기차편을 이용하다가 자동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때로는 걷기도 하는 그 길은 당연히 힘들고 위험하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몸에 감춘 것이 없으니 뒤진대야 빼앗길 것이 없고, 어여쁜 색시면 봉변도 한다지마는 늙어가는 아내와 업고 걸리고 한 올망졸망한 어린것 서넛을 앞세웠을 뿐이요, 동행인 젊은 부처라야 부인이 만삭이니 도리어 겁날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다.”(『38선』 3면) 그러나 토성과 해주 사이가 전염병(호열자)으로 통행이 차단되어 한동안 진퇴양난에 빠지는가 하면, 남루한 피난행렬조차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본인 여자와 아이들 무리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화자는 인간에게 희망이란 무엇이며 민족의 운명이 왜 이런 고통 속에 헤매야 하는지 이성적 숙고를 행한다.
어두워 가는지라 차도 제정신이 드는지, 낮에 한눈만 팔던 당나귀처럼 제법 속력을 낸다. 휙 지나쳐놓고 다시 돌아다보니 어스레한 길에 지게를 진 아이가 책을 펴들고 간다. 해방 이후에 비로소 반가운 꼴을 본 듯싶다. 어쩐지 마음에 좋았다. 해방의 꼴을 그 아이에게서 본 것 같다. 텅빈 내 가슴에도 희망이 차츰차츰 차오르는 듯싶다.(54면)
행진이 시작되는 것을 보니, 저절로 비장한 마음이 든다. 추방당한 약소민족의 이동과는 다르다. 아무리 약소민족이기로 손바닥만한 제 땅 속에서 왔다갔다 하는데 이렇듯 들볶이는 것을 생각하면 절통하다. 배 주고 뱃속 빌어먹기에 이골이 나고 예사로 알게끔 된 이 민족이기로 이 꼴이 되다니, 총부리가 올 테면 오라고 악에 받치는 생각도 든다.(70면)
외세에 의한 국토의 분단, 일제 식민지 잔재의 미청산, 민족 내부의 이념적 분열, 그리고 귀환동포를 비롯한 서민들의 극심한 생활난은 해방시기 우리 민족 앞에 가로놓인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자 최대의 난제였다. 당시 우리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와의 연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염상섭이 기대를 품고 내려온 남쪽의 현실도 뜻과 같지 않았다. 연작단편 「이합」과 「재회」는 그의 방대한 생산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지만, 젊은 주인공들이 “남북에 대하여 역시 서로 똑같은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똑같은 불안과 의문을 품는” 모습을 통해 그의 비판적 입장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의 중도적 자세는 남북 어느 쪽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방관적 의식 소유자의 기계적 중립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당시의 살벌한 남북현실을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염상섭 소설이 갖는 강력한 리얼리티를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미구에 닥친 압도적 현실의 중압은 그나마 남아 있던 중도적 양심의 자리를 박살내고 작가로 하여금 비근한 일상의 속물적 세계 이외의 다른 선택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된 것은 당연히 작가의 탓이 아니다. 염상섭과 정지용을 비롯한 수많은 양심적 문인과 무고한 백성들이 국가보안법 시행(1948.12)에 따라 강제로 소위 국민보도연맹(1949.6)에 가입했고, 6・25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수십만 양민에 대한 집단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소설가는 구차하게 해군소령의 군복 안에서 구명(救命)에 성공했고 시인은 안타깝게도 이름 없는 전장에서 비명횡사의 운명을 맞았으니, 때때로 역사는 개인들의 의지와 용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을 연출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염상섭은 후일 가난에 지친 병든 몸으로 4・19혁명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린다. 1960년 8월 무더운 여름, 그는 단편집 『일대의 유업』(을유문화사 1960)을 내게 되었을 때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머리말’을 쓸 수 있었다. “새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이 책이) 풀려나오게 된 것도 시기의 우연한 일치이겠지만, 무슨 기연(奇緣)이나 있는 듯이 저절로 기꺼운 미소를 떠오르게 한다. 건국 후 12년간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나의 작품들마저 함께 맞이하는 듯이 시원하기 짝이 없다.” 건강이 허락했다면 서문에서 토로한 이 “독재로부터 해방된 기쁨”은 그에게 1930년 전후, 해방 시기에 이은 세번째의 문학적 전성기를 선사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일대의 유업』은 생전에 간행된 그의 마지막 소설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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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재선 「일제의 검열과 『만세전』의 개작」, 『문학사상』 1979년 11월호. 이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만세전』은 1922년 7월부터 『新生活』지에 『墓地』란 제목으로 3회까지 연재되다가 잡지의 폐간으로 중단되었고(3회 연재분은 전문 삭제 처분), 1924년 4월부터 시대일보에 『만세전』으로 제목을 바꾸어 연재를 재개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곧이어 그해 8월 개작을 거친 단행본이 고려공사(高麗公司)에서 간행되었는바, 이 초간본에는 검열로 삭제되었던 연재분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어, 신문・잡지와 단행본에 대한 검열의 기준이 달랐다는 추론을 낳는다. 그리고 해방 후 1948년 2월에는 다시 개작한 판본이 수선사(首善社)에서 간행되었다. 대부분의 문학전집・선집에 수록된 것은 이 수선사본인데, 1960년대초 필자가 개작인 줄 모르고 읽었던 것도 이 판본이다.
2) 임화 「소설문학의 20년」, 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임화문학예술전집 2: 문학사』, 소명출판 2009, 449면.
3) 후일 염상섭은 「橫步 文壇回想記」(『사상계』 1962년 11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三代』는 新舊時代를 祖孫으로, 그 중간의 신구완충지대적인 시대, 즉 흑백의 중간적이요 흐릿한 회색적 존재로서 부친의 代를 개재시켜 세 시대상의 추이와 그 특징을 밝힌 작품이다. (…) 조부는 만세전 사람이요, 부친은 만세후의 허탈상태에서 自墮落한 생활에 헤매던 無理想・無解決인 자연주의 문학의 본질과 같이 현실폭로를 상징한 부정적인 존재이며, 손자의 대에 와서 비로소 새 길을 찾아들려고 허덕이다가 손에 잡힌 것이, 그 소위 심퍼사이저라고 하는, 즉 죄악에의 동조자 혹은 동정자라는 것이었다.”
4) 염상섭 『삼대』, 창비 2007, 125면. 『삼대』는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고, 해방 후 개작하여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필자가 1966년에 읽고 참고한 것은 『한국문학전집』(민중서관 1959)에 수록된 개작본인데, 창비판 『삼대』는 1931년의 조선일보 연재를 저본으로 삼되 을유문화사 개작본을 참고했다고 한다. 다행히도 인용된 부분은 연재본과 개작본이 일치한다.
5) 김동리(金東里)의 회고에 따르면, 가톨릭에서 창간하는 신문의 책임을 맡게 된 정지용이 편집국장 할 만한 분을 물색해보자고 자신에게 의논하여, 자기가 염상섭을 추천했다고 한다. 그후 정지용은 점차 좌경적인 색채를 보인 반면, 염상섭은 “그때도 결코 좌익이라고 자처하지 않았고, 언제든지 좌우익을 통합시켜보겠노라”고 자기 포부를 말했다 한다.(김동리 「횡보 선생의 일면」, 『현대문학』 196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