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 제3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2013년 대한민국, 우리가 선거하지 않는 이유
이영유
1988년생. 숙명여대 영문과 대학원 재학중. behappy11@hanamil.net
1. 우리는 선거하지 않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우리는(도) 선거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피를 흘렸고 달렸으며 외쳤다. 그리하여 비록 혁명이란 이름은 얻지 못했어도 운동이란 이름은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도) 진지하게 선거를 했다. 날씨를 개의치 않았으며 (가령 하필 선거철에 때맞춰 발발한 천안함사건과 같은) 위협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오랜 선거의 역사를 갖지는 못하였어도 우리는(도) ‘민주적으로’ 투표를 한다고 말할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90년대 이후 선거철만 되면 언론매체는 연일 투표율 저하 상황을 수치스러운 어조로 보도하기에 바쁘다. 이번 선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거리가 선거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면, 이제 거리는 선거권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는 ‘팸플릿’들로 가득하다. 선거일이 언제인지 알리는 일은 공적인 일이 되었고 심지어 복지의 일부가 되었다. 선거장소가 어디인지 알리는 일은 필수적인 일이 되었고 심지어 경찰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지난겨울 내가 사는 신도시의 오래된 광장에도 ‘기호 1번, 기호 2번’을 외치는 사람보다 ‘투표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요즘에는 심지어 ‘누구’를 뽑느냐보다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투표율이 저하하는 이러한 상황을, 유권자의 게으름이나 권태로 보거나 후기 자유민주주의사회의 디스토피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개개인의 자질을 검토하는 것은 냉소의 결과일 뿐이지 대안을 마중하는 일이 되지는 못한다. 개개인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는 것은 쉽다. 나는 얼마든지 이 긴 글을 투표의 욕구를 끓어오르게 하는 미사여구와 교훈적인 어구들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후기자유민주주의의 부작용이라거나 ‘극도의 복지사회화로 인한 시민의식의 마비상태’라는 식으로 문제를 보는 것 역시 ‘정치적으로 거짓’이라고 말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이 일말의 진실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며, 따라서 악용될 소지와 의도가 다분한데다, 모든 정치구조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주장을 단지 뒤집는 식으로 반응하여, 민주주의나 복지사회에 어떠한 결점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진실은 ‘모든 조직 형식’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모든 곳에, 국가를 형성하는 모든 방식에 문제가 있다. 사실 진정한 문제는,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부인(否認)을 대리보충하기 위하여 끌고 오는 모든 언술들이 혼란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없는 체제’란 언제나 환상 속에서만 추상적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유 구조 속에서만 기만적으로 존재한다. 정말로 진지하게 ‘조직 형식’의 문제 자체에 접근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조직 형식 속에서 문제를 경험해나가는 방식 자체를 조명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두가지 접근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도덕성, 게으름, 권태 등의 비난이 후기 자유 민주주의의 논리적인 결말이라는 절망과 정확히 냉소적으로 공존하는 것은 단지 의견이 우연히 두개로 갈린 것이 아니라, 두 의견이 정확히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쪽은 형식과 구조는 ‘정상’인데 사람들이 ‘부패’했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한쪽은 모든 문제를 무작정 ‘민주주의’로 돌림으로써 형식과 구조가 ‘비정상’이며 동시에 ‘부패’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명사 앞에 붙이는 접두사 ‘후기’와 ‘자유’가 보충하고 있는 뉘앙스다. 단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지므로 보다 안전하기 위해 ‘후기’와 ‘자유’를 붙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유권자’ 전체를 비난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보다 안전하게 ‘젊은 사람들은 투표를 안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문제를 보충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정확히 현재 보도국에서 하는 일이다. 특히 지난겨울의 선거 보도는 이전 선거 관련 보도와는 다른 한가지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특정 집단(물론 소위 ‘젊은이들’을 지시하는 것이 거의 명확해 보이지만)이 투표하게 된다면 선거 결과가 달라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아직 후보자였을 시절 얼핏 보인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고릿적부터 이어져 온 ‘세대 갈등’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번역하여 덧붙인다. 그러면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자연스러운 갈등의 일부가 된다. 이 둘 모두가 사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어쨌든 말을 함으로써 말을 하는 사람들 자신은 정당화되게 하는 기막힌 효과를 낼 수는 있다.
이와 같은 보충은, 둘 모두가 ‘구조와 형식’ 문제 자체를 왜곡하거나 적어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은 모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형식’을 ‘자연’과 혼동하거나 아니면 ‘기계’과 혼동한다. 둘 모두 실질적으로는 개입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세워 놓은 구조와 형식의 ‘본성’으로부터 그 개입하지 않음의 알리바이를 제공받는다. 후기 자유민주주의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위해서 부도덕성, 게으름, 권태라는 도덕적 비난은 증거가 된다. 한편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언제라도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상존하는 위험’의 형태로 위협적으로 예시할 수 있다. 이들이 전제한 ‘구조와 형식’이란 너무나도 딱딱한,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는 기계 같아서 인간이 그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란 기껏 그 논리적 결말을 전망하거나 아니면 거기에 성실하거나 불성실하게 반응하는 양자택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구조와 형식은 그렇게 견고한 게 아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꾸지 않는다면 어느새 스러져버릴 만큼 연약하고, 우리가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어느새 우리를 돕는 일을 멈출 수도 있을 만큼 타자적이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탓에 ‘진리’를 갖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기를 중단한다면 오해되고 말 것이다. 그것들은 보편적이기를 원하므로 어느새 ‘환경’이 되어버리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의식하여 지각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편재하는 ‘풍경’(카라따니 코오진)에 그치고 말 것이다. ‘틀’을 ‘거푸집’으로 생각하지 말자. ‘민주주의’가 있으면 ‘민주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선거권’이 있으니까 그저 행사하면 될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틀’과 다르게 관계 맺자. 어쩌면 ‘선거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하지 않는 상황’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제 우리가 ‘선거권’이라고 하는 하나의 민주주의적 장치와 다르게 관계 맺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단순히 ‘투표하자’는 슬로건에 무작정 끓어오르는 식이 아닌 것,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만 정당화하는 식은 아닌 것, 오히려 진정으로 개개인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미덕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히려 진정으로 개개인이 정치 형식과 관계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도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말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 나는 그렇게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2. 선거권: 소유의 관점에서 사회적 관점으로 이동하기, 민주주의와의 동일시에서 병립화로 이동하기
사실 우리는 선거권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국민으로서 내가 선거권을 ‘소유’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쟁점이었다. 그 인정이 평등한 것이냐, 평등하지 못하느냐가 쟁점이었다. 그 권리가 기만적이냐, 진정하냐가 쟁점이었다. 우리는 선거권을 실체로서 우리 앞에 세워두고 관계하긴 하였지만 선거권이라는 실체 자체에 대해서 숙고해본 적은 별로 없다. 선거권을 두고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말이 오갔고 씌어졌다는 것도 이 주제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선거권에 관련된 모든 주제가 너무나도 낡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주제는 전혀 낡지 않았다. 아니 낡을 겨를도 없었다. 왜냐하면 선거권은 언제나 소유의 관점에서만 사유되었지, 사회적 관점에서 사유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선거권이 마치 ‘여성에게 재산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루어졌다는 것, 심지어 그 두 과정이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두’가 선거권을 요구했을 때조차 어쨌든 ‘자기 자신’에게 선거권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1960~80년대에, 이미 20세기 초반에 선거권을 쟁취했던 서부 유럽 및 미국의 여성운동가들은 참정권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였다. 1866년 밀(J. S. Mill)이 최초로 여성참정권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된 이후 여성참정권 운동은 특히 수잔 앤서니(Susan Anthony), 캐리 캐트(Carrie Catt)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장되었다. 영국에서는 1928년 여성에게 선거권을 인정했는데, 당시 그런 국가는 30개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60년대 후반부에 오면 100개가 넘는 국가가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하였고 이미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여성이 선거하러 가는 일이 꽤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1970년,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참정권은 많은 면에서 성혁명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구실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투표권을 얻은 후 여성운동은 설 자리를 잃었다”고까지 단언했다.1) 밀렛은 선거권과 정치성이 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해낸 첫번째 페미니스트였다. 하지만 남성적인 권력이 구체적인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허구적인 표상방식을 비판하는 쪽으로 논의가 집중되면서 선거권 운동 ‘이후의’ 정치 문제에 관한 논의는 가려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의 1990~2010년대에, 여성운동가 밀렛이 제기했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투표권을 얻은 후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민주화운동’이란 어휘 자체는 현실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역사적 의미만을 갖고 있다. 그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다. 현 상황에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언어가 어떤 식의 실질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단지 과거에 있었던 몇몇 사건들을 ‘지칭’하는 데 그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민주화운동’ 자체가, 어떤 식의 이야기화과정을 거쳐(hi-storization), 선거권을 얻기 위한 노력과 분투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렇다. 나는 ‘축소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민주화운동’을 재사유하여 ‘혁명’이라고 재명명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민주화운동’을 더욱더 신화화하는 데 그칠 것이다. 또한 이 말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 중 누락된 부분이 있어 내가 그것을 채우고자 한다거나 ‘민주화운동’의 본질은 사실 다른 것이었다든가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선거제도’와 동일시해왔던 오랜 전통을 다시 숙고해보아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일시가 적어도 두가지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이제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과업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선거권은’ 얻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를 왜곡시킨다. 문제 자체가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조건’의 차원에서 사유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하는 것’을 민주주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의 소유’를 민주주의로 생각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민주화‘운동’이란, 압제적인 악에 ‘대항하여’ 일어나는(정확히 말하면, 일어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는 참정권 문제나 정치적인 행위 문제를 축소시킨다. 좀더 지속 가능하고 공적인 정치참여의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좋게는 ‘민중의 봉기’로 나쁘게는 ‘군중의 폭동’쯤으로 치부해버린다. 또한 이상적인 정부형태가 마련되면 ‘민주화운동’이 종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정치적 행위를 ‘일관되게 지속되는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폭발적인 민중/군중의 일회적인 자기의사 표현’쯤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유행하는 정치철학이 (특히 바디우로 대표되는) ‘사건’이나 (특히 지젝으로 대표되는) ‘신적 폭력’ 개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문제 자체가 ‘정치적 형식과 좋은 구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일어난 폭동’의 관점에서 사유된다.
민주주의가 ‘조건’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바로 그 민주주의와 동일한 조건을 온정적으로 허락해주는 군주를 갖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민주주의가 종종 폭발적인 사건에 의해서만 스스로를 드러낸다면 군주가 스스로를 단속함으로써 압제의 수준을 조절함으로써 모든 것은, 어느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별일 없이’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선거권을 ‘권리’로, ‘태어나자마자 누구나 평등하게 갖게 되는 그러한 조건’으로 만듦으로써 거대 권력이 제멋대로 종횡무진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고, 혹시나 그러한 위험이 현실화될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그를 제지할 힘이 상존함을 민중 봉기를 통해 현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건’이 ‘태어남이라는 사실’과 연결됨으로써 얻으리라 여겨졌던 평등은 권리를 정치적인 차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생물학적 사실의 차원에 종속시키는 결과 또한 낳았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던 봉기는 우리가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자마자 불가능해지는 결과 또한 낳았다.
이것이 바로 선거가 가진 양면성이다. 투표는 한 개인이 행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면서 다수에 속해야만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투표권은 한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신체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개인이 의무교육과정을 모두 거친 적절한 나이가 될 때까지 그 권리가 잠재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하다. 선거권이 나이를 제한해둔 것은 선거권이 ‘태어나자마자 평등한’ 그런 권리임을 확증해주는 것이 전혀 아니다. 하필 어떤 나이가 들어야만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는 규칙은 물론 자의적으로 정해진 것이지만 그 사회의 교육과정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사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의 문화적인 규칙을 습득하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 나이가 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교육과정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엔 생물학적 사실과 사회문화적 사실이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거권은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고 신체적이면서도 정치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거권’이라는 ‘권리’ 자체는 하나의 신체를 가진 한명의 개인이 출생을 통해 얻은 것이지만 ‘선거’라는 ‘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결코 홀로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거 경험을 통해 선거권이라는 소유물을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의미’를 띠는 행위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선거권은 조건이 아니었다. 차라리 선거권은 그것이 ‘얻어지는 과정’에서 그 본질을 더욱 잘 드러냈다. 선거권이 자리하고 있는 영역은 매우 기묘한 곳이다. 매우 이중적인 곳이다. 아직 정치화되지 않은 영역이지만 정치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역이다. 선거권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선거권이 그 자체로 정치적이라는 이야기는, 선거권을 소유하고 있는 ‘개인 혼자’로도 얼마든지 정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선거는 집단적인 행위이기 전에는 의미를 가진 적이 없었으며, 이때의 집단이란 단순히 ‘통계적인 산출이 가능한 집합’이 결코 아니었다. 물론 현재 선거의 모든 현실적 방식들은 선거를 이렇게 사유하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선거권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되고 병립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선거권을 다시금 이야기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사유의 형식과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 이유다. 민주주의자는 제도에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적절한 지향점을 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선거권의 근본적인 이중성과 선거제도라고 하는 견고하지 않은 사회정치적인 형식 앞에서 언제나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이 관계를 맺어가야만 하는 민주주의의 운명이다.
선거권이 사이비 소유물이 되도록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선거권을 얻어냈던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다시 사유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때, 그 역사적인 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선거권을 얻으려 노력하였는가? 그때 그건 분명히 ‘당신과 함께’였다. 가난했으며, 여성이었으며, 흑인이었고, 이방인이었던 모든 당신 또한 선거권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였다. 선거권이 차차, 점점, 20파운드 이하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도, 여성에게도, 흑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확산되어갔던 것은 단지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억울함이나 원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평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위한 열정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권리란 사회적인 권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영혼 때문이었다.
3. 이 시대 투표의 경험에 대하여: 고독한 투표, 소외된 투표
당신은 홀로 선거소에 들어간다. 물론 종종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갈 때도 있다. 하지만 잠시 후 당신이 홀로 온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왜냐하면 당신은 신분증을 내밀기 때문이다. 당신은 서명을 한다. 이곳에선 이것만이 당신이 당신이라는 유일한 증거다. 그리고 당신은 차양이 드리워진, 오직 당신 혼자만이 서 있을 수 있는 그 장소에 오직 당신 혼자 서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다. 이 경우엔 당신이 ‘했다’는 증거는 없다. 어쨌든 당신은 자물쇠로 채워진 무겁고 근엄한 ‘함’에 이 보잘 것 없는 종이 한장을 넣고 돌아선다. 누군가 수고하셨다고 말해준다. 당신은 자신이 수고한 것인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하겠다. 너무나도 합리적이었던 그 투표 광경이 문득 환상처럼 흐릿해진다. 왜냐하면,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의 ‘나’가 아무리 나 홀로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고 외쳐도 “닭들이 그걸 모르면 소용없는” 것임을 아는 것처럼,2) 우리가 오직 타자들로 인해서만 세계를 확신할 수 있다고 한다면 타자 없는 그 곳에서 우리의 이 ‘도장 찍기’라는 ‘의사표현’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비밀투표’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지금 우리의 투표가 어떤 ‘소외 투표’ 쯤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비밀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대화를 가져야 한다. 투표란 우리의 정치적 행위들을 위한 플랫폼이나 경첩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지만 투표‘만’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정기성을 띠고 공적으로 지지되는 유일한 정치적 행위는 투표지만, 투표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말은, ‘평소에도 좀 잘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정치적 행위 없이 ‘혼자’ 투표만 하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보잔 이야기다. 비밀투표는 다른 사람이 내 생각을 알지 못하게 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압에 대항하여 자기의 의견을 ‘수호하게’ 하는 식의 단순한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비밀투표는 타인과의 대화가 만드는 우묵하고 깊은 내면의 장소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거주처가 있어야만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생성할 수 있는 것이다. 투표, 즉 비밀투표는 우리 각자에게 공적인 의탁처가 전부 포함시킬 수 없는 어떤 영역이 늘 존재해왔다는 것을 말해줄 뿐 아니라 이미 투표 상황을 넘어선 곳에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생성된 우리 의견의 탄생처가 있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밀투표는 우리가 타인과의 사회적, 정치적 삶으로부터 만들어낸 상징이자 제도인 것이다. 한데 비밀투표가 본래의 토대를 잃어버리면서 소외투표가 되고 말았다.
지금의 우리는 비밀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선거란, 그저 가서 몇가지 중 하나를 고르고 나중에 더 많은 사람이 고른 대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식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가 고르는 그것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표를 준비하는 사람들더러 ‘정책자료집’을 잘 읽어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식의 소통 통로가 있어야만 그것이 정책자료집이 ‘되는’ 것이지, 그런 게 없다면 그것은 일종의 ‘카탈로그’에 불과하다. 어떤 대상을 ‘광고’로 만드는 것은 그 대상 자체가 가진 근본적인 속성이 아니라, 그 대상과 주체가 맺는 관계가 폐아(閉我)적일 때다. 지금의 정책자료집은 우리에게 무언가 정치적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단지 마치 개인적으로 무엇을 구매할 것인지를 결정해보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택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상품인가, 숫자인가, 정말 우리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대화 없이 선택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의견의 토대 전체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선택 자체가 존재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선거는 우리의 투표 전체를 집계해, 아주 합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의견 전체가 검토되고 반영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선거가 집계하는 방식 자체가 실제로는 온갖 ‘다양성’을 은폐하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온갖 ‘의견의 구체적인 실재’를 소외시키는 기능도 한다. 선거는 단지 모여진 표의 숫자를 세서 통계상 과반수의 경계선을 그을 뿐이다. 선거는 그 모든 의견의 무한한 다양성을 대표자나 정당의 ‘이미지’로 통합할 뿐이다. 이미 선거가 제시하고 있는 선택지들 자체가 토론이나 대화 같은 사회적인 소통의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치 객관식 답안지처럼 선택지들은 그저 주어진 것이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의견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이미 제공된 선택지를 넘어서는 의견을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다 해도 그 의견이 ‘공적으로’ 드러날 수는 없는 것이다. 채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은 선택지에 의해 체계적으로 말소되었다. 설사 우리 선택에 일말의 자발성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선택하는 바로 그 즉시 그것은 소멸하고 만다. 우리의 선택은 ‘던져진 한표—투표(投票)’가 되자마자 선택으로서의 존재론적 위상을 잃고, 집계할 수 있는 양적 지표의 일부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다양성 그 자체에 대한 공격은 또 어떤가. 무한한 의견의 무한한 토론이란 이미 비생산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배제되거나,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다 해도 적어도 ‘현 상황의 물리적인 한계’라는 명목으로 애초에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구나 토론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그 중요성을 주장하지 않기에 토론의 생산성을 기능적이고 기계적인 생산성과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고, 토론의 조건을 여전히 다수결이라고 하는 원칙 속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어쨌든 토론은 무슨 결론을 내야 한다고 단언하고 어쨌든 모든 의견은 다수결이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로 묶여 분배되어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다양성보다 통합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가령 세대와 세대가, 지역과 지역이, 너와 내가 의견이 다르면 건강한 것으로 보지 않고 무언가 분열된 것으로 보는 무의식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의견의 차이를 환영하지 않는 사회는, 의견을 나눌 토대가 없는 사회다. 그 사회는 의견을 받아들일 형식이 없기 때문에 의견의 형식을 띤 모든 말들이 두려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통합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야말로 소외가 극심한 것이고, 다양성을 다양성으로 내버려둘 수 있는 사회야말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시대 선거제도가 수행하는 다양성의 은폐와 무산은 실로 ‘대화 없음’이라는 ‘소외 투표’의 상태와 공모하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고립됨과 동시에 통합되는 것이 이 시대 선거제도의 핵심이다. 전국적으로 통합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란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세부적인 수준에서의 의견의 다양성을 무시한 결과일 뿐 아니라 사실상 마치 스타의 이미지처럼 기능함으로써, 환상적으로는 선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흐릿하게 존재함으로써, 소외의 모든 기미에 통합의 최면을 걸면서, 소외의 모든 징후를 은폐하기에 이른다.
4. 홀로 선거할 수 없음과 함께야—비로소—선거할 수 있음
어쩌면 우리는 선거의 이러한 면에 환멸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권리이면서도 우리를 소외시키고, 우리를 소외시키면서도 통합을 주장하니 말이다. 통합의 최면은 통계적인 비율로, 수치라는 엄정한 합리성의 권위로 시작되지만, 그 최면을 완성시키는 것은 대표자의 신화성이다. 기호들로 나누어진 선택지를 넘어서 한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야기, 힘, 카리스마, 권위 등에 의지하고 그를 믿는 것이 우리의 원초적 경험에 보다 가깝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대표자의 이미지가 선거를 초과한 것이다. 우리가 환멸스런 선거의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한 사람의 이미지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이미지에 투신함으로써 우리는 소통할 수 없는 슬픔과 인간에 대한 지독히 그리운 그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선택은 소통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함을 확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의견의 교환을 이미지로 대체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지만 우리에게 별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현재 선거제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것은 소외 상황을 토대로 하고, 설사 그렇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이용하고 있으며, 나아가 존속시키며 재생산하는 기능까지 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환멸을 적어도 두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여긴다. 한가지가 대표자 이미지에 대한 불가능한 의존이라면, 다른 한가지는 투표할 수 없음을 투표하지 않음으로 단순히 환원하여 전유하는 것이다. 선거하지 않는 것은 사실 선거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투표의 무능은 곧 투표에의 불능이다. 이러한 해결책은 증상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결책은 투표의 무능과 투표의 불능이 자리한 근본적인 토대를 직시하는 것이 아니기에 상황을 악화시킨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거권이 소유권이 되어 현실감을 가질 수 없기에 투표 상황 자체를 회피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각각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는 현재의 선거 제도에 대해 소외되어 있기에 대표자 이미지에 스스로 환원함으로써 통합의 껍데기라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써 결국 내내 우리는 대화와 사회성을 빗겨가고 있다. 더이상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조직 형식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선거권이 그 근본에서부터 이중적인 형식이라는 점을 기억해내야 한다. 선거권의 양면성을 직시하고 개입을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위해서 독립적으로 선거권과 병립해, 서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소통의 미래를 통해 선거라는 제도와 공동체적 관계를 맺기 위한 운동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나는 전반적인 상호 소외의 상황에서는 투표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투표율이 높은 것이야말로 정말 걱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투표를 소통과 대화의 완벽한 대체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화가 없는 사회에서는 투표율 또한 지지부진한 것이 당연하다. 그나마 현재의 투표율이 유지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보완물들로 투표의 의무를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드러내 보이고 있는 증상적인 해결, 이 두가지 방식은, 적어도 대화 없이는 선거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겐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소통이 금지되었다면 대표자 이미지와의 상상적인 통합을 통해서라도 타인과의 신뢰 관계의 형태나마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인 영혼은, 우리가 대화할 수 없다면 선거 또한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 하겠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방식을 이해하고 읽어낼 필요와 의무도 우리에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접근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좀더 성실하라고 좀더 도덕적이라고 비난하듯 요구하는 것이나 아니면 애매모호하게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질에 대한 비난이나 디스토피아적 절망은 답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대화할 수 없고, 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투표해왔으며, 그리하여 절망해왔고 여전히 그렇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여전히 대화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홀로 투표할 수 없음을 안다. 함께야, 비로소, 투표할 수 있다.
내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나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 혹은 군주정, 귀족정과 연속선상에 놓고 범주화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지난 정부 형태와 민주주의에 근본적인 다름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권리 및 조건의 차원이나 범개인적이지만 비공동체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정치적인 제도 및 형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양식, 대화와 소통의 양식을 통해서 경험과 개입과 참여를 이끄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주권’을 갖고 정치적 ‘결단’을 하는 게 아니다. ‘각자’가 ‘책임’(responsibility)을 다할 수 있는 공동체에 ‘개입’하여 탈의인화된 변화의 인격적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단순한 정부형태가 아닌 셈이다. 민주주의는, 그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화적이고 사실상 대화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회복시켜야 할 것은 그 모든 개인적인 권리 소유를 증대시키거나 좀더 영속적으로 잘 다스릴 만한 대표자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일관되게 지속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생활양식을 발명하는 일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의견을 나누는 것,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 설득하는 일, 반박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오히려 다른 층위를 개시하는 일 모두가 가능해지는 것, 대표자 이미지에 상상적으로 통합됨으로써 스스로에게 소통의 최면을 걸거나 단순히 투표 자체를 회피함으로써 상황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회적 영혼을 일깨우고 닦고 배워 개입하는 것,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구하는 ‘촌선(寸善)’(김영민)일 수 있다.
물론, 대화가 단순하게 ‘대화하자’는 슬로건을 내건다고 해서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화가 가능해지는 토대를 밝히고 생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하나의 대화를 ‘시작’하고 싶다. 그간 당신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던 거라면, 내가 응답할 차례. 나는 다만 우리가 선거하지 않음을 통해 이미 어떤 것을 스스로 표현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는 그 표현을 이해하고 그 표현이 ‘보이도록’ 함으로써 대화의 가능성을 펼쳐내는 일을 해야 한다. 대화란 분명히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할 것도 없다. 우리가 권리로서 가졌던 선거권을, 대화의 삶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사회적 행위로 전환, 변용시키는 일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거권은 우리가 끊임없이 도전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에게 낯선 ‘행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