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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찰스 페로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RHK 2013
우리가 원전을 포기해야 하는 진짜 이유
장대익 張大翼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djang@snu.ac.kr
연구년을 맞아 미국 보스턴에 온 지 몇주가 지났다. 미국 운전면허를 받기 위해 서류를 준비하다 정말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예전에는 미국 입국신고서(I-94)를 방문자 본인이 작성하여 입국장을 통과했었는데, 경비 절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몇달 전부터 출국장에서 입력한 자료가 자동으로 전산화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입국 후에 웹페이지에서 승인된 신고서를 본인이 직접 뽑아볼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란다. 그런데 내 것을 도통 뽑을 수가 없었다. 이 서류가 없으니 나를 정상적인 입국자로 증명할 방법이 없고, 따라서 내 운전면허 지원서는 거부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공항 입국심사장까지 찾아가서 담당자에게 항의했지만 “어딘가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을 제대로 바로잡으려면 12주가 걸린다”는 대답만 듣고 왔다. 뭐가 그리 복잡하단 말인가?
지난 40여 년 동안 대형 참사의 메커니즘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온 미국 예일대학교 명예교수 찰스 페로(Charles Perrow)는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에서 불가피한 대형 사고를 유발하는 시스템의 복잡성과 상호연계성을 분석했다.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를 비롯하여 몇몇 석유화학 공장 폭발사고, 항공기 사고, 해상 사고, 광산 폭발사고, 우주탐사 사고의 실제 사례들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저자는 복잡하고 단단하게 상호연결된 시스템이 수많은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오싹한 진실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논지는 이렇다. 원전이나 우주탐사처럼 수많은 요소들(부품, 절차, 운용자)로 구성된 복잡한 시스템에서 두가지 이상의 장애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 시스템의 속성상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붕괴로 이어지는 시스템의 속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두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상호작용적 복잡성이고 다른 하나는 긴밀한 연계성이다. 전자는 선형적 복잡성, 또는 순차적 복잡성과도 다르다. 아무리 복잡한 생산라인이라도 한 지점에서 문제가 생기면 경보가 울리고 그 라인이 정지될 것이며, 감독자가 점검한 후에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이것은 순차적인 복잡성이다. 하지만 하나의 잘못이 다른 오작동과 상호작용하여 걷잡을 수 없이 큰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가령, 드라이어기가 과열되어 불이 났는데 집안의 화재경보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외출한 사이에 집이 몽땅 타버린 경우를 상상해보라.
저자에 따르면, 실제로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에서 발생한 방사능 누출사고는 4개의 사소한 독립적인 장애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시스템의 복잡성 때문에 네 겹의 안전장치도 무용지물이었다. 당시에 이런 복잡성을 어렴풋이 이해했던 원전 직원은 단 한명뿐이었으며 게다가 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고가 부품, 절차, 운용자로 구성된 복잡한 상호작용적 시스템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고 말한다.
너무 비관적인 주장 아닌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니. 실제로 이 책이 처음 출간된 1984년만 해도 스리마일 섬 원전사고만 한 대형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다. 원전이 그토록 위험한 시스템이라면 왜 비슷한 사고들이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하지만 놀랍게도 저자는 이 책의 초판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그 이유는 아직 그럴 만한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형 사고가 재발할 요인들은 이미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대단히 운이 좋지 않는 한 향후 10년 안에 방사능 유출사고가 1건 이상 발생할 것이다” 불행히도 이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 발생한 방사능 누출사고는 5년 동안 7000여명의 생명을 앗아갔고 100만명 이상을 환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최악의 원전사고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재앙이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꾸시마에서 발생했다. 이 참사의 시작은 동일본의 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쓰나미였지만, 자동안전장치의 연속적인 오작동, 운용자의 계속된 판단 실수 등이 이어진 전형적인 대형 사고였다. 실제로 후꾸시마 사건이 터지자 저자는 ‘후꾸시마와 터질 수밖에 없는 사고’라는 기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내 원전은 안전한가?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원전은 근본적으로 안전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 드러난 관행화된 부품 납품 비리와 너무도 잦은 가동 중단은 암울하게도 저자의 주장을 더욱 신뢰하게 만든다. 급기야 외국의 유수 언론도 한국의 원전사고를 걱정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와 관계 기관들은 원전정책에 대한 근본적 재고는커녕 사고 덮기와 불안 잠재우기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도발적인 주장은 고도로 정교한 안전장치를 겹겹이 장착해도 ‘필연적으로’ 언젠가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고위험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원전과 핵무기를 이 범주에 넣었다. 한편 해상운송이나 DNA재조합처럼 그보다는 덜 위험해서 매우 엄격한 제한을 가하면 어느정도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있고, 항공로나 화학공장처럼 적절한 개선을 통해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안전장치를 더 많이 단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시스템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더 큰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확률적으로 계산해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가령 원전사고가 나기 위해 네곳에서 동시에 장애가 발생해야 한다고 해보자. 물론 동시에 이런 장애가 생길 개연성은 거의 0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원전 하나에 140만개 이상의 부품이 들어가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절차들이 개입한다고 한다면 확률은 꽤 높아진다. 게다가 설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납품 비리나 운용자의 실수가 들어가면 사고 확률은 배가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대형 사고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문가(절대적 합리주의자)들은 시스템에 대한 대중의 무지를 내세우며 안전하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저자는 의사결정에 대한 인지심리학적 연구들을 인용하며 대중의 공포감은 충분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저자의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시스템에 대한 두려움은 불행을 막기 위한 심리 장치로 진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 책의 원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정상적 사고’(normal accident)이다. 참사가 터질 때 마다 사람들은 ‘이례적인 사건’이라고들 한다. 가령,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폭발, 괌 비행기 추락, 태안 기름 유출, 우면산 산사태, 그리고 4대강 녹조 사태 등과 같은 참사는 비정상적 사건인가? 물론 발생의 빈도의 측면만을 보면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참사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시스템의 속성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아무리 효율적인 안전장치를 겹겹이 쌓아도 시스템의 속성상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사고를 그는 ‘정상적 사고’라고 부른다.
며칠 전에 입국심사서 문제 때문에 공항을 다시 찾아갔다. 담당자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똑같은 문제로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나는 만나야 했다. 시스템의 복잡성이 어떤 역치값을 넘어서면 관리와 훈련을 강화해도 이런 사고가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이 책은 적어도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하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문제작이다. 특히, 대중의 무지를 나무라며 안전을 약속하는 무지한 전문가들이 곱씹으며 공부해야 할 교과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