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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은주 金銀珠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함. leenaan@naver.com
구름왕
하오의 구름은 아름다웠어
구식으로 바람이 불고
우리는 지우개만으로 그림을 그리네
덧칠된 햇빛햇빛
오늘도 구름을 망쳤어
뭉게뭉게 뭉개진 구름의 아이들
한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다는
코끼리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다정한 홍채에 대해서 반응할 수 있을까
구름의 아이들이 발을 구르고
구겨진 발들이 저마다 소리지를 때
그러데이션에 실패한 구름에도 소실점은 찍힌다
어떻게 매순간 아름다울 수 있지?
균일하게 반복되는 고백성사처럼
고백이 성사를 낳고 성사가 고백을 키우면
우리는 자주 유원지 같은 기분이 들어
세상의 어떤 밀담에도 가담하지 않기로 하였지
하늘이 허기진 저녁을 달달 볶아 붉어지면
다리가 여섯개뿐인 의자에 앉아
폈다 접었다 새로운 다리를 만드는 구름의 아이들아
잃어버린 것들을 완전하게 잊는 방법을 알고 있니
저녁의 입술입술 쉿!
침묵을 말하는 검지손가락검은손가락
비밀로 녹는 솜사탕솜사탕
대답 없는 주머니속주머니
복화술로 훈육된 염소들염소
우클렐레우클렐레1로 춤을 추면
실측한 구름보다 가벼워진단다
우리는
구름을 흠애하는 코끼리의 망막은
장화 신은 입술 파란 쥐
꼬리 없는 쥐를 처음 만났을 때 얘기해줄까 쥐방울만한 쥐들이 다글다글 긴 꼬리를 걸상에 걸치고 노래 부르던 교실이었어 우리는 호밀로 만든 식빵을 타고 날아다니고 바나나 껍질에서 서로의 꼬리를 잡고 미끄럼 타기를 했어 내가 독감에 걸려 갸릉갸릉 고양이 목소리로 재채기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아이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방울 깨지는 소리로 넘어지는 쥐방울들이라니 비질비질 웃음을 비질하며 내가 허리를 꺾는 순간 꼬리가 제일 뾰름하게 생긴 녀석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니겠어? 반짝 녀석이 빛의 속도로 사라졌을 때 화들짝과 반짝 사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발등에서 녀석의 앞니 하나가 질질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번뜩 이빨에 상하면 불에 태운 꼬리를 잘라 붙이라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났어 하지만 이미 놈은 꼬리를 내빼고 없었는걸? 에라 모르겠다 다른 쥐를 곁눈질하기도 했지만 꼬리를 가진 쥐들은 의심이 많아 꼬리를 휘휘 감으며 사라졌어 치근이 자라는지 자꾸 치근거리며 발등이 간지러워질 때까지 녀석은 앞니를 찾아가지 않았어 아무튼 그때 장화 신은 쥐가 되기로 결심한 거야 비가 오거나가거나 햇빛이 쏟기거나말거나 장화를 신고 잘박잘박 꼬리를 찾아 걸었지 아무도 나의 무거운 보폭을 이해하지 못해 구름을 쳐다보며 가끔 뭉클뭉클 울기도 했어 그럴수록 나는 장화 속에 사라지는 것들과 이미 사라진 것들 앞으로 사라질 비밀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리를 찾아다녔어 바로 그때 꼬리 없는 쥐를 만난 거야 꼬리 없는 쥐가 엉덩이를 보여주며 나는 끌끌 돼지의 목소리를 흉내내다 꼬리를 잃었단다 너도 나와 함께 일백 서른 두 개의 목소리를 모사해보지 않겠니? 장화를 벗어보렴 어서 더러운 장화 따위는 벗어버리래두! 나는 장화를 벗지 않았어 꼬리 있는 쥐가 꼬리를 감추고 꼬리 없는 체한다고 생각했거든 나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냥 쥐야 빨리 성장하고 오래 늙는 병에 걸렸을 뿐이라구! 에이 거짓말 평생 거짓말쟁이들에게 존댓말하기 싫으면 바른대로 말해 거짓말은 입술을 창백하게 하거든 웃기는 소리! 꼬리를 구할 수 있다면 내 꼬리를 잃어도 좋아 내가 씩씩거리며 꼬리 없는 체하는 꼬리 있는 쥐를 쳐다보자 어머나 세상에 녀석이 파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바닥에 무언가 떨구고 있었어 툭 하는 소리에 놀란 꼬리 감춘 쥐는 똥꼬에서 긴 꼬리를 빌빌 싸면서 저만치 도망했지 뭐야 내가 장화로 톡 건드리자 바스락 구겨지던 그건 종이로 만든 앞니였어 장화 신은 입술 파란 쥐야 너는 오늘도 장화 속에 무엇을 모으며 익살맞은 밤을 날아다니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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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클렐레: 네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하와이 전통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