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심사평
신인상은 이미 알려져 있는 표준적 덕목을 두루 갖춘 이른바 좋은 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규범을 뚫고 솟아나려는 기미가 엿보이는 예외적 개성을 주의 깊게 찾는 일이라 믿는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와 대결하고 그 한계를 실험하는 자세의 발견일 것이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문제 설정과 스타일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실천의 확인일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열명의 응모자 가운데 최종적으로 논의된 것은 공현진 엄기수 전문영의 응모작이었다.
「나도 펭귄」 외 6편을 응모한 공현진의 경우 문장을 읽고 난 뒷맛의 개운함이 좋았다. 문장의 리듬감과 표현의 재치, 부담 없이 치고 빠지는 능수능란한 연마다의 구성력까지 매끈했다. 그러나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아쉬웠다. 익숙한 몇몇 시인들의 발자국을 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타고난 시적 감각을 믿고 본인 시의 자존감을 찾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엄기수의 작품은 다채로웠다. 응모작들에서 여러 종류의 시적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소 불안정하고 비일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작품 경향은 이분의 경우에는 겸손하고 진지한 시적 모색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표제작 「옹관묘」에서 표현되는 진솔하고 잔잔한 생의 슬픔이 차분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러한 아름다움 덕택에 마지막 순간까지 당선작과 경합을 벌였다.
전문영의 「사과를 기다리며」 외 6편은 이채롭고 탄력적인 단언과 시를 장악하는 독자적 진술의 거침없는 화법으로 자기 스타일을 밀고 나가는 뚜렷한 개성에 도달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과 극적 행위를 통해 상징적 질서의 틈을 무겁지 않게 밀도있는 보폭으로 주파하며 자명성으로 위장된 현실을 날카롭게 환기하는 사유의 감각은 낯익은 것을 돌연 낯선 것으로 탈은폐하고 존재의 모순에 대한 당혹스런 질문을 촉발한다. 놀랍도록 개방적인 방식과 단독자적인 자세로 세계의 질서와 대결하며 잠재적 현실의 발명에 이르는 전문영의 시편은 우리 시의 예외적인 경험이 되리라는 믿음과 새로운 독자를 창조하는 활로를 열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 김민정 김성대 진은영 |
시 | 수상소감
전문영
1984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재학중.
언어의 불구성(不具性)을 오래 불신해왔다. 나의 일방적인 적대감은 여전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 자신 역시 불구라는 인지와 함께 언어와 내가 사는 영역이 동일한 지평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뿐. 그리고 어느날 버스를 잘못 탔는데도 어쩐지 느낌이 좋아 내리지 않았더니 한순간 이름 모를 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이 전면 유리에 펼쳐졌다. 여기까지가 내가 시를 쓰게 된 기묘한 사건에 대한 내 최선의 요약이다.
시와 나는 무척 친밀한 느낌이다. 시와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내가 오해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깍짓손을 끼고, 서로의 속눈썹을 흩뜨린다. 지금 같아서는 시의 둥근 이마와 잔머리의 경계 정도를 겨우 매만지면서도 시의 실체에 대해 한밤 내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면 조금 흡족한 기분이 든다.
혹은 시를 제대로 오해하기 위해서 이 친밀한 감정을 내가 은연중에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닮은 생각을 닮은 형상 속에 품을 수는 있어도 시와 나의 육체는 영원히 동일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서. 그만큼 혼자 시를 읽고 쓴다는 건 내가 말이 말하는 말 속에서 꿈이 꾸는 꿈을 꾸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혹을 거듭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발생지를 각기 달리하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동안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는 시의 손길이 있다고 믿었다. 당선소식은 그 접촉이 환상은 아니라는 최초의 안도였다. 내 손을 꼭 쥐고 어딘가로 쉼 없이 잡아 이끄는 시의 손아귀 힘, 그 따뜻한 압박감에 이름을 붙이고 가만히 읊조려본다. 함께 많이 걸어야지. 그리고 잔뜩 얘기해야지. 절대로 울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혼자서 속으로 무수한 약속을 다짐하고 있으면, 시가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나와 언어의 불구를 씻어 내리는 느낌으로.
소설 |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소설상에는 300여명의 응모자가 총 610편의 작품을 보내주었다. 심사위원 네명이 그중 여섯분의 작품을 골라 본심에 올렸다. 응모작들은 공통적으로 감각이든 정서든 사유든, 이야기를 조직하는 언어가 환기하는 것이 표면의 이야기와 너무 가까워 보였다. 말들이 자체의 운동성을 갖지 못한 채 이야기의 기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장시간 토론과 숙고를 이어가다 올해는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 본심에서 주로 논의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김민성의 작품은 네모난 지구 밖으로 떨어질 듯 위태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나, 윤 씨, 미스 손 등 여러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시종일관 차가운 문체로 그려내며 독자를 뜨거운 용접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솜씨에서 작가로서의 재능과 오랜 수련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결론에서 갑자기 평균속도를 잃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 점이 아쉽다.
구연의 작품은 상당히 고전적이며 이야기로 승부하겠다는 의욕이 넘친다. 문장과 구성도 탄탄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너무 쉽게 예측 가능하다는 게 아쉽다. 곁가지 에피소드를 활용하면 소설이 더 풍부해질 것 같은데 작가는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만 일직선으로 정주행하며 쏟아낸다. 그 사건의 배경에 더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
신만봄의 작품은 무대를 인상적으로 구조화하고 장면을 이미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이야기와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보충물로 작용한다. 문제는 중심인물의 정념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정념을 이상하게 해소해버린 인물의 말이다. 인물의 정념은 ‘죽음’이라는 단어에 포획되지 않을 것인데, 그게 오히려 인물의 정념을 오해하게 만들고,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장서연의 건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체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으로 충분한 듯했다. 한 여성 통역사의 불안한 내면을 외국어와 모국어,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스크린’, 즉 경계의 삶으로 묘파한 작품은 문제작이 될 만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동봉한 작품 역시 평범한 인물들의 말과 행동 속에 담긴 커다란 진실을 볼 줄 아는 예리한 감각이 돋보였다. 그러나 당선작으로 선뜻 밀어올리기엔 망설여지는 대목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들이 ‘글쓰기의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당선작 없음’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신인들에게 유난히 엄격한 잣대를 고집하여 진입장벽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심사진은 자문을 거듭했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 세상을 좀더 궁금해하고 좀더 놀라게 만드는 작가와 만나고 싶다는 소망과 기대가 커서라고 변명해본다. 귀한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강경석 김미월 송종원 황정아 |
평론 | 심사평
평론상 심사에 임하면 좋은 평론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된다. 단순화해 말하면, 애정을 갖고 텍스트를 대하되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하며, 세계와 작품을 보는 눈이 독자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섬세한 읽기와 설득력있는 논법이 가능해지며, 시대와 작품에 대한 깊이있는 입론을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는 좋은 평문을 만나는 일은 흔치않다. 올해 창비신인평론상 응모작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시를 대상으로 한 글에서 아쉬움은 더욱 컸다.
총 14편의 응모작 가운데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어 주목한 글은 네편이었다. 전영규는 보르헤스와 겹쳐 읽는 방식으로 한유주 소설이 지닌 개성을 부각하고자 했다. 방법론이 단순한 것은 아닌지, 동시대 문학에서 한유주 소설의 좌표와 위상은 무엇인지 좀더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의 여운이 깊은 문장과 집요한 사유가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은지는 이장욱의 텍스트에 대한 애정 없이는 쓸 수 없는 글을 썼다. 작가의 개성이 무엇인지 또는 자신의 시각이 기존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고려하면 그 애정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최종적으로 논의를 거듭한 글은 두편이었다. 김요섭의 「길 잃은 시대의 작가: 박민규론」은 명쾌한 글이다. 무엇보다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특히 ‘인류’와 ‘인간’을 구분하고 ‘미래’와 ‘미지’를 구분하여, 낙관론 또는 비관론으로 박민규 소설을 읽은 기존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불안함을 읽어내는 냉철함’을 요구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기존 논의를 비판적으로 재정리하면서 논지의 선명함을 끌어낼 수는 있었으나 자기만의 읽기를 정치하게 밀고 나가는 비평적 작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끝내 지울 수 없었다.
류수연의 「통각의 회복, ‘이름’의 기원을 재구성하다」에도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두 텍스트 『레가토』와 『비자나무 숲』 가운데 후자에 대한 논의는 밀도와 설득력이 덜했으며, 전자의 논의에서도 플롯 중심의 분석에 치중한 나머지 권여선 소설이 최근 한국문학에서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지, 그의 소설에서 역사에 대한 물음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얼마나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분석적 평문은 안정된 문장과 정연한 논리를 기반으로 권여선 소설의 기존 논의와 변별되는 지점을 보여주었다. 특히 텍스트의 미덕을 풍부하게 찾아내면서도 그 약점과 아쉬운 점을 직시하는 냉정함을 보여줌으로써 향후에도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주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의 계속적인 비평적 정진을 기대하며 심사위원들은 그의 글을 수상작으로 선택했다. 수상자에게는 축하를, 그밖의 투고자에게는 격려의 응원을 보낸다.
| 김종훈 한기욱 |
평론 | 수상소감
류수연
1977년생. 인하대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묵은 숙제를 끝냈다. 그리고 시작이다.
이 순간 내겐 설렘과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다시 출발점에 서면서 마주하는 질문은 맨 처음 문학과 조우했던 그 시절의 것으로 되돌아가 있다. 15년 전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입체적인 질문으로 변모했을 뿐이다. 그것은 이제 평론가로서 첫발을 내딛은 내가 답해나갈 수많은 의문부호들의 시작이 될 것이다. 달변이 아니니 멋진 말로 포장하지 않겠다.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가진 작품을 찾아내는 것, 그 작품과 함께 올곧은 한걸음을 내딛는 것을 평론가로서 내 사명으로 삼고자 한다. 적어도 내 목소리에 책임질 줄 아는 논객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이 수상소감을 대신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학문의 길을 알려주신 최원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스승의 발자취를 쫓으며, 언젠가는 스승 앞에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다고 욕심을 부려본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한기욱 김종훈 선생님께도 감사드린다. 성실한 글로 그 선택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게으른 나를 채찍질 해준 인하대 동학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호모루덴스 세미나 팀에게 감사드린다. 이 글은 세미나에서 축적된 지난 수년의 공부에 많은 것을 빚졌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나에게 진정한 위로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세우회에도 감사드린다. 사랑하는 가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멀리 방글라데시에서 근무 중인 남편과 두 딸 아현・시현, 부모님과 동생들. 그들과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길었던 번민과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