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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혜순 金惠順
1955년생. 1979년『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함. 시집『우리들의 음화』『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한 잔의 붉은 거울』『당신의 첫』등이 있음.
탑승객
동그란 커피 동그란 수프 동그란 국수
동그란 윤회 동그란 것만 보면 속이 울렁거려
엄마의 안경알 속에서 아기가 부화한다
아기가 겨드랑이를 긁적이더니 사타구니를 긁적인다
아기의 사타구니 속에서 엄마가 하나 부화한다
거울 속에서 거울이 끝없이 거울이 부화한다
햇살 속에서 햇살이 끝없이 햇살이 부화한다
그렇게 한바퀴 거슬러 돌다 보면
당신과 내가 부둥켜안은 알이 부화한다
약병에서 알약들이 부화한다
천장에 붙은 물방울 속에서
구더기들이 부화한다 파리들이 부화한다
미끄덩거리는 올챙이가 부화한다
올챙이에서 황제개구리가 펄쩍 뛰어오른다
다음 생엔 브라만으로 태어나세요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세요
나를 속이려는 동그란 말 나를 속이려는 우주의 동그란 궤적들
내 방을 유영하는 잠의 비행선에서 내가 부화한다
잠옷을 입은 채 끌려나온 탑승자의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내가 아직 다 만들지 못한 내 유령에서 생선 아가미 냄새가 난다
잘 자라 우리 엄마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과 아가양과
엄마를 재워다오 한번 엄마는 영원히 엄마 엄마를 재워다오
동그라미는 싫어 순환하는 건 싫어 낮 다음에 밤이 싫어
동그라미 같은 세상이라는 말은 누군가 나를 속이려는 말
알 낳고 그 알 품은 여자들을 속이려는 말
밤에 갇힌 낮 낮에 갇힌 생선 생선에 갇힌 알 속에 갇힌 불면증
내가 소리친다
세상에 태어나 다시 되돌아갈 잠의 비행선을 그리던 사람이
소리친다
동그라미는 싫어 정말 싫어 이곳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싫어
동그란 국물 동그란 빗물 동그란 계란 정말 싫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동그란 그릇 다시 동그란 방 다시 동그란 거리
그릇 속의 물이 싫어
쇠나팔 속에서 울리는 동그란 소리들 싫어
동그란 몸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물감들을 틀어쥐고
가쁜 숨 몰아쉬는 사람이 소리친다
정말 싫어!
낮별
아래
피딱지 위에 눈이 내렸다
담뱃불 위에도 내렸다
은박지에 싼 점심을 먹는 모습
다 먹은 은박지를 구겨서 꽉 쥔 주먹
내 얼굴을 담은 거울을 움켜쥔 것처럼
참 우울했다
이 더러운 모퉁이 남의 구두 아래
한 층 아래 두 층 아래 층층이 마주 앉아서
통성명이나 하고 털이나 기르면서
울분을 가라앉히는 방법도 모르면서
내 유일한 시계는 목구멍밖에 없다는 듯
시간 맞춰 아무거나 집어넣으면서
변기 뚜껑을 열고 내려다보는 사람의 표정으로
늘 우리를 내려다보는 별 아래서
낮에도 꺼멓게 떠 있는 그 별들은 모른 척하면서
지구별 쓰레기를 뒤지고 팔다가 돌아가는 한평생
갑자기 불이라도 난 것처럼 문 밖으로 뛰어나가서
오줌 한줄기 빌딩 밖으로 내보내본다든지
손 씻을 때 거울 속에 나타난 눈빛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그 오묘한 별빛을 오래 보다가
끝끝내 내 숨을 밀어내는 거울을 주먹으로 구겨본다든지
그러다가도 불이 나면 어디서 뛰어내릴까 생각해본다든지
변기 위에 앉아 며칠간 확 굶어버려! 하고 생각해본다든지
창문 밖에는 금성수성목성화성 별을 단 간수들이
검은 돌덩이들처럼 하늘을 지키고 있는데
젖은 셔츠 깃 위에 눈이 또 내렸다
오늘 세번째 담뱃불 위에 눈이 내렸다
여전히 석기시대 검은 방망이를 휘두르는 별들이 떠 있는 그 아래서
눈발처럼 내려와 가만히 죽어주는
신념이 가능할까 생각해봤다
‘밖’이라는 죽어버린 은유가 떠올라서
점심때 먹고 구겨버린 은박지에 눈발 소복이 담는
그런 미소 한번 연습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