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오늘, 세계문학을 다시 읽다

 

‘세계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백년의 고독』을 중심으로

 

 

유희석 柳熙錫

문학평론가. 전남대 영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공역서로 『한 여인의 초상』(근간) 등이 있음. yoohuisok@yahoo.com

 

 

1. 말문을 열면서

 

근년 영미의 인문학계에서 ‘세계문학’ 담론이 부쩍 활발해진 데는 아스뚜리아스(Miguel Ángel Asturias, 1899~1974)의 『옥수수인간』(Hombres de maís, 1949)이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라틴아메리카의 ‘붐(Boom)소설’1) 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서사의 혁신을 이룬 붐소설을 서구의 고전과 견주면서 문학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만큼 넓어진 결과다. 하지만 세계문학 담론의 실상에 관한 한, 각국의 문학을 탐구하는 방법론으로 ‘디스턴트 리딩’을 제창한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연구방식이 말해주듯이 엄밀한 비평적 판단보다는 지식의 전지구적 축적에 골몰하는 풍토가 학계의 대세를 이룬 느낌이다.2) 각국의 문학전문가들을 동원하여 문학형식의 ‘표준해설모델’을 만들어내려는 모레띠 식의 실증적 연구는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역을 간과한 채 세계문학의 영토 확장에 치중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3)

그런 위험성을 다각도로 성찰하는 작업에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ía Márquez, 1927~)의 『백년의 고독』(Cien años de soledad, 1967)만큼 맞춤한 작품도 찾기 어려울 듯하다. ‘붐’의 숱한 문제작 가운데서 이 장편서사처럼 확실하게 지역 특유의 토속성을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사례도 드물다는 뜻에서다. 이 글은 그러한 『백년의 고독』과 대면하려는 시도이다. 논의는 먼저 붐소설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나서 『백년의 고독』으로 들어가겠다.4)결론은 이 장편이 도달한 소설적 성취의 성격과 그 현재성을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일원으로서 한국문학이 안고 있는 과제와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2. 라틴아메리카와 ‘경이로운 현실’

 

모든 위대한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양상은 작가마다 제각각인 법인데,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는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에서 시기별로 몇몇 텍스트를 선별해서 읽어봤을 뿐이지만 비판적 사실주의에서 출발한 서사의 여정이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내지는 실재)’(lo real maravilloso americano)로 향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술적 사실주의와 짝을 이루는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은 꾸바의 작가 알레호 까르띠에르(Alejo Carpentier, 1904~80)가 『이 지상의 왕국』(El Reino de Este Mundo, 1949)에 부친 서문 형식의 평문5)에서 처음 썼다. 1930년대 빠리를 근거지로 삼은 초현실주의(운동)에 가담한 바 있는 까르띠에르는 중국아랍권쏘비에뜨 연방을 차례로 둘러본 소감을 배경으로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역사 및 미()와 추()로 가득한 토착현실을 환기하면서 서구 전위주의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문학의 원료들과 그 창조적 가능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자연과 역사는 서구에서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상상력의—그가 보기에 다분히 관념적인—실험 같은 것이 전혀 필요치 않은, 마르지 않은 “신화들의 보고(寶庫)”이다. 작가의 사명은 서구의 ‘전위’로 눈을 돌리는 대신 아메리카의 바로 그 살아 있는 현실을 천착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를 상아탑주의와 다를 바 없는 인위적인공적 실험으로 규정하면서6) 그에 맞서는 개념으로 ‘바로끄’를 제시한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을 지어낸 1920년대 독일의 미술비평가 프란츠 로(Franz Roh)와도 거리를 둔다. 그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경이로운 현실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조작된 신비”에 불과한 전자가 사실상 정치적 뇌관이 제거된 예술임을 비판하는 한편,7)후자와 관련해서는 15세기에 에스빠냐 식민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맞닥뜨린, 온전히 이해할 수도 해명할 수도 없는—적어도 그런 의미에서는 식민화가 불가능한—“그 장대함과 기이함”을 부각시켰다.8)

하지만 여기서 마술적 사실주의 담론을 둘러싼 숱한 갈래의 이론들을 다룰 여유는 없다. 다만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해 서구 제국주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이성주의과학주의를 전복하는 진보적 서사로 규정하는 통념에 일정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마술적’이라는 형용사가—중국의 작가 모옌(莫言, 1955~)에게 따라붙는 허환(虛幻)적 또는 마환(魔幻)적이라는 말도 마찬가지겠지만—사실주의의 확대고양을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사실주의와의 결별 내지는 단절을 뜻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짚어둠직하다. 전자라면 한국의 평단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한 작품의 경지에 당연히 부합하는 것이며 또한 후자라 할지라도, 재현주의로서의 사실주의를 지양할 것을 고집한 민족문학의 리얼리즘론과 본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보기 어렵다.

‘마술적’이든 뭐든 그 한정사는 리얼리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어떤 속성이 이렇게 저렇게 발현되는 하나의 양태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파악도 리얼리즘을 본질화하거나 해체에만 골몰하는 일체의 언설들과의 싸움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리얼리즘의 또다른 형이상학을 만들어내기 십상이다.9) 이 땅의 리얼리즘론은 그 나름의 이론적 전진과 축적을 이룩해왔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의 실행에 근거를 둠으로써만 리얼리즘론도 이론으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꿈’이나 ‘비현실적’ 요소가 나오면 무조건 ‘마술적 사실주의’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는 평단을 신랄하게 꼬집은 라틴아메리카문학 전공자의 발언10)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작품을 긍정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 점에 대한 하나의 방증으로는, 붐소설의 진정한 계승자 가운데 한명인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이 마술적 사실주의를 형식주의적 설명틀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대목을 제시할 수도 있다.11) 물론 마술적 사실주의의 예로 거론되는—전지구적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20세기 후반—작품들의 존재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로 돌아가보자.

일종의 선언으로 제출된 까르띠에르 평문의 의의는 두 (연관된) 차원에서 좀더 엄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선언의 진정한 의의가 선언 그 자체보다는 『이 지상의 왕국』이라는 작품으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까르띠에르가 역설하고 예견한 ‘경이로운 현실’도 구전(口傳)예술의 영역과 분리될 수 없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의 ‘붐’에서 그런 영역의 소설화가 종합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그 붐의 정점에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있었다.

꾸바혁명의 기운이 주변지역으로 퍼져가는 데서 더욱 기운을 얻은 붐소설은 서구 리얼리즘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상당부분 이뤄냈다. 그리고 그런 탈피는 서구의 서사 유산을 국지적 현실에 맞춰 실험적으로 변용하고 새롭게 창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 점은 가르시아 마르께스 문학의 궤적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가령 초기작인 「죽음의 저편」(“La otra costilla de la muerte,” 1948)을 비롯해 다인칭 관점이 동원된 중편 「낙엽」(“La Hojarasca,” 1955)이나 비판적 사실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El coronel no tiene quien le escriba,” 1958)만 봐도 그가 전통적인 사실주의 양식에 짙은 토속성을 얼마나 능숙하게 담아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실험의 양상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백년의 고독』도 선행한 작품들에서 나온—돌연변이에 가까운 진화를 수반한—소설적 성과임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백년의 고독』은 어떻게 지역을 넘어서는가

 

그러한 돌연변이로서의 『백년의 고독』은 가령 에밀 졸라(Émile Zola)라면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디테일로 가득 차 있다. 이 장편은 초기값만 알면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뉴턴적 운동법칙의 세계를 확실히 초월한 것으로 보인다. 망자(亡者)도 나이를 먹는 것이 이 장편의 세계다! 물론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후안 룰포(Juan Rulfo, 1917~86)의 『뻬드로 빠라모』(Pedro Páramo, 1955)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면 이런 ‘마법’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만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명사로 통할 만큼 『백년의 고독』의 ‘초현실’이 압도적인 것도 사실이다.

다른 한편 독자 입장에서는 현실이냐 초현실이냐보다 6대에 걸친 부엔디아 일족의 일대기를 빼곡히 채운 탈현실적 사건들의 원료가 거의 예외 없이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외가이자 고향인 아라까따까(Aracataca) 및 바랑끼야(Barranguilla) 주변 지역에서 보고 들은 실제 ‘이야기’라는 점이 더 중요한 생각거리가 아닌가 싶다. 12) 그렇다면 “두서없는 농담으로라면 모를까 『백년의 고독』을 요약한다는 건 부조리하고 끔찍하게 지루”할 터라,13) 작품의 이 장편의 지역성 및 세계성과 직결되는 주제, 즉 내전(內戰)(5~9장)과 마꼰도 노동자들의 파업(10~15장)을 집중적으로 읽어보자.

내란은 작품의 첫 문장에서부터 암시되어 있다. 자유파와 보수파의 처절한 골육상쟁은 그 자체로 20세기에 제3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이념의 야만적 폭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의 뇌리에 가장 깊이 남는 인물은 단연 아우렐리아노 대령일 것이다. 물론 어릿광대 독재자 행세를 하다가 총살당하는 아르까디오도 인상적이지만 아우렐리아노 대령에 비하면 막간극에 출연한 단역에 불과하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사실적 초상(肖像)으로 그려진 대령은 처음에는 마치 전쟁의 신처럼 신화적인 영기(靈)를 뿜어내는 전사(戰士)로 구현되다가 내전의 지리멸렬한 과정 속에서 생의 창조적인 활력을 완전히 탕진한 인물로 변모한다. 그 변모가 너무도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나머지, 그의 소모적 일생이 내전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질 정도다. 말년에 그가 황금물고기를 끊임없이 만들었다 녹였다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내전의 비극적 낭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읽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내전의 사실적 실상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하고 여실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필자의 입장에서 골몰하게 되는 것은, 대령이 전장에서 돌아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의지한 “가장 오래된 기억들의 온기”(영역본 167면; 국역본 1249면)이다. 유년의 추억과 고독으로 안내하는 그런 온기 속에서 거의 모든 부엔디아 일가가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도 대령의 변모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우렐리아노 대령을 비롯해 그 기억 속에서 명멸하는 부엔디아 일가의 죽음을 응시할 때 독자는 그 기억이야말로 ‘역사’의 다른 이름임을 인식하게 된다.

기억의 문제가 처음으로 다뤄지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역병과 유사한 형태로 그려지는 3장의 집단불면증이다. 환기해야 할 점은, 이런 불면증도 인디오의 문화적 역사를 말살시킨 ‘정복’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인디오로부터 옮은 부엔디아 일가의 불면증은 식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인바, 그 증상이 단순히 잠들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불면 상태에 익숙해지면 어릴 적 추억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사물의 이름과 개념,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잊게 되어 종국에는 과거가 없는 일종의 백치 상태가”(영역본 44면; 국역본 173면) 된다.14) 이런 역병에 맞서 일가의 1세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사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그 용도를 적어놓다가 급기야 메모리카드라는 장치까지 고안해낸다.

이 ‘기억의 투쟁’은 흥미롭게도 부엔디아 집안의 연대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멜끼아데스의 ‘기적의 물약’에 의해 일단 해소되지만, 기억 상실과 정체성 말소라는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돈 끼호떼적 실험과 모험 끝에 완전한 자기망각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 1세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나 병리적 정형행동(定型行: 고등동물의 무의미한 반복행동)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2세대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삶이 말해주듯이, 기억은 고독과 향수(鄕愁)를 실존의 필연적인 조건으로 인식하는 거의 모든—“무자비한 환기력을 통해 몸뚱이를 부여받은 기억들이 외부와 단절된 방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돌아다니는”(영역본 157면; 국역본 1237면)—부엔디아 일가가 마주하는 문제인 것이다.

자유파와 보수파가 벌인 내전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근대주의의 핵심 동력인 기차가 마꼰도에 들어오면서 그전까지 있었던 기억의 문제도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는다. ‘바나나공화국’이라는 매판권력을 만들어낸 연합청과물회사(UFCO)가 철로를 따라 마꼰도로 진출한다. 미국의 거대기업인 ‘바나나 회사’가 꼴롬비아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로, 싼따 마르따(Santa Marta) 철도의 건설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 꼴롬비아는 세계 최대의 바나나 수출국이 된다. 이제 1928126일 싼따 마르따 근교 씨에나가(Ciénaga)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을 소재로 삼은 파업 에피소드가 본격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매판정부가 미국을 업고 분쇄한 파업이 “소설 전체에서 핵심을 형성하는 에피소드로 간주되지만 그게 얼마나 핵심적인지는 거의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면15) 이유는 그 사건의 의미를 이분법적 사고로 재단한 데 있을 듯하다. 마꼰도는 평화로운 마을이었으며 사망자도 없었다고 기록한 공식역사 대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살해되어 바다에 수장되었다는 집단기억의 역사라는 대립구도 말이다. 47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될 뿐 희생자의 수조차 불확실한 그 학살의 의미를 실증주의적 역사해석의 틀로 좁혀서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민중의 집단기억으로 해소할 수도 없다.16)

오히려 19세기에만 여덟차례의 내전이 발발하고 ‘천일전쟁’(1899~1902)을 거쳐 20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이른바 ‘폭력의 시대’(La Violencia, 1948~58)를 겪은 꼴롬비아적 비극의 일부인 동시에 기차로 표상되는 식민주의와 근대주의의 폭력적 후과(後果)라는 점이 파업 에피소드의 핵심이다. 부엔디아 가의 4대손이며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호세 아르까디오 쎄군도와 이후 세대인 아우렐리아노가 홀로 끈질기게 벌이는 ‘기억의 투쟁’을 읽을 때도 그런 투쟁의 의미를 국지적 맥락에서 파악하면서 동시에 그 기억의 전지구적 울림을 놓치지 않을 때 비로소 작품의 세계성이 실감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말할 것도 없이 식민주의 청산이 아직껏 완결되지 않은 동아시아, 20세기 희대의 학살극인 홀로코스트가 원죄로 남은 독일을 비롯해 남아공, 소련, 동유럽 등지에서도 성격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망각과 싸우는 기억의 역사적 투쟁은 현재진행형이지 않은가.

『백년의 고독』이 속지성(屬地性)에서 탈피해 ‘세계’와 접속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따라서 마꼰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지역과 세계의 삼투 양상도 이분법을 초월한다. 마꼰도가 꼴롬비아 내륙의 신화적 마을인 동시에 외부의 식민주의 및 발전주의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침윤되는 제3세계적 공간이듯이, 부엔디아 일가의 인물들 역시 지역 고유의 토속성과 토착적 기질을 강렬하게 구현하면서도 고독과 애욕으로 표상되는 근대인의 보편 형상을 이루고 있다. 요컨대 (신)식민주의의 내적외적 폭력과 근친 간의 애욕으로 점철된 부엔디아 일가의 가족사를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지역사로도 확대해석할 수 있게 하는 가르시아 마르께스 특유의 ‘기억의 시적 서사화’야말로 『백년의 고독』을 ‘세계문학’으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이렇게 세계와 만나는 파업 에피소드를 411개월 2일간 지속된 대홍수로 마감한 것은—서구가 제3세계에 수출한 가장 마술적인 텍스트라 할—성경의 상상력에 값하는 서사적 솜씨라 하겠거니와, 또다시 근친 간의 애욕이라는 싸이클이 변주되는 16~20장은 부엔디아 일가와 마꼰도의 몰락을 그리면서 ‘백년의 고독’이라는 서사의 시원(始原)으로 되돌아간다.

미국의 거대기업이 마꼰도에서 철수하고 1세대 우르술라를 비롯한 부엔디아 가문의 대다수가 고인이 된 상황에서 최후로 남은 인물은 아마란따 우르술라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이다. 부엔디아 일가의 최종적인 몰락을 재촉하는 것은 물론 근친상간의 유혹인바, 파국은 6대손인 아우렐리아노가 양피지에 산스크리트어로 남겨진 멜끼아데스의 부엔디아 일가—이전 세대들도 계속 시도했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실패한—백년사를 마침내 해독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해야 그 첫 문장, 현재 시점에서 과거시제를 교묘하게 미래완료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서사의 진행을 예견된 필연처럼 느껴지게 하는 첫 문장을 독자는 온전히 헤아려보게 된다.17) 또한 부엔디아 일가의 모든 이야기가 멜끼아데스의 예언서에 기록되었다는 결말의 설정을 알아차린 독자는 물론, (필자처럼) 재독, 삼독을 한 경우라도 ‘사실’로서의 역사에서 ‘허구’로서의 소설을 분리해낼 수가 없게 된다.

 

 

4. “쎄르반떼스적 전환”으로서의 『백년의 고독』

 

필자는 이같은 분리 불가의 양상이 어떤 차원의 소설적 성취로 이어지는가를 해명하는 비평 가운데 마이클 벨(Michael Bell)의 통찰에 필적할 만한 읽기를 찾기 어려웠다. 그는 모두 세차례에 걸쳐 『백년의 고독』을 거론했는데, 18)그중 단행본 저서(Gabriel García Márquez: Solitude and Solidarity)의 4장 「쎄르반떼스적 전환」(The Cervantean Turn)과 최근 논문의 결론을 소개함으로써 쟁점의 날을 세워보고자 한다.

마이클 벨에 따르면 “『백년의 고독』은 허구의 외래(外來) 역사가라는 근본적인 장치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쎄르반떼스적인 작품이다.”(Bell a, 60면) 『돈 끼호떼』에서 화자가 돈 끼호떼의 모험 이야기가 아랍인 역사학자 시데 아메떼 베넹헬리의 아랍어 작품을 에스빠냐어로 번역한 것임을 환기하고 시시때때로 그 역사가의 존재를 불러들임으로써 허구로서의 소설을 그 모험의 역사적 진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 만들 듯이,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작중 무대인 마꼰도의 외부인이자 집시인 (사실상 초현실적 인간인) 멜끼아데스를 내세워 그가 산스크리트어로 양피지에 남긴 6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따라서 소설의 허구성 자체도—독자로 하여금 근본부터 성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작품은 6대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이제까지의 가문의 내력과 자신의 출생 비밀 및 일가의 최종적인 종말을 예언하는 원고, 즉 ‘백년의 고독’의 해독과 동시에 묵시록적인 태풍이 마꼰도를 쓸어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벨의 간단치 않은 논지를 간명하게 내 식으로 풀면 “역사의 가장 단순하고 사실적인 형식인 연대기”로서의 멜끼아데스의 수고(手稿)와 “완전한 허구”인 소설은(Bell c, 188면) 마치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어서 독자가 어느 한쪽만을 『백년의 고독』으로 규정할 수 없게 한다. 여기서 독자는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문학을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좋은 장난감”으로 정의한 대목도(영역본 388면; 국역본 2265면) 떠올릴 수 있다. 『백년의 고독』을 가득 채운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바보가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더 바보가 되니, 과연 그럴듯한 정의가 아닌가. 독자가 독서과정에서 믿음과 불신 사이 어디쯤에 매달리게—또는 『돈 끼호떼』의 바로 그 싼초 빤사처럼 모든 것을 믿으면서 모든 것을 믿지 않게—되는 것도 허구일 수 없는 삶과 허구로서의 소설의 관계를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서사화한 결과일 것이다. 벨은 그 역동적 구조를 뫼비우스의 띠나 에셔(M. C. Escher)의 그림에 비유하면서, 이 순환적 미로에서 역사와 허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주의적인 태도로 부정하기보다는 양자를 신화창조적(mythopoeic) 인식19)으로 통합승화시킨 것이야말로 『백년의 고독』의 진정한 성취요 해방적 서사행위라는 취지의 평가를 내렸다(Bell b, 197면).

그렇기 때문에 『백년의 고독』은 꼬르따사르(J. Cortazar)나 보르헤스(J.L. Borges)의 작품처럼 서사적 유희(遊戱)로 느껴지지 않는다. 동시에 쎄르반떼스적 서사를 창의적으로 소화한 이 장편이20) 민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결합가능성을 최고도로 구현함으로써 독자에 대한 ‘교육’을 한층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점도 주목함직하다. 기사도문학에 심취한 나머지 모든 물상을 그런 문학의 프레임을 통해 보는 돈 끼호떼의 무수한 망상이 독자들에게 주는 ‘교육적 효과’가 그렇듯이 집시들이 들여온 신문물을 제멋대로 해석함으로써 우세를 사는 호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의 코믹한 기행(奇行)도 “우리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읽지 말아야 하는지를 일러준다는 것이다(Bell a, 62면).

그런데 『백년의 고독』을 “명백히 쎄르반떼스적인 작품”으로 규정한 벨의 논지에서 탁견은 서사형식의 상동성(相同性) 자체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쎄르반떼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 각자가 당대의 지배적인 소설양식이 안고 있는 문학적 한계를 ‘돌파’함으로써 장편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언급이 역시 두고두고 생각할 거리이다. “쎄르반떼스가 당대에 소설(fiction)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라는 발상을 활용하는 반면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자신의 시대에서 본질적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소설을 이용한다.”(Bell a, 64면)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모범소설집』(Novelas Ejemplares, 1613)에서 날카로운 사실주의적 감각을 과시하기도 한 쎄르반떼스가 당대의 서사적 우세종인 (목가적) 로맨스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사실주의 출범기에 장편소설의 새로운 경지를 선구적으로 열어젖혔다면,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현실에 소설로써 참여해야 했던 가르시아 마르께스도 사실주의 문학의 황혼기에 사실로서의 역사와 허구로서의 소설을 하나의 텍스트로 모아들인 신화창조적 상상력을 통해 소설의 종언이라는 비평가들의 진단을 낭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과 『돈 끼호떼』는 두 작가의 문제의식과 창조성을 집약하는 대표성을 띠지만 그 성취는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성질일뿐더러, 사실주의적 전작들에 대한 반동(reaction)의 산물이라는 뜻에서 비전형적인(atypical)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비전형으로서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전체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백년의 고독』에 대한 마이클 벨의 비평은 최근 평문, 즉 「가르시아 마르께스, 마술적 사실주의 그리고 세계문학」에 와서 지금 우리의 시대로 시야를 넓히는 동시에 마술적 사실주의에 대해서도 한결 명료하게 정리한다. 이 밀도 높은 평문도 다 소개할 수 없지만 결론의 요점만은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구문학에는 도구적 이성 쪽으로 기우는 문화적 경향을 내파하는 고딕적낭만적 글쓰기의 오랜 전통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술적 사실주의도 내부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우리시대 문학의 한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그는 “마법은 정말이지 일상이 될 수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도 결국 너무 쉽게 그런 일상에 이르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지만, 일상성 속에서 마법을 이뤄내는 것이야말로 문학적 상상력의 본령”이라고 역설한다. (Bell c, 193~94면. 인용자 강조.)

‘문학적 상상력의 본령’을 그렇게 정의한 벨의 진술은 확실히 사실주의에서의 현실재현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성찰하게 한다. 말의 정처(定處)가 그러하듯이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벨의 통찰을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거하는 이 실제 시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과 경이의 세계이며, 문학의 상상력도 그런 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21)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더 생각해볼 만한 벨의 논점은,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장르는 특정 민족이나 국가와 무관할뿐더러 문학형식의 창의적 혁신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아메리카의 전유물이 아니며 단일한 지역적 중심성을 갖는 것도 아니라는 말인데, 즉 ‘작품’으로 표출되는 양상에 관한 한 지역이나 민족 예외주의가 설 땅은 없다는 뜻이다. 벨의 이같은 주장이, 근대의 모든 세계문학은 언제나 특정 지역과 언어공동체에 뿌리를 둔, 적어도 그런 의미에서 세계 이전의 지방 내지는 지역 문학이라는 필자의 생각과 상치(相馳)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계성의 일종의 필수조건으로서 지역성을 내세우는 입장에서는 방점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인다면, 마이클 벨은 『이 지상의 왕국』과 『백년의 고독』을 각각 ‘post-modernist’와 ‘postmodernist’의 작품으로 규정한다.(Bell b, 197~98면) 후자의 경우 이음표를 없앰으로써 본격 모더니즘(high modernism)에서도 탈피한 작품의 면모를 더 강조한 셈이다. 이런 강조는 로런스(D.H. Lawrence)의 『무지개』(The Rainbow, 1915)를 낙관주의로, 콘래드(J. Conrad)의 『노스트로모』(Nostromo, 1904)를 비관주의로 설정하고 그 양자를 ‘지양’한 걸작으로 『백년의 고독』을 읽어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대목에서도 필자는 생각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아무튼 『백년의 고독』은 시작과 끝이 절묘하게 맞물리고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내용들도 하나의 무봉(無縫)의 텍스트로 짜여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마이클 벨이 역설한 것처럼 “그 순환적 미로에서 역사와 허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재확인하게 된다. 요컨대 내전의 그 모든 비극적인 낭비와 역병과도 같은 신식민주의의 폭력이라는, 라틴아메리카의 전형적인 지역사가 부엔디아 일가의 일화적인 삶을 통해 인화(印畵)되고 인화의 풍경을 멜끼아데스의 예언서라는 허구의 장치를 통해 드러내는 『백년의 고독』의 서사형식은 한 지역의 지역사를 소설로 녹여낸 과정의 산물이다. 이야기가 스스로의 궤적을 지워감으로써 서사를 완성하는 결말이, 마이클 벨이 역설하듯이, 단순히 서사적 유희나 재주에 머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감컨대 아우렐리아노의 해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불어닥치는 묵시록적 엔딩 자체를 다시 성찰하게 하는 멜끼아데스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의 갱생을 희구하는 열망의 시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점을 실감할수록 『백년의 고독』 전체를 감도는 어떤 기운(氣運)도 못지않게 강렬해진다. 대모(大母) 우르술라의 죽음을 계기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부엔디아 일족, 즉 에스빠냐 정복자들 후손의 고독을 그토록 멋진 ‘악몽’으로 채색한 『백년의 고독』 자체는 “진한 감동을 주고, 너무도 인간적이고 일상의 진실미가 넘치는 악단들의 음악”과는 거리가 있는, 오히려 수공으로 제작된 정교한 ‘소설기계’, 이야기의 무한 복제가 가능한 소설기계처럼 읽히는 일면도 있기 때문이다. 논법을 달리해서 표현한다면 이 장편은 ‘백년의 고독’이라기보다는 ‘백년의 소외’에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인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대의 다른 이름, 아니 연대의 필수조건이기도 한 인물들의 고독이 정형행동으로 고착됨으로써 (자기)소외의 양태를 띠고 그 양태가 작품 전체로 번지는 현상마저 서사의 마술적 매혹이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곤란하다. 그런 소외의 양태만은 멜끼아데스의 수고(手稿)라는 절세의 뒤집기 장치로도—“백년의 고독에 처해진 가계(家系)는 지구상에서 제2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최후의 계고를 통해 독자가 작품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서도—끝내 완벽하게 해독(解毒)되지 못한 요인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백년의 고독』에서 소외의 와중에도 순간순간 빛을 발하는 그 존재론적 고독을 독자는 어떻게 연대라는 이름으로 이어주고 해석해낼 수 있을까? 역사적 진실과 시적 진실 모두를 뫼비우스의 띠로 묶어냄으로써 지역문학의 세계성을 구현했다는 이 장편서사가—소설기계로서의 한계를 안은 채—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22)에 진정으로 값하는 성취이기도 하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지역현실을 통해 ‘세계문학’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5. 한국문학의 현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

 

우리가 괴테맑스적 기획으로 부르는 세계문학이란 작품 자체의 최고의 문학적 성취뿐 아니라 그런 성취를 궁극적으로 가능케 하는 문학지식인들의 초국적 연대와 교류를 지향하는 담론행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세계의 문학시장에서 여전히 위세를 잃지 않은 정전주의와 상업주의 모두에 대한 비판적 견제도 그 기획의 필수적인 내용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백년의 고독』 자체는 한 탁월한 작가의 창조성이 발휘된 유일무이의 작품이지만 동시에 붐소설로 통칭되는 20세기 중후반 라틴아메리카 장편문학의 활력이 집단적으로 분출되는 과정의 일부임을 더 강조함직하다. 그 분출의 전모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시야를 도리어 조금 넓혀 19세기 미국문학 사례와의 간략한 비교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지역문학으로서의 『백년의 고독』, 나아가 붐소설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대강이라도 추정해보고자 한다.

19세기 미국문학의 ‘르네쌍스’는 뉴잉글랜드 및 동부 연안에 뿌리를 내리고 식민모국 영국의 문화적 활력을 흡수함으로써 가능해진 업적인 데 반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는 서구의 식민주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19세기말에 이미 ‘제국’으로서의 물적 토대를 갖춘 미국이라는 또다른 식민주의팽창주의 세력의 영향하에 놓여 있었다. 20세기 후반까지 되풀이된 중남미의 독재와 내전도 결국 그런 영향을 떠나서 설명하기 힘든 현상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따라서 마샤두 지 아시스(Machado de Assis, 1839~1908)23)처럼 라틴아메리카적 사실주의 내러티브를 창안한 작가도 있었지만 19세기 중반에 식민지배자 영국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장편문학을 창출한 미국의 앵글로색슨계 문학과 대비해본다면 가르시아 마르께스, 까를로스 푸엔떼스(Carlos Fuentes),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등으로 표상되는 ‘붐소설’의 전성기는 근대 에스빠냐의 제국주의적 통치뿐 아니라 20세기 미국의 신식민주의까지 작용한 일종의 ‘지체된 중흥(中興)’으로 해석할 소지도 있다.

그럼에도 대략 19세기 후반까지 에스빠냐의 강력한 문화적 자장 아래 놓인 상태에서 식민지배자의 바로 그 언어를 통해 (신)식민주의의 예속성을 떨치고자 했던 작가들의 각고의 투쟁이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초월한 독특한 범지역적 문학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세계성을 획득한 강렬한 반식민적 지역성은 식민성 극복 과정에서 또다른 패권주의를 노출하기 일쑤였던 북미의 미국문학24)과는 확실하게 구분된다. 『백년의 고독』이 대표하는 지역과 세계의 창조적 ‘교섭’도 문화적 기억인자라 해야 할 에스빠냐어와 그 언어로 축적된 이베리아 반도의 위대한 문학유산의 창의적인 활용이 따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말인데, 복합 다인종다언어사회인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에서 식민성 극복은 (미국이 가세하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에 대한 철저한 문제제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기득권 고지를 점령한—서구 식민주의가 심어놓은 식민근성을 더 저열하게 반복재생산해온—자생적인 에스빠냐계 아메리카 중심주의(Spanish Americanism)와의 싸움은 성격상 하루아침에 끝날 성질도 아니었다.25)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 안팎의 허위의식에 대한 해체적 비판이 1950~70년대 붐소설의 주요 걸작들에서 끈질기게 이뤄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라틴아메리카 작가들 역시 근대 적응과 극복이라는 우리의 이중과제와 유사한 난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대략 5분의 4를 차지하는 기층민중과의 연대를 전제하는 그같은 난제를 염두에 둔다면 『백년의 고독』조차 비판적 판단의 여지가 있음을 적시한 셈이지만, 이쯤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 지역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를 느낀다. 어떤 면에서는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의 지역문학도 라틴아메리카 지역문학이 안고 있는 난제를—비록 국지적 성격과 특성은 다르다 할지라도—공유하기 때문이다.

19세기초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유럽문학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작가들의 움직임이 표면화될 때에도 자국만의 문학사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가령 꼴롬비아문학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라기보다는 라틴아메리카문학의 일부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근대를 지배한 중화체제와 한문의 공통성이 해체되면서 동아시아 삼국, 즉 중국한국일본의 학문장에서 발생한 가장 두드러진 공통현상 가운데 하나가 자국문학사의 확립이었다.26) 근대적 학문제도의 구상을 동반한 문학사 구축작업이 가능했다는 것은 동아시아에 축적된 전근대의 문학유산만 해도 각국마다 무척이나 풍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정한 일상언어의 공유율이 높았다는 점도 풍부한 유산의 일부임은 물론이다. 바로 이렇게 각국의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구의 학계에서는 온당하게 인정받기 어려워진 면이 있지만 동아시아의 ‘문화자본’도 결코 빈곤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쯔메 소오세끼(夏目漱石, 1867~1916) 한용운(, 1879~1944) 루 쉰(魯, 1881~1936) 같은 걸출한 문인들의 작품이 각자의 방식으로 증거하듯이 타율적 개화(開化)가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와중에도 전근대 유산의 현대적 이월(移越)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곳이 동아시아다.27) 그런 작가들을 배출한 삼국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실행에 옮긴 자국문학사 프로젝트는—“당위로서 요청되었고 또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28)으로서의 자국학 이념은—‘내이션-스테이트(nation-state)’ 만들기에서 필수불가결한 문화적 계몽사업의 일환이었고,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된 식민지배체제에 대한 민족적 대응의 표출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에 이어 내전을 거치고 분단된 우리에게는 아직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작품에 의해 뒷받침되는 자국문학사가 없다. 물론 현대 한반도에 그러한 자국문학사가 없는 것은 ‘일국(一國)’을 갈라놓은 분단 때문이다. 그렇게 갈라져 있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숱한 이산(離)을 초래한 식민지근대를 거친 분단이기에 “남과 북의 문학들이 소통할 수 있는 길도 한반도 내부뿐만 아니라 바깥의 소외된”29) 다언어 동포문학의 목소리를 통해 열릴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작품이든 담론이든 진정으로 세계적 지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같은 이질적인 목소리를 수용하는 한반도적 시각이 필수적임을 역설한 바 있다. 온갖 기형과 불구의 관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분단체제라는 온상(溫床) 자체를 혁파하는 상상력이—분단시대를 거치지 않은 나라의 ‘자국문학’과는 다른 차원의 문학에 대한 상상력이—작품으로 발산되고 축적되지 않는 한 한반도 차원의 온전한 자국문학사 성립도 요원한 일이다.

우리 앞에 놓인 그런 과업을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세계문학 담론이 펼쳐지는 현장에 한국문학을 ‘걸고’ 참여하는 일이 절실해진다.30) ‘세계문학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여하한 세계문학론에서도 불가결한바, 근대의 모든 세계문학이란 언제나 특정한 언어(들)를 공유하는 국가 내지는 지역/지방 공동체의 문학이지 않은가. 물론 그럴수록 세계와 국가의 중간항에 해당하는 동아시아 지역문학에 대한 탐구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반도적 시각의 확보 및 남과 북의 독자에게 통할 수 있는 ‘보편적 작품’의 창조도 동아시아, 특히 북한과 대만을 포괄하는 한일의 현재 문학공간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참여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을 벼리는 공부와 직결되는 일이다. 그리고 인식이 첨예해질수록 지역문학으로서의 동아시아 근대문학이 그 자체로 세계적 잠재성과 보편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도 새로이 눈뜰 수 있으리라 본다. 동아시아의 고립분산적인 지역에서 산출된 탁월한 작품을 ‘발견’하고 비평적으로 연결해주는 것도 그런 잠재성을 살리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31)

다른 한편, 근대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근대주의라는 전염병도 퍼뜨렸지만 근대가 열어준 인간해방의 지평에 대한 고뇌를 심오하게 형상화한 19세기 서구문학은 물론이고, 지역문학으로서 세계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확장한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붐소설 같은 선례도 더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맞다. 그런 의미에서 『백년의 고독』을 읽는 행위도 동아시아문학의 연대를 모색하는 비평적 성찰과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동아시아로, 동아시아에서 세계로 시야를 열고 작품을 읽는 훈련도 한국문학의 구체적인 현장으로의 복귀가 따르지 않는 한 헛수고에 그칠 공산이 크다. 어떤 분야건 오늘 바로 이곳이, 세계적 현장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에서도 그렇다.

 

 

--

1) 붐소설의 시기 설정 문제도 간단치는 않은 것 같다. 『옥수수인간』을 영예로운 서막으로 간주하는 논의는 Donald L. Shaw, “Which Was the First Novel of the Boom?” The Modern Language Review 89:2 (1994년 4월) 360~71면 참조. 붐소설 자체에 대해서는, 지면 제약으로 일일이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송병선 교수를 비롯한 국내 라틴아메리카문학 전공자들의 논저, 편저 및 논문들도 많은 참고가 되었음을 밝혀둔다.

2) ‘디스턴트 리딩’은 모레띠의 최근 저서 제목이기도 하다. Franco Moretti, Distant Reading (Verso 2013). 가치판단 대() 실제지식 운운하는 대목은 135면.

3) 모레띠의 비평에 내재한 그런 양면성 및 ‘디스턴트 리딩’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각각 졸저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창비 2007)에 실린 「근대성과 모더니즘: 『근대 서사시』의 비판적 소개」와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프랑꼬 모레띠의 발상을 중심으로」를 참조.

4) 텍스트는 그레고리 라바싸(Gregory Rabassa)의 영역본(One Hudred Years of Solitude, HarperPerennial 2006)과 조구호의 국역본(민음사 2000)으로 삼았다. 필요한 경우 영역본과 에스빠냐어 원본(Vintage Español 2003)을 대조했다. 작품 인용의 경우 괄호 안에 영역본과 두권으로 나온 조구호의 국역본 면수를 병기하지만 번역은 영역본을 주 대본으로 삼은 필자의 것이다. 영역본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5) Alejo Carpentier, “On the Marvelous Real in America”(1949), Magical Realism: Theory, History, Community, eds., Lois Parkinson Zamora and Wendy B. Faris (Duke UP 1995) 및 같은 책에 실린 까르띠에르의 후속 평문 “The Baroque and the Marvelous Real” (1975) 참조.

6) 까르띠에르와 당대 초현실주의(운동) 간의 소상한 논의는 특히 Jason Wilson, “Alejo Carpentiers Re-invention of América Latina as Real and Marvellous,” A Companion to Magical Realism, eds., Stephen M. Hart and Wen-Chin Ouyang, Tamesis 2005, 67~78면 참조.

7) Alejo Carpentier, “The Baroque and the Marvelous Real,” Magical Realism: Theory, History, Community, 102면.

8) 가르시아 마르께스 역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에서의 판타지와 예술적 창조」라는 짤막한 에쎄이에서 에스빠냐어 왕립 아카데미의 사전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카리브해 및 라틴아메리카 대륙 고유의 거대하고 기기묘묘한 자연세계를 환기하면서 카프카의 창조적 재능으로서의 판타지와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를 구분한 바 있다. 까르띠에르와 대동소이한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이 글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Fantasía y creación en América Latina y el Caribe,” http://www.ciudadseva.com/textos/teoria/opin/ggm7.htm

9) 19세기 서구의 위대한 사실주의 걸작들을 구성하는 ‘이율배반들’에 대한 해체작업을 주밀하게 수행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최근 저서 The Antinomies of Realism (Verso 2013)도 그런 싸움의 수행에 하나의 방편은 되리라 본다.

10) 송병선 「라틴아메리카문학의 수용과 문제점」, 『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과 한국문학』, 울산대출판부 2005, 36면 각주 2.

11) “경이로운 것의 이러한 존재는—소설 자체의 언어와 마찬가지로—현실에 얹어진 인공적인 부가물 또는 주입물이 아니다. 내가 그토록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말에 반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용어는 소설에서 일어나는 그러한 일들을—작품에서 그려지는 기이한 일들을(옮긴이)—라틴아메리카 민중이 자신의 삶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생겨난 하나의 문화적 경험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어떤 문학적 전략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Ariel Dorfman, Some Write to the Future, Duke UP 1991, 210면.

12)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자기 작품들을 그런 원료들의 “시적(詩的) 변형”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날한시에 도처에서 모여든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17명 아들을 비롯하여 있을 법하지 않은 작중 에피소드들이 실제 사건들을 ‘이야기’로 가공한 결과물임을 세세하게 밝힌 자서전이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바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조구호 옮김, 민음사 2007.

13) Michael Wood, García Márquez: 100 Years of Solitude, Cambridge UP 1990, 24면.

14) 신경학자들이 의미치매(semantic dementia syndrome) 증후군을 발견하기 이전에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이미 소설로써 그런 증상을 그려냈다는 주장도 문학의 예지력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백년의 고독』이 묘사하는 불면증의 임상학적 증상이 의미치매와 일치한다는 것은 집단불면증도 단순한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백년의 고독』에 그려진 집단불면증과 의미치매의 관계를 논한 ‘임상보고서’는 Katya et al, “‘The quicksand of forgetfulness’: semantic dementia in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Brain, 2009 (132), 2609~16면 참조.

15) Gerald Martin, Journeys through the Labyrinth: Latin American Fiction in the Twentieth Century, Verso 1989, 229면.

16)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온갖 문서들을 뒤졌음에도 “진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술회하면서 “그(학살—인용자) 드라마의 서사시적 균형을 잡기 위해 사망자 수를 3000명으로 잡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결국 실제 삶은 내 판단과 작업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해주었다. 불과 얼마 전, 그 비극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어느 식장에서, 연설 순서가 된 상원의원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무명 순교자 3000명의 넋을 기리는 1분 동안의 묵념을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96면) 소설이 ‘역사’를 이긴 극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이런 일화는 사실로서의 역사를 녹여낸 소설의 역사적 진실에 관한 성찰을 요구한다.

17) 소설 첫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Muchos años después, frente al pelotón de fusilamiento, el coronel Aureliano Buendía había de recordar aquella tarde remota en que su padre lo llevó a conocer el hielo.” 송병선도 3종에 이르는 이 대목의 번역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대안번역을 제시한 바 있는데(『라틴아메리카 현대문학과 한국문학』 31~33면) 간단치 않은 것 같다. 옛이야기체는 물론 예정된 필연이라는 느낌도 담아서 옮겨야 할 텐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총살집행조 앞에 섰을 때 그는 그 먼 옛날 오후를 기억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가 얼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 일단 옮겨본다. 조구호의 경우는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고 풀었다. 두가지가 걸린다. “얼음 구경”이라는 의역은 얼음을 생전 처음으로 알게 된(conocer)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경이(驚異)를 온전히 암시하지 못하고, “떠올려야 했다”는 표현도 종말을 향해 치닫는 작품 특유의 예언적 서사라는 실감을 실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한국어 번역과 관련하여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10장에서 멜끼아데스가 아우렐리아노 쎄군도에게 하는 말 중에 “백 살이 될 때까지 그 누구도 원고의 의미를 알아서는 안 되거든”이라는 대사가 있는데(국역본 1권 274면) 영역본의 오류를 반복한 오역이다. Chester S. Halka 교수가 영역본의 오류를 바로잡았듯이 ‘원고가 백년이 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의미를 알 수 없거든’으로 옮겨야 한다. Chester S. Halka,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Two Additional Translation Corrections,” Journal of Modern Literature XXIV, Fall 2000, 173~75면 참조. 아무튼 작품의 첫 문장이 멜끼아데스의 예언서의 일부임을 인식할 때, 독자는 거의 인류학적인 원경()의 시야를 확보한 상태에서 꼴롬비아의 전근대와 근대를 부엔디아 일가의 연대기로 압축하고 그 압축적 연대기를 등장인물의 플래시백으로써 제3세계의 보편적 역사로까지 승화시킨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를 좀더 확실하게 알게 된다.

18) Michael Bell, Gabriel García Márquez: Solitude and Solidarity, St. Martin Press 1993; Literature, Modernism, and Myth, Cambridge UP 1997, 195~98면; “García Márquez, magical realism and world literature,” The Cambridge Companion to Gabriel García Márquez, Cambridge UP 2010, 179~95면. 이하 본문에서 인용할 때는 각각 괄호 안에 Bell a, Bell b, Bell c로 표기하고 면수만 병기한다.

19) ‘신화창조적’이라는 단어는 Bell b를 관통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이고, 니체의 해체적 사유와 밀접히 연관된 개념이라 간단한 정리가 특히 어렵다. 여기서는 일단 ‘인간이 거하는 20세기 근대의 모든 사상적 지반(地盤)이 불확실하다는 인식에 창조적으로 상응하는 자기비판적자기성찰적 상상력’ 정도로 정리하고 벨의 비평(론)에 대한 논의는 차후 과제로 남기겠다.

20) ‘소화’의 한 양상을 짚어둔다. 가령 『돈 끼호떼』 2부 24~27장에 그려진 인형극장 에피소드와 『백년의 고독』 12장에 묘사된 영화 및 축음기 에피소드를 대비해보면 근대의 여명기와 식민지근대에 대한 두 작가의 창의적 대응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돈 끼호떼』에서는 인형극장의 재현된 상황과 실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후자를 기사도소설의 프레임으로 파악하는 돈 끼호떼의 오도된 인식이 풍자적으로 부각되면서 소설에서의 현실재현이 문제시되는 반면, 『백년의 고독』에서는 마꼰도에 유입된 신문물로서의 영화와 축음기에 대한 마꼰도 주민의 매혹과 환멸이 동시에 그려짐으로써 ‘삶다운 삶’에 대한 물음도 한결 적실해진다. 『백년의 고독』에 초점을 맞춘다면 나팔 달린 원통형 축음기에 대한 마을 주민의 건강한 반응을 더 부각시켜봄직하다. 즉 그들은 축음기가 외지인들의 선전과는 달리 “마법의 맷돌이기는커녕, 진한 감동을 주고 너무도 인간적이고 일상의 진실미가 넘치는 악단들의 음악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눈속임 도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영역본 223~24면; 국역본 2권 37~38면)

21) 실제로 이는 보르헤스의 문학을 관념으로의 도피로 규정한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가적 신념과 부합하는 진술이기도 하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에서의 판타지와 예술적 창조」의 끝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의 우리 작가들은 현실이 작가보다 더 훌륭한 작가라는 점을 가슴에 손을 얹고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운명은, 아마도 우리의 영광도, 최대한 겸손하게 현실을 묘사하는 데 있을 것이다.”

22) 괴테맑스적 기획으로서의 세계문학에 관한 논의는 백낙청 「지구화시대의 민족과 문학」,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70~86면; 졸고 「세계문학의 개념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창비 2013, 379~412면 참조.

23) 『낑까스 보르바』(Quincas Borba) 『동 까스무후』(Dom Casmurro)와 더불어 마샤두의 대표 장편에 속하는 『브라스 꾸바스의 사후 회고록』(Memórias Póstumas de Brás Cubas, 한국어판 박원복 옮김, 창비 2013)이 최근에 국내 최초로 소개된 바 있다.

24) 이에 대해서는 졸고 「세계문학의 역사적 조건에 관하여: 19세기 미국문학의 ‘르네상스’」, 『한국문학의 최전선과 세계문학』 491~521면 참조.

25) 그런 에스빠냐계 아메리카 중심주의를 작품과 연관짓는다면 1세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 이구아란의 증조부가 각각 끄리오요(에스빠냐계 부모를 둔 식민지 태생 백인)와 에스빠냐 동북부 지역의 아라곤 왕국 출신으로 설정된 면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년의 고독』에서 되풀이되는 근친상간은 인종간 혼교(miscegenation)에 대한 지배계급 끄리오요의 두려움이 발현된 비극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에 재현된 인종문제에 관한 좀더 자세한 논의는 Adellaida López-Mejía, “Race and Character in Cien años de soledad,” Theory in Action 6:1 (2013년 1월) 29~49면 참조.

26) 이에 관한 연구는 특히 류준필 『동아시아의 자국학과 자국문학사 인식』, 소명출판 2013 참조.

27) 1911년 8월에 열린 한 강연에서 일본 근대화의 실상을 파고들다가 “우리들은 일본의 장래라는 것에 대해서 아무래도 비관적으로 전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는 결론에까지 도달한 소오세끼를 키워낸 것이 동아시아의 근대요 (한문)문학이기도 했다. 『나츠메 소세키 문명론』, 황지헌 옮김, 소명출판 2004, 109~110면.

28) 류준필, 앞의 책 322면.

29) 졸고 「한국문학의 범주에 관한 단상들: 제인 정 트렌카의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들』2013년 여름호 325면.

30) ‘건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는 사행성 도박 같은 일회적 결판과는 무관한 발상이다. 오히려 한 연구자가 ‘세계문학에서 티벳문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을 ‘걸고서’—중국과 서구, 중국어와 영어가 표상하는 이중의 정치문화적 식민주의에 상시적으로 노출된—티벳어 고유의 문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세계문학의 독서현장에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각도로 숙고한 작업과 비슷한 것이다. Steven J. Venturino, “Where is Tibet in World Literature?” World Literature Today 2004년 12월호, 51~56면 참조.

31) 그러한 발견을 비평으로 실행한 최근의 좋은 예로는, 백지운 「폭력의 연쇄, 연대의 고리: 오키나와 문학의 발견」, 『역사비평』 2013년 여름호 333~58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