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데이비드 마이클스 『청부과학』, 이마고 2009

과학을 무기로 제품을 방어하라

 

 

김명진 金明振

성공회대 강사, 시민과학쎈터 운영위원 walker71@empal.com

 

 

청부과학표지마이클 만이 감독하고 알 파치노와 러쎌 크로우가 주연한 영화 「인싸이더」(1999)는 미국의 3대 메이저 담배회사 중 하나였던 B&W의 연구담당 부사장을 지낸 과학자 제프리 와이갠드의 실제 경험담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담배의 중독성을 높이는 화학첨가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과학자를 해고하는 것도 모자라 퇴직금과 건강보험 급여를 미끼로 기밀유지 계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고, 나중에는 소송 위협과 협박장 발송 같은 짓도 서슴지 않는 담배산업의 비열한 작태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대 담배회사들의 진면목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위협과 협박이 아니라 담배의 위험성을 둘러싼 공중보건 연구와 규제 과정에 대한 대응에서 좀더 여실히 드러난다. 담배회사들은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홍보산업 내지 일명‘제품방어’(product defense)산업과 연계해 이러한 연구들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규제조치를 지연시키는 전술을 개발해왔다. 담배산업이 선구적으로‘개척’한 이러한 전술은 이후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 오염물질을 배출하는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어 업계의‘표준적’대응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환경·산업보건학 교수이며 클린턴 행정부 시절 에너지부의 환경·안전·보건담당 차관보를 지낸 데이비드 마이클스(David Michaels)의 책 『청부과학』(Doubt Is Their Product, 이홍상 옮김)은 업계의 이러한 전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담배회사의 내부 문건에 나오는 문구를 살짝 바꾼 책의 원제는 그 전술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한다. 1969년에 작성된 이 문건에서 B&W의 한 간부는 “의심은 우리의 제품이다. 대중의 마음속에 존재하는‘사실의 실체’에 도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의구심의 조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수단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담배를 포함해 석면, 염화비닐, 방향족 아민, 납, 라돈, 크롬-6, 베릴륨, 디아쎄틸(인공버터향) 등의 방출이 노동자나 인근 지역주민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다룬 흥미진진한 사례연구다(이 부분은 미국 산업보건의 짧은 역사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오염산업과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제품방어산업이 규제기구를 무력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상투적인 수단을 낱낱이 보여준다. 업계의 입장에 동조하는 과학자를 동원해 특정 물질의 위험성에 대한 연구의 원자료(raw data)를 재분석함으로써 연구 자체의 문제점과 한계를 부각시키거나, 유령 학술지와 학술단체를 창립해 업계에 유리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싣게 함으로써 위험성 논란에‘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전술은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의 공중보건과 환경규제를 사실상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렸다. 저자는 권말에 실려 있는 방대한 양의 1차문헌(관련 논문이나 보고서는 물론 업계의 내부문건까지)을 분석해 증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제품방어산업의 전술이 먹혀드는 이유는 인간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역학(疫學, epidemiology) 연구 자체에 불확실성의 측면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가령 역학 연구자가 특정 공장의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한 암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인체에 독성물질을 다양한 농도로 주입하는 식의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동물실험이나 독성물질 노출 환자의 이력 추적 등 간접적으로 수집된 증거에서 결론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특히 낮은 농도의 독성물질에 장기간 노출되는 경우는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제품방어산업은 바로 이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면서, 규제의 근거로 절대적 확실성을 요구하는 자기들 입장을‘건전과학’(sound science)으로, 현존하는 최상의 근거에 기반하여 노동자나 지역주민의 건강을 지키려는 역학 연구나 규제당국의 입장을‘쓰레기과학’(junk science)으로 부르는 적반하장식 전술을 취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과학자로서 보기 드물게 솔직한 태도를 보여준다. 먼저 그는 과학에서 절대적 확실성이란 애초에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임을 시인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불확실성이 규제를 회피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못박는다. 증거 하나하나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증거들이 모여서‘증거의 가중치’에 대해 대체적인 과학적 합의를 이루었을 경우에는 독성물질에 대한 노출 규제나 사용금지의 충분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공공보건이나 식품 및 환경 사안에서 과학자나 정부당국이‘100%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식의 선전을 내세워 대중을 안심시키려 하다가 나중에 역풍을 맞는 광경이 흔한 현실에 비추어보면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사실 제품방어산업의 전술이 애초에 먹혀들게 된 것은 전문가집단이나 언론매체가 과학의 확실성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심어온 결과라는 점에서 자업자득인 면도 없지 않다. 과학자나 정책결정자가 과학이나 위험과 관련된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중요한 함의를 던져주는 대목이다.

『청부과학』은 과학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담고 있다. 과학자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로 연구를 평가해야 한다는 고전적 이상과 달리,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연구주제를 정하고 실험을 설계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모든 과정이 연구자 개인이나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업의 이해관계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 최근에는 기업의 후원을 받은 연구에서 대체로 해당 기업에 유리한 연구결과가 도출된다는 이른바‘펀딩 효과’(funding effect)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더 나아가 극소수이긴 하지만 제품방어산업과 결탁해 업계에 유리한 재분석이나 통계 처리를 거의 도맡아하는‘청부’과학자가 출현해 과학의‘타락’에 대한 탄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학의 전통적 가치규범과 윤리가 상업화에 따라 침식되는 작금의 상황에 과학자집단뿐 아니라 사회 전체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책이 던지는 중대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