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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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도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해청』 『사진리 대설』 『대청봉 수박밭』 『성에꽃 눈부처』 『밤 미시령』 등이 있음. sipyung2000@hanmail.net

 

 

 

수박

 

 

이상하다, 이번에는 수박이다. 줄기가 기어간다. 줄기가 어둠 바닥까지 기어나갔다. 그 끝은, 가끔 개의 앞발이 돌무덤을 파던 곳. 굼벵이와 나비들이 몰래 노는 곳

어둠과 볕이 가까운, 눈멀기 쉬운 경계의 도로표지판이 서 있는 앞쪽,

그곳이 이 수박밭의 끝이다.

 

문득 수박줄기는 포복을 멈췄다,

더 갈까? 순이 뒤돌아본다. 참 오래 한 일이지만 무작정 간다고 되는 법이 없는 것을 안다. 잎에 가린 뿌리 쪽이 보이지 않는다. 둥지를 틀고 머리를 감아올린다. 저쪽에서 물 들어오는 소리 들린다. 두더지가 줄기라도 물어뜯는 날엔 끝장이다. 식물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

 

수박의 눈은 멀리 뻗어나온 귀여운 줄기 끝,

줄기 밑으론 마디가 있어, 실뿌리 마디는 땅내를 맡고. 오직 수원은 저 대한민국 양평 이 수박밭이다. 거기서만 물을 대준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태양이 하늘에 있는 법. 낮의 태양에 대해서 말해 뭘할까, 그러나 수박은 태양 하나만 믿지 않는다.

그것이 제일 좋은 자율성

 

그러니까 이번에는 수박으로 태어났다,

뿌리는 깊지 않으나 표토의 모든 양분을 비로 쓸듯 가져간다, 퇴비, 죽은 벌레, 쇠똥, 계분. 수박이 좋아하는 이름들은 만나면 뒤섞인다.

이렇게 수박도 수박을 기르다 정이 들어, 수박밭은 골라지고 말문이 열린다.

이 평화 속에서 수박은 햇살을 수분에 섞어 당분을 만든다. 절묘한 기술

 

수박밭을 기웃대는 옥수수는 내년엔 수박이고 싶은 얼굴. 식물도 윤회하지만, 글쎄 아무나 수박이 되는 건 아닐 테지. 수박도 모르는 일이 있어, 내년엔 어디로 건너갈까?

그러나 이 밭은 내년에도 수박밭일 확률이 높다.

어림잡아 이 둑 너머는 옥수수밭. 내년에도 이 근처 어디서 우리는, 지금처럼 수박이든 옥수수든 황금땀방울

 

비가 올 것 같다. 주인이 삽을 들고 나온다. 수로를 낼 모양이다. 수박은 다 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수박은 늑대새끼들처럼 돌아다니며 아무데서나 사냥하고 새끼 치지 않았으니까.

눈 내리는 겨울, 우리가 어디 있는지 가끔 궁금해 출출할 때 있지만,

수박은 평범한 다년생이 아니다. 녹색의 천둥 번개를 찍으며 한여름만 살다 가는 일년초다.

 

 

 

브롱크스 장터를 간 시인

뉴욕의 P에게

 

 

한마리 날개 달린 수탉이 퍼덕이고 있었다 철망 안에 혼자 남았다 친구들은 다 팔려갔다 오늘 아침, 여럿이 나왔었다

한 남자는 신문을 접어 들고 어슬렁, 저쪽에서 다가온다 유색인종이다 앞에서 멈춘다 이 기억은 죽음이 늦어지고 있던 이미 죽은 자의 전생의 문자다

한 남자는 앞에 다가가 앉는다 수탉이다 볏은 피멍이 들고 발톱은 늙었다 추억만 남았다 그는 장터에 뭘 사러 온 게 아니었다 생명 같은 것을 살 생각은 더더욱 없다 이것은 뒤에 미소짓고 앉은 주인의 대뇌피질의 움직임

 

근육질의 날개를 덮고 있다 놈은 빤히 남자의 눈을 들여다본다 깃털이 화려하고 붉고 검다 인간보다 더 빨간 눈, 서로의 운명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별처럼 반짝인다 이건 한 남자의 기억이다 인간과 수탉은 소통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해 절망한 적이 없는 남자는 무릎을 펴고 일어나려 했다 그때 수탉은 그의 시전문 잡지를 엿본다 수탉도 영문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남자는 모르고 있다 수탉이 꾸르륵 하고 가래 소리를 냈다 마치 개가 짖으려는 듯, 그 소리는 창자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등 뒤에서 큰 영어 소리가 들렸다 저놈 주세요 수탉의 영혼이 쳐다본 마지막 말

 

남자는 십분을 남쪽으로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전철로 갈아타고 또 걸어 돌아왔다

집 안엔 방문과 냉장고와 책 따위가 서 있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받을 겨를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 어른거렸다 도시가 캄캄하다 스위치와 등은 연결되어 있다 도시는 방의 안쪽 같았다

브롱크스 장터는 흐렸다 멀리서 눈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도시가 낮아졌다 그 너머 마천루도 바다도 브롱크스 장터 너머였다 타자의 상상도 지워진다

아직도 장터의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