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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알랭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민음사 2013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문학과지성사 2013
공백과 소진: 구애의 존재론
강우성 姜于聲
서울대 영문과 교수 woosungkang@snu.ac.kr
차이의 담론인 철학은 세상의 경이로움을 표상하려는 의지에서 탄생했다. 철학은 존재하는 모든 차이들을 분별할 뿐 아니라 이 차이들의 으뜸, 가장 근원적인 차이를 사유한다. 이 근원적 차이는 환원 불가능한 개별인 동시에 보편으로 현상한다. 현대철학은 이 차이를 특이성(singularity)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특이성의 사유로서의 철학에 문학은 어떤 존재인가. 철학에 의해 때로는 수사와 은유의 영역으로, 때로는 허구의 형식으로 간주된 문학은 철학의 존재를 떠받치는 근원적 타자의 이름일까.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번역 출간된 바디우(Alain Badiou)와 들뢰즈(Gilles Deleuze)의 베케트(Samuel Beckett)론을 읽고 있자니 문득 철학과 문학의 관계가 새삼스럽다.
‘진리’와 ‘사건’의 철학자 바디우가 베케트에게서 읽어내려는 것은 긍정의 메시지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압도적 이미지로 인해 실존주의 및 부조리와 연관된 허무주의자로 오해된 베케트를 절망적 기다림의 수렁에서 건져올리려는 것이다. 베케트의 유아론(唯我論)적 인물들은 바디우가 ‘공백’과 ‘회색 암흑’이라 명명한 근대적 불모의 상황에 처해 있다. 여기서 무의식에 의해 분열되어 도달 불가능한 결핍된 욕망의 대상을 암중모색하는 근대적 주체의 위기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아니 공백과 회색 암흑은 오랜 사유의 끝에 현대철학이 마주한 근본상황과 다르지 않다. 베케트는 바디우에게 철학의 돌파구를 열어줄 것인가. 철학자 바디우는 베케트를 읽는 네가지 질문을 던진다. 존재의 진리라는 픽션, 주체의 정체성, 사건의 명명 가능성, 타자의 잠재성. 회색 암흑 속의 인간존재는 언어도 잃고 독특성도 상실한 채 이름 없는 공백으로 있기에 “의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있고” “실존하지 않는다”(『베케트에 대하여』 21면, 이하 같은 책). 그러나 상징계의 의미화를 벗어난 주체에게는 “반성 그 자체인 무언가가”(24면) 고갈되지 않고 남는다. 공백에 갇힌 코기토(Cogito). 언술행위, 수동성, 심문행위의 세 기능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베케트의 코기토적 주체는 표상을 거부하는 “아무것도 아닌 텍스트들”(34면) 위에서 고통스럽게 반복된다. 바디우가 보기에 코기토의 고문을 당하며 버티는 베케트적 주체의 돌파구는 “돌발하는 것으로서의 사건”(41면)이 질긴 “의미(작용)의 문제틀”(43면)을 깨고 “타자의 형상의 위협”(48면)으로 진입할 때 생겨난다. 이 돌파된 주체의 새로운 이름은 ‘둘’(Deux)이다. 상상계라는 촘촘한 의미의 그물망을 헤쳐 나오는 주체의 형상, 바디우가 사랑의 주체라고 본 베케트적 존재들의 이야기를 ‘실재의 글쓰기’라 부를 수 있다면, 이 “예술적 산문”(103면)이 수행하는 것은 “존재의 허구적 장소를 명명하는 일”(99면)이다. 그런데 왜 명명인가? 상징계의 법칙 안에서 언어의 가능성이 고갈된 주체에게 남은 유일한 표상이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케트적 주체가 처한 이 “명명의 빈곤함”(231면)은 바디우에게서 돌연 기쁨의 순간으로 전화한다. 왜냐하면 철학자 바디우가 베케트에서 읽고자 하는 것은 “주체를 빼거나 유예시킨 다음, 그 상태에서 존재에게 무엇이 도래하는지”(233면) 보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공백 속에서 이름만 남은 고독한 주체는 완전한 “무화의 불가능성”(236면)에 의거하여 “박탈자”(123면)로서의 타자와 만나 강탈—사랑이라는 사건—을 완수한다. 이러한 사랑의 주체 되기는 유(類)적 인류의 최종 근거이자 남성성과 여성성의 ‘성차’가 기입되는 공간이다. 바디우에게 진리가 일어나는 사건은 결국 공백과 고갈을 이겨낸 주체가 타자와 ‘둘’로서 이루는 사랑의 행위다.
프랑수아 발(François Wahl)에 따르면 바디우는 정립적인 반면 들뢰즈는 묘사적이다(알랭 바디우 『조건들』, 새물결 2006, 12면). 존재의 진리를 추구하는 바디우에 비하면 들뢰즈는 개념의 철학자라는 진단이리라. 그러나 ‘가능한 것’의 고갈 속에서 존재의 잠재적 역량을 발견하는 들뢰즈야말로 바디우보다 더 정립적이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주체는 가능한 것의 실현이라는 상징계의 사유지평 자체를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언어는 여전히 “가능한 것을 명명”(『소진된 인간』 32면, 이하 같은 책)하기에 들뢰즈의 주체는 바디우가 베케트에게서 찾는 비표상적 주체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모든 의미화를 포기”(25면)한 상태에 근접한다. 바디우가 베케트의 주체에게서 “이접적이며 단절되고 잘게 쪼개진” 언어(랑그Ⅰ)와 “목소리들의 랑그”(랑그Ⅱ, 33면)만을 찾아낸다면, 들뢰즈는 더 나아가 가능한 것이 소진된 상태의 언어, 상징계의 표상에 “어떤 중단, 구멍, 찢겨진 틈”(37면)으로 드러나는 잠재성의 언어로서의 이미지(랑그Ⅲ)를 발견한다. 들뢰즈에게 베케트가 극작가로서가 아니라 공간과 이미지를 창출하는 영상예술가로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이다. “잘 보이지도 잘 말해지지도 않는 것, 잘 보이지도 잘 들리지도 않는 것”을 활성화하는 이미지의 운동은 상징과 표상의 세계와 절연된, 아니 그 세계를 파열처럼 관통하는 일종의 물질화된 힘의 차이, 즉 “순수한 강도성”(68면)의 표현이고 베케트에게 이러한 이미지의 생산은 연극이나 산문이 아니라 “오직 텔레비전만이” “충족시킨다”(70면). 그렇다면 “실재의 가능한 클리셰들”(이정하 「옮긴이 해제」, 115면)이 가득한 ‘코기토’의 사유지평을 돌파하는 이미지 운동은 왜 꼭 ‘가능한 것’의 소진을 통하며, 어떻게 이 고갈된 가능성으로부터 잠재성의 역량이 발현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가능한 것’은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부터 “감산적 운동”(이정하, 115면)을 통해 추출된 재생산물이며 흡사 상징계의 의미효과처럼 존재를 궁극적으로 현실에 재통합하기에 해체해야 마땅한 환상이다. 따라서 사각형의 공간을 말없이 배회하는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쿼드」에 등장하는 신체들이 카메라 프레임에 잡힐 때 이미지의 운동은 “어떤 것이 스스로 실현될 가능성과, 어떤 지점이 바로 이를 실현할 가능성”(53면), 즉 사건의 유일한 가능성, 공간 자체의 잠재성을 형상화한다. 이는 의미작용의 재생산으로서의 ‘가능한 것’이 존재 현실화의 핵심 계기인 잠재성으로 변증법적 전화를 이루는 순간이 아니라, “강도적 형상이 이루어지는 중심의 잠재적 공간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는 쿼드의 경계 밖 순수 잠재성의 공간”(이정하, 134면)이 비대칭적으로 길항하면서 단절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단절의 효과인 이 순수 잠재성의 공간은 “어떤 대상도 없고 감춰진 부분도 깊이도 없는 임의의 공간”(61면)이고 “더이상 신체나 대상을 통해 실현될 필요조차 없는”(65면) 영역이며 이는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체셔 고양이처럼 신체 없는 미소의 이미지로 극화된다. 들뢰즈가 베케트의 영상예술에서 찾는 것은 가능한 것의 마지막 보루인 신체와 언어조차 소진된, 주체 없는 순수한 강도성의 공간이다.
이렇게 바디우와 들뢰즈는 베케트에게서 사랑의 주체와 이미지의 창출이라는 자신들의 철학적 과제를 추출한다. 그렇다면 ‘실재의 글쓰기’인 예술에서 진리의 사건과 이미지의 운동을 읽어내는 철학의 사유를 예술은 어떻게 봐야 할까. 『소진된 인간』을 옮긴 이정하가 탁월하게 요약하듯이, 들뢰즈 철학에서 예술은 “철학이 스스로 창조할 것을 강제하고 추동하는 강력한 외부성의 기호로”(149면) 자리한다. 이는 들뢰즈보다 바디우에게 더 적합한 진술일 수도 있다. 예술이 철학의 전화를 추동하는 영역이라면 철학의 잠재성은 예술이라는 타자와 만나는 사건을 통해서, 철학과 예술이 ‘둘’로서 이루는 사랑의 존재론으로만 구현될 것이다. 그러나 베케트가 이들 철학자들에게 진정으로 들려주고 싶은 말은 어쩌면 이들의 지난한 구애와는 달리 “내가 있는 여기, 나는 모른다, 나는 결코 모를 것이다”(『베케트에 대하여』 249면)라는 전언일지도 모르겠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문학이라는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철학의 핵심을 관통하며 일어나는 파문 때문에 생겨난다고 한 것처럼, 바디우와 들뢰즈에게도 베케트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철학의 타자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에 우리말로 한꺼번에 읽는 두 철학자의 베케트론은 각자 그들만의 사랑의 존재론이자 이미지의 인식론일 뿐, 철학의 ‘타자’조차 해체하고 유예시키는 예술가 베케트의 ‘차이’에는 여전히 눈멀어 있다. 철학의 구애는 실패하고 ‘소진’에 맞선 역자들의 노고만이 홀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