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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송종원(사회) 이번호부터 문학초점 코너를 여러 필자의 짧은 리뷰 모음이 아닌 한편의 정담(鼎談)으로 개편합니다. 형식을 바꾼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은 촌평 형식의 리뷰가 너무 전문화되는 바람에 독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또 근간의 문학비평이 비평가들 사이에서조차 소통되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었고요. 선배 비평가의 한국문학사적 감각보다는 외국이론가의 논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경향도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개편 첫회의 초대손님을 고민하다 한국문단의 대선배이자 우리 사회의 변동을 현장에서 체험하신 백낙청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백낙청 새로운 문학초점 첫회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한국문단의 일원으로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은 근래에는 작품도 많이 못 읽고 평론도 많이 못 쓰는데, 혹시 작품 안 읽는 늙은 평론가로 구경거리나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웃음)
송종원 귀한 말씀 기대합니다. 앞으로 이 코너는 강경석 평론가와 제가 고정으로 참석하면서 매회 새로운 초대손님을 모시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전회의를 통해 지난 계절에 출간된 작품 중에 소설 세권과 시집 세권을 다루기로 했습니다.
공지영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
강경석 지난해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출간된 작품 중에서 대상작을 선정했는데 먼저 다룰 작품은 공지영(孔枝泳)의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한겨레출판 2013)입니다. 비평이 너무 문단 중심으로 돌아가다보니 공지영처럼 많은 독자의 지지를 받는 작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에서 소외되곤 합니다. 독자가 선호하는 작품과 비평가가 평가하는 작품 사이에는 늘 일정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은 그 괴리가 너무 큰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크게 선호되는 작품이라면 무조건 상업주의적 대중성이라는 딱지를 붙여 평가에서 제외해버리는 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수 대중의 선택이 때로는 집합적 각성의 결과물인 경우도 있잖아요? 전작인 『도가니』(창비 2009) 때만 해도 작지 않은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2005) 같은 작품을 통해 사형제 폐지 문제 등을 다루며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해왔던 작가인 만큼 공지영의 작품은 글쓰는 목적부터 일반적인 대중소설과는 어느정도 변별점이 있지요. 독자들을 위해서도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백낙청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 중에는 기본조차 안돼 있는 작품들도 많은데 『높고 푸른 사다리』가 그건 아니란 점에서 우리가 다룸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사회적 발언 문제를 떠나서도 서술기법상으로도 굉장히 능숙한 면이 있고 표현력이라든가 장면 장면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능력은 뛰어나다고 보거든요.
강경석 그도 그렇지만 공지영은 독자들과 함께 ‘낮은 단계의 합의점’ 같은 것을 찾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문체 자체가 읽는 이에게 호소하는 톤인데다 작품의 주인공도 굉장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지요.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최저윤리’에 호소한달지. 영화 「변호인」에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마치 ‘이러면 안되는 것’ 같은 적절한 상황을 제시하고 거기에서 출발하는 거죠. 작품 속의 삽화를 예로 들면, 흥남철수 때 위험을 무릅쓰고 피난민을 배에 태우는 선장의 모습이나 북에서 신부들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생명의 존엄이라는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광주항쟁 얘기를 끌어들이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최저윤리의 한계선을 그어놓고 그것이 아직 살아 움직이는 상처이자 현재임을 환기시킵니다. 그래서 독자들도 단순히 흥밋거리를 좇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요. 다만 작품이 그 출발선으로부터 결국 어느 높이까지 다다랐느냐는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송종원 본격적으로 작품 얘기를 해본다면, 서사축에 놓인 두개의 사랑, 그러니까 소희와 요한의 세속적 사랑과 수사(修士)로서 요한이 지켜야 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대립구도가 너무 구태의연해 보였습니다. 세속적 사랑과 종교적 사랑을 대립구도로 놓고 양자택일하는 갈등이 이 시대에 얼마나 유의미한 질문인지 의심스러울뿐더러, 대립구도 자체가 공평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소희라는 여성인물을 너무 형편없이 그려서 애초부터 하느님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희가 요한에게 왜 다가왔고 왜 떠나갔는지가 도무지 납득이 안됐습니다.
백낙청 송선생이 지적한 문제점 중에 가령 소희와 요한의 사랑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는 생각은 나도 했지만, 약점의 성격에 대해서는 조금 해석이 달라요. 두가지 사랑을 매우 이분법적으로 처리했다고 하셨는데 요한은 보통사람이 아니고 수사란 말이죠. 이분법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예요. 오히려 나는 작가가 그 이분법을 얼버무려버린 것 같아요. 어떨 때는 인간의 사랑도 하느님의 명령 아니냐 하며 넘어가려고 하는데, 인간의 사랑이나 수사의 하느님에 대한 헌신이나 크게 보면 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지만 실제 작중상황에서 그 둘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결국 하나를 선택하지만, 뭔가 갈 데까지 가서 선택한 게 아니고 우연이라든가 여러 사건이 개입해서 정면의 선택을 회피하게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또 이런저런 발언을 통해 얼버무리는 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단적인 예로, 나중에 요한이 미국에 갔을 때 어느정도 마음이 정리된 뒤에 혼자 걷고 있는데 ‘요한, 요한’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죠.(359면) 뒤돌아보니까 아무도 없었는데 그 목소리는 할머니 목소리 같기도 하고 미카엘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안젤로 목소리 같기도 한데 그에 앞서 소희의 목소리 같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소희의 목소리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성격이 달라요. 그렇게 섞어놓으면 안된다는 거지요. 소희라는 인물의 형상화에 대해서도 낮게 평가하셨는데, 작가가 소희를 그냥 미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형편없는 면을 지녔다는 걸 독자가 충분히 알도록 해준 건 작품의 성과라고 봐요. 다만 매력적이지만 일종의 공주병도 있는 복잡한 인물을 시종 냉정하게 그려놨다기보다는 작가가 좀 왔다 갔다 하지 않았나. 사실 만약에 우연적인 사건들이 개입하지 않아서 요한이 소희를 선택했더라면 상당히 비참해졌을 거예요. 원래의 서원(誓願)을 배반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있지만 두사람이 결코 해로할 수 없지 않았을까 해요. 하여간 비극적인 결말로 가든 하늘의 은총으로 비극을 피하게 되든, 문제를 끝까지 파고든 것 같지는 않아요.
강경석 소희도 왔다 갔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작품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면이 있습니다. 수도원이라는 배경을 구축하는 1부의 장면들은 상당히 실감나서 기대를 갖게 만드는데 미카엘과 안젤로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부터 멜로드라마 공식으로 빠져버려요. 거기가 변곡점이 되면서 신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사회・역사적인 맥락으로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봅니다. 소희라는 인물은 아마도 작가의 숨은 분신일 텐데 그 인물이 갈팡질팡하니까 작품 전체 구조도 그 길을 따라간 게 아닌지요.
송종원 두가지 정도 더 말할게요. 우선 작품에 놓인 사랑의 구도가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지적했던 거는, 중요히 다룰 만한 문제들을 배경으로 둔 채 도식적인 사랑의 대립구도만을 집중해서 다룬 점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령 미카엘 수사의 형상은 정교분리 담론의 영향하에 정치적인 것을 억압하도록 요구받는 우리 사회의 종교인의 삶을 성찰할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이 문제의 시의성에는 별 이견이 없으실 거라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이 인물의 서사를 돌연한 죽음으로 처리해버리죠. 또한 후반부에 다뤄지는, 해방 이후와 6・25 때 겪게 되는 종교와 이념 사이의 갈등 역시 우리 사회의 종교가 어떠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이념성을 적대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는지를 되짚어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겠다 싶었는데, 그 부분 역시 깊이있게 다뤄지지 않아요. 소희와 요한 사이의 설득력 없는 사랑의 갈등 대신에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이 왜 대립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는지를 좀더 파고들었다면 훨씬 좋았을 거 같아요.
대중이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최근 우리 사회에 횡행한 힐링 담론 열풍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 있어요. 실제로 몇몇 종교인이 힐링 담론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담론은 고통받는 개인들로 하여금 부여받은 자신의 위치가 어떤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인가를 들여다보게 하기보다는 그 고통을 개인의 심성을 다스리는 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비슷한 문제가 이 소설에서도 보여요. 소설에서 그려지는 고통의 끝에는 늘 ‘오, 주여 왜’라는 단말마가 따릅니다. 그 말이 쓰이는 순간 운명론의 분위기가 소설을 덮칩니다. 그 고통을 더이상 사고의 대상으로 대하지 않는 태도가 발생하는 거죠.
백낙청 지금 송선생이 말한 그런 문제는 황정은의 작품과 대비해보면 상당히 재밌을 것 같아요. 혹시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김두식・황정은 진행, 제33회)에서 저자를 초대해서 이야기 나눈 것 들어보셨나요? 황정은 소설 얘기도 뒤에 하겠지만, 마리너스 수사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한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거기에 대해 황정은이 약간의 이의제기를 해요. 그게 송선생이 말하는 ‘힐링 담론’으로 갈 우려를 넌지시 암시한 셈이죠. 황정은 작품하고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거든요. ‘왜? 주여 도대체 왜?’라는 『욥기』의 유명한 질문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답해버린 느낌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미카엘의 예수와 장상(長上)들의 교회 사이의 갈등 문제도 미카엘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더는 깊이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아요.
백민석 소설집 『혀끝의 남자』
강경석 이쯤에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합니다. 백민석(白旻石)이 절필 10년 만에 문단에 복귀했습니다. 이른바 90년대 ‘신세대문학’의 기수 중 한 사람으로 문제적인 작가였죠. 그가 과거에 발표한 작품 일곱편을 개작하고 새로 쓴 두편을 앞뒤에 배치해 단편집 『혀끝의 남자』(문학과지성사 2013)를 출간했습니다. 우선은 전에 즐겨 쓰던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社)’ 같은 모티프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폭력의 기원」 같은 수록작은 제목조차 바뀌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이 작품들을 모두 신작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작가 스스로 말했을 정도예요. 아마 백민석 문학의 새로운 이정표이거나 준비단계를 보여주는 소설집인 듯합니다. 따라서 소설집 자체의 완성도를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작품들 안에서 어떤 싹이 지금 새롭게 눈뜨고 있는지도 토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백낙청 예, 충분히 점검해볼 가치가 있지요. 그런데 작품 자체의 성취가 크게 두드러진 것 같진 않아요. 신작인 「혀끝의 남자」도 그렇게 성공적인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서두에 나오는 “혀끝을 걷고 있었다”라는 표현도 일종의 의도적 비문인데, 작가가 예전에도 일반독자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나 문장을 태연하게 구사하는 걸로 너무 재미를 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지요. 개작과정의 자세한 내용은 강경석씨 같은 전문가가 짚어주실 일인데, ‘절골 이야기’의 경우 제목이 원래 「기원: 작은 절골」이었고 이번에 새로 내면서 「폭력의 기원: 작은 절골에서」로 고쳤어요. 내용을 보면 다른 작품에서처럼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라는 장치가 없어졌고 전반적으로 문장도 많이 쳐내서 읽기가 더 좋아졌다고 보는데, 다른 한편 오히려 관념화된 면도 있어요. 그러니까 절골이란 게 기원은 기원인데, 폭력의 기원이기도 하지만 꼭 폭력만의 기원은 아닌 거죠. 그런데 이걸 ‘폭력의 기원’이라 못박아버리니까 폭력이라는 주제 중심으로 단순화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 같은 장치가 없어지면서 어떤 작품은 사실주의 소설하고 별 차이가 없게 되었어요. 가령 「신데렐라 게임을 아시나요?」는 사실주의적 소품으로 읽어도 꽤 매력있는 작품이에요. 그런데 어떤 작품은 기왕에 사실주의에 접근하려면 아예 사실주의적 기율에 더 충실한 작품을 쓰지 그랬나 싶은 게 있어요. 「재채기」 같은 작품은 상당히 재밌었어요. 부채정리 담당자로서의 행각이 실감나고 우리 사회에 중요한 계급문제를 환기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자의 집 앞에만 가면 재채기가 나온다는 걸 나중에 그 여자의 아버지가 경찰서장으로서 옛날에 최루탄 시위진압을 했다는 사실에 갖다붙이는데 그건 좀 억지같이 느껴져요. 작품 전체가 아예 환상적으로 진행되면 문제가 안될 테지만요. 「일천구백팔십년대식 바리케이드」 같은 작품은 환상의 이용이 처음부터 드러나서 그런 문제점은 없지만 썩 감동적이라거나 80년대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를 수행하는 작품이라기에는 좀 뻔한 알레고리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백민석이 문단에 복귀한 것을 나도 진심으로 환영하고 앞으로 더 좋은 작품 쓰기를 바라는데 이 작품집 자체로는 아직 성이 안 찬다고 말해야겠어요.
송종원 백민석 하면 누구보다 장치를 잘 사용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귀환하기 이전 백민석의 장치는 ‘엽기’로 기억됩니다. ‘엽기’라는 장치를 통해 계급적 적대나 분노 같은 것을 잘 표출했고, 당시 한국사회 중산층의 비정상성을 고발하는 데도 유효하게 사용했죠. 물론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하위문화적 요소에 노출이 적었던 사람들에게 접근성이 너무 떨어져서 장치의 낯섦에만 집중하게 만든 면도 있죠. 그래서 비현실적이고 과격한 언어라고 오해를 부르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러한 부작용까지도 각인의 효과 내지 인지적 충격의 요소로 보자면 꽤나 성공적인 장치였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백민석이 착란과 기억술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돌아왔네요. 좀 전에 백선생님께서 사실주의적인 접근으로 봤을 때 이해 가능한 면모와 벗어난 면모를 짚어주셨는데, 그 벗어난 지점을 저는 기억술이 발생시킨 ‘시적 사실’로 보았습니다. 기억술이라는 것이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일종의 착각이죠.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을 불현듯 거리감을 지운 채 밀착된 사건이나 존재처럼 여기는 태도니까요. 그런데 이 착각이 은유적 언어공간을 열면서 시간의 축적 속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어떤 진실의 열림을 가능하게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시라는 장르가 자주 활용하는 기술이고요. 화자의 진술이나 인물의 생각이 때때로 뜬금없기도 하고 또 때때로 모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시간적 두께를 지닌 역사적 시공간을 환기시키는 면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기억술이라는 장치의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도 조금 있습니다. 가령 「일천구백팔십년대식 바리케이드」라는 작품에서 공장지대, 바리케이드, 노동자 등등의 형상을 떠올리고 마주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 환기가 지금 이 시점에서 너무 수월하게 작동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80년대적인 노동운동의 진지함과 무거움을 지금 이 시공간에서 마주하려면 어떤 변형이나 장애가 발생해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면모가 없다는 말이에요.
강경석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평가받을 만하다면 그것은 엽기적이거나 하위문화적인 요소를 작품에 도입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런 작법 자체의 허위성조차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작가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 같은 장편소설에서만 보더라도 자신이 억지로 깨워져 불러들여진 괴물이라는 주인공의 자각이 선명했거든요. 요즘 소설들이 ‘재현의 재현’이란 얘기가 있는데, 백민석이야말로 이런 작법에 몰두했던 선두주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재현의 재현’이라는 스크린에 둘러싸여 꼼짝없이 갇혀버린 존재라는 자의식이 있었다는 것,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앞에서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의 사실주의적 매력에 대한 얘기가 나왔지만 실은 여기에 등장하는 서점 공간과 그 옆 빌딩의 황태자들의 생태만 보더라도 알레고리적 요소가 다분합니다. 「재채기」의 결말도 끝내 환상이랄까 미스터리로 남지요. 이것이 사실주의와 환상 둘 중의 하나를 확실히 선택하지 않은 어정쩡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모두가 ‘재현의 재현’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자연스런 귀결로 보입니다. 오히려 주목해볼 점은, 전에는 궁벽한 하위문화 소재를 활용하는 ‘재현의 재현’ 전략으로 복잡하고 우회적이었다면, 신작인 「혀끝의 남자」만 해도 세계의 비참상이랄까 하는 문제를 차분한 직설화법의 스케치로 보여주고 있거든요. 예정된 깨달음에 도달하는 흔한 인도여행담과 달리 작품의 주인공이 결국 발견한 것은 자신이 “하고픈 말, 해야 할 말” 그리고 “병든 기억”이라는 겁니다.
송종원 이전에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다가 「혀끝의 남자」에 와서 세계의 비참상을 직접화법으로 스케치하고 있다는 강선생님의 분석에는 동의가 되지 않아요. 우회와 직접이라는 변화와는 뉘앙스가 좀 다르긴 하지만 제가 보기엔 확실한 의도를 밀어붙이는 경향에서 모호하기는 하나 다소 여유가 생긴 쪽으로의 변화로 보이거든요. 엽기라는 장치는 우회의 도구가 아니라 강도를 지닌 직접화법에 가깝다는 거죠. 「혀끝의 남자」에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어요. 강선생님이 언급하신 “병든 기억”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의 장면인데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인 스님이 꼭 무언가를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건네자 주인공과 스님이 인상들을 늘어놓으며 소통을 하는 장면(27~28면)이 그것이에요. 왜 기억하는지를 모르나 자신에게 엄습한 인상들을 말하는 그 방식이 꼭 『혀끝의 남자』에 실린 작품들을 창작한 방법의 일종이라는 판단이 들더라고요.
「항구적이며 정당하고 포괄적인 평화」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어요. 백민석이 워낙 방법이 승한 작가이다보니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좀 소홀히 여겨지는 면도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 착란(錯亂)처럼 마주하는 전쟁의 장면은 한국사회의 분단문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요.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나 오히려 현실에서나 문학에서조차 잘 말해지지 않는 이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 일차적으로 호감이 갔습니다. 착란의 순간 인물들이 마비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장면은 억압된 분단문제의 강도를 재치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여요. 이런 식의 생각이 확장되다보니 「폭력의 기원」에서 아이들이 펼치는 전쟁장면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더라고요. 인간이 가진 원초적 공격성 내지 폭력성을 암시한다는 것으로도 보이지만 그것이 한국이 겪은 전쟁의 기억을 암시한다는 분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강경석 전자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지만 후자는 일종의 병정놀이가 폭력의 심리로 몰입해 들어가는 순간을 짧게 포착한 소품 정도 아닐까요?
송종원 확대해석한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대통령이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지요. 통일조차 경제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를 보여준 말일 텐데, 분단체제로 인해 삶의 많은 부분이 구성되는 면이 있는 데 반해 우리 문학은 그 문제를 덜 의식하는 편인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이런 통일대박론에 대항할 만한 적절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도 같고요. 앞으로 누군가가 이 작업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해봅니다.
황정은 장편 『야만적인 앨리스씨』
송종원 다음으로 황정은(黃貞殷)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황정은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익히 알고 계실 겁니다. 단편이면 단편, 장편이면 장편, 독특한 스타일로 주목을 받고 있죠. 비평적으로 합의된 용어는 아니지만 공공연하게 ‘황정은식 대화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고요. 가령 ‘대화가 시적이다’라는 인상비평은 많은데, 황정은의 문체를 설득력있게 풀어준 적절한 분석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자리에서 두분이 이런 주제를 다뤄주시면 어떨까 싶네요.
강경석 전체적으로 감명 깊게 읽었는데, 우선 한두가지를 확인하고 싶어요. 작품의 배경이 고모리라는 도시 근교 농촌이지요. 실제로도 고모리라는 동네들이 종종 있습니다. 작품에 오래된 무덤(古墓)과 관련된 지명유래가 나오지만 사실 ‘고모’는 곰입니다. 곰마을인 거죠. 특히 이 작품에 나오는 고물상집 아들이 ‘고미’예요. 웅녀(熊女)신화에서처럼 고모리는 아직 인간에 도달하지 못한 짐승의 상태, 야만의 장소인 셈입니다. 우리에 갇힌 개나 길에서 죽은 개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암시지요. 다음으로 시점(視點) 문제인데, 이 소설은 1인칭이지만 3인칭처럼 읽힙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주어 ‘나’가 세번밖에 등장하지 않아요. 주어가 앨리시어였다가 ‘나’였다가 하는데 가만 보면 ‘나’가 앨리시어죠. ‘나’가 앨리시어를 들락날락합니다. 자신을 객관화해 지켜보고 있다는 거죠. 그리고 작품에서 가장 실감나게 묘사되는 부분은 대개 폭력적인 상황입니다. 주인공이 어머니의 폭력 아래 느끼는 공포와 분노가 손에 닿을 듯 선해요. 그런데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그렇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폭력 때문으로 설명됩니다. 자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성장한 어머니가 나이 많고 무력한 그러니까 자기 아버지와 정반대인 남편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똑같이 폭력을 행사하는 거죠. 종합하면 주인공 앨리시어가 자기 안의 분노나 공포와의 대면을 통해 성장기를 반추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성장기의 분노나 공포를 자기 소설의 질료로 삼았던 작가 자신의 소설적 성찰이기도 할 것이고요.
백낙청 지금 몇가지 의문점을 지적하셨는데 사실 이 작품은 의문점투성이예요. 딱히 답도 안 주지요. 시점 이야기를 하셨는데 사실 첫 문장 “내 이름은 앨리시어”를 보면 분명히 일인칭 화자의 시점이에요. 하지만 읽다보면 일인칭 서술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계속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하다가, 나중에 잠시 ‘나’라는 말이 나올 때 ‘어, 이게 일인칭이었네’ 하게 되지요. 앨리시어라는 이름도 그래요. 여장 부랑자니까 이름도 여자 이름을 쓸 수 있지만 마치 옛날에도 앨리시어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단 말이에요. 게다가 책 제목에는 앨리시어가 아니고 앨리스로 나오는데 영어로 같은 이름이긴 해요.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데 아마 계속 앨리스라고 부르면 그 연상이 너무 강해서 쓸데없는 해석을 유발할까봐 앨리시어로 바꿨는지도 모르지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아니라 야만적인 나라의 앨리스, 이런 취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왜 이름도 앨리시어냐는 의문이 있죠. 게다가 “그대는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표현이 거듭 나오는데 ‘그대’가 누군지도 끝내 모호하지요. 첫 대목에서 “여장 부랑자의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고 그대는 얼굴을 찡그릴 것이다”라고 했으니 그냥 평범한 독자를 ‘그대’라고 한 것 같기도 해요.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그대는 어디에 있나./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고 해요.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 이미 기록한 사람은 황정은이죠. 아무튼 이 그대가 누군데 자꾸 그대 그대 하는가,(웃음) 이것도 의문점이고요. 그리고 앨리시어나 어머니의 폭력성도 한편으로는 설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설명을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아서 ‘씨발년’이 되었다는 심리학적인 설명이 가능한가 하면, 동시에 앨리시어는 그런 상담전문가식 설명 자체를 웃긴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냥 ‘씨발년’과 ‘씨발됨’이라는 현실이 있을 뿐이지요. 이런 의문점이랄까 불확실성이랄까, 이런 것투성이예요 이 작품은. 나는 그게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봐요. 김소연의 「모른다」라는 시에 “아는 것을 쓰는 것은/시가 아니므로”라는 구절이 있는데, 가령 공지영 소설이나 백민석 소설은 상당부분 아는 걸 쓰고 있어요. 반면에 황정은의 이 작품은 모르는 것을 탐구해가는 작품 같아서 그 점을 나는 ‘시적’이라고 생각하지요.
송종원 시점의 문제는 백선생님이 잘 설명해주신 거 같고요. 고모리의 경우 전 ‘소돔과 고모라’에서 고모라의 변형으로 읽었는데, 강선생님의 해석도 재미있네요. 백선생님께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이야기하셨는데, 그 설명은 황정은의 문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황정은의 문장은 특히 대화에서 잘 드러나는데, 늘 덜 채워져 있어요. 이걸 시적인 압축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던데, 전 그보다는 말이 되지 못한 침묵이 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욕설도 그래요. 그것도 일종의 말이 되지 못한 비명이면서 해소가 되지 못한 분노죠.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의 언어로 풍부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체험을 하고 있어서 말의 궁핍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형상들이에요. 때문에 그 사람들의 말을 누군가 좀더 귀 기울여 들어주고 때론 대신 채워줄 수 있는 자리가 요구되는 것 같거든요. 그 요구의 자리에 소설에서 계속 호명되는 ‘그대’가 놓인 게 아닌가 생각해요.
강경석 여러가지 의문점이 말 그대로 모호하고 모순적인 것만은 아닌 듯해요. 다 읽고 나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느낌보다는 공감이 된다는 쪽으로 귀결이 되니까요. 논리적으론 모순일지라도 감각적으론 성립하는 세계인데 문학작품에서라면 전혀 문제될 게 없지요. ‘그대’가 누구든 이 작품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작업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송선생님 말씀이 중요한데,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누군가들, 이를테면 고모리 사람들의 이야기도 누군가 기록하고 들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항의 같은 것이 호소력있게 전달되는 것 같아요.
백낙청 그렇다고 그런 비참하고 비루한 현실에 대해 말해주는 게 사람들의 사회적 양심에 호소하는 식은 전혀 아니지요. 그러는 행위 자체도 우습게 보는 면이 있어요. 어찌 보면 이 작품의 의도를 첫 장면에서 분명하게 밝혔죠. 내 주변에 오면 불쾌하고 냄새나고 찡그릴 것이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8면)라고 했는데, 작품 전체로서도 독자를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랄 수 있어요. 그런데 불쾌하고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재밌게 읽도록 만드는 게 놀라운 이야기 솜씨고, 또 하나는 엘리시어가 굉장히 폭력적이면서도 사실은 따뜻한 데가 있어요. 특히 동생과의 관계가 그런데, 동생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고서 다시 읽으니까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그런 따스함이 황정은 작품의 또다른 강점 같아요.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도 그렇고, 실은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2년 봄호~여름호)보다 나중에 씌어진 『소라나나나기』(『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2013년 봄호)도 그렇지요. 『소라나나나기』에서는 그게 동성애적인 감성하고 직결돼요. 나기와 나나가 굉장히 따뜻한 관계인데,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오라버니하고 누이동생 사이 같은 관계만은 아니잖아요. 나나는 사실 나기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나기가 동성애자란 말이에요. 그래서 둘의 이성애적 관계가 성립이 안된 거지요. 어쨌든 황정은 소설의 따뜻함에는 이성간의 격정적인 사랑, 이런 게 배제된 어떤 특징이 있어요.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동생하고의 관계가 있고요. 『백의 그림자』에서는 은교하고 무제가 연인간인데, 거기도 뭔가 오라버니하고 오누이 같은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잖아요?
강경석 『백의 그림자』도 그렇지만 갈등은 언제나 가족관계 내에서 수직적으로 유전하는데, 해법은 항상 동기간이나 친구 사이의 우애로 수평적이에요. 흔히 보는 가족로망스로 빠지지도 않고요. 이 작품에서도 동생이나 고미라는 친구가 중요합니다. 고미가 부수적인 역할만 하다가 어느덧 사라져버린 건 좀 아쉽지만 어쨌든 수평적 우애라는 요소로 작품을 끝까지 견인한 뒤 더 많은 불특정의 ‘그대’들에게 말을 걸면서 작품을 맺는 방식은 작가의 체득이지요. 다만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처음부터 예정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좀 있어요. 고모리의 폭력이라는 것이 생래적인 조건처럼 나오잖아요? 어른은 하나같이 야만적이고 어린이는 모두 피해자인 것도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백낙청 꼭 그렇지는 않죠. 학교에서 동생 공책을 찢어버리는 여자애라거나, 그러니까 아이들 간에도 가해, 피해 그런 게 벌어지고 있죠.
송종원 앞서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황정은의 소설에 동성애적 관계가 종종 나타나는 것도 주목해볼 지점이에요. 근간에 문단에서 회자되는 소설들 중에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거나 일상의 언어에 잠식해 있는 성의 정치성을 의식하고 있는 작품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황정은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달라요.
백낙청 사회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로서의 동성애를 떠나서, 동성애자들에게는 대부분의 이성애자가 갖지 못하는 감수성이 있잖아요. 작가의 경우는 본인이 동성애냐 이성애냐를 떠나서 남들이 갖지 못한 독특한 감성을 가졌을 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 아니겠어요?
김소연 시집 『수학자의 아침』
강경석 다음은 김소연(金素延)의 『수학자의 아침』(문학과지성사 2013)인데요. 이 시집의 1부를 검토해보면 용산참사, 쌍용자동차 분규, 제주해군기지 논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느낀 소회가 담겨 있어요. 그것이 서시인 「그늘」의 첫 행 “벚나무는 천 개의 눈을 뜨네”에서와 같이 집합적 눈뜸으로 표현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이 2부에서는 타자와의 연대 가능성/불가능성에 대한 탐문으로 나아간 것 같고 3부는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옮긴 경우죠. 4부는 특이하게도 딱 두편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가 변곡점입니다. 타자와의 연대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중지되면서 5부가 폭발합니다. 뒤에서 검토할 『무제시편』 뺨치게 활달해져요. 나와 타자 사이뿐 아니라 국경조차 시시로 넘나들지요. 표제작의 수학자가 울퉁불퉁한 데 없는 점・선・면의 세계를 사는 이상주의자 같다고 할까요? 설령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을지라도 지금은 더 많은 이상주의자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항변으로도 읽힙니다. 시인의 자기변모 과정이 시와 정치라는 맥락의 계통 발생을 압축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시사점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송종원 근간의 시비평들은 시집의 배치를 적극적으로 읽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강선생님께서 좋은 시도를 한 거로 보여요. 한데 그 세부 내용이 맞는지는 의문입니다. 가령 표제작을 읽는 방식에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수학자라는 말과 작품 속에 사용된 수학적 표현을 가지고 이상주의자를 연상하신 거 같은데, 제가 보기에 이 시는 그냥 좀 낙담한 자 내지는 무언가를 포기한 자가 마주하게 되는 선명한 심정을 재치있는 언어로 표현한 시입니다. 포기 속에 자신의 삶의 선명한 뼈를 본 것이라고나 할까요. 삶의 시작점을 은유하는 아침을 맞이하면서 화자는 돌연 죽겠다고 선언하죠. 그러자 생각지 못했던 자신의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수학적 단정함과는 무관한 생의 감각이 미세하게 살아나고요. 그 아이러니함을 위트 있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죠.
백낙청 1부에서 5부까지 가면서 어떤 식의 진행이 있다는 지적 자체에는 동의하시는 거예요?
송종원 글쎄요. 제가 1부에서 5부까지의 진행을 적극적으로 그려보지는 않아서……
백낙청 나도 이상주의자라는 말에는 의문이 들어요. 그런데 뭐라고 짚기는 어려운데, 김소연 시집에 어떤 진행이 있는 것 같긴 해요. 그게 매력의 일부 같아요. 아무튼 「수학자의 아침」에 대해서는 두분의 입장이 다른 거 같은데, 두분 이야기를 더 듣고 싶군요.
강경석 「수학자의 아침」을 이상주의자의 탄생으로 읽는다는 건 일종의 비유에 불과하니까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 시에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라는 구절이나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이런 얘기가 있잖아요. 원주율이라는 것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수학적 가상이죠. 그렇다고 “온전한 원주율”을 꿈꾸는 것조차 포기할 이유는 없다는 거고, 수록작 중엔 「오, 바틀비」라는 시도 있어요. 멜빌(H. Melville)의 필경사 바틀비가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의 주인공이듯이, 현실이라는 범주 바깥에서 좀더 급진적이고 순수한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꺼내본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 너머로의 눈뜸이 집합적인 형상을 띠고 있다는 게 중요하고요.
송종원 저는 이 시집이 두가지 행위로 읽혔어요. 유서를 쓰는 행위와 안부를 묻는 행위가 그것인데요. 흥미롭게도 요 근래 대자보로 많은 사람들이 타자와 이 사회의 안녕에 대해 묻는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사건도 있었죠. 그 사건과 이 시집이 지닌 태도에 공유되는 점도 있습니다. 시집의 초반부에는 어떤 고독감 내지는 절망감에 마치 유서를 쓰는 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시들이 많이 보여요. “유서”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자살을 암시하는 뛰어내린다는 표현이 쓰이기도 하죠. 초반부에는 저 행위와 관련한 심정이 좀 막연한 면이 없지 않는데, 시집을 죽 읽어나가면 곳곳에 암시된 죽음에 꽤 다층적인 의미가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삶이 파탄난 비극적 현장을 돌아다니는 시편이 중간중간에 있죠. 용산, 강정, 평택 등등이 그곳일 텐데, 그 현장에서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에 휩싸이면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하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아요. 또 이렇게 누군가의 삶이 망가져야 유지되는 사회라면 그 안에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되물으며 죽음을 떠올리는 시인이 보이는 것도 같고요. 덧붙여 나와 공존하는 다른 사람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한다면 저항의 의미로서 나의 삶을 적극적으로 파업하겠다는 의지도 발견할 수 있죠. 삶의 파업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할까요.
백낙청 처음에 「수학자의 아침」을 두고서 삶을 놓아버린 수학자를 이야기하실 땐 나는내심 동의를 안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말씀은, 그냥 삶을 놓아버린 게 아니라 평범한 삶, 통상적인 삶을 놓으면서 뭔가 삶의 일부로서 죽음까지도 전복하라는 적극적인 자세라는 거지요?
송종원 그렇지요.
백낙청 그 말이 훨씬 더 정확한 것 같군요. 그리고 평택이니 용산이니 이야기가 나왔는데, 「주동자」라는 시를 보면 용산이나 평택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사회적 저항의 의지도 분명히 느껴져요. 가령,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나는 장미의 편입니다”라든지 “나는 절규의 편이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라는 대목도 그렇고요. 그래서 수학자도 “잠깐만 죽을게” 같은 대목이 그냥 상황도피 하겠단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키워드로 말하자면 어찌 보면 시인 자신이 「시인의 말」에서 두개의 키워드를 제시한 셈이에요. “애도를 멎게 하는/자장가가 되고 싶다”라는 딱 두줄인데, 애도 자체가 슬픔을 멎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도할 거리가 너무나 많은 세상, 그런 세상에서 의식을 마비시켜서 애도를 멈추게 하는 게 아니고 진정한 노래로 애도하고 잠재우고 싶다, 그런 뜻이라면 ‘이상주의자’라는 말은 안 쓰더라도, 한편으로 이 세상에 애도할 일들을 던져주면서 뭔가 그걸 넘어서는 길을 찾아가는……
송종원 「여행자」를 보면 시인이 찾아가는 길이 보이는 거 같아요. 삶이 불가능할 법한 현실의 극지를 일부러 찾아서 돌아다니는 듯한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죠. 그 극지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안부, 이게 시인이 하고픈 말이 아닐까 합니다.
강경석 「여행자」가 2부에 있는 시들 중에서도 좋은 작품이죠. 이게 타자를 만나러 가는 여행인 거잖아요. 2부의 서시로서 부 전체를 관류하는 것 같아요. 특히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쫒으면서/나는 알게 된다”라는 대목을 보면 만만치 않죠. 그렇다고 비관을 탐닉하자는 자세도 아니니 값싼 낙관이나 서툰 비관을 모두 극복한 뒤 깨닫게 되는 무엇이 거기에 있습니다. 마지막도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거기에 집 짓고 창을 낼 뿐 아니라 심지어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에요. 불모의 삶을 딛고 청포도밭을 일구는 데로 근사하게 비약하는 거죠.
백낙청 나도 「여행자」를 좋게 읽었는데, 전반적으로 김소연 시인이 소위 미래파 시인들 중에서도 이렇게 활달한 데가 있어요. 나로서는 그의 시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수두룩하지만, 전반적으로 이렇게 힘있게 끌고 나가는 게 이 시인이 여러 미래파 시인들과 조금 다른 것 같네요. 물론 힘있게 끌고 나가는 예로는 황병승(黃炳承)도 있지만, 그쪽은 약간 뭐랄까, 신들린 활력 같은 것이고,(웃음) 훨씬 차분하면서도 활력을 지닌 게 김소연 시 특유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송종원 아까 우연찮게도 황정은 작품 이야기에서 김소연 시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둘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드네요. 김소연 시의 화자가 묻는 안부와 앨리시어가 잠자리에서 동생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시적 의미보다는 그것의 수행성이 중요하죠. 백선생님께서 김소연 시인의 「시인의 말」을 인용하시며 애도와 자장가 이야기를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두 사람 모두 애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는 이들처럼 보입니다. 말의 온기를 가동시켜 함께 있음의 감각이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는 방식이 어쩌면 작은 의미의 문학의 정치성이 아닐까요.
손미 시집 『양파 공동체』
송종원 다음 작품입니다. 최근 몇년간 김수영문학상이 연령대가 낮은 젊은 시인들에게 많이 돌아가는 것 같네요. 서효인 황인찬 등등의 시인이 수상 이후에도 좋은 시작활동으로 주목을 받고 있죠. 이번에는 올해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손미(孫美) 시인의 작품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집 여기저기에 빛나는 구절이 많았다고 기억합니다. 또 이 시인의 시작(詩作)방식과 시비평 담론 사이의 어떤 거리감도 흥미롭기도 하구요. 두분 선생님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강경석 손미 시인의 『양파 공동체』(민음사 2013)는 문제적인 대목도 적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높이 평가하긴 어렵지 않나 싶어요. 까봐도 결국은 속을 알 수 없는 양파 이미지도 그렇지만 첫 시 「컵의 회화」에서 스푼으로 찻잔을 둥글게 젓는 행위나 「내림」의 “주인집에서 빌린 테이프/그 속에 녹음된 말”처럼 핵심은 비밀에 부쳐져 있고 그 둘레를 빙글빙글 에두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둥글게 감긴 비밀에 관한 시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게 사실 미래파 시들에서 낯익어요. 통상 미래파를 구분해내는 준거가 서정적 자아의 단일성을 의심하는 데 있으니 구심력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원심력 위주의 세계와 크게 다르진 않은 거죠. 김행숙(金杏淑)의 「가까운 곳」이나 「가까운 위치」 같은 가작이 떠오르는데 손미 시인의 작품이 그보다 낫거나 확실히 변별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자기극복이나 내밀한 상처의 치유 쪽으로 전개되긴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벗어난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물음표가 찾아올 수밖에 없어요.
백낙청 이른바 ‘미래파’ 계열의 시집이 으레 그렇듯이 나는 읽기가 꽤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면 조금씩 그 코드랄까, 그런 게 짐작이 가서 다소 풀려가는 느낌이었고, 두번 통독한다면 더 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만 김소연 시집에서 느끼지는 활달함 같은 것이 모자란데다, 그런 따스함 같은 것도 덜하더군요. 나는 이 시집에 대한 권혁웅(權赫雄)씨의 해설이 재미있었습니다. 물질과 반물질이라는 물리학의 학설을 끌어들여서 이 작품에서 반물질(antimatter)의 세계를 표현하려 한다는 해석이, 어쨌든 우리가 친숙한 세계를 해체하고 생소한 경지를 개척하며 그려보려는 노력과 부합하는 듯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송종원 미래파 이야기가 나오면 늘 시의 자아/주체 이야기가 함께 나와요. 강경석 선생님이 구심력과 원심력을 가지고 설명한 내용도 그것이죠. 미래파 담론이 지나간 후 시적 자아 대신 시적 주체란 말이 더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죠. 흥미롭게도 두분이 모두 손미의 시를 미래파 계열로 읽으셨는데, 전 손미의 시가 주체란 말보다 자아란 말로 설명하기 좋은 시로 여겨졌어요. 전통 서정시의 느낌을 주는 불행한 자아의 시, 손미의 시가 딱 그래요. 시편들 중에는 비밀스럽기는 하나 불행한 개인사를 암시하는 내용이 참 많죠. 그런데 그게 읽는 이들에게 또 묘한 울림을 줘요. 서정적 자아에 반감을 표시했던 미래파 담론에 기대 이야기하자면 손미의 시는 자기애적 슬픔이 가득한 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게 어떻게 독자를 움직이는 탄력을 발휘하는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좀더 다뤄보고 싶었고요.
백낙청 이른바 시적인 자아를 해체한다고 할 때 시인의 진솔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고, 자아를 해체한다고 열심히 이런저런 기법을 구사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열심히 해체작업을 수행하는 또다른 자아가 덩그러니 자리잡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요. 그러니까 자기 이야기를 하더라도 불교적 의미로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할 수 있는 거고, 자기를 깨부순다면서도 사실은 깨부수는 작업을 하는 자아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경우가 있지요. 나는 솔직히 말해 이 시집을 놓고 어디가 얼마만큼 이렇고 어디가 얼마만큼 저렇다고 정확하게 짚어낼 자신은 없어요. 그러나 양면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송종원 이 시집의 큰 골격은 타인의 언어로 말미암아 훼손되는 자기를 지켜내려는 태도에 있는 것 같아요. 만들어지는 소문의 세계가 있고 소문에 의해서 훼손되는 것들을 지켜내려는 자기의 세계가 대립한다고 할까요. 어떤 시는 왕따의 경험을 빗대 이 갈등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도 있어요. 그래서 시의 언어가 시인의 삶 바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 안으로 깊숙이 뛰어들게 되죠. 독단적 유아론의 혐의까지 보일 정도로 말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기의 삶 속에 깊숙이 뛰어들다보니 그 속에서도 비밀을 발견하는 양상이 나타나요. 양파의 이미지처럼, 슬픔을 벗기면 또다른 슬픔이 나오는 식인 거죠. 온전한 나에 이르지 못하는 슬픔, 나에게조차 비밀이 된 나의 슬픔의 지대, 여기에서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유지가 발견되는 듯합니다. 슬픔에 빠진 자아가 자기의 존재론적 인식에 도달하는 면모가 이 시집의 큰 성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경석 희박하지만 다른 면도 있어요. 표제시 「양파 공동체」가 재밌는 게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가는 것은 올바른가”라는 물음으로 끝나요. 옳고 그름을 묻는 일종의 윤리적 판단문제를 제기하는 건데, 그 덕에 이 시가 살아나요. 이 물음이야말로 원심력에 몸을 내맡긴 공회전의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일 수 있죠. ‘나’를 벗어나 ‘우리’로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은 적지 않다고 봅니다. 제목이 벌써 ‘양파 공동체’잖아요.
고은 시집 『무제시편』
송종원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무제시편』(창비 2013)입니다. 이 작품집에 대해서는 특별히 선정 이유를 말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드네요. 시집의 가시적인 물성이 벌써 독자를 압도해오는 면이 있죠.(웃음) 고은(高銀) 시인이 수준 높은 시들을 꾸준히 다작하고 계시다는 점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번 좌담을 준비하는 사전모임 때 백선생님께서 요즘 젊은 평론가들이 근래의 시인들에게만 집중할 뿐 고은 시인과 같이 연배가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덜 이야기하는 면이 없지 않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셨어요.
백낙청 젊은 비평가들이 고은 시를 ‘덜 이야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기피증까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두분 같은 소장평론가들이 젊은 세대에 흔한 편식증이나 기피증을 넘어 『무제시편』을 다루기로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두분은 읽어들 보시니까 어때요?
강경석 워낙 방대한 규모라 한마디로 정리하긴 어렵지만, 일단 받은 첫인상은 통제할 길 없는 어린아이의 거대하고 발랄한 놀이, 심지어는 우주적인 놀이처럼 읽혔습니다. 부록 시편들을 제외한 본편만도 오백편이 넘는데 이 경우는 여기에 어울리는 특별한 독법이 개발될 필요가 동시에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고은 시인이니까 예우하자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서 있는 판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핵심적인 작품만 추려서 편집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에 따라 「무제시편」 연작의 의의는 무엇인지 또 수록된 개별 시편들의 우열은 어떤지를 판가름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송종원 시인들이 한편의 시를 두번 쓴다고 생각해요. 한번은 시를 개별 작품으로 발표할 때 쓰고, 또 한번은 시집의 전체적인 형상 속에서 작품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쓰죠. 그런데 『무제시편』은 두번째 쓰기가 없어 보입니다. 이는 사실 이 시집의 형식을 문제 삼는 것뿐 아니라 고은 시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과 관련한 말이기도 합니다. 고은의 시에는 체계에 대한 거부 같은 게 늘 있어요. 체계 안에 작동하는 신화적 요소를 낮은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죠. 가령 32번 시를 보면 들녘에서 착란처럼 할아버지를 보다 아버지로 옮겨가고 다시 새참을 이고 오는 어머니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있죠. 점점 더 낮은 자리로 순식간에 소급해가는 이런 상상력의 운동성은 분명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가끔 체계에 대한 거부가 종잡을 수 없을 때까지 나아갈 때도 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처럼 수만 방향으로 튀는 통에 일부러라도 억압적 계기를 만들어서 어떤 흐름을 잡아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죠.
백낙청 독특한 독법이 필요하다는 강선생 지적은 참 탁월한 견해예요. 이번 시집 머리말에 보면 베네찌아에 있는 동안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무제시편』은 몇달 사이에 오백몇십편을 썼으니까, 고은 시인으로서도 유별난 경우지만, 사실 고은 시인의 전반적인 생산력이나 작업방식을 보면, 유성우가 그냥 시도때도 없이 내리는 시인이라고 봐야지요.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좀 추려서 내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이 유성우이라는 게 비유이긴 하지만, 말하자면 별똥별의 소낙비가 쏟아지는데 조금 줄여서 쏟아지면 어떠냐, 더 빛나고 멋있는 별만 추려가지고 내리쏟으면 좋지 않겠느냐 하는 게 가당치가 않잖아요.(웃음)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읽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흔히 우리 머릿속에는 ‘주옥같은 시편’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그런데 고은 시에 주옥같은 것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인 자신은 주옥같은 시편이라는 개념을 애초에 거부하겠다는 거예요. 특히 『무제시편』에서는 ‘시가 아닌 시’란 것을 추구하잖아요. 그래서 일단 쏟아지는 유성우를 한번 지켜보면서, 우리 나름으로 그중 어느 시들은 좋고 어느 시들은 덜 좋더라 하는 비평을 각자가 해야지요.
강경석 가령 연작의 171번에 “미는 숙련된 미숙이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148번에는 “걸어가는 노래로 살아야겠소”란 다짐이 나옵니다. 일상의 소소한 행위로부터 거대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유와 행위가 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시 자체가 행위이기도 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아요. 사람의 몸과 마음이 아침저녁으로 들쭉날쭉하듯 이 시들도 우발적이기 이를 데 없는 생의 리듬을 따르는 거예요. 아이 같고 미숙한 거죠. 그러니 시편들 사이에서 논리적 모순도 비일비재합니다. 141번이 “싸움의 끝은 싸움이 아닙니다”로 끝나는 데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시의 끝, 그러니까 이 시들의 목적지는 결국 시가 아니라는 점이 뚜렷해요. 시적 완성이라는 일반적 목표가 무상해지는 거죠. 따라서 부록의 첫 시 「안성을 떠나면서」의 마지막 연 “시가 시이고 또 시였다 내가 감히 시였다”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앞에서 서정적 자아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무제시편』이야말로 서정적 자아에 대해 해체적이에요. 서정적 자아란 게 문제되는 맥락도 결국은 근대적 주체성,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단자화된 개인을 절대시하고 숭상하는 문화와 연루되어 있는데, 『무제시편』의 서정적 자아는 거기서 비켜서 있지요. ‘무제시편’ 자체가 제목 없다는 뜻의 제목인데 주인 없는 주인, 주체 없는 주체인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나 사회 단위에만 독재가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독재를 행할 수가 있는데 고은 시인은 ‘나’라는 독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겠다고 나선 셈이에요. 여기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송종원 『무제시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작품 수가 상당한 데 비해 태작은 잘 안 보인다는 점이에요. 시집의 초반부를 읽었을 때 간결하면서도 탄력있는 말들의 기운이 흥미로웠어요. 근데 100편 정도를 넘어가니 좀 지루해지더라고요.(웃음) 후반부 작품이 성과가 덜하다는 말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시적 운동을 계속 반복해서 보니 피곤하게 느껴졌어요.
강선생님의 ‘나’에 대한 해석도 설득력이 있지만 전 조금 달리 읽은 거 같아요. ‘나’라는 말이 무척 많이 나와요. ‘나’에서 출발해서 ‘나’로 끝나는 시도 많고요. 그런데 이 ‘나’ 사이의 여정이 세계사적 인식을 끌어들이며 상당한 스케일을 지니는 데 반해 처음의 나와 마지막의 나가 큰 차이가 없어 보여요. 이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저는 아직 고민입니다.
백낙청 앞부분과 뒷부분 이렇게 나누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아무튼 변별을 해서 불만이 있는 부분을 적시하는 작업도 필요한데, 서문에 이런 말이 있지요. “나는 한반도의 아픈 영광이야말로 때려죽여도 때려죽여도 살아나는 시의 땅이라고 되받는다.”(11면) 감동적인 구절인데, 이런 한반도의 아픈 영광이 제대로 살아 있는 시가 어떤 거고 그렇지 못한 시는 어떤 건가, 그런 물음을 던져봄직은 하지요. 가령 나는 분단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고 분단체제론이라는 걸 얘기해왔는데, 그렇다고 항상 분단 이야기만 하자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 시집 327번에서처럼 “분단이 웬말인고”라고 일축하는 걸 신선하게 느끼기도 해요. 짧은 시니까 전문을 읽어보면, “내 풍류 욕하는 놈 치사하렷다//금방 따온/외금강 송이를 구워 먹는다//분단이 웬말인고//천하의 가을이 내 가을이구나”(533면). 다른 한편 268번에서, “분단 70년을 살았다 제비들 오지 않는다//아주 굳어진 것인가/저 밑창에서/다른 세월이 움트고 있는 것인가”(448면) 이렇게 물음을 던져놓고는 분단이 150년도 갈 수 있고 상당히 오랜 세월을 갈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상정합니다. 그런데 나처럼 아주 굳어진 것 같은 답답함 속에서도 저 밑창에서 다른 세월이 움트고 있는 낌새를 잡아내기를 갈망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쉬움이 있어요. “분단 1백50년쯤 가보라” 하는 거는 그야말로 너무 초월적으로 나간 형국이고 이런 경우는 진정한 무아의 경지라기보다 우주적으로 사고하는 자아가 드러나는 대목이 아닌가 싶어요.
강경석 327번 같은 경우는 고은 시인이 그동안 보여줬던 돌출적이고 비약적인 인식들에 비춰보면 그렇게 놀랍지가 않은, 어쩌면 자기 반복처럼 다가오기도 했어요.
백낙청 하지만 그걸 이렇게 다섯줄로 쓰는 건 쉽지 않죠. 게다가 분단 이야기가 느닷없이 나온 게 아니고 ‘외금강 송이’를 구워 먹는 통에 자연스럽게 나오거든요.
강경석 268번에 비해서는 당연히 월등하지요.
송종원 327번처럼 먹는 일과 분단문제를 연결시킴으로써 극히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 생존의 목적이 아니라 사치스러운 먹기라는 구체성을 활용해 자기환멸적 감각을 재치있게 시적으로 만드는 능력은 고은 시인의 특장임이 분명해요. 같은 맥락에서 가령 103번 같은 시 “풀 보아/나무 보아/똥 안 누고도/잘 사는/조각달 보아//나야 죽어도 달 못되어 똥 마려워”(189면)라고 말하는, 누추한 육체성을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시들이 좋게 읽혔던 것 같아요.
강경석 그렇죠. 그런데 바로 앞의 102번만 해도 그렇고 태작이 없지는 않아요. 27번 같은 경우도 “제주도 1만 신들”부터 세상의 온갖 신들을 쉼 없이 불러들이고 있는데 금세 지루해져요. 이런 식으로 쏟아진 열거의 시들 상당수는 가령 같은 열거법을 썼어도 농사꾼 아버지가 쓰던 연장과 자신의 시 쓰기를 오버랩시킨 341번 같은 시에 비할 때 한참 뒤처집니다.
백낙청 아까 268번과 관련해서 내가 보기에 너무 스케일이 커진다고 불만을 표시했는데, 시인이 자신의 ‘오만불손’을 호언한다고 해서 꼭 자아과잉의 시는 아니에요. 또 시인이 굉장히 풀이 죽었다고 할까,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시들도 좋은 게 많아요. 가령 “나는 청중 앞에서 부끄럽다”로 시작하는 362번이 그런데, 우리가 아는 고은 선생은 청중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분이 아니거든요.(웃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그런 고은이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시를 통해 드러낸 건데, 자기고백이라는 게 굉장히 자아중심적인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그런 종류의 자기고백이 아니고 진실의 어떤 한 면을 드러내주는 시의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하지요.
송종원 사실 이 좌담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읽어내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이 자리에 오면서도 텍스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정리된 상태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더 고민해봐야 할 질문이 선명해진 거 같습니다.
강경석 독자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두분과 토론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백낙청 많이 배웠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강제로라도 최근 작품을 많이 읽으면서 우리 문학의 활력이 만만찮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 느낌이에요.(2014년 1월 15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