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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실패의 기록
최근 장편소설 논의에 부쳐
차미령 車美怜
문학평론가.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주요 평론으로 「친밀성의 새로운 신화는 어떻게 전복되는가」 「몸뚱이는 말하지 않는다」 등이 있음. kirugi@dreamwiz.com
두께의 시간
우리의 이야기는 묵시록과 함께 시작되었다. 우울에 젖지 않고 비감해하지도 않으며 적는다. 다만, 끝났다는 인식은—이야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결’된 것이다—종종 비평을 원점으로 회귀하게 하거나, 앞날을 내다보게 했다. 근원을 탐구하는 고고학자와 미래를 개시(開示)하는 예언가의 형상이 비평에서만큼은 드물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특히 후자, 예언으로서의 비평은, 전망과 장래라는 말이 오가기는 해도, 내가 생각하는 비평언어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씌어진 작품이 아니라 씌어질(혹은 씌어져야 할)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식의 지평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문학 고유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불안을 뒤로 돌리고, 현재의 과잉과 결여에 비추어 미래를 단일한 상으로 투사한다.
그러나 묵시록의 휘장을 걷는다 해도, 최근 몇년의 관찰이 문학적 개념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 사실을 ‘반응’의 과잉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그러한 논란의 배경에는,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향방을 두고 생산된 첨예한 긴장이 잠복되어 있다. 범박하게 말해 초점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근대와 그것에 대한 통렬한 성찰이거니와, 부분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재검토까지를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최근 장편소설 논의가 ‘노블’(novel)을 다분히 강박적으로 호출하는 양상에 불만을 품은 독자가 있다면, 그것이 이같은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겠다. 논의의 첫머리에서 장편소설은 ‘근대문학의 챔피언’으로 호명되었으나, 다양한 저항과 부딪히며 곧 개념의 재설정에 대한 요구에 직면했다.
쉽게 짐작되는 것처럼 ‘모던’이나 ‘포스트모던’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시대 및 정신사와 결합한 장편소설의 정의에 대해 정연한 논증을 시도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우리가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은 변신과 해체를 그 자신의 근거이자 동력으로 삼아왔던 한 장르의 두께다. 그것을 규정적으로 포획하려는 시도는 탁월한 반례들에 의해 흔들리거니와, 그러한 반례들은 소설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세종’이라는 진화론적 어휘—자신을 우세종이게 했던 그 이유로 사라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하는—가 출몰하는 것은 내부의 타자를 예외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곤경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최근 장편소설에 대한 논의는 안팎에서 그 장르적 특성을 발견하고 재구축하는 대신 다른 장르, 특히 단편소설과의 거리를 무화하고 그 경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현재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차이를 묻는 질문들은, 장편소설을 어떤 특권으로 간주하고 그 특권을 타도하고자 하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구성되고 있다. 장르의 해체가 지배적인 현상이라면, 그것이 장단편의 구분에까지 이르지 못할 이유는 물론 없다. 또한 두 장르의 생산과 수용에 절대 넘을 수 없는 기준선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도 무모한 발상이다.
하지만 현재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경계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우리에게 유익한 쪽으로 심화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해져도 좋을 듯하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유의미한 내적 차이가 ‘길이’밖에 없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다. 소설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시간을 나누고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의 길이는 그것이 품고 있는 시간성(과 공간성)이기도 하다. 이를 두고, 예컨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모두, 지구의 역사도, 단 1분의 시간도 다룰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는 소설의 내적 시간을 오로지 ‘이야기 시간’(story-time)의 차원으로만 제한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의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만다. 그 불일치를 갖고 다양한 작업을 진행한 주네뜨(Gérard Genette)의 발상을 환기하면,1) 소설의 길이는 분량이며 그것은 ‘이야기 시간’과 ‘서술 시간’(text-time)이 이루는 함수에 영향을 주게 된다.
소설의 작가는 이야기를 버티는 동시에, 지면의 압력을 버텨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야기를 짓고자 하는 작가에게 서술 시간은 공간적인 차원으로 변형된다. 지금 내 안의 이야기가 요구하는 길이를 가늠하며, 먼저 제시하느냐 나중에 제시하느냐, 몇번 반복하느냐, 무엇을 생략하고 무엇을 드러내느냐, 얼마나 가속하고 또 얼마나 감속할 것이냐…… 누군가는 이를 테크닉이라 하겠지만, 지금 이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가를 더듬어가는 섬세한 의식이 그 일을 한다. 그것은 소설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자 가능성이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양쪽에서 더 심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현재의 불만을 이유로 서둘러 닫아버릴 필요가 있을까? 김영하(金英夏) 김연수(金衍洙) 그리고 최근의 황정은(黃貞殷)의 사례를 갖고 짐작하건대, 장편소설의 시간을 통과한 작가에게는 단편소설의 시간도 다른 형태로 다가올 수 있다. 한 작가의 고유한 세계는 길이와 무관하게 오롯하더라도, 독자에게 그 시간의 운동성은 다르게 체험될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지금 두 장르의 차이는 길이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들에서, 정작 그 길이의 차이는 무겁게 사유되고 있지 않다.
시장과 공동체
이제 이야기의 외부로 가서 질문을 던져보자. 위의 논란은 최소한 ‘한국문단’에서 현재 수세에 놓여 있는 장르가 과연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직시하게 한다. 장르의 규정은 곧 그 장르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위기에 놓인 장르는 상위 장르의 범례로 종합되기를 원치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러한 장르들은 독자적인 내적 세계를 옹호하며 스스로를 독립적인 장르로 제시하기 위해 고심했다. 예컨대, 웰렉(René Wellek)과 워렌(Austin Warren)이 허구적 서사장르를 ‘fiction’으로 통칭했을 때, 단편소설의 옹호자들은 그것이 단순히 총괄의 의미가 아님을 예민하게 주시했으며,2) 서구문학사를 모델로 한 발전론적 도식을 전제했음에도 임화(林和)는 “단편소설이 우리 순수문학의 기본적 생산형태”이며 “단편소설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순수문학사를 문제삼을 수 없다”3)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소설계에서 단편이 더 풍성해왔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풍성하지 못했던 쪽으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욕망이 가차없이 기각될 필요가 있을까? 최근 장편소설 논의가 뚜렷하게 노출한 사안 중 하나는 장편소설 앞에 놓인 딜레마이다. 간단히 말해, 상품의 운명을 사는 장편소설은 시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시장의 법칙이 인간사회의 비판적・창조적 능력과 무관하게 형성된다고 본다면,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문학의 쓸모없음에 대한 논의는 유서 깊지만, 생존의 불안과 함께 도래한 대대적인 실용주의의 요구 앞에 그것은 얼마나 강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지점에서 “사실 2007년 즈음의 장편대망론은 한국 문학의 세계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확하게는 국내에서나마 ‘팔릴’ 소설을 쓰자는 매우 분명한 요구가 개입되어 있다”4)라는 논평 앞에 멈춰선다. 2007년 이 지면에서 제시된 기획에서 노골적인 상업주의적 함의를 읽지 못했던 나로서는, ‘팔다/읽다’의 수준에 놓여 있는 어떤 근본적인 고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위 장편대망론이 ‘운동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개진되었음에도 상업주의라는 비판에 휩싸인 것을 오해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조연정(曺淵正)이 진솔하게 논의하고 있는 내용들은 앞에서 거론한 배경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녀는 “더이상 독자에게 흥미를 주기 힘든 긴 소설들은 비로소 문학의 성채 안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할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닌가”(317면) 자문하며 힘겹게 나아간다.
이 질문의 심도에 무심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 속도전의 시대”에도,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이 이야기의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면—조연정의 섬세한 책이 그 증례 중 하나일 텐데—“씨스템”과 무관한 자리에서 “문학의 성채”(같은 곳)를 생각하는 것만이 장편소설의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지 않을까 숙고해보려 한다. “이 시대가 두꺼운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전제”(303면)가 만약 시장이 구축한 사회적 상상이라면, 그것에 대항할 권리도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짚어보려 한다.
장편소설에 “모험의 정신”을 요구하며 쇄신을 논한 김영찬(金永贊)의 글5)을 이같은 측면에서 검토해볼 수 있을 듯하다. “시장전체주의 체제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을 식민화”했고, “사회 전체를 묶어내는 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는 상실”6)되었다고 한 그의 지난 글과, ‘시장’을 “더 큰 소통의 장”으로 호출하고 있는 이 글을 나란히 놓으면 어쩔 수 없는 불협화음이 감지된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이 논의의 주요한 참여자들이 몇년에 걸쳐 큰 그림을 그려왔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논리적인 방어선을 추스르며 지형도를 설계하는 비평이 그 자신의 인식 변화에 이같이 겸허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컨대, 그가 펼친 “21세기 소설의 운명”에 대한 논의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전개된 일련의 상황, 특히 SNS 등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에 대한 그의 희망적 진단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새삼 비평가로서 김영찬의 미덕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은 이러한 국면에서다. 그는 시장과 공동체가 얽혀 있는 지점을 피해가지 않으려 한다. ‘시장’이라는 기표에 드리운 자본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짐짓 ‘시장바닥’이라 고쳐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단호하게 시장이라 적는다. 태생부터 상품인 장편소설의 운명을 끌어안고 직시하겠다는 뜻으로도, 또 그런 만큼 장편소설이 사회적 징후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촉구하는 뜻으로도 읽힌다. 이제 그에게 “시장은 시대정신과 시대의 감수성이 유통되는 집합적 공간이며, 감정(들)이 연대하고 상상력이 공유되는 공감과 연대의 네트워크”다.(306면)
저 아름다운 말들을 존중하면서도, 그 존중의 도리로서 작은 의문 두가지를 기록해두고 싶다. ‘소통’ ‘공유’ ‘공감’ ‘연대’ 등을 매개로, 시장과 시대감각을 무리 없이 결합하는 그의 순환론은 위험한 유토피아론으로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시장과 시대정신은, 단일한 공동선이라는 관념을 향해 편안하게 통합되어 있다. 그는 네트워크를 말하되, 그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행위자들의 위치를 묻지 않는다. 나를 포함하여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공감과 연대를 안이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성원 모두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깨고, 우리가 ‘상이한 공동체의 거주자들’7)이라는 사실을—그가 상징으로 삼고 있는 SNS의 특징은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이제는 숙고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장편소설 앞에는 그의 글에서처럼 모든 차이를 포괄한 “대중의 삶의 감각”이나 “대중적 공감”만이 불분명한 실체의 숙제로 부상하기 쉽다. 장편소설의 이야기가 싸워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일 터인데, 그의 구도에서 불온한 감각의 낯선 이야기가 출현할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장편이란 결국 세계와의 서사적 싸움”이며 “인간에 대한 더 큰 통찰을 유도한다”(311면)라는 그의 말 역시 생각보다 울림이 크지 않다.
김영찬이 젊은 작가들이 가진 “재현의 공포”를 문제 삼으며 “미학적 필터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현실의 재현”(307면)을 고평하는 부분8)은 위와 같이 볼 때 징후적이다. ‘시장의 형식’을 전제하고 작가 고유의 이야기 방식을 해체하라는 말의 숨은 뜻이 모호한 가운데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미학이다. 그러나 김영찬이 현실을 그 대척점에 놓으며 쓴 “미학적 필터”라는 말이 은연중 가리고 있는 사실은, 재현된 현실은 ‘필터링’되지 않은 것이라는 의아한 고정관념이다. 미학적 완결성에 대한 자의식은 맹렬한 의문에 붙이되,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그만큼 깊이 추궁하지 않는 이유가 “소통과 공감의 요구” 때문이라면, 장편소설이 싸워야 할 세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장편소설이 열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은 아니지 않을까? “‘불가피한’ 장편의 시대”와 함께 김영찬은 그가 애도한 근대문학을 향해 위태로운 귀향을 시도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장편소설의 미래
근대문학의 어떤 관념들도 ‘절멸’하지는 않는다. 다시 적자면, 문학의 어떤 관념들도 절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취를 그리며, 흔적을 남기고, 잔존하고, 또한 신생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나온 문학을 황량한 불모지로 만들고 다음 단계로 전진하려는 비평의 관습은 반성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문학이념을 완강하게 옹호하며 그것을 사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변화는 저항과 단절의 언어로써 조망되기도 하지만, 공존 속 긴장과 갈등의 언어로써 발견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지나온 시기의 문학을 다시 읽되, 비평적 언어로 포획되지 않았던 징조들, 내재적 논리를 암암리에 허무는 흐름들에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이 남긴 한 시대의 성취는 문학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상속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장편소설 논의에서 한기욱(韓基煜)이 개진한 이른바 ‘단절론’ 비판을 이해해보려 한다. “탈근대의 충동과 계기를 자본주의 상품화 과정과 체제 내의 회로에 포섭되게 하지 않고 근대 극복의 소중한 예술적 자원으로 만드는”9) 길을 사유하는 그는 근대와 탈근대의 길항을 의식하며 나아간다. 특히 그가 서구의 장편소설들을 다채롭게 참조하며 그 생명력과 풍부한 변이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대목들은, 세계문학과 더불어 한국 장편소설을 읽는 일에 흔치 않은 모범이 된다. 나 역시 그나 백지연(白智延)의 논평대로 “장편소설론과 관련된 문제의 핵심은 현실에서 생산되는 작품이 근대 장편소설의 관습적 형식에 얼마나 부합되는가에 있지 않”10)다고 생각한다.
위와 같은 한기욱의 문제의식을 상기하며 지난 계절 발표된 그의 글11)을 읽는다. 지난 글에 이어서 한기욱은 다시 한번 묻는다. “만약 ‘장편소설(novel)’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소설’로 지칭되는 문학장르 가운데 무엇이 “시나 희곡, 또는 개별 민족의 다양한 문학장르를 자체에 복속시키며 성장하는” 장르로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일까?”(344면) ‘개별민족’ ‘복속’ ‘성장’ 같은 식민적인 뉘앙스의 어휘들이 위와 같은 물음을 낳을 수는 있을 듯하다. 장편소설을 모델로 한 이론으로 단편소설을 분석하는 사례가 그간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운 문제제기가 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호텍스트성의 측면에서 보면 일기, 편지, 수기 등의 경험적 양식과 더불어 “시나 희곡, 또는 개별 민족의 다양한 문학장르”와 교섭하는 것이 장편소설(novel)만의 특징은 아니다.
총론의 차원에서 발휘되는 그의 글의 포용력과 융통성을, 각론에서 회의하게 되는 것은 위와 같은 대목들에서다. 한기욱은 장편소설에 근대의 “핵심적 진실”을 여러차례 요구한다. 비평을 분석할 때 발휘되는 그의 치밀한 구체성을 통해서는 그가 그 비평에 어떠한 각도로 접근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핵심’ ‘진실’ ‘본질’ ‘극복’ 등의 추상적인 어휘로써 장편소설의 이상을 엄정하게 논할 때 독자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그의 한계가 아니거니와, 도래하지 않은 작품 앞에서 비평의 이상은 무능할 수밖에 없다. 그 내포와 외연은 비단 그뿐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확정할 수 없을 것인데, 문제는 그것이 어떤 슬로건으로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그의 구도에서, 그럼에도 장편소설은, 그가 제시한 “핵심적인 전략”을 갖고 특정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12) 이것이 과연 장편소설의 ‘열린 미래’일까?
장편소설의 미래는 어떻게 열리는가. 그 변화의 한 방향을 김형중(金亨中)은 가령 “3D영상이나 스마트폰이 문화적 우점종이 되어버린 시대”13)에서 찾고 있다. “새로운 장편소설들이 탄생할 만한 조건으로서 감수성의 변화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가를 찾는”14) 그는 언제나 물증을 제시하는 비평가다. 물증이라 경박하게 적었지만, 그는 소설의 현장에 해박하고 사회문화적 변화에 민감하다. 주지하다시피, ‘스마트폰’과 ‘3D영상’은 생산 및 향유의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장르, 즉 영화의 미래와 관련하여 먼저 주목받았다.
김형중이 거론하는 대상은 소설들이고, 그래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감수성의 재편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구상을 진전시키고 있다.15) 인터넷써핑, 하이퍼텍스트를 거론한 지난 글에 이어 트위터 등을 아울러 상기하며 그는 몇몇 소설을 “이야기의 무한 증식”의 사례로 예시하고, 김연수와 윤성희(尹成姬)를 “브리꼴뢰르(bricoleur)”이자 “무한소설의 선구자”로 거론한다. 김형중에 의하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 지음, 문학동네 2007)이라는 제목의 무한소설”은 “수집된 이야기소들을 어디든 성좌의 원리에 따라 배치해주면 되기 때문에” “원리상 이야기는 무한”하며, 윤성희의 『구경꾼들』은 “엽서는 이야기소이고, 수집된 이야기소들의 배치를 달리하고 인과를 달리함에 따라 완성된 이야기들의 숫자는 순열 조합마저 가능”하기 때문에 “역시 무한소설”이다.(231~32면)
나 역시 그의 ‘유머’(장편소설 개념의 특권을 조롱하기 위해 반개념으로 고안한 무한소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어서 적는다. 위의 설명에서 브리꼴뢰르의 통합적 역량은, 하이퍼텍스트식 생산성을 만나 ‘무한’으로 변주된다. 하지만 수집한 것들을 배치하고 조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원리상” 무한하다는 해석은, 형태의 특징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지금 그 이야기의 고유성은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설계도를 갖고 목적에 맞는 도구와 재료를 찾는 ‘엔지니어’와, 눈앞의 재료들을 변통하여 물건을 만드는 ‘브리꼴뢰르’는 여러 측면에서 비교될 수 있다.16) 하지만 브리꼴뢰르가 하나의 물건을 완성하는 또다른 유형의 창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구경꾼들』은 저자를 지시하고 있으며, 우리 앞에 놓인 소설이 하이퍼텍스트가 아닌 이상 이야기소들의 배치와 인과는 이미 그 저자에 의해 결정되었다.16)
이 사실을 김형중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소설의 전체상에 어울리는 창의적인 명명의 고안에 심술궂은 사족을 덧붙이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말할 때 비평을 잡아당기는 어떤 인력, 그의 어휘를 빌리면 “문화적 우점종”과 소설의 “우세종” 사이의 역학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유물론이 가진 힘과 그러한 작업이 갖는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구도에서 이야기의 형식은 곧 그 토대인 바깥세계의 형식이며, 소설은 세계가 이미 배치를 끝낸 시공간이라는 어떤 한계 내에서 포착된다. 그러나 장편소설에 공동체적인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우점종에 합류하는 우세종의 방식으로서(만) 출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지금 지배적인 어떤 분할에 몰두하느라, 이야기 속의 다른 희미한 기미들을 지나쳐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실패의 기록
지금까지 장편소설과 그 미래를 사유하는 동시대의 가장 치열한 고투들을 따라서 글을 이어왔다. 장편소설은 시장과는 거리를 둔 문학의 성채 안에서 사유될 수도 있고, 시장 아래를 흐르고 있는 시대정신 안에서 파악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근대의 진실을 향한 슬로건과 함께 모색될 수도 있고, 사회문화적 지각변동에 기반한 감수성의 변화와 더불어 탐색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덧붙여왔지만, 비평언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설들이 아니라, 결국 그 언어가 지금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어떤 소설들에 바쳐진다. 이제 바꿔서 묻거니와 최근 장편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장편소설의 2010년대는 신경숙(申京淑)의 저 문장과 함께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의 첫 문장은 무엇이 사라진 사태를 보고한다. ‘그것’은 이념도 아니고, 사랑이나 욕망도 아니며, 환상 속 지구도 아니다. 그 문장은 어떤 사람이 실종되었음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편의 소설을 겹쳐 읽으려 한다. 김애란(金愛爛)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에서도 물리적 실체를 가진 어떤 것이 사라진다. 늙어가는 소년은 임종의 순간까지 우리와 동행하지만, 그가 “세상과 처음 말을 섞은 곳,” 부모의 고향이자 소년의 고향인 한 마을은 지도에서 삭제된다.
두 소설에서 사라진 것들은 ‘나’의 육체적, 정신적 기원이다. 살과 뼈, 숨과 말을 준 엄마가, 고향이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다시는 찾아지지 않는다. 기원이 가진 인력을 잠시 뒤로 물리고, 지금 무언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 엄마가, 내 마을이, 내 친구가, 내 이웃이 지금 사라지고 있다. 이 구체적인 것의 실감을 ‘상실’이라는 말로 뭉뚱그리지 않으려 한다. 소설 속 이야기는 우리가 뚜렷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거대한 실체를 앞질러 발견한다. 살아 숨쉬던 누군가가, 발딛고 있던 그 무엇이 지금 사라지고 있다.
이 국면에서 신경숙과 김애란은 이야기하기로써 동일한 어떤 작업을 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은 마치 그들의 힘으로는 외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야기의 요청인 것처럼 다가온다. 큰딸, 큰아들, 남편을 차례로 호명하던 『엄마를 부탁해』는 4장에 이르러 그 가족이 알지 못했던 엄마의 목소리를 되살려놓는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개발에 의해 수몰된 마을을 생명력이 충만한 시원적 공간으로 다시 돌려놓고서야 끝이 난다. 이 상상적 복원이, 최근 몇년간의 장편소설이 세계의 분할에 맞서 문학의 이름으로 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 사람이 사라지고, 또 한 마을이 없어진다. 최근 발표된 한 장편소설을 짧게나마 읽고자 한다. 복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만 했고, 또 기어이 갔던 한 소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려 한다. 황정은의 신작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는 앞의 두 소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한 마을의 유전자로부터 비롯된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농촌마을이 김애란의 원형공간이라면,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고모리’는 황정은식 세계의 축도다. 그곳은 비유하자면, 일어선 그림자들의 세계(『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다. 그 세계 속에서 “씨발년”이 발아한다. 『백의 그림자』의 대화들 때문에 더 압도적으로 체감되는 ‘씨발’이라는 말, 현재의 일상에 편재(遍在)하는 말인 동시에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고통을 가리키는 그 말.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그 말은 다름 아닌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들을 “씨발년”과 “포스트 씨발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소년에게, 자신의 모계는 원하지도 않은 생명을 주고 앞날은 박탈해버린 비극의 기원이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미래를 집어삼키며 탄생한 ‘고모리’는 이러한 세계인식에 정확히 조응한다. 그 지명의 유래가 된 “영문 모를 무덤”은, 굶주리던 마을 사람들이 아기의 몸을 삶아 나눠먹고 “비참한 뼈들을 숨긴 봉분”(9면)이다.
소년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은 추악한 세계가 잉태한, 황정은 고유의 언어를 빌리면, 가장 희박한 자들이다. 그들은 “씨발년”에게 육체가 짓밟히고, 존재 자체를 추궁당한다(그 장면들은 독자를 관통한다). 특히 동생의 말은 너무나 희박해서, 세계에 자리잡지 못한다. 그의 숨결은 형인 앨리시어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밤의 대화들 안에서만 간신히 부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다. 앨리시어는 묻는다. “그는 어디에 있나.”(150면)
앨리시어의 동생은 죽은 채 발견되지만, 세계는 동생을 위한 말들을 갖고 있지 않다. 형인 앨리시어조차도 그 말들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동생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하며, 동생이 이름을 새겼던 머릿돌을 찾아가지만 “그 이름, 빗물과 먼지에 씻겨 이미 그 자리에 없다.”(157면) 앨리시어는, 실패한다. 그는 동생이 사라진 이후 죽을 때까지의 시간 역시 알지 못한다. 기도를 가득 채운 모래와 함께 발견된 동생의 마지막 순간은 공백 속에 있다. 그곳에서 태어난 가장 연약한 자가 비명조차 갖지 못하고 모래무더기에 묻힘으로써 고모리의 시작과 끝은 이어진다.
황정은은 쓴다. 이것은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이다.”(161면) 당분간 이 진술을 넘어서는 이 소설에 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물론 소설은 이야기의 고비마다 다른 선택의 가능성들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가장 중요한 선택들은 저 실패들로 인한 것으로 읽힌다. 앨리시어는 “씨발년”을 넘지 못하고, 동생을 구하지 못하며, 이제 없는 고모리 역시 떠나지 못한다. 소설에서,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는 그 실패를 보존하는 동시에 부인하는 우울증적 주체가 되어 세계를 심문하며 떠돈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8면)
이것이 세상에 개입하는 이 소설의 방식이다. 세상으로부터 움터온 어떤 소설의 이야기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 세상을 찢고 출현하게 된다. 내게는, 이 실패의 기록이 그렇게 읽힌다. 재현과 호명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소설은 바로 그 불가능을 앓아 이야기의 육체로 만듦으로써, 세계의 지배적인 식별 체제, 그 가시성과 불가시성의 경계를 노출시키고 그것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야기 속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목소리, 곧 이야기의 목소리가 이야기의 바깥을 향해 묻는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다.17)
소설의 이야기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소설의 이야기는 무엇을 하는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제 답하겠다. 이것이 소설의 이야기라고. 바로 이것이 소설의 이야기가 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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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라르 즈네뜨 『서사담론』, 권택영 옮김, 교보문고 1992.
2) 토마스 걸러슨 「단편소설: 경시된 예술」, 『단편소설의 이론』, 찰스 E. 메이 엮음, 최상규 옮김, 예림기획 1997.
3) 임화 「단편소설의 조선적 특성」, 『인문평론』 1939년 10월(『임화문학예술전집 5』 하정일 책임편집, 소명출판 2009, 140면).
4) 조연정 「왜 끝까지 읽는가—최근 장편소설에 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306면.
5) 김영찬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6) 김영찬 「끝에서 바라본 한국근대문학」,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31~32면.
7)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보경 옮김, 후마니타스 2007, 41면.
8) 그는 편혜영의 『재와 빨강』(창비 2010)과 윤성희의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을 단편미학의 연장이라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면, 김이설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은 “오해의 지점을 단선으로 돌파해나간 중요한 성취”로 꼽는다.
9) 한기욱 「기로에 선 장편소설—장편소설과 비평의 과제」,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225면.
10) 백지연 「장편소설의 곤경과 활로—김려령과 구병모의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2013년 겨울호 440면.
11) 한기욱 「장편소설 해체론과 비평의 미래—『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 특집에 대하여」, 『문학과사회』 2013년 겨울호. 내가 보기에 이 글의 핵심은 강동호(康棟晧)의 비판(「리얼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장편소설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문학과사회』 2013년 가을호)에 대한 반론이고 지금 주어진 이 지면은 두 글에 대한 생각을 묻고 있다고도 짐작된다. 하지만 치열한 공방의 축인 김남천(金南天)에 대한 나의 이해가 충분히 깊지 않아서, 여기에 독후감을 남기기는 어렵다. 파시즘과의 공모를 의심하며 진행된 일련의 탈정전화 작업들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지금 이 글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대목만을 간단히 살펴보려 한다.
12)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근대 장편소설이 내장한 근대성찰의 풍부한 지적 자산과 탈근대적 상상력의 결합, 이것이 김영찬이 제기한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략이 아닐까?” (한기욱 「기로에 선 장편소설」, 226면)
13) 김형중 「그러니까, ‘장편소설’이란 무엇인가?」, 교수신문 2011.7.5.
14) 김형중 「장편소설의 적—최근 장편소설에 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58면.
15) 김형중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소설 쓰기—2011년 여름, 한국 소설의 단면도」, 『문학과사회』 2011년 가을호.
16)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한길사 1996.
17) 생의 마지막 해의 한 강연에서 쑤전 쏜택(Susan Sontag)은 “소설의 죽음”이라는 선언에 맞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이퍼텍스트의 이데올로기와 텔레비전의 서사 모델에 맞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다’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수전 쏜택 「동시에—소설가와 도덕적 논리」, 『문학은 자유다』, 홍한별 옮김, 이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