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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작은 것들의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안녕’을 묻는 방식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김민정론」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2010년대 시를 위해 더 말해야 하는 것
2010년대 한국시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얼마간의 비평은 지금 우리에게 도착한 시편들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1) 언제나 “영향에의 불안”(헤럴드 블룸)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 문학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기원’의 탐색이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쓰기를 추동하는 현실이 시시각각 변하기도 하거니와 여기에 비평이 얼마나 기민하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시에서 형성된 현실 역시 다른 의미화가 가능하다. 이는 2010년 이후에 등장한 시를 읽는 방법으로 2000년대 시를 거꾸로 경유하는 비평적 회로의 설계에 필자가 일면 동의하면서도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이유이다.
2010년대 시에 대한 담론이 유독 2000년대 시와의 영향관계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른바 ‘미래파’로 불리는 2000년대 시를 읽는 과정에서 제기됐던 여러 질문—시에서 누가(주체), 어떻게(화법) 말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들—을 집요히 추궁해간 덕분에, 비평은 시의 틀을 한정하기보다는 넓히는 방향으로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어떤 난감한 작품이 출현할지라도 그에 담대하게 반응할 채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질문과 추궁의 과정은 2010년대 시를 향해서도 여전히 유효하기에, 미처 논의를 다 통과하지 못한 지금의 비평은 그러한 가르침을 전수한 담론의 자장에서 당연히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비평이 2000년대 시를 지속적으로 호출하는 것은, 이제는 ‘명명’의 불완전함을 실감하게 된 비평이 전위를 선언하지 않고도 새로 씌어진 작품의 의미를 선취하기 위해 고안한 방식일 수도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작품의 새로움을 소비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상황을 지연시키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만약 그와 같은 독법만을 계속해서 따르게 된다면 2010년대 시의 단독성이 제대로 존중받을 길은 묘연해진다. 동시대의 작품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비평의 가능성조차도 지연되는 것이다.
시인에게 육박해오는 현실이 언어로 수행되는 것이 시라면, 문학사적인 지형을 그리는 작업에 있어서도 시가 쓰인 해당 시기에 대한 고려가 동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태껏 비평은 지금의 시편들이 쓰이고 있는 현실의 양태를 제한적으로만 살피느라, 그에 대한 충실한 사유를 전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버린 시편은 저 자신을 면밀하게 내보이기 위해서 오늘날의 현실에 좀더 발랄하고 적극적으로 조응하고 있지는 않는가. 다시 묻는다. 2010년대 시는 다른가? 2010년대 시에서 말하는 자는 어디에, 어떻게 있나.
2. 현시—‘작은 것’들의 정치성
신형철(申亨澈)은 2000년대 시가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이라는 정치적 조건하에서 ‘극적 독백’의 화법을 발굴했고, 그후 정치적인 변화가 딱히 없다고 할 만한 2010년대에는 앞선 시들로부터 받은 영향에 따라 시들이 ‘감응적 인물’을 창조한다고 했다.2) 그러나 2010년대 시에서 “현실의 배치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다른 감각-미학적 체제의 정치성”3)을 읽어내는 일이 가능한지를 밝히기 위해선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만약 예술의 변화와 체제의 변화가 연동되어 있다면, 어떤 정치적 상황을 주요하게 볼지에 따라 예술작품을 평가하는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학은 오히려 공적인 담론으로 포섭할 수 없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일어날 때 그와 더 잘 부합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이하 ‘안녕 대자보’) 현상은 2010년대 시에서 정치적 상황 변화와 연동이 가능한 미학적 변화를 찾아볼 수 있게 하는 단초를 마련해주는 것 같다. 가정을 구체화해보자. 먼저 ‘안녕 대자보’는 대자보라는 오래된 매체를 이용해 낯익은 방식의 소통을 시도한다. 과거 학생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대자보는 보통 낡은 매체로 여겨진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쓰임새를 이미 알고 있는 이들에게 대자보는 접근성 있는 매체다. 매체의 변화에 따라 낡았다고 여겨졌던 과거의 방식이 현재에 되풀이되면서 유효한 창구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안녕 대자보’가 붙고 읽힐 적마다 사람들은 일상을 잠시 중단한 채 자신의 삶이 처한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일상에 삽입된 대자보가 사람들의 삶을 내재적으로 비틀어 틈새를 만들고, 급기야는 으레 고정되어 있는 줄만 알았던 일상을 재배치할 수 있게끔 도운 것이다.
2010년대 들어서 첫 시집을 발표했거나 곧 발표할 예정인 시인들의 화법 역시도 낯익은 방식의 재편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통사구조를 크게 거스르지 않는 입말에 가까운 시어들로 시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시더러 낯익다고 말하는 것이 어쩐지 적절치 않아 보일 수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했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애써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의 말들이란 응당 익숙한 문맥으로부터 고립을 자처하고, 상징질서의 위반을 모색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시가 문단에 불어넣었던 활기도 낯선 시어들의 역할로 인해 가능한 것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익숙함과 생경함은 맥락에 따라 다른 함의를 가진다. 김수영이 시의 형식을 깨뜨리기 위해 “시적인 말과 비시적인 말 사이의 차이를 없애고”4) 시가 될 수 없으리라 여겼던 날것의 언어를 시에 들여왔던 때에는 오히려 그것이 낯설고 새롭다는 대우를 받았다. 이는 2000년대 시의 화법에도 해당하는 얘기다. ‘낯설게 하기’ 자체가 더이상 낯설지 않을 때, ‘낯섦’은 ‘낯익음’과 동의어가 되고, 도리어 종래의 ‘낯익음’이 새로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010년대 시는 이렇게 익숙한 말하기 방식으로, 시는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를 넌지시 묻는다.
‘안녕 대자보’의 또다른 특징은 ‘안부’를 묻는다는 점이다. ‘안녕 대자보’에서 자보를 쓴 이는 ‘나’의 상황을 밝히면서 불확정적인 ‘당신’의 존재를 먼저 묻고, 그에 따른 응답을 요청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선언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예감 속에서 ‘너’의 답변을 기다리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방식이 오히려 우리의 대화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안녕 대자보’는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외양을 띤 채로 관계를 형성하고, 내용의 완결을 유보한 채 계속해서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대의(代議)로는 불충분했던 소통이 일상적인 말하기 구조를 통해서 추동되는 것이다. 지배적인 정치체제로는 포괄할 수 없는, 이른바 ‘공적인 영역’을 벗어난 말의 움직임이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주체성을 회복하고 대화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데, 이는 기존 정치의 바깥에서 ‘정치’의 범위를 확장한 경우라 할 수 있겠다.
2010년대 시가 누군가를 대리하지도 않고 어떤 인물을 창안해내려는 욕망도 없이 오롯이 ‘나’의 말 걸기(顯示, presentation)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안녕 대자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잠재적인 대화관계가 여기에서도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시적주체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너’를 요청하는 발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너’가 아직은 내가 요청한 자리에 없음을 인지한 채로 자기발화가 이어진다는 뜻이다. 오래전 시들의 발화방식이라 여겨졌던 ‘독백적 말하기’와는 다르게, 2010년대 시는 고독과 다정함이 혼종적으로 묻어나는 야릇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때문에 기존의 비평에서 ‘시적주체’ ‘시적자아’와 같이 ‘나’를 일컫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됐던 개념은 비평적 거리를 확보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환되고 동시에 ‘나’의 범위 역시도 재구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3. 시—작은 것들의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어떻게 다른지 구체적으로 읽기로 한다. ‘낯익은 화법’을 구사한다는 말은 시가 단순히 가독성이 높기 때문에 꺼내든 얘기는 아니다. 2010년대 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두기 이전에, ‘무엇을’ 위해 ‘어디에서’ 발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시들은 시어들 간의 의미 간격을 멀리 두는 날이 선 비유들을 구사하기보다는, 시구(詩句)와 시구를 어떻게 배치하는지에 따라 의미를 분화해서 표출하는 방식이 눈에 띄도록 한다. 또한 통사구조를 뒤틀고 해체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뒤틀리지 않은 통사구조의 시구들을 이어나가고, 와중에 시의 화자인 ‘나’의 사유가 중단되는 지점을 마련하여 텍스트 내부에 틈새를 마련한다. 그 자리에 타자를 연루시키는 ‘나’의 또다른 사유가 틈입하면서 시적 현장은 본격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주체의 기이한 화법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던 2000년대 시의 ‘낯선’ 출현과는 사뭇 다르게, 화자인 ‘나’의 낯익은 화법으로 대화적인 관계를 잠재적으로 촉발하고 있는 한편의 시를 먼저 읽는다.
거기를 지날 때마다 나는 반반을 고민한다.
간판에는 장의사라고 반듯하게 박혀 있고
미닫이문에는 영어로 드럼 레슨이라 적혀 있는,
거기는 낡았지만 웃기는 구석이 있다.
관을 짜는 사람과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이
한 건물에 다른 연장과 집기를 들여놓고는
하나가 염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스틱을 닦을
거기, 나는 그들의 반반이 궁금하다.
(…)
내 생의 반쪽과 사과 한알의 반쪽,
적도의 위아래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
내가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손쉬운 이분법도 거기를 지날 때 시작되었다.
—백상웅 「반과 반」 부분(『거인을 보았다』, 창비 2012)
시에서 화자의 눈길은 “장의사” 간판을 달고서 “드럼 레슨”이 적힌 입구로 모양새를 갖춘 한 상가에 닿아 있다. 지금 화자는 이질적인 이름이 하나의 장소에 모이게 된 이유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는 확신이 섰을 때가 아니라 무엇 하나도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이어지는 태도기 때문이다. 화자는 왜 고민하는가? 무엇이 진짜라고 판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화자가 지나치는 저 상가 안에서 “관을 짜는 사람”이 죽음과 늘 마주해야 하는 상황도 진실이고,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이 심장소리와 비슷한 비트에 몸을 맡기며 생충동을 자극하는 상황도 진실이겠다. 어느것이 진짜고 어느것은 가짜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인바, 이 이질적인 상황이 나란히 동행해 있는 풍경에 화자는 손쓸 새 없이 노출되고 마는 것이다. “반쪽”짜리 정체성은, “반반”씩 걸쳐져 있는 그 상황 자체를 사실로 삼아 “거기”에 그저 있다.
여기에서 다시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여전히 고민하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나’의 고민은 혹시 “적도의 위아래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와 같이 “손쉬운 이분법”을 통해 어느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밝히려는 시대의 방식에 몸을 맡기려는 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닌가. 같은 시집의 「괴물의 발명」에서 시인이 “세상의 모든 합체는 윤리에 어긋난다”라고 말할 때, “합체”란 차이를 파괴한 채로 기존 사회질서를 움직이는 힘의 원리에 따라 ‘동일화’하려는 자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이를 상기한다면 “끊임없이 반과 반을 고민”(「반과 반」)하고 있는 화자의 눈앞에 놓인 대극(對極) 중에서 무엇 하나만을 살려두어야 한다는 방식은 오히려 더욱 위험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이분법”을 사용하려고 드는 우리의 방식은 얼마나 “손쉬운” 것인가.
인용시는 “장의사”라는 간판과 “드럼 레슨”이라는 표시를 다른 것이라 치부하는 ‘나’의 포착을 행갈이로 나누어서 보여준다. 그런데 ‘나’의 사유가 이들 풍경에 멈춘 채 “관을 짜는 사람”과 “드럼을 두드리는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연상하기 시작할 때, 이들의 사연은 각각 하나의 행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나가 염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스틱을 닦”듯이 같은 시구에 나란히 배열되어 드러나거나, 혹은 앙장브망(enjambement, 구句의 걸침)을 이용한 배치를 통해 “거기”가 이미 각자의 “반”을 잘라 붙인 이음매를 드러내면서 살고 있는 장소임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화자의 고민과는 달리 이들은 “죽음과 음악을 다툼 없이 공유하는 법을” “한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또다시, 고민의 자세가 끊임없이 문제다. 이 상황을 이를테면 “거기 주인이/시체를 닦으며 드럼을 치는 사람이거나/장의사가 망한 자리에 드럼 치는 사람이”(같은 시)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진실로 여기는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끝까지 “반과 반을 고민”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해야 하는 삶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전시하는 백상웅(白象雄) 시의 화자는 결국 이 상황을 결정론적으로 막을 내리려 한다기보다는 유보하는 ‘고민’의 자세를 택한다.5) 고민이 진행될 때마다 ‘미안함’과 ‘애틋함’이라는 화자의 감정이 내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속에서 늘 애매한 ‘나’는 나를 고민하게 하는 대상들과 ‘공감’으로 결합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하고자 한다.6) 이는 통합적인 서사를 지향하는 대화로 화자의 감정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적인 교환이 수행되는 과정에 ‘나’를 위치시키는 작법이다. 따라서 인용한 위의 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거기의 문이 열린 모습을/본 적이 없다”라는 생각에 닿을 때, 독자는 시에서의 ‘나’의 시선을 따라 익숙한 배치의 이미지들이 내장한 균열에 눈길을 던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왜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데 이르지 못한 채 감정이입만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2010년대 시의 무수한 ‘나’는 누군가를 대리하려고도, 어떤 인물(character)을 창안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7)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고백으로 침잠하지도 않으려 하는데, 이는 시의 화자가 ‘타자’에 대한 생각을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봐도, ‘나’는 타자의 단면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장악하지도 구속할 수도 없는 존재가 ‘타자’임을 떠올린다면, 그 한계를 감수하는 방식이 때로는 정직하게 윤리에 복무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육박해오는 타자의 자취를 인정하면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 누구도 대의할 수 없는 ‘나’와 ‘너’의 ‘대면’을 통해 잠재적인 대화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방식. 앞서 ‘안녕 대자보’의 ‘안부를 묻는’ 말하기 방식에 대한 평가를 빌려오자면, 확신할 수 없는 예감 속에서 ‘너’의 답변을 기다리는, 조심스러운 태도가 2010년대 시에는 있다. 황인찬(黃仁燦)의 시를 읽는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다
이곳은 따뜻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나는 밥을 먹고, 불을 피우고, 눈을 뜨게 된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 거기에 끌려 여기에 온 것 같다
죽은 사람이 나를 보고 수인사하지만 나는 그를 모르고
그도 나를 모르겠지 이곳의 상냥함이
계속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너는 내 몸이 아니구나, 아니구나 내 몸이구나
나는 오늘도 밥상머리에서 떠올린다
이듬해 구름이 미리 흐른다
(…)
죽은 사람과 밥 한 그릇도 나눠 먹어야지
이곳은 빛이 꺾여 들어오는 방이다
비가연성의 캄캄함이 겨울에도 내려온다
—「목조건물」 부분(『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인용한 시에서 ‘나’가 있는 ‘목조건물’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데도 “따뜻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화자인 ‘나’가 같은 시에서 “밥을 먹고, 불을 피우고, 눈을 뜨게 된다”라는 진술을 차례로 이어갈 때, 이곳은 어쩌면 “죽은 사람”이 누워 있는 ‘관’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죽음의 상태에 진입한 자인가? 확신할 수는 없더라도 다른 이를 일컬어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걸로 보아 ‘나’는 아직 삶과 죽음의 중간이라는 애매한 층위, 즉 가사상태에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상태조차도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 ‘목조건물’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나’의 상태도, 죽은 사람의 정체도, 그 무엇도 쉽게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의 익명성이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상대에 대해 무분별하게 아는 척하지 않아도 이곳은 충분히 “따뜻한” 곳이기 때문이다. ‘목조건물’에서 ‘나’는 청각(“먼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과 미각(“밥을 먹고”)과 촉각(“불을 피우고”)같이 오직 감각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이 애매하지만 편안한 상태인 ‘나’가 기어코 외부와 맞닥뜨리는 지점이 4연에서 나타난다. “나를 보고 수인사하”는 “죽은 사람”이 곧 ‘나’의 육신일 수도 있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나’ 앞에 등장한 몸은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므로 그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한편, ‘나’와 유사한 구석이 있으므로 차마 등돌리지는 못하는 연결된 대상으로 자리한다. “너는 내 몸이 아니구나”라는 부정이 마치 하나의 시구를 반으로 접어서 그 반대편에 흔적이 묻어나게 한 듯 “아니구나, 내 몸이구나”라는 수용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몸은 언제나 이성의 타자 자리에 놓여 있음을 상기해볼 때, 화자인 ‘나’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몸이 타자임을 지금 막 인식하기 시작한 듯하다. 때문에 화자는 타자로부터 건네받은 메시지를 듣는 자세를 취한다. 확신할 순 없지만, “아니구나 내 몸이구나”라는 메시지를 들은 이후에야 화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도 “살아 있는 것 같”(같은 시)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나’는 타자를 ‘나’에게 귀속되지 않는 이타성 속에서 경험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라는 말의 수행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나’와 ‘너’는 ‘우리’이기 이전에 “밥 한 그릇도 나눠 먹”어야 하는 의존적인 관계다.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캄캄함”이 ‘나’와 ‘너’가 나란히 있는 곳에 내려올지라도, ‘나’의 말은 ‘너’와의 대면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만 가능하기에 나는 ‘너’를 내내 좇을 것 같다. 그 곤혹을 황인찬의 ‘나’는 감당한다.
황인찬 시가 ‘너’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잠재적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앞으로 ‘너’와 공감하기 위한 공존관계를 모색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길항하는 대화의 과정 속에서 ‘나’의 타자에 대한 인식은 예상하지 못한 지점을 맞이하고, 이러한 상황이 화자인 ‘나’가 있는 공간을 과정으로서 파악하도록 만든다.
‘나’의 말과 ‘나’에게 들리는 ‘너’의 말이 잠재적으로 대화를 형성하는 속에서 시를 쓴다는 사실은 ‘시는 자아의 세계화’라는 정리(定理)를 재고하게 만든다. 자아가 실은 타자의 재현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일 때, 세계는 이미 대상과 ‘나’ 사이의 상호침투적인 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2010년대 시는 낯익은 화법으로 ‘나’를 내세워 ‘너’를 요청하는 ‘잠재적인 대화의 관계’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씌어지고 있다. 이전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읽기의 곤궁을 호소하던 독자 역시도 2010년대 시를 읽을 때에는 각 시구의 배치를 통해 형성된 의미 층위에 불편 없이 참여하거나, 또는 화자가 마련한 사유의 틈새에 개입하는 전환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이것은 누구나 애초부터 시를 읽기 위해 밟아야 하는 당연한 수순 아닌가? 2010년대 시는 결국 시의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2000년대 시와는 다른 방식으로 던진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을 ‘작은 것들의 정치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불러도 될까. “삶 자체의 근저에서 형성된 언어를 요청”8)하면서 쓰이는 시의 말들이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해가는 과정, 하여 다른 현실을 직조해나가는 과정 중에 획득되는 감각과 인식의 재편성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4. 삶과 문학의 실험
질문은 추가되어야 한다. 2010년대 시와 ‘안녕 대자보’에 참여한 주체들은 왜 익숙한 방식으로 ‘대화’하려 하는가. 지금 한국 사회에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앞서 우리는 현실에서 막 발화(發話)하기 시작한 이들과 2010년대 시의 다른 말하기 방식으로부터 ‘작은 것들의 정치성’을 들었다. 이들은 가장 일상적인 말로, 혹은 시에서 가장 근원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목소리/발화로 다른 관계의 형성을 요청/대화한다. 이는 역으로 대화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발화하지 못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겐 ‘너’가 필요하다. 이 작은 움직임들이 종국에는 공동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리라는 예감은 그래서 가능하다. 당장의 급격한 도약을 실현하진 못할지라도 잠재적인 가능태로서 다음의 현실을 상상하는 과정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맥락을 단절시키고, 다른 맥락으로 급격히 물살을 바꿔내는 거대 사건만이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것들의 정치성은 혁명이나 전위 같은 수사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개개의 운동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표출되고 교통하는지 그 흐름의 지형을 그려내며 다음을 기약한다. 이로 인해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그 에너지가 어떻게 전화(轉化)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삶과 정치가 실험되지 않는 한 문학은 실험될 수 없다”9)라는 진은영(陳恩英)의 말을 바꾸어 읽어야 할 것 같다. “삶과 정치가 실험되고 있다. 문학도 그러하다.” 이 실험은 미비하고 가늘 수 있다. 어쩌면 매우 희미하게 드러나므로 그 기미가 잘 잡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때문에 우리에겐 어떤 조짐이라도 그를 엄정하게 읽어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실험의 보고서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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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이광호 「비성년 커넥션」, 『문학동네』 2013년 여름호; 조재룡 「주체에서 주체로 이행하는 목소리의 여행자들」, 같은 책; 김수이 「시, ‘인간’을 향한 듣기와 발성 연습」, 같은 책.
2) 신형철, 앞의 글 370~75면.
3) 김수이, 앞의 글 393면.
4)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문예중앙 2012, 192면.
5) 백상웅의 또다른 시 「불변의 불면」(같은 책)에는 “자본을 경멸하면서 나를 묵인하고, 폭력에 분노하면서 나를 용서하고…… 이건 따돌림당하는 기분인데?/사랑해도 좋나 모르겠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줄임표는 시인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사이에서의 머뭇거림을 이미지로 등장시킨 것 같다.
6) 리처드 써넷(R. Sennett)은 시스템의 한계로 인해 폭압적인 상황이 빈번한 지금 시대에 공동체를 재구상하기 위한 방식으로 ‘감정이입’을 제안하면서, ‘공감’과 ‘감정이입’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공감과 감정이입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협력을 실천하기 위해 모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공감의 경우는 타인과의 동일시로 이어지기가 더 쉽다. ‘공감적 반응’은 상대를 모방하는 일을 더욱 부추기면서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변증법적 연극을 위한 하나의 감정적 보상”으로 기획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감정이입은 “그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에 “대화적 교환”에 더 많이 연결된다. 여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모방’이 아닌 상대의 얘기를 “듣는” 기술이다. “애도의 말을 할 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이 겪는 시련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감정이입은 유별나게 정치적으로 많이 응용된다.”(리처드 세넷 『투게더』, 김병화 옮김, 현암사 2013, 49~55면)
7) 2010년대 시의 작품 속 화자들은 새로운 인물을 ‘가면’(persona)으로 내세우는 경우에도 결국 가면 뒤의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방식이었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만다. 이에 대한 논의로는 졸고 「요청된 오독」, 『문학선』 2012년 가을호; 「누구에게 이것을 바칠까? (2)」, 『문학들』 2013년 여름호 참조.
8) 이장욱 「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296면.
9)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