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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비평담론의 사회성을 찾아서
‘다른 세상’에 대한 물음
‘창비적 독법’과 리얼리즘론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창비적 독법’과 리얼리즘론
‘창비적 독법’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물어놓고 보니 우문 같다. 1966년 창간되어 5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계간 『창작과비평』의 존재감이나 지속적 영향력을 ‘창비’가 일구고 지켜온 문학론이나 현실에 대한 태도와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테다. 위기의 민족현실에 대한 온당한 인식과 실천적 관심을 촉구하며 출발한 창비의 ‘민족문학론’이 한국문학의 주체적 시야를 정립하는 간단치 않은 과제를 감당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 내적 긴장과 민중적 활력을 파수하고 북돋았음은 두루 아는 이야기다. 그것은 문학의 이름으로 수행된, 인간다운 삶의 실현을 가로막는 세력과의 역사적 싸움의 도정이었다. 창비의 문학관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간에,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창비의 민족문학론은 문학 내적으로는 ‘리얼리즘론’으로 구체화되고, 현실인식의 차원에서는 ‘분단체제론’으로 깊이와 폭을 넓히면서 비단 문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실천이론으로 한국사회의 진로 모색에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아마도 문학의 사회성을 ‘근원적 진리’의 자리에서 사유하고 점검해온 가장 뜨겁고 치밀한 비평담론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인간해방’이나 ‘역사발전’ 같은 대의에 대한 회의가 유행처럼 번진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사회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창작 현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그 변화가 집단/개인, 이념/탈이념, 해방적 정치/욕망 등등의 손쉬운 이항구도의 일방적 진행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런 변화에 맞선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실천적 대응력에 의문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근자에 와선 창비 내부의 문학담론에서조차 ‘민족문학’이란 단어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문학론을 제기하고 그것을 여전한 문학적 역사적 실천의 과제로 삼는 문제의식에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처음부터 민족문학론의 핵심적 관심사이던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분단체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노력이 성숙해감에 따라, ‘민족문학’이라는 틀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실행하는 데 제약이 많다는 인식이 커지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극복이 ‘민족문제’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세계체제 변혁작업의 일환이요, 또한 남한사회 내부의 딱히 ‘민족적’이랄 수만은 없는 여러 모순들을 해결하는 개혁과 직결된 사업이니만큼, 민족문학론의 일정한 상대화가 불가피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 민족문학론을 제기할 때의 초심을 견지한 데 불과하며, 민족문학의 깃발이 전면에 나부끼지 않는다고 비통해할 이유도 없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역사를 묻고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동시에 묻고자 하는 민족문학론의 초심마저 버리라고 다그치는 것도 우스운 짓이다.1)
사실 민족문학론이 하나의 이론이기에 앞서 문학과 역사를 대하는 실천적 자세와 태도의 문제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민족문학의 깃발’이 전면에서 나부끼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을 테다. 인용문에서 ‘민족문학론의 초심’으로 표현된 물음(“‘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역사를 묻고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동시에 묻고자 하는”)은 ‘동시에’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하나의 물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적어도 1966년 『창비』 창간호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이래로 창비 문학론의 실질적 대표자인 백낙청(白樂晴)의 비평에서 이 두 물음을 하나의 물음으로 ‘동시에’ 묻는 일은 중단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미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지만, 여기에 ‘민족문학론’조차 방편으로 만드는 창비(정확히는 백낙청) 문학론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그 문학론은 인간해방으로 나아가는 역사 창조의 도정과 문학의 길이 다르지 않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그 하나의 길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창조하는 ‘진리’의 자리를 참된 문학예술의 몫으로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만큼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의 근원적인 동질성이 천명되고, “진정한 시의 새로움은 곧 역사의 새로움”2)이 된다. 소외의 표현에서 이룬 나름의 예술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한 일정한 체념과 퇴각, ‘삶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두려움’을 기초로 하고 있는 모더니즘이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종래 서구의 리얼리즘론이 쉽게 따라야 할 길이 되지도 않는다. 객관현실의 미학적 반영을 강조한 루카치(G. Lukács)의 리얼리즘론은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관념적 실체론’의 약점을 드러낸 것으로 비판되는데, ‘진리의 구현’이라는 ‘시적 창조’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이 (…) 독자적 명칭을 요구하는 근거가 바로, 인간의 세계는 ‘현실’로서 인간이 체험하는 그것 이외에 따로 없지만 이 현실의 정확한 인식은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하며 따라서 진정한 ‘사실성’에는 이상주의가 가세할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비이상주의적이며 철저히 현실적인 전투성이 주어진다는 세계인식이 그것이다.3)
여기서 “‘시적’ 창조의 과정에서만 가능한” “현실의 정확한 인식”이 곧 ‘진리’의 드러냄(드러남)과 구현일 텐데, 지식(알음알이)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근원적 진리’의 자리를 상정하고 그 진리의 구현에서 ‘시적’ 차원의 계기를 강조한다는 점은 백낙청 문학론의 중핵이라 할 만하다. 후에 ‘시의 경지’로 더 많이 표현되는 이 진리의 자리는, 로런스(D. H. Lawrence)의 소설관을 이야기하면서 소개한 ‘being’의 차원4)과도 맥을 같이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차원에 미달해 있는 한에서는 “사회적·역사적 총체성을 강조하는 루카치의 사상도 삶의 진실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는 셈이 된다.”5) 그런데 그 차원이 “실존의 과정에서 도달하지만 도달하는 그 순간 이미 실존의 차원, 유·무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동양적 ‘도(道)’의 깨침이나 종교적 각성의 순간과 방불한 것일 테다. 기실 ‘사람이면 누구나 타고나는 본마음’ ‘양심(良心)과 양지(良知)’의 차원에서 역사와 문학의 문제를 사유한 것은 백낙청 문학론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이 점에서 초기 평론의 한 각주6)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각주는 ‘존재’라는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체험을 뜻하는 것으로서 독일어 ‘Sein’(이다-있다)을 서구 형이상학의 망각과 소외의 역사로부터 구해내려 한 하이데거(M. Heidegger)의 철학을 소개하는 가운데, ‘Sein’의 역어로 ‘임’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임’이라는 낱말이 최선의 번역이 못 될지는 몰라도, 종전의 존재론과 사물관을 그대로 담은 ‘존재’라는 말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은 이 글의 논리전개를 위해 긴요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던 서구 형이상학의 시각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핵심 개념어를 둘러싼 고심에 뚜렷하다. 분명한 것은 백낙청의 문학론이 과학과 이성, 계몽의 신화 위에 구축된 근대 서양의 지배적 진리관을 비판하고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진리관7)을 모색하는 작업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 진리관을 제대로 간추릴 능력은 없지만, 요체는 진리란 객관적 대상적 인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실천 과정에서 그때그때 ‘드러나고’ ‘이룩된다’는 생각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창조적 실천은 역사발전이라는 목적론적 대의에 봉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사람이면 누구나 타고나는 본마음’ ‘양심(良心)과 양지(良知)’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인 한 자연스럽게 역사발전(인간해방)의 흐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서양 근대의 진리관, 과학적 진실(지식)의 범주는 (단순히 부정되고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창조적 실천의 장에서 드러나고 이룩되는 ‘근원적 진리’ 속으로 지양되고 합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게 ‘본마음’에 대한 물음일 텐데, 기본적으로는 삶의 도리와 관계된 만인공유의 인간적 바탕이면서도 좀더 구체적으로는 기왕의 역사전개에서 확인된 다수 민중의 각성된 의식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바탕조차도 근원적 진리가 드러나는 역사적 실천의 장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결국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구체적 실천 속에서 확인되고 생성되는 것인 듯하다.8) 인간과 역사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관인 셈이다. 물론 ‘근원적 진리’가 또다른 형이상학적 위계의 설정은 아닌지, 동양적 관념론의 한계를 진정 넘어서고 있는지 등등 다양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 대한 면밀한 이론적 검토를 수행할 능력도 없거니와, 애당초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테두리’에서 해결되지 않는 ‘진리’에 대한 물음이란 근대과학의 이론적 검증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지점을 품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싶다. 그것은 어쩌면 이론에 앞선(혹은 이론을 넘어선) 존재적 실감, 신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근원적인 진리를 인식의 정확성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물으며 걸어야 할 ‘길’로”9) 비유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근원적 진리의 모색과 관련해서 문학예술이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는 생각이 백낙청 문학론의 또다른 핵심임은 잘 알려진 대로다. 사실 개념적 언어나 명제적 진술로 제시될 수 없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 한다면, 그것이 문학예술의 형태로 표현되고 체험된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백낙청은 과학적 진실보다 예술적 진리가 우위에 있다는 점을 살핀 뒤, 문학예술이 그 자체로 탁월한 진리 탐구의 양식임을 밝힌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예술에서 우리가 얻는 기쁨”은 “단순히 ‘심미적’ 쾌락이라거나 개인적인 감동이 아니고 바로 ‘진리’를 깨닫고 ‘도’에 이르는 순간과도 견줄 바 있는 것”10)이 된다. 이것은 백낙청의 리얼리즘론이 최상의 예술적 창조가 이룩되는 ‘시의 경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터이다. 가령 세부의 진실성과 전형성의 구축을 통해 현실반영의 미학적 충실성을 따지는 종래의 리얼리즘론에서는 객관적 현실인식의 층위를 넘어서는 ‘근원적 진리’의 차원은 건드릴 방법이 없다. 따라서 객관적 총체적 현실인식을 아우르고 관통하는 “투철한 참여정신과 엄정한 객관정신이 조화롭게 결합된 지공무사의 경지” “참된 의미의 중도(中道)” “사무사(思無邪)의 경지”11)가 예술적 창조의 관건이 된다. 한편의 시도 그러하지만, 소설의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경지가 예술적으로 구현되는 ‘시의 경지’에 이를 때만 ‘근원적 진리’의 드러남에 기여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이론들과의 비판적 대화를 거친 치밀한 이론적 실천적 모색의 산물이라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백낙청 문학론의 난점은 ‘근원적 진리’나 ‘시의 경지’라는 말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는 명료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지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기실 인식과 실천이 하나인 ‘깨달음’이라는 높은 수준의 인간 행위를 상정하는 순간, 이 ‘곤혹’은 예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진리와 깨달음의 영역을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넘어오면 당장의 회의적인 시각을 이겨내기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12) 회의적인 시각의 뿌리를 서구 형이상학의 한계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암암리에 조성해온 왜소하고 패배적인 문학이념에서 찾는다고 해서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한국문학 비평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실패’ 혹은 ‘불가능’이 아닌가 하는데, 여기에 유행하는 서구 담론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나름 하나의 실감을 통해 구체화되어온 문학과 현실에 대한 중대한 태도 변화가 있는 것 같다. 백낙청 문학론에서 말하는 ‘근원적 진리’가 인간의 본마음이나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면, 적어도 그런 차원의 ‘대문자 진리’의 추구는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그것일 테다. 그리고 그럴 때 문학은 가능성의 자리가 아니라 불가능성, 혹은 실패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진실’에 충실함으로써(이 ‘진실’은 오인이나 오작동 혹은 뒤틀린 증상으로 드러나기 십상이어서 이에 대한 미학적 정신분석학적 해명이 비평의 관건으로 떠오른다) 역설(아이러니)의 방식으로(만) 기왕의 세계현실이 강요하는 것과 다른 시선, 다른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것은 그저 정신분석학 담론의 위세를 업은 모더니즘적 문학이념의 회귀에 불과한 것일까. 이 문제에 관한 한, 그것이 회통(會通)이든 흡수든 극복이든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 구도가 생산적인 논법이 아님은 이미 여러차례의 논쟁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에게 별다른 관점이나 준비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작품을 놓고 전개된 비평의 언어를 통해 이른바 ‘창비적 독법’을 대표하는 백낙청 문학론의 실질적 양상을 알아보고, 최근 강력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또다른 ‘비평적 독법’과의 차이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 리얼리즘론의 현재성—‘2교시’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
연전에 있었던 한 대담13)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박민규(朴玟奎) 소설에 대한 백낙청의 애정 어린 독법을 두고 대담자인 황종연(黃鍾淵)은 이렇게 말한다. “박민규 소설처럼 사실주의의 기율을 고의로 저버린 작품을 흥미와 애정을 가지고 읽고 있는, 더욱이 거기서 시적 기법을 발견하는 백낙청의 독법이 내겐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비평가로서 그의 감각이 내가 평소 짐작하던 것 이상으로 유연하고 활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14) 아마도 이것은 이른바 ‘창비적 독법’에 대한 외부의 시선을 거의 표준적으로 보여주는 언급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앞서도 부분적으로 소개했지만 백낙청은 자신의 리얼리즘론이 사실주의를 넘어서서 모더니즘조차 비판적으로 극복한, 심화된 리얼리즘의 재구성임을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과제론’으로 설명된다.
백낙청은 사실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예술적 창조성의 핵심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못박는다. 자연주의는 물론이고 사실주의와도 구별되는 리얼리즘을 주창해온 것도 바로 이런 인식에서이며, 기왕의 리얼리즘 문예론의 근간인 반영론을 한편으로 끌어안으면서 궁극적으로 넘어서는 일종의 ‘이중과제’를 리얼리즘론 갱신의 관건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반영은 예술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는 한쌍의 명제 중 어디에 역점을 둘지는 주어진 역사적·문화적 맥락과 과제에 따라 달라진다. 모더니즘에 맞서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일이 시급했던 70년대의 상황에서는 반영의 중요성에 좀더 방점을 찍었다면, 다양한 리얼리즘론이 각축한 80년대 이후로는 반영론의 극복에 더 무게를 두어왔다. 리얼리즘의 근본적 갱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에게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근자에 올수록 그런 지향이 더욱 전면화되고 있는 것이다.15)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명료하게 정리되지만, 외부에서는 끝없는 오해와 시비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혼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리얼리즘의 갱신’을 일반이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한국문학의 현장과 밀착된 구체적 작품비평을 통해 검토하고 모색하는 과정이 그다지 충분치 못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도 일견 리얼리즘적 전통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박민규 소설을 백낙청이 높이 평가하고,16) 『핑퐁』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한 작품비평(본격적인 작품론은 아니지만)에서 자신의 ‘독법’을 보여준 대목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실 2000년대 한국소설의 현장에서 박민규 소설이 그 특이한 어법과 문체, 혼종적 상상력을 통해 성취해낸 소설적 모험의 활력에 대해 이의를 다는 평론가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인 지점으로 들어가면 박민규 소설만큼 그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나 싶다. 앞서 인용한 대담에서만 해도 박민규의 단편들이 긴밀한 “언어적 표현의 연쇄를 통해 작품의 짜임새를 갖”는다거나 “좋은 시에서와 같은 굉장한 언어의 에너지”를 통해 “현실에 대한 일깨움을 준다”는 백낙청의 평가에 대해 황종연은 의견을 달리한다. “박민규 소설은, 특히 단편은 양식상으로 보면 한마디로 우화가 아닐까? 어떤 현실의 그럴듯한 가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력에서 자유로운, 그러면서 재미와 교훈을 주려고 재치를 발휘한 이야기가 그의 단편의 특징 아닐까? 어떤 경우 박민규 단편은 내게 대중소비사회의 이솝우화처럼 보인다.” 박민규 단편을 우화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도의 문제이겠지만, ‘재미’와 ‘교훈’, 그리고 ‘재치’라는 표현에는 일정한 가치 평가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교훈’은 박민규 단편의 ‘우화’적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제대로 된 문학작품이라면 일차적으로 피해야 할 상투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꽤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백낙청은 박민규 소설을 교훈과 연결 짓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박민규 소설이 ‘이야기 위주의 구성’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만큼 줄거리나 메시지를 ‘요약하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소설을 짜나가는 기법이 기본적으로 ‘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흥미로운 대립각이라고 생각된다. 박민규 소설이 언어의 연쇄, 비유의 연쇄를 이용하여 독특한 소설적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한쪽은 이 독특한 언어 운용술이나 기법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고 오히려 소설이 어떤 메시지로 쉽게 요약되고 환원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한쪽은 바로 그 기법으로 말미암아 그같은 요약과 환원을 어렵게 만드는 소설의 복합적 층위가 생성되고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소설언어의 운용을 ‘시의 특성’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백낙청의 독법이 궁극적으로는 ‘시의 경지’에서 일어나는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재현이나 반영의 한계를 넘어서는 ‘리얼리즘론’과 어떤 접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짧은 대담의 내용만으로 예단하기는 어렵다.17) 전위적 소설미학에 좀더 개방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황종연이 대중문화나 여타 하위장르의 키치적 이질적 상상력을 독특하게 변형하고 재구성하면서 번져나가는 박민규 소설언어의 운용에 박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대담의 발언만으로는 더 살피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언어의 연상작용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황당한 비약처럼 보이는 서사의 흐름에 나름의 내적 긴장을 확보하고 곁가지 서사의 자유를 방치하는 듯하면서 조율하는 박민규식 소설기법은 그 적절한 통제의 수준을 놓칠 때 언제든 언어유희적 재담에 그칠 위험을 안고 있다. 성공적인 작품에서는 백낙청이 언어의 ‘시적 사용’이라고 부른 측면이 최대한 확보되면서 소설의 다층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반면, 그렇지 않을 때 소설의 알레고리적 양상이 확대되고 ‘재치’와 ‘교훈’ 수준에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박민규 소설의 ‘은유적 단일 코드’가 노출하는 문제점에 대해 그간 여러 비판적 접근들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18)
백낙청 역시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핑퐁』에 대해 “반면에 그런 기본적인 건강성에도 불구하고 ‘2교시’에 대한 탐구에 치열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1교시’를 서술하는 과정에서도 다분히 습관화된 재담으로 흐르는 대목이 있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19)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다분히 습관화된 재담으로 흐르는 대목’은 일차적으로 언어의 ‘시적 사용’이 실패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20)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떤 ‘단일한 비평적 코드’로 정리하고 평가하는 일이야말로 백낙청 비평이 극구 피해온 일이기도 한데, 문학에 대한 물음을 ‘개별 작품에 대한 개별 독자의 반응을 토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 따르더라도 한 작가의 작품들 역시 그 개별적 성취를 낱낱이 따지는 일이 우선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조차 그러한 소설적 성취의 미흡을 “‘2교시’에 대한 탐구에 치열성이 부족”한 데서 찾는 점에서 그 자신의 비평적 입장을 선명히한다. 사실 이 ‘2교시’의 문제는 백낙청의 『핑퐁』 평가에서 이중의 날이기도 하다. ‘은유적 단일 코드’로서 『핑퐁』의 ‘탁구계’가 소설의 질문을 단순화해버렸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 백낙청의 의견은 다른 것 같다. “탁구로 대표되는 공상적인 세계는 알레고리나 상징이라기보다 소설의 주제를 추동해가는 일종의 수사적 장치”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인류의 세계—‘못’과 ‘모아이’ 두 중학생 입장에서는 왕따와 폭력배에 의한 일상적 구타 및 갈취 그리고 무의미한 공부에 시달리는 학교생활에 더해 ‘다수인 척’하며 살아가는 다수 인간들의 절망적인 이 세계—에 숨통을 열어주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55~56면) 한 ‘쎄트’ 왕따인 ‘못’과 ‘모아이’가 치수 패거리로부터 늘 두드려맞던 학교 뒷산 근처의 벌판에서 우연히 발견한 게 탁구대다. ‘탁구계’라는 황당무계한 공상의 입구인 셈인데, ‘못’과 ‘모아이’가 처한 절망의 무게로부터 이어지는 ‘생략된’ 연상을 감안하고 보면 그 ‘방편’의 의미가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러기에 치수의 심부름으로 치수의 여자친구인 마리의 집에 들렀다 겪는 곤혹스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탁구를 쳐야 해”(작은 글씨체로 되어 있다)라는 말을 내뱉고, 그 직후 ‘2교시’가 한창일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행복할 수, 있을까? 인류에게도 2교시란 게 있을까” 하고 물을 때, 그 질문에 우리도 깊이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이 질문의 무게를 제대로 사주었다는 점에서(“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물음이다.” 56면) 백낙청의 독법은 가급적 어떤 편견이나 이론적 틀에 갇히지 않고 작품을 그 자체로 읽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평소의 생각을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논란 많은 『핑퐁』의 결말을 두고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류를 ‘언인스톨’하기로 하는 것을 두고 작가의 반지구적 태도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고지식한 알레고리적 독법이다. 아니, 인류의 1교시가 얼마나 무의미한 시간인지를 풍성한 사실묘사와 날카롭고 발랄한 수사법으로 제시해온 이 소설의 맥락에서 인류의 ‘유지’를 선택하는 일이야말로 더 깊은 의미로 반인류적이고 반지구적이었을 것이다.(56면)
백낙청이 문제삼는 것은 최종선택 이후에 제시되는 마지막 장면의 모호함이다. 사실 ‘컴온, 쎌러브레이션!’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짧은 마지막 장은 이상한 사족의 성격이 강하다. 최종선택에 앞서 세끄라탱이 ‘인류 제거’ 이후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준 바 있으므로, 특별한 반전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 앞장의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라는 대목에서 소설이 끝나도 별문제는 없다. 오히려 그것이 ‘언인스톨’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증폭시키는(세끄라탱의 설명과는 또다른 차원에서) 더 강력한 결말이었을 수 있다. 바로 그랬다면, ‘반지구적 태도’라는 비판이 ‘알레고리적 독법’으로서도 얼마간 설득력을 더 얻지 않았을까? 마지막 장의 존재는 ‘언인스톨’의 선택을 포함해서 그때까지 이어진 『핑퐁』의 서사가 벌판에서 두 사람이 꾼 꿈이었을 가능성을 남긴다. “우리는 함께 벌판에서 깨어났다”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자. “탁구대도 소파도 보이지 않아, 우리는 탁구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탁구대도 소파도 꿈의 한 부분이었을 수 있다. 사실 그러지 않고는 “학교를 열심히 다녀볼까 해”라고 말한 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나’의 마지막 행동은 백낙청이 지적한 대로 “사람은 다 없어지고 물질만 남은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괴기적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럴 개연성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물론 이전의 진행이 ‘꿈’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방식은 손쉬운 상투형이 될 테다), 『핑퐁』의 서사가 처음부터 공상이나 꿈의 경계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지 않고 기본적으로는 사실주의적 호흡을 바탕으로 하면서 공상적 상황을 박민규 소설 특유의 비약적 기법으로 뒤섞으며 진행되어온 만큼, 마지막 장도 씌어진 그대로 ‘인류 제거’ 이후의 상황으로 읽어주는 게 온당할 수도 있다. 백낙청의 독법은 후자다. 그는 일단 그렇게 하면서 결말의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그런 괴기적 상황을 재현하려는 기미는 없으며 오히려 일상의 회복과 쇄신을 기대하게 만드는 분위기다. 그것이 ‘인류의 2교시’라는, 저자가 「작가의 말」에서도 거듭 언급하는 문제의식에 더 어울리기도 한다.”(57~58면) 그러나 이러한 모호한 결말이 작품의 미덕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평가를 내린다. ‘2교시’의 문제의식이 양날의 칼로 바뀌는 대목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말의 모호함이 ‘인류의 2교시’에 대한 성찰의 치열성에 부합하는 미덕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아니, ‘1교시’의 (…) 한 부분에 대한 인식을 자의적으로 확대했다는 혐의도 걸린다. ‘1교시’의 인류도 처음부터 “그냥, 사는 게 이런 것 같다”는 식으로 살았던 건 아니지 않았을까.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도 ‘깜박’해버림을 안 당한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그나마 여기까지 왔고 지금 같은 말기국면에서도 ‘2교시’를 꿈꿀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58면)
『핑퐁』의 비교적 단순한 구도 속에 이같은 성찰의 여지가 얼마나 있는지는 별도로 따져볼 문제겠지만, 요는 ‘인류의 2교시’에 대한 물음이 ‘인류의 1교시’에 대한 탐구와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일 테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런 지적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언제부턴가 ‘2교시’에 대한 물음을 중단해버린 듯한 우리의 상황과 관련이 있지 싶다. 눈앞의 현실에 대한 탄식과 비판은 증대하고 개선의 목소리도 높지만, 거기에 우리 삶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리라는 기대가 들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 아는 대로 문학 쪽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다. 재난서사를 비롯해서 현실의 부정적 양상에 주목하는 작품들은 늘어나고 있는데, 『핑퐁』의 ‘언인스톨’ 수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절망과 체념의 시선이 상당하다. 그 함의가 단순한 것은 아니겠지만, 실패, 불가능성, 몰락 등등이 비평의 관용어가 된 지도 오래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도 ‘깜박’해버림을 안 당한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라는 성찰이 『핑퐁』에 빠져 있다면, 그게 오히려 지배적인 세상의 실감이기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반문마저 가능하지 싶을 정도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마음만을 챙기도록 만드는 현실 앞에서 ‘2교시’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커녕 ‘1교시’에 대한 정당한 평가나 인식이 자라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극은 일상의 나날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참여의 감각이 개인과 사회 모두에서 누적되지 않고는 회복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문학이 갖는 근본적인 가능성과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작가들 역시 이러한 상황에서 예외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백낙청 문학론이 현재성을 가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한다. 적어도 백낙청의 문학론, 리얼리즘론에서라면 그 ‘2교시’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빠질 수 없고 중단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의 갱신’이 애초에 그러한 물음을 통해 제기된 것이기도 하지만, ‘분단체제론’은 예의 이중과제론의 형태로 그 ‘2교시’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분단체제론의 구체적인 현실인식과 미래전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다음에는 무엇?’(로런스)이라는 문제의식(60면)을 이 땅에서 문학하는 사람의 온당한 물음으로 지속시켜온 리얼리즘론의 기여를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나 그 물음을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묻는 일은 어떤 일목요연하고 명쾌한 과정일 수는 없을 테다. 『핑퐁』만 하더라도 ‘2교시’에 대한 물음이 ‘왕따’의 현실에 대한 고민과 인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박민규 특유의 소설적 상상의 문법, 예술적 탐구 속에서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었을 텐데, ‘성찰의 치열성’을 그 통합적 과정과 분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인식의 문제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있다. ‘리얼리즘론’에서 ‘예술적 진리’의 영역, ‘시의 경지’가 계속 난문으로 남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3. ‘다른 세상’에 대한 물음과 예술적 진리의 드러남
박민규의 또다른 장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한 백낙청의 독법에는 감동적인 대목이 있다. 그 대목을 살펴보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짓자. 백낙청은 이 작품에 대해 “더욱 원숙한 경지에 이른 걸작”이라는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 논의를 시작한다.21) 물론 이 작품이 “대중적 통속문학에 가깝다는 유사한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요소도 많다는 점 등 일견 과소평가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한다. 특히 자신이 꼼꼼히 그 의미를 캐내는 소설 막판의 독특한 반전에 대해서도 “단순한 재주자랑이나 심지어 혼란 조성으로 읽힐 우려가 없지 않다”(140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적으로는 그러한 우려를 이겨냈다고 보는 듯하다. 이 작품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는 권희철(權熙哲)의 경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반박에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변증법이 우리를 자발적인 노예로 전락시키며 권력에 전원을 공급한다는 요한의 깨달음이 선포될 때 이 소설은 영지주의-민주투사의 노선에 충실하다”22)라며 소설 전반에 스며 있는 독단적 계몽의 목소리를 염려한 바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백낙청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실제 작중사건들이 요한의 냉소주의를 거듭 수정하곤 한다는 사실”(144면)을 지적한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기로는 두 주인공의 13년 만의 해후라는 행복한 결말일 텐데, ‘Writer’s cut’의 반전이 그 ‘낭만적 판타지’를 객관화하면서 소설의 울림을 증폭시켰다는 것이 백낙청의 판단이다. ‘Writer’s cut’ 앞에서 끝난 소설 전체가 요한이 쓴 일종의 액자소설로 밝혀지면서 여러가지 미묘한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중 소설의 첫 장면을 마감하는 문장(“그것이 내가 본/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이 “겹겹의 울림을 갖게 된다는”(147면) 점을 강조하고 되새기는 백낙청의 독법은 인상적이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읽는 일이 쉽지 않다는 예이기도 하겠거니와, 최근의 소설비평이 그 ‘이론적 정치함’에 비해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Writer’s cut’의 마지막이 ‘그리고, 그의 이야기’로 끝나고 이것이 실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최종 결말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야말로 값진 독법일 것이다. 융프라우요흐에서 하산열차를 기다리는 이 마지막 장은 요한이 쓴 소설의 결말(액자소설의 결말)에서 빠진 것을 추가한 대목일까, 아니면 요한의 후일담까지 포함한 소설의 또다른 결말로부터 생성되는 제3의 무엇일까. 실제 이 마지막 장은 전자인 것처럼 씌어 있지만, 그 배치의 효과에 의해 다른 소설적 울림을 선사한다. 그것은 간절함(그런데 이 간절함은 누구의 것일까? 두 주인공과 요한은 물론 우리 독자까지도 거기 가세하는 간절함일까?)의 증폭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낭만적 판타지’의 제동이나 승화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듯하다. 백낙청은 이 마지막이 ‘완전한 재반전’도 아니고, 진실의 불가지성을 과시하는 장치도 아니라고 말한 뒤 여기서 두 주인공의 행복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현실’을 유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를 읽는다.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그 나름의 신앙고백”(148면)이라는 것이다.23) ‘다른 세상’ 혹은 ‘2교시’란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거창하기만 한 시대 전환의 이야기일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추녀와의 사랑’이라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어쩌면 너무 통속적일 수 있는) 테마를 통해 우리가 발딛고 있는 속물적 현실로부터 어떤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간단하게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결말이 웅변하고 있는 소설적 진실일지 모른다. 그 ‘진실의 발생’에 독자의 자리에서 공감하고 참여하는 마음, 그것이 아마도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독법이 아닐까. 만일 있다면, 예술적 진리, ‘시의 경지’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두 주인공이 다시 액자소설 바깥으로 걸어나와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장의 ‘신비’와 같은 것일 테다. 그 절실함의 협동과 창조가 일어나는 순간 말이다. 다른 세상에 대한 물음(그것은 동시에 지금 이곳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을 문학을 통해 묻는다는 의미, ‘구체적인 작품의 창작과 수용을 통해서만’ 그 물음이 이행될 수 있다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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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5』, 창비 2011, 40면.
2) 백낙청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창작과비평사 1978, 193면.
3) 백낙청 「리얼리즘에 관하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Ⅱ』, 창작과비평사 1985, 373면.
4) “로런스의 being이란, 사람이든 또는 다른 무엇이든, 사람답게 또는 다른 무엇답게 그것임의 경지를 뜻하는바, 그 경지는 실존의 과정에서 도달되지만 도달되는 그 순간 이미 실존의 차원, 유·무의 차원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백낙청 「D. H. 로런스의 소설관」(1977),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창비 2011, 279면.
5) 백낙청, 같은 곳.
6) 백낙청 「역사적 인간과 시적 인간」, 앞의 책 170면.
7) 백낙청의 진리관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 두 글이 도움이 된다. 김영희 「진리와 이중과제: 백낙청의 과학과 예술 논의를 중심으로」, 『지구화 시대의 영문학』, 설준규・김명환 엮음, 창비 2004; 김명환 「리얼리즘, 인간해방과 진리구현의 역사적 싸움: 백낙청 리얼리즘론의 이해를 위하여」, 같은 책.
8) 그렇다고 해서 백낙청의 진리관이 진리와 인간의 역사적 실천 사이의 변증법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백낙청은 초월적인 진리가 부정된 자리에서도 진리에 대한 물음은 남는다고 본다. “인간의 실천이 진리를 만든다고 할 때일수록 실천이 진리에 근거할 필요 또한 절실해진다.” 백낙청 「작품·실천·진리」,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 창작과비평사 1990, 372면.
9) 백낙청, 같은 글 374면.
10) 백낙청, 같은 글 374면.
11) 백낙청 「시와 리얼리즘에 관한 단상」,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 창비 2006, 427면.
12) ‘최상의 예술’이라는 전제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의 이념형적 모델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작품을 읽고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도 ‘사무사’에 방불한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그 도달의 어려움은 배가되는 듯하다.
13) 백낙청·황종연 「무엇이 한국문학의 보람인가: 문학평론가 백낙청과의 대화」,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14) 같은 글, 『백낙청 회화록 5』에 재수록, 창비 2007, 263면.
15) 김영희 「진리와 이중과제」, 앞의 책 135~36면.
16) “박민규의 경우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 2003),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그리고 『핑퐁』(창비 2006)이 모두 문제작들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는 더욱 원숙한 경지에 이른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39~40면.
17) 물론 한 소설작품에서 ‘언어의 시적 사용’이 두드러진다고 해서 그것이 ‘시의 경지’와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18) 김영찬 「개복치 우주(소설)론과 일인용 너구리 소설 사용법: 박민규론」,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신형철 「만유인력의 소설학: 김영하, 강영숙, 박민규의 장편을 통해 본 ‘소설과 현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권희철 「아름다운 영혼이여, 안녕!: 박민규론」, 『당신의 얼굴이 되어라』, 문학동네 2013 등 참조. 특히 뒤의 두 글은 박민규 소설에서 이원론적 대립구도의 단순성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는데, 거기서 어떤 ‘종교성’의 측면을 감지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9) 백낙청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59면. 이하 『핑퐁』에 대한 백낙청의 언급은 같은 글에서 가져온다.
20) 단편에서도 성취의 편차가 있을 수 있으나 아무래도 기법의 특성상 박민규 소설은 장편에서 이러한 실패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21)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같은 책 140면. 이하 같은 글 면수만 표기.
22) 권희철, 앞의 글 372면. 이 글은 백낙청의 평문보다 나중에 발표된 것이다.
23) 권희철은 ‘Writer’s cut’이 낭만적 판타지에 대한 제동장치로 기능한다는 백낙청의 독법은 “경청할 만하다”라고 하면서도, 거기서 이같은 ‘작가의 의지’까지 읽는 해석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것 같다”라고 본다. “교통사고 이후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운명의 반전을 다룬 ‘Writer’s cut’이 후기 자본주의적 현실로부터의 반전이라는 주제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같은 글 373면) 그러나 단순히 ‘운명의 반전’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중단되고 실패한 사랑(혹은 죽음)’과의 대면과 연대의 공간을 다시 한번 열기 위한 시도로 ‘Writer’s cut’이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거기서 당장의 현실을 유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세상(부와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다수결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읽는 것이 ‘무리한’ 독법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