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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삶의 암면을 노래하는 카나리아의 진혼곡

 

조재룡趙在龍

문학평론가. 번역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평론집 『번역의 유령들』 『시는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 등이, 번역서 『사랑예찬』 『잠자는 남자』 등이 있음.

 

나희덕羅喜德

시인.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본문에 별색 처리된 나희덕 시인의 발언은 2014년 4월 18일 필자와 시인이 만나 나눈 대화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후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상호 확인을 거친 것이다. 인용 작품은 별도의 출전표시가 없는 한 모두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수록작이다.

 

 

1. 시 쓰는 자의 책무

 

등단작 「뿌리에게」(1989)는 그간 나희덕의 시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문단의 꾸준한 지지, 독자들의 긍정적인 평가와 대중적 확산, 시세계 전반에 대한 폭넓은 공감을 바탕으로, 나희덕의 시는 다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자들에 의해 생명력의 시, 모성적 힘의 시, 삶을 성찰하는 따뜻하고 다감한 시로 이해되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시절 읽었던 시들 가운데 「필경사」나 그 이후 접했던 「누에의 방」 같은 작품들은 글 쓰는 자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작품, 그러니까 오로지 글로 세계를 잣는 인간을 그린 빼어난 시였고, 기이하게도 기억 속에서 맴돌고 있는 나희덕의 시들은 거개가 쓰는 자의 삶과 그 운명을 다룬 것들이다.

 

어느 날인가 그의 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활자가 휘청거리고,

십오 촉 백열등처럼 조금씩 흔들리면서

더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을 때까지

그는 무엇이든 다 쓴다

그는 언제까지나 쓴다

더는 두 팔꿈치가 굽혀지지 않을 때까지

—「필경사」(『뿌리에게』, 창작과비평사 1991) 부분

 

그의 작품 전반에서 자전적 요소가 빼어난 방식으로 녹아든 이유도, 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이 아버지의 삶을 결곡하게 표해낸 글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운명, 이 세계에서 글 쓰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 문자의 세계를 더듬거리며 제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 그것이 아니라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문자와 맺는 치열한 세계를 다루고 있기에, 나희덕의 시 전반에서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구성한다. 오늘날 ‘필경사’라는 말이 흔하지 않게 되어버린 데는 멜빌(H. Melville)의 「필경사 바틀비」의 영향이 크다고 하겠지만, 나희덕의 ‘필경사’는 멜빌의 주인공처럼 일을 ‘안하는 것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싫어도 의무이며 책임이기에 반드시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하는 근대적 인간상을 위반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나희덕의 ‘필경사’는 제 일을 거부할 자유조차 갖고 있지 않으며, 때문에 근대사회의 합리성이라는 맥락 속의 ‘필경사 바틀비’가 아니라 오히려 시인의 운명으로 읽힌다. 계속해서 쓴다는 무언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만 시인이 시인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에게 시는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필경사」와 연관이 있을, 그러나 아버지의 직무가 고스란히 시인의 운명으로 되살아난 「누에의 방」(『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사 1997)에서 일부를 인용한다.

 

글을 쓰고 싶어하셨지만

글자만을 한 자 한 자 철필로 새겨넣던 아버지,

그러나 고치 속에서 뽑아낸 실로

세상을 향해 긴 글을 쓰고 계셨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후로도 오랜 뒤였다

 

오늘 밤,

내 마음의 형광등 모두 꺼지고 식구들도 잠들고

백열등 하나 오롯하게 빛나는 밤

아버지가 뽑아내던 실끝이 어느새 내 입에 물려 있어

내 속의 아버지가 나 대신 글을 쓰는 밤

나는 아버지라는 생을 옮겨 쓰는 필경사가 되어

뜨거운 고치 속에 돌아와 앉는다

 

그때의 바람이 이 견디기 어려운 여름 속으로

백열등이 너무 어둡게도 너무 밝게도 생각되는 내 눈 속으로

더 깊이 더 깊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림자 어른거리는 천정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건네지 못할 긴 편지를 나 역시도 쓰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멈출 권리가 없는 사람, 그러니까, 모두 저 필경사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나희덕은 누구보다도 일찍 이와 같은 사실을 직관으로 포착해낸 사람이었다. 쓰는 자라는 시인의 책무는 따라서 이념과 순수를 절분해서 문학을 바라보던 시절에도 변함없이 존재했던 무엇이며, 분석하고 타진하는 일과 그 실천 사이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했던, 그러니까 「뿌리에게」가 세상에 나올 무렵에 벌써 그의 시세계에서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혹시,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의 바구니 안에 담긴 현실이 아닌, 실재의 영역에 시가 가닿으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던가?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할 수도 있을 삶의 면면과 그 가능성을 백지 위로 걸어 들어오게 하는 일에 나희덕은 일찌감치 발을 내디뎠고, 바로 이 추체험의 세계를 시라는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실천해냈다. 나희덕이 현실주의자라는 말은 따라서 옳은 지적인 동시에, 그의 시세계를 더러 축소시켰던 저 시대의 한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의 시에 대한 현실/관념 식의 접근법은 일종의 선입견이라기보다 대다수 이분법에 속박되었던 한 시대의 지적 패러다임 때문이었다고 해야 한다. 나희덕 시의 미덕과 시를 관통하는 서정적 힘을 주목한 평가는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이분법이라는 불안한 단 하나의 지반 위에서 행해졌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분법을 중심으로 재편된 문단의 당파성은 이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당시 인식의 한계가 명백히 존재했다면 시인은 이 시단의 에피스테메(epistēmē)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일까?

 

80년대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첫 시집을 비롯해 여러권의 시집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으니 민중적 세계관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당시 민족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내 시는 왜소할 정도로 개인적이고 내향적인 여성 언어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것이 창비시선 내에서 상대적인 개성을 만들어준 면도 있지만, 늘 어정쩡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편으론 어떤 이념이나 당파성에도 귀속되지 않았기에 자유로운 면도 있었다.

대학시절 시를 열심히 쓰긴 했지만 시인이 되겠다는 욕구는 별로 없었다. 그저 시를 쓰는 게 좋았고, 흔들리는 삶을 가누기 위해 시라는 부표를 꽉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삶 전부를 던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화된 세계와 타협하면서 현실적인 인간으로 살 수도 없었다. 바로 그 사이에 난 어떤 길이 나에겐 문학이었다. 그런 모호한 지점이나 성향에 대해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2003)에서 “나는 보라색 분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보라색이라는 색채는 빨강과 파랑 사이의 균형감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립적인 두 세계의 역동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절충적이고 중간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 속에 실은 수많은 뒤척임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내 시가 몇개의 코드 안에서 규정되거나 단순하게 이해되어온 면이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시인은 늘 경계인 또는 관찰자이며, 시의 자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경계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어찌 보면 온순하고 절제되어 보이는 내 시에도 그런 내적 싸움은 끊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50년대 후반 김수영(金洙暎)이 양계(養鷄)를 하면서 쓴 작품들을 보면 ‘정지’ ‘절제’ ‘휴식’ 같은 말들이 자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정지나 휴식이 아니다. 그의 시 「여름뜰」에는 “합리와 비합리 사이에 묵연히 앉아 있”고 “질서와 무질서와의 사이에 움직”이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묵연하게 바라보되 끝내 대상에게 “속지 않고” 내적 긴장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이 시에서 읽혀진다. 손쉽게 최후의 보루를 찾으려 하지 않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뒤척이고 갈등하면서 “바늘 구녕만한 예지”(김수영 「叡智」)를 바라며 살아가는 자의 ‘설움’ 같은 게 내게도 있었다.

 

 

2. 관계를 사유하는 지성의 언어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이분법의 문제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것이 되었건 이분법은 모든 것을 편리하게 구분하는 바로 그만큼, 제 사유의 가능성도 어느 한편에 묶어두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뿌리의 신도였”던 시인이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뿌리로부터」)이라고 말할 때 이것을 우연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도, 이분법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정경들이 시집 전반에서 자주 목격되는 한편 이분법 너머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읽은 것은」이나 「그곳과 이곳」은 삶과 죽음을 벗어난 어떤 세계를 바라보려 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썩어가는 것과 시들어가는 것 사이”(「그들이 읽은 것은」)는 「뿌리에게」의 현실세계와는 사뭇 다른 곳이며, 그 공간에 늘어선 것들은, 가령,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호송버스와 승용차

열리는 문과 열리지 않는 문

푸른 수의와 검은 재킷

스무 살의 청년과 칠순의 노인

감옥인 학교와 학교인 감옥

(…)

어머니를 떠올리는 남자와 어머니였던 여자

울먹이는 말과 고개 숙인 생각

환한 방에 대한 상상과 어두운 방의 공포

죽음의 그림자와 애인의 얼굴

느릅나무와 플라타너스

불가능한 대화와 불충분한 대화

비에 젖은 창문과 빗물조차 들어올 수 없는 복도

우산을 든 손과 들지 않는 손

—「그들이 읽은 것은」 부분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과 시인”이 “비에 젖은 몇 편의 시를” “함께 읽었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구절이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함께”에 시가 제 방점을 내려놓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공간은 물론 사이()의 공간이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성급한 결론으로 치닫지 않은 채, 이 양자가 하나 되지 못하는 순간의 긴장을 담아내려는 시도에 새로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오늘의 비등점”과 “오늘의 결빙점”, “그곳과 이곳 사이”는 삶이나 죽음, 각각의 세계보다는, 시인이 두 세계의 너머에서 “얼마나 많은 눈과 비와 얼음과 물과 현기증이 있는지”(「그곳과 이곳」) 투시하려 할 때만 포착되는 것들이 자리한다. 이렇게 시인은 “썩을 수 없는 것들은 대체로 완고한 얼굴을 가졌다”(「그의 뒷모습」)라고 말하며, 소멸하는 것들, 사소한 것들, 쓰레기가 되는 것들, 더는 쓸모가 없어진 것들, 무정형의 상태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비끄러매고, 이원론의 자장에서 벗어나 고유한 발화의 방식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말들을 끌어안는다. 이 되돌아오는 말들이 그려내는 독특한 세계는 특히 3부에서 빛난다.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나 「여우와 함께 살기」 「신을 찾으러」는 기존의 시세계와 떨어져나온 저 큰 보폭 때문에 충격을 준다. “묵시록의 하늘”(「그의 뒷모습」) 아래, 삶을 묵묵히 살아낼 때만 스며드는 비장함과 처연한 몰골들, 삶의 저 구석구석에 축축하게 스며든 현대생활의 실질적인 주체들이 “죽음의 냄새”(「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를 뿜어내며 시집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길 잃은 개들과 고양이들, 또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달아나는 여우들,

술 취한 남자들이 갈기고 간 오줌 냄새와

변태성욕자들, 또 다른 노숙의 달인들에 관해

동물적인 감각으로 익혀온 바가 있다

그러니 어젯밤이 지나갔듯이 오늘밤도 지나갈 것이다

갈라진 시멘트의 혈관에서 냉기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 부분

 

(어느 외국) 도시의 뒷골목을 샅샅이 뒤진 흔적이 그곳에서의 낯선 경험과 함께 시세계의 변모를 예고한다. 감지되는 변화는 이뿐 아니다. 청바지가 완성되는 공정과 절차에 빗대어, 실체가 관계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명랑한 파랑」, 관계의 문제를 좀더 밀고 나간 「창문성」은 각별한 주목이 필요하다.

 

창문과 문의 관계, 창문과 벽의 관계, 창문과 지붕의 관계, 창문과 또 다른 창문의 관계, 창문과 계단의 관계, 창문과 커튼의 관계, 창문과 하늘의 관계, 창문과 빛의 관계, 창문과 어둠의 관계, 창문과 새의 관계, 창문과 나무의 관계, 창문과 사람의 관계, 창문과 마을의 관계, 창문과 마음의 관계, 창문과 시간의 관계, 창문과 창문 자신의 관계, 그것들이 투명한 구명의 스크린에 비추어내는 형상이라는 것을

—「창문성」 부분

 

본질이나 실체에 대해 확신하는 태도를 버리고, 모든 것을 관계의 소산으로 파악하려는 의지가 이번 시집에 유난히 도드라진다. “창문성이 창문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 역시 ‘타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는 사유가 자리한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나 대상을 차분히 응시하고 관찰하며 삶의 서정적 뿌리를 더듬어내는 여정보다, 나희덕은 이번 시집에서 움직이는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동()의 세계(「동작의 발견」), 관계가 실체에 선행한다는 사유(「창문성」 「명랑한 파랑」), 상호관계성의 필연성(“길과 나무는 서로에게 벽과 바닥이 되어왔네”,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이나 그 어려움(「흑과 백」)에 주목한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면서……

 

내 시는 대부분 타자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타자가 말을 걸어오면, 그 말을 알아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면서 나와 타자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들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따라서 시는 관계지향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순한 낭만주의자는 못되는 것 같다.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시적 자아를 조금씩 비워내고 그 자리에 어떤 타자를 들이는 일은 ‘나’를 객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 ‘바깥의 눈’을 갖는다고 할까.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는 행위는 그 간접화된 시선으로 인해 감정보다는 지성에 더 의지한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서정적 합일의 순간에 충실했던 예전의 시편들에 비해 이번 시집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바깥의 눈’을 갖는 데는 해외체류의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3부의 시들에는 신자유주의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국경의 기울기」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에서 관찰되는 자본의 불균형에 대해, 「명랑한 파랑」은 다국적기업 청바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삼분과 삼분의 일」은 팔레스타인 시인 자까리아 무함마드(Zakaria Mohammed)의 삶에 대해,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나 「그의 뒷모습」은 런던의 도심과 쓰레기처리장을 각각 배경으로 쓴 시들이다. 이 시들을 통해 현대문명의 그늘이나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가하면 「밤 열한 시의 치킨샐러드」는 더블린의 햄버거집에서 목격한 동성애 연인을 그렸고, 「신을 찾으러」는 영국 남부에 있는 부르더호프 공동체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았다. 부르더호프에서는 사랑과 우정의 공동체를 발견했지만, 대도시에서 그런 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여우와 함께 살기」에서처럼 영국에서는 여우가 고양이처럼 흔하게 목격되는데, ‘나’라는 이방인이 영국인들의 눈에는 그 여우들과 별다를 바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삶의 장면들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전지구적 풍경이다.

 

 

3. 삶의 암면(暗面)에서 끌어안은 낯선 것들

 

외국시를 읽는 것 같았던 작품도 여러편이다. 풍경은 낯설고, 어휘들은 이질적이며, 문장의 배치는 서걱거리는가 하면(「언덕이 요구하는 것」), 외국의 극작품을 시로 번역한 흔적(「등장인물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낯섦을 시적 모티브로 삼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작품도 여럿이다. 이런 식의 낯섦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이 충돌할 때 빚어지는 독특한 감수성 덕분에 예기치 못한 무언가가 시 안으로 스며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인이 “여우처럼 근근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여우와 함께 살기」)는 장소는 한국이 아니며, “여우” 역시 삶의 암면(暗面)을 배회하는 존재에 대한 비유이자 시인 자신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이 변화는 어떻게 찾아온 것일까? ‘따뜻함-생명력’에서 ‘차가움-죽음’으로의 이행이 이번 시집의 관건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이 양자에 깊이 파인 구분을 철회하는 일에서 시의 개성이 확보되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비루한 것, 쓰레기가 돼가는 것, 명료하게 포착되지 않는 감정 등은 사실, 그 어떤 카테고리로도 분류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소재의 변화, 낯섦의 침투, 관계성과 타자에 대한 사유는 어떻게 찾아왔는가?

 

새 시집에서 목격되는 변화는 우선 시간과 공간이 바뀌었던 데서 생겨난 것 같다. 연구년으로 2012년을 영국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는 내가 소수자이고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을 실생활에서 자주 접했고, 언어나 문화적 조건이 달라진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익숙하게 쓰던 언어와 사유가 삐걱거리는 상황이 오히려 자동적인 말의 질서에 어떤 충격과 간극을 만들어주었다. 이것은 시인으로서는 즐거운 발견이기도 했는데, 오히려 더듬거리거나 잘못 발화된 말들을 통해 새로운 언어적 질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낯설게 하기’를 의도적인 전략으로 사용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겪게 된 언어적 환경이 새로운 시의 장()을 마련해준 셈이다. 말씀하신 번역투나 낯선 구문들은 그런 결과일 것이다.

 

나희덕의 시는 이국풍의 기행시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작가들 대부분은 제 외국 체험을 어떤 방식으로건 작품에 반영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일년가량의 외국 체험이 나희덕의 시에 가져온 시적 감수성의 변화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시집 전반의 색채가 훨씬 낯설어졌으며, 구문의 구성이나 어법도 단정하기보다 오히려 서걱거리는 경우가 다수 목격된다. 시의 저변에는 회색이 깔려 있으며, ‘보랏빛’ 정취가 시집 전체를 투통(透通)하면서 비통하고 우수에 젖은 언어로 비장미를 한껏 뿜어낸다.

 

언어적 서걱거림은 의도적인 것도 있겠지만 시를 쓰는 방법이나 몸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를 쓰면서 이전의 어법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순서를 바꾸거나 무언가 덜어내거나 이질적인 것을 삽입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주려고 한다. 시적인 완결성이나 유기적 통일성을 중요시했던 초기 시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그런 태도를 강화해온 편이다. 시가 어느 한 방향으로 뚜렷해지려고 하면 내 속의 또다른 목소리가 그것을 방해하는 진술을 툭, 던져 넣는다. 그 던져진 말이 서걱거리며 시행에 새로운 긴장을 만들어낸다. 요즘엔 내가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에 진입하는 것이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바틀비’ 얘기를 좀더 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필경사였기 때문에 「필경사 바틀비」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남의 문서를 대신 써주는 필경사와 자신의 시를 쓰는 시인의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바틀비’를 현대사회에서 시인의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 거리가 많이 좁혀진다. ‘바틀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자와 피고용자로 맺어진 계약관계를 거부하고 오직 자신이 선택한 것, 자기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수행했다. 강제된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수동적인 저항을 만들어내었고, 말을 하라고 강요해도 침묵을 지켰다. 이러한 수동적인 저항과 침묵을 통해 자신의 원칙을 관철해가는 ‘바틀비’의 모습은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시인이 가야 할 길을 잘 보여준다. 「누에의 방」에서 필경사였던 ‘아버지’와 시를 쓰는 ‘나’가 하나로 겹쳐지는 것도 그래서다. ‘누에의 방’이라는 시적 공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또는 노동자와 시인은 조우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필경사였던 아버지가 지금은 당신의 글을 써서 두권의 책을 출간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시 쓰는 노동과 가르치는 노동이 서로 충돌할 때가 적지 않다. 특히 정부의 눈치만 보면서 돈에 미쳐 돌아가는 대학의 현실은 제도 속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 강한 회의를 느끼게 한다. 그 폭력적 질서에 덜 휘둘리면서 시인의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늘 어려운 숙제다. 다시 김수영을 끌어오자면, 「반시론」에서 동생의 농장에 가서 부삽을 잡으며 “섬뜩했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부삽’으로 대변되는 노동의 세계는 ‘펜’을 든 시인에게 섬뜩한 것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부끄러운 노릇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늘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나의 노동 앞에서 나의 시는 무엇인가. 양자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일이야말로 시인으로서 ‘바틀비’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희덕의 필경사는 멜빌의 바틀비와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쓰지 않는 쪽을 ‘선택’한 바틀비와 달리 시인은 그러려야 그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시인이 ‘절필’을 했거나 절필을 선언한다면, 사실 그는 자신이 시인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택은 시인의 몫이 아니다. 시인은 계속 시를 쓸 때만 오로지 시인일 수 있으며, 이것을 시인의 책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희덕은 첫 시집에서 이 멈출 수 없는, 멈추어서는 안되는 시인의 책무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시인은 시를 멈출 권리가 없다는 말을 곰곰이 되새겨본다. 시를 쓰는 게 점점 힘들게 느껴져서 앞으로 시를 더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시인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절망은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시쓰기가 관성화된 행위처럼 느껴질 때와 시적 에너지가 고갈되었다고 느껴질 때. 그런 고비를 여러번 넘었듯이 앞으로도 노력은 해야겠지만…… 언젠가 시가 더이상 써지지 않는 날이 오면, 절필선언 같은 것은 안하더라도 말없이 시인의 자리를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인은 계속 시를 쓸 때만 오로지 시인이라는 말, 시를 멈출 권리가 시인한테는 없다는 말이 나를 일깨워주었다.

 

 

4. 애도의 시학

 

시집의 2부에 실린 시들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해설을 먼저 읽고 상당수 작품들이 개인적인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예외 없이 처절하고 비통하며, 비할 데 없이 슬프다. 사실을 말하자면 끝까지 읽기 어려운 작품도 다수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 다시 읽어보니, 비통한 감정에 매몰되어 시적 형상화의 힘이 덜하거나 에둘러 조의(弔意)의 감정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개인사와 시의 관계에 관해 짚어볼 기회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첫 시 「어떤 나무의 말」을 이렇게 끝맺은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이 시집은 누군가를 향한 애도와 비참한 사고 이후에 시달리게 되는 우울의 차이에 대해 성찰하게 해준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결국 개인사가 사라진 자리에 시만이 남겨질 것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상처에서 출발한 작품들은 비가(悲歌)의 형식을 띤 시, 진혼가 자체로도 살아남을 것이며 그것도 아주 빼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연을 제거하여 시를 마주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과는 어떤가? 비통함에 토해낸 절망과 우울만이 백지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2부에는 개인적으로 겪어야 했던 죽음에 관한 시들이 몇편 있다. 사실 이 작품들 때문에 원고 정리를 미루었고, 출간을 주저하기도 했다. 개인적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이상한 수치심 같은 게 들었기 때문이다. 동생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소비하는 행위가 될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동생이 떠난 후에 의도적으로 그에 관한 시를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동생의 얼굴이 나를 덮치듯 찾아왔다.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을 제대로 대면하고 내 방식으로 애도를 해야 할 시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쓰던 시들을 제쳐놓고, 그 기억들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울다가 쓰고, 울다가 쓰기를 반복하면서, 무슨 굿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죽음의 사건을 되살아내면서 며칠 만에 그 작품들이 한꺼번에 씌어졌다. 시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최대한 걷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직도 감상적인 대목이 남아 있을까 걱정이 된다.

 

흔히 정신분석학에서 ‘애도’는 상실을 겪은 주체가 상실된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전이시켜낸 경우를 말하며, ‘우울’은 상실된 대상에서 주체가 분리되어 나오지 못해, 대상의 객관화에 어려움을 겪거나 결국 자아분열이나 나르시시즘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1) 나희덕의 진혼가는 죽은 사람의 영혼에 평안을 주고 위로하는 통상의 애가도, 슬픔을 견디다 못해 차오른 감정으로 백지를 적시는 처연한 노래도 아니다. 오히려 비극을 담아내는 나희덕의 언어는 상실감의 서정적 기술에 의존한다기보다 절제와 비장미로 수놓아 매우 지적인 형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2부를 여는 시 「취한 새」는 랭보(A. Rimbaud)가 미지의 세계(어린 나이의 그에게 세계는 자체로 미지였다)로 나가기 전에 던진 출사표 같은 장시 「취한 배」를 변주하며 지성에 의지한 구성력을 뿜어낸다. 삶과 죽음을 이접하는 “새들의 영혼”을 “착란”(이것도 랭보에서 왔다)과 “취한 배”의 알레고리로 그려내는 능력에 주목하면, 나희덕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감정의 이러한 지적 처리 방식이 아닌가 한다. 「흙과 소금」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썩음을 방지하는 “소금”을 제 입 안에서 녹이려 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흙의 사건’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태고에 관한 사유(“태고의 기억”)를 환기해내는 시인의 저 재능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을 아낄 수 없게 된다. 죽음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는 오로지 시로 애도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일까? 죽음의 체험은, 죽음을 사유하게 만드는 지상의 산물들을 새로운 언어로 끌어안음으로써 세계를 달리 바라볼 계기가 된다. 나희덕은 죽음을 매개로 ‘사라지고 있는 것’ ‘사라져버린 것’ ‘사라질 것’(「마비된 나비」)을 포괄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승화시켜내고 신체의 모든 감각으로 죽음을 감지하여 맞닥뜨린 침묵의 항변(「상처 입은 혀」)을 지성의 언어로 담아낸다. 개인사가 속박하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 개인적인 죽음은 객관화에 힘입어 무시로 비가의 톤을 뿜어낸다.

 

너는 살아 있을 때 보랏빛이었지.

물결 속에서 빛나던 별,

너는 쇠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온몸이 팔로 이루어진 너는

팔이 잘리면 다시 돋아난다고 했지.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다고 했지.

 

어느 날 해변에 밀려든 불가시리 떼,

너는 빛을 잃은 별처럼 모래 위에서 시들어갔어.

햇빛에 닿는 순간 딱딱해졌지.

 

네 피가 마르기 전에

우리는 구멍을 뚫어 목걸이를 만들었어.

—「그날의 불가사리」 부분

 

시집의 상당수 작품이 소멸하거나 사라지는 것들에 제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일상적인 소재를 죽음을 각성하는 알레고리로 전환하거나 죽음의 형상화를 절제미를 통해 길어 올린다. 시집에서 죽음의 알레고리는 ‘너의 상실’에 바쳐진 2부의 작품들과 호응하면서 개인적 차원의 우울이 아니라 애도에 관한 독창적인 형식을 그려내는 데 전념한다. 따라서 개인사에 매몰되는 대신 죽음을 추체험으로 환원해내는 힘겨운 과정이, 최소한의 감정으로 최대치의 비장미를 선보이며 시집을 물들인다. 우울에서 벗어난 이 애도의 순간은 어떻게 찾아왔는가?

 

무언가가 나를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만들어진 위로보다는 내 슬픔이 다른 슬픔을 만나 공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 역시 애도와 우울의 차이를 깊이 생각해봤다. 지적하신 것처럼, 애도가 대상을 떠나보내고 나서 그 대상과 분리하는 과정 속에서 찾아온 슬픔을 일정기간 감당해내는 상태라면, 우울은 그 분리를 인정하지 않고 사라진 대상에 집착하면서 자아를 계속 괴롭힐 때 나타나는 병적 현상이다. 나는 죽음을 그다지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개인적 불행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힘든 시기를 보내긴 했지만 병적 징후가 크게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우울증 환자는 아닌 모양이다.

 

나희덕의 시에서 애도는 ‘너머’를 사유하는 힘이기도 하다.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시에서 붙들어매거나 그 존재를 드리우는 모티브는 ‘이곳’의 죽음이다. 「그곳과 이곳」이나 「묘비명」 같은 작품은 죽음이야말로 도달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었던 시원을 담아낼 고통스러운 형식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묘비명」의 전문을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석수장이에게 이렇게 새겨 달라고 부탁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저편의 어둠 속에서도

네가 사랑했던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어눌하게 새겨진 글자 속으로

비바람이 다녀가고

그럴 때마다 말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누군가 심어두고 간 튤립이 흙 속에서

손을 내밀 듯 꽃을 피우고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꽃의 눈망울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흙 속에 뿌리내린 네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이렇게 죽음을 기록하는 나의 말 속에서 붕괴된다. 타자와 나, 무의식과 의식, 현실과 이상, 외부와 내부 등의 경계도 함께 허물어질 것이다. 나희덕의 시에서 죽음은 절분(節分)으로 충족되지 않는 곳을 사유하게 해주는 애도의 형식이다. 죽음의 체험은 지상의 산물들을 애도의 방식으로 끌어안게 해주는 동시에, 기존의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나희덕은 간절한 구원의 말투로 끄집어낸 물음을 통해, 제 초기 시에서 벌써 죽음과 소멸과 같은 주제를 모순 가득한 현실에 투척했으며,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죽음과 삶, 비애와 슬픔이라?

 

죽음 자체는 비극적이지만 충분한 애도를 통과해 병리적인 현상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별이나 죽음이 망자와의 분리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망자를 뒤늦게나마 더 깊고 역동적으로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관계의 갱신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또는 애도의 과정을 통해 찾아오기도 한다.

개인적인 죽음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많아서인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 마치 상장(喪章)을 단 시집처럼 언급되곤 하는데, 이 점은 좀 아쉽다. 나는 ‘개인적 죽음’의 체험뿐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라고 부를 만한 현상들에 대해서도 여러편의 시를 썼다. 부의 편중과 위험의 편중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위험사회에서 재난, 가난, 기아, 살육 등은 우연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사회적 재앙 뒤에는 잘못된 시스템이 있고, 부와 권력을 거머쥔 자들의 탐욕과 무책임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개인적 관계의 갱신뿐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 말할 때는 산문과 달리 논리적이고 직접적인 진술을 유보하게 되기 때문에 충분한 전달이 쉽지 않다. 외부적 비판보다는 자성적(自省的) 태도를 취하고, 비애의 감정이 주조를 이루는 것도 그런 한계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사실 인간에 대한 내 인식의 밑바닥에는 비관주의나 허무주의가 적지 않게 깔려 있다.

 

 

5. 변화의 길목, 지상 위의 굴곡

 

그래서일까? 허무에서 벗어나려는 목소리도 나지막이 울려나온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형이상학의 길에서 토해내는 구원의 갈망은 아니다. 사실 그의 시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척박한 현실을 울리는 말투는 기도의 어법으로 투척한 물음을 통해 간곡한 정서를 내비쳤던 것도 사실이다. 거개의 물음은 형이상학적 존재를 향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이 중의성에 기댄다는 점이다. 그가 찾아 나선 신은 “너무 오래 신어서 이젠 없어도 된다고 대답”할 수 있는 신, 내가 신은 낡고 더러운 신, “지상의 하루하루, 싸우면서 피 흘리는 싸움 속에 있”는 “신”(「신을 찾으러」)이다.

 

빛은 어디서 오는가,

빛은 도둑처럼 찾아온다고 했지만

삶은 검은 부츠처럼 낡아가고

꿈에서나 중얼거린다

그곳에 가야 하는데 신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신을 찾으러」 부분

 

나희덕에게 신은 인간적인 신, “대장간에서는 땀을 흘”(「대장간에서의 대화」)리는 신이며, 기독교의 신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의 신, 인간처럼 희로애락을 느끼며 대지에서 정체성을 찾는 그런 신일지도 모른다.

 

해가 뉘엿 넘어가는데

의자 하나 버리러 갔다가 보고 말았다

그의 뒷모습을

흰 날개와 검은 날개로 가득 찬 묵시록의 하늘을

—「그의 뒷모습」 부분

 

시인은 현실의 가장 지저분한 곳, “저편에는 썩어가는 것들”이 넘쳐흐르는 “쓰레기처리장”(같은 시)에서 “묵시록의 하늘”을 보았다 말한다. “그의 뒷모습”에 어떤 구원의 입김이 서려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모태신앙으로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나서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시적인 것을 만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1980년대에 시를 시작한 세대로서 나는 역사적 현실이나 이성적 근대가 창출한 새로운 질서와 문법 속에 서 있었다. 내 안에 있는 강한 종교성이나 윤리적 자아가 시에 방해가 된다고 여겼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종교와 문학이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도그마에 빠진 좁은 종교가 아니라,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라든가 지상의 존재를 통해 ‘너머’의 세계에 대한 단초를 발견하는 것이 시인에게 중요한 자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내 안의 종교성을 덜 억압하고 조금씩 방임하면서 시를 썼다.

이번 시집에 ‘신’이라는 말이 여러번 등장하지만, 이때의 신은 절대자나 초월적 타자라기보다는, 우리의 비참한 현실 속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무엇에 가깝다. 낡은 신발을 신앙공동체에 두고 온 일화를 다룬 「신을 찾으러」처럼, 인간의 대지에서 오물을 묻히고 다니는 신발과 하늘에 있는 신을 등가적으로 대비시킨 것이 그런 예가 될 것이다. 쓰레기처리장에 의자를 버리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그의 뒷모습」에서 쓰레기처리장은 문명의 뒷모습을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여기서 신은 우리의 비참한 문명과 묵시록적인 현실의 대타적인 존재로서 호명된다. 신의 부재를 더 강력하게 느낄수록 더 간절하게 부르게 되는 존재라고 할까. 20대부터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두이노의 비가」에서 느껴지는 종교성이 좋았다. 이제는 그에 감응할 수 있는 영성이 내 안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더 문제다.

 

그렇다. 이번 시집은 변화의 시집이다. 시간의 변화와 삶의 진화, 운동이나 변형되는 성질은 1부와 4부의 작품들에서 핵심을 이룬다. “한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을 데려”(「휠체어와 춤을」)오는 운동성이나 “수천 가지 표정을 만들어낼”(「당신과 물고기」) 진화의 시간, 다양한 변화나 변모의 과정을 다룬 작품들이 시집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수없이 많은 표정을 겪어나가면서 결국 다른 것이 되어 태어나는 변화와 굴곡의 과정이 시집의 여기저기에 각인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는 동안’과 ‘~하는 중인 운동’을 이야기하는 작품도 여럿이다. 「어둠이 아직」의 부분을 읽는다.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 하는 동안’이나 ‘~하는 중인 운동’은 변형되는 것, “흘러내”리는 것,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는 것, “녹거나 닳아 없어”(밀랍의 경우지는 어떤 성질에 주목한 시들과 함께 시집 전반에 새로운 목소리를 입히고 커다란 공명을 만들어낸다.

 

뜨거운 밀랍은

이제 어디로든 흘러내릴 수 있고

어떤 형태로든 반죽될 수 있다

 

한 자루의 초가 되거나

한 조각의 비누가 되거나

한 사람의 밀랍인형이 되거나

밀랍은 서서히 굳어가며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도 밀랍은 밀랍일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것은

밀랍 자체보다

밀랍이 곧 녹거나 닳아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밀랍의 경우」 부분

 

나희덕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뿌리로부터」) 그리고자 “어느 날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 뿐”(「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이었다고 말한다. “자꾸 말을 더듬”어 “매순간 다르게 발음되는”(「풀의 신경계」) 세계를 넘보고자 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앉아보고 저기에 앉아”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무언가 부족한 저녁」)을 포착하려는 노력의 결실처럼 시집에서 바글거린다. 시론으로 읽히는 작품도 있다.

 

물방울들은 얼마나 멀리 가는가

새들은 어떻게 점호도 없이 날아오르는가

 

그러나 그녀의 발은 알고 있다

삶은 도약이 아니라 회전이라는 것을

구멍을 만들며 도는 팽이처럼

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녀의 손은 알고 있다

삶은 발명이 아니라 발견에 가깝다는 것을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시간째 서 있으면

어떤 움직임이 문득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동작은 그렇게 발견된다는 것을

 

동작은 동작을 낳고 동작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춤을 낳고 춤은 허공을 낳고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길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녀는 아는가

돌면서 쓰러지는 팽이의 낙법을

동작의 발견은 그때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동작의 발견」 전문

 

시를 창조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나희덕에게는 “동작”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 과정은 말할 것도 없이 “절망을 낳”는 시간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돌면서 쓰러지는 팽이의 낙법을” 익히는 시간은 시 쓰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손끝에서 시작”되는 말들, “팽이처럼/결국 돌아오고 또 돌아올 수밖에 없”는 말들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물론 번뜩이는 재능에 의지해 무언가를 새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절망” 속에서 삶의 이면을 “발견”해야 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있다. 「조롱의 문제」에서 다루고 있는 새와 새장은 삶과 삶의 구속과 대칭을 이룬다. 과감히 해석하면, 이 대칭의 관계를 시와 시를 가두는 비평, 이 양자가 맺는 불안한 관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꽃가루 음절들이 만든 문장을/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만,/그 해독되지 않는 침묵이/장미를 장미로 만드는 원천이라는 것은/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장미의 또 다른 입구」)라는 언술도 시 쓰기의 어려움, 즉 “누구도 들어간 적 없는 방”에서 시를 찾아야 하는 고통의 토로는 아닐까?

 

「조롱의 문제」는 새를 품은 채 날아가려는 조롱을 이미지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날아가고 싶지만 날아갈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조롱과 새를 견디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자유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흑과 백」을 비롯해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시들도 있다. 언어를 매개로 한 모든 행위가 근원적으로 소통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지만, 소통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단일한 내용의 효율적 전달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확정되지 않은 내용을 공유하는 동안 새로운 텍스트가 생성되는 과정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동작의 발견」은 그런 텍스트의 실험 속에서 나왔다. 대학원 학생들에게 ‘춤’에 관한 시적인 문장을 각자 5행씩 써오도록 했다. 수업시간에 그 5행을 차례로 읽어나갔고, 그런 다음 10분 정도 시간을 주고 새로운 5행을 쓰게 했다. 다시 그것을 돌아가면서 읽고, 10분을 쓰고, 이 과정을 여러번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애초에 썼던 다섯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가 전개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문장들을 선택과 재구성을 통해 각자 한편의 시로 완성했다. 나도 그 과정에 함께 참여했고, 그 결과물이 「동작의 발견」이다. 말과 말이 서로 접촉하고 자극하면서 시적인 무엇이 만들어졌다. 동작이 발견되는 순간 또는 시가 태어나는 순간에 관한 시이니까, 일종의 메타시라고 볼 수 있겠다.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은 새로운 동작을 생각할 때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서 있었다고 한다. 몸 안에서 생겨난 어떤 리듬이 손끝을 타고 나오기 시작하면 그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을 만들며 하나의 동작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 오랜 작업방식은 어떤 경험을 충분히 체화한 다음에 그것을 유기적으로 구조화하는 데 공력을 기울이는 편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그런 방식이 답답하고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의 오랜 되새김질을 통해 시를 쓰던 습관을 여러 방식으로 깨뜨려보고, 소통의 효율성보다는 개방성을 넓혀가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머리보다는 몸으로 생각하면서 시적인 순간에 무작정 뛰어들어 써나간 시들이 많아졌다. 이미 경험된 것들을 익은 상태로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날것이나 낯선 것들이 툭, 하고 나를 치는 순간 내 몸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면서 튀어나오는 언어들, 그런 걸 받아적고 싶었다. 시의 문법이 좀 낯설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의도된 난해성이 아니라 모호성이 강해진 시작 과정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희덕의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삶의 비밀에 살그머니 밑줄을 긋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행이다. 이 이행은 구석진 네모 안에 무()의 원형을 넣어보려는 저 힘겨운 일과도 닮았다. 나희덕의 시를 다 읽고, 그의 이야기를 청하여 들은 지금, 탄광 속의 카나리아 한마리가 내 앞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아니다. 저기서는 방금 토끼 한마리가 부표 위로 떠올랐다. 카나리아의 죽음으로 광부는 무사히 갱도를 빠져나올 것인가? 부족한 산소를 감지해 질식사한 토끼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있는 것인가? 나희덕과 함께 삶의 골목들을 힘겹게 돌아들고 어두운 터널 속을 빠져나오려는 지금, 우리는 삶의 어디에 서 있는 것이며 그곳에서 또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여전히 우리는 이 폐허 같은 삶 저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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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도와 우울증에 대해 프로이트(S. Freud)는 1917년 발표한 「애도와 우울증」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도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理)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 비록 애도가 삶에 대한 정상적인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하지만 결코 그것이 어떤 병리적인 상황도 아니며, 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 반면에 우울증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1997, 285면. (번역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