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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와 희망의 목적론

 

 

김남시 金楠時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철학·문화학. 저서 『본다는 것』, 역서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권력이란 무엇인가』 『문자의 기호들』 등이 있음. namseekim@ewha.ac.kr

 

 

과거와 정의

 

세월호 사고로 어처구니없이 죽어간 아이들의 주검이 수습되는 동안,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참사의 책임자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며, 이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제도를 개선하고 더 나은 구조와 관리 체계를 마련하자는 목소리들이 높다. 우리로서는 당연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밖에는 달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하게 되는 이 생각에는, 하지만 어딘가 부끄럽고 염치없음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어간 아이들을 우리 살아갈 사람들이 좀더 ‘나아진’ 세계에서 살게 되는 계기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과 삶을 위해 전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자를 ‘엄벌’에 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를 개선한다는 것,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시간에 영향을 끼치고 세상을 조금은 개선할지도 모를 이런 행위들은, 고작해야 미래를 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달한 미래는 정의로울까?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고 부당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때마다 개선된 제도와 환경, 더 나은 미래를 다짐했음에도 우리의 현재가 여전히 그만큼 나아지거나 정의롭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죽어간 자들이 우리를 향해 제기한 요구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과거에 이루어진 부당하고 무고한 죽음, 고통과 분노, 눈물이 지닌 무거운 요구로부터 눈을 돌린 채, 앞으로 살아갈 우리만을 위해 미래의 행복이라는 꿈에 매달려온 탓이 아닐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주겠다는 정치가들의 허튼 약속을 믿고, 불행한 과거를 잊고 현재를 참으며 미래의 성공으로 보상받으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죽은 자들의 요구를, 과거의 요구를 외면해온 탓은 아닐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씌어진 이 글에서, 나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빌려 오늘날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희망의 목적론’을 비판적으로 숙고해보고자 하였다. 그런 이유로 이 글의 초점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적 개념을 정치적으로 활성화하려는 이론들, 결국에는 희망의 목적론과 공모하게 되는 종말론적 정치론에 대한 비판에 맞추어져 있다. 지금도 진행 중인 세월호 희생자 수습과 그 와중에 드러난 국가기관의 치명적인 무능함은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사유와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화적 질서1)

 

일반적으로 신화에 대한 이론은 신화를 부정적인 의미로, 가상이나 이데올로기, 허구적 의미 연관 등을 지칭하는 메타포로 사용한다. ‘신화에서 로고스(logos)로의 이행’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성의 발현을 긍정하는 계몽주의적 전통에서 신화란 이성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상상적 연관들이다. 그것은 이성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에 의해 극복되었거나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그러한 점에서 ‘진리’ ‘실제’ ‘현실’과 대립한다. 그런데 벤야민에게서 ‘신화’(Mythos) 또는 ‘신화적’(mythisch)이라는 단어에 대립하는 것은 놀랍게도, ‘신적’(göttlich)이라는 형용사다. 그의 글에서 ‘신화적 폭력’에는 ‘신적 폭력’이, ‘신화적 질서’에는 ‘신적 질서’가 대립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벤야민에게서 ‘신화’ 또는 ‘신화적인 것’이 계몽주의 전통의 이론과는 다른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벤야민은 ‘신화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계몽이나 혁명 등의 세계 내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신화적 질서’는 특정한 역사 또는 정신 단계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메시아적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세계와 인간, 그들이 연루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상태를 지칭하는 탈()역사화된 개념이다. 벤야민은 ‘신화적 질서’를 ‘빚/죄의 연관’(Schuldzusammenhang)이 지배하는 질서라고 특징짓는다. 신화적 질서의 특징인 “빚/죄의 연관”이라는 개념은 빚과 부채의 계보학적 관계에 대한 니체(F. Nietzsche)의 논의2)에 근거하고 있다. 신화적 질서는 인간의 생명을 신화의 신들에게 ‘빚지게’ 만듦으로써 인간에게 ‘죄’의 의식을 갖게 하며, 신화적 질서를 대리하는 법은 빚으로서의 죄에 대한 판정과 처벌의 개념과 함께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자의(恣意) 대신 법질서에 의거하는 정치를 역사의 진보로 보았던 계몽주의적 사유와는 달리, 벤야민은 법적 질서가 지배되는 상태를 결코 정의로운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벤야민에게 “법의 질서는 인간의 데몬적(dämonische) 실존단계, 사람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신에 대한 그들의 관계까지도 법적 규정(Rechtssatzungen)에 의해 규정되던 실존 단계의 잔재가 시대를 지나 남아 있게 된”3)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법적 질서는 파라다이스 상태의 근원적 행복, 무구함의 상실과 더불어 등장한 것이다. 벤야민에게 법적 질서는 창조 상태의 순수한 이름언어가 타락한 결과 생겨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판단하고(urteilend), 판결을 내리는(richtend) 언어4)와 더불어 등장한다. “그 언어가 최초의 인간들을 파라다이스에서 추방했고, 아니 그들 자신이, 유일하고도 깊은 빚짐(Schuld)으로 처벌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영원한 법에 따라 그 언어를 부추겼다.”5) 대상을 ‘옳은 것’과 ‘그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판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언어는 그 언어 외부에 존재하는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의 기준과 규범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에 따라 법적 질서는 그를 어기고 훼손하는 행위를 죄로 선언하고 처벌하는 구조6)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화적 질서의 가장 큰 부정성은, 인간의 삶을 ‘결단’ 대신에 ‘운명’에, ‘빚 없음’(Unschuld) 대신에 ‘빚짐’(Schuld)의 연관 속에 짜넣음으로써 불행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신화적 질서는 “그것의 유일하게 구성적인 개념이 불행과 운명이며, 그 내부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해방의 길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7)다. 인간이라면 지니고 태어난다는 근원적 원죄이든, 그 원초적 빚짐(Urschuld)을 사해주기 위해 희생한 그리스도에 대한 종교적 빚짐이든, 사회적·정치적 혹은 경제적 의미에서의 빚짐이든 이 ‘빚짐의 연관’에 붙들려 있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 빚/죄가 우리가 갚아야 할 것이든, 누군가에게서 돌려받아야 할 것이든 우릴 자유롭지 못하게 함은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질서는 보복 또는 보상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우면서, 이 빚과 빚짐의 상태를 지속시키면서, 결국 우리를 “살아 있는 것의 빚의 연관인 운명”8)에 종속되게 한다.

 

 

신적 폭력

 

이러한 신화적 질서를 신적 질서와 대비시키면서 법과 폭력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글이 「폭력 비판을 위하여」이다. 이 글과 「신학-정치적 단상」은 1920년 징병을 피해 머무르던 스위스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벤야민이 구상했던 총 3부로 이루어진 정치서의 둘째 부분에 해당된다.10) 이 글에서 벤야민은, 모든 시민의 시초적 동의와 같은 상상적9) 씨나리오에서 법질서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민적 정치이론과는 달리, 모든 법적 질서의 근원이 폭력에 있다고 본다. 법적 질서는 ‘법을 세우는 폭력’(rechtssetzende Gewalt)에 의해 수립되고, ‘법을 지탱하는 폭력’(rechtserhaltende Gewalt)에 의해 유지됨으로써만 그 정당성을 갖는다. 프랑스대혁명 같은 부르주아 혁명이건 러시아혁명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건 하나의 법적 질서의 정당성은 그것이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성(Faktizität) 말고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10) 벤야민은 이 생각을 인간역사 일반으로 보편화한다. 곧 하나의 법질서가 다른 법질서로 대체되며 이행해온 인간사회의 역사는 “새로운 폭력이나 이전에 억압되었던 폭력이 지금까지의 법을 세우는 폭력에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법을—그것 역시 새로이 몰락할—정초”11)해온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법을 세우는 폭력에 의해 세워진 법적 질서는 법을 지키는 폭력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유지되기에, 그 법적 질서 속에는 늘 경계하고, 위협하며, 죄를 선언하는 신화적 폭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폭력에 대립하는 것이 신적 폭력이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신이 대립하듯이 신화적 폭력에도 신적 폭력이 대립한다. 신화적 폭력은 모든 점에서 신적 폭력의 대립물이다. 신화적 폭력이 법을 세운다면 신적 폭력은 법을 없애버리며,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그 경계를 없애버린다. 신화적 폭력이 빚지게 하면서(verschuldend) 동시에 죄를 짓게 한다면(sühnend) 신적 폭력은 죄를 없애며(entsühnend), 신화적 폭력이 위협하는 식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식이다.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치사적이다.12)

 

여기 등장하는 ‘신적 폭력’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려는 일련의 이론적 시도들13)은 이 개념에 주목하면서, 이를 예상치 못하게 발발하는 세계 내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지젝(S. Žižek)은 벤야민의 ‘신적 폭력’을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들이닥”치는 폭동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신적 폭력은 그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멋대로 살인을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순결함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구조화된 사회적 공간 바깥에 있는 자들이 ‘맹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즉각적인 정의/복수를 요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바로 이것이 신적 폭력이다. 십수년 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난 상태를 상기해보자. 빈민가의 군중이 도심의 부유층 거리로 가서 슈퍼마켓을 마구 약탈하고 방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적 폭력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를 신의 이름으로 벌주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메뚜기떼 같았다. 신적 폭력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들이닥친다.14)

 

하지만 위에서 본 신화적 질서의 특징들을 떠올린다면, 이런 종류의 폭동이, 아니 이보다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지는 어떤 혁명일지라도 그것이 우릴 빚지고 죄를 짓게 하는 ‘빚짐/죄의 연관’을, 거기에 근거하는 법적 질서를, 그 법질서가 만들어내는 경계들을 ‘내리치는 방식’으로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설사 그 혁명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수립할 만큼의 힘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법을 수립하는 폭력일 것이며, 또다시 법을 지키는 폭력에 의해서만 그 정당성이 유지될, 또 하나의 법질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와 세속적인 것의 질서

 

‘신적 폭력’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와 충돌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분명히 분리시키고자 했던 역사 내적 질서와 메시아적 질서를 다시 연속해놓음으로써, 벤야민의 메시아주의가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세속화할 뿐 아니라, 구원에의 기대를 역사 내부에 자리잡게 함으로써 그가 가장 경계하던 희망의 목적론을 소환해낸다. 「신학-정치적 단상」을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메시아의 도래나 신의 왕국을 역사적 목표로 설정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메시아가 비로소 모든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킨다. 그 역사적 사건이 메시아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를 메시아가 비로소 구원하고, 완성하고,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것은 그 스스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맺기를 바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의 목적이 아니다. 신의 왕국은 목표로 설정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종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왕국에 대한 생각에 구축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신정(神政, Theokratie)은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오직 종교적 의미만을 갖는다. 신정의 정치적 의미를 강도 높게 부정했다는 것이 블로흐(E. Bloch)의 『유토피아의 정신』(Vom Geist der Utopie)의 가장 큰 공적이다.15)

 

첫 문장에서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둘러가지 않고 ‘메시아’(der Messias)라고 못박는다. 그러니까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의 도래’는 봉기나 폭동, 혁명에 대한 신학적 메타포가 아니라는 말이다. 야콥 타우베스( Jacob Taubes)가 강조하듯 여기서 벤야민은 신학적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학의 개념을 가지고 현실정치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16) 오히려 벤야민은 “역사적인 것은 그 스스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맺기를 바랄 수 없”으며, “신의 왕국은 역사적 동력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역사적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간극을 만들어놓는다.19)

17)‘신의 왕국’을 세속적 질서와, 메시아적인 것을 역사적인 것과 분리하고, 현세적·세속적 질서와 초월적·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 인과적 관계도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메시아의 도래를 현세적 질서의 귀결이나 목표로 세우지 않는 것, 이것은 유대 메시아주의의 특징이다. 벤야민의 절친한 친구이자 유대교 연구가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은 메시아주의에 대한 논문18)에서 메시아를 ‘자기 스스로 오는 자’로 특징짓는다. 메시아는 그의 도래를 원하는 인간의 노력이나 갈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오는 자라는 말이다. 메시아의 도래와 더불어 비로소 이루어질 역사적인 것의 종말과 완성, 구원, 나아가 신의 왕국은 인간의 노력, 기도, 애원, 갈망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역사적인 것은 그 스스로 메시아적인 것과 관계 맺기를 바랄 수 없다.” 구원이란 역사 내적인 요구나 노력, 갈망의 댓가가 아니며, 세계 내적 발전의 결과는 더더욱 아니다.

 

구원은 세계 내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 구원은 오히려 역사에 대한 초월성의 침입이다. 그를 통해 역사 자체가 몰락하는, 전혀 다른 곳에서부터 그를 비추는 빛을 접하기에 역사가 몰락 속에서 스스로를 변신시키는, 그러한 침입이다.19)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이 인간의 현세적 질서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 질서의 도래에 있어 현세적·역사적 세계는 철저히 수동적이라는 점에서 유대교의 메시아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유대교가 역사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구원을 전적으로 초월적 질서로부터 오는 것으로 만들었다면, 기독교는 구원을 고독한 개인의 믿음과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으로 이해한다. 성실함과 노력을 통해 도달한 세속적 성공을 예정된 구원받음에 대한 사후적 징표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티즘에서 구원은 구원받을 만한 행동을 수행한 인간에 대한 일종의 신의 보상으로 받아들여진다.20) 프로테스탄티즘은 구원을 개인화하여 처벌과 보상의 원리에 포함시킴으로써 구원의 문제를 다시금 신화적 질서로 편입한 것이다. 그에 반해 유대교에서 메시아의 도래는 현세적 세계의 질서나 그 속에서의 인간의 행동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구원은 현세적 세계의 시간도, 그 세계 내의 인과적 질서도 따르지 않는다. 신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현세적 세계에 개입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초월적 영역의 소관이다.

이처럼 구원을 역사적 세계, 현세적 질서와 분리시키는 것은 일견 매우 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원과 현세적 질서를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벤야민 역사철학의 핵심이다. 구원이 ‘구원받을 만한’ 행동에 대한 응답이나 보상으로, 구원을 향한 노력과 애씀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를 통해 이루어진 시간의 질서는 여전히 “빚짐의 연관”에 붙들려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애절한 부름에 구원으로 응답해준 초월자에게 ‘빚을 지게’ 될 것이며, 그 빚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정한 규칙과 명령을 따라야 하는 의무감을, 그를 어겼을 경우의 죄의식을 갖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신화적 폭력이 지배하는 신화적 질서에 붙들려 있는 것이 된다.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과 비관주의

 

메시아의 도래를 우리의 의식적 노력으로 불러낼 수 없다면 역사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 대해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행복의 이념에 정향(定向) 해야 한다. 이 질서가 메시아적인 것과 맺는 관계는 역사철학의 본질적 가르침 중 하나이다. 이 관계로부터 신비주의적 역사이해의 조건이 정해지는데, 그 문제는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해볼 수 있다. 한 화살의 방향이 세속적인 것의 동력을 작동시키는 목표를 나타내고, 다른 화살이 메시아적 강렬함을 나타낸다면, 자유로운 인류의 행복추구는 당연하게도 저 메시아적 방향에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겠지만, 자신의 길을 따라 나아가는 하나의 힘이 그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다른 힘을 촉진시킬 수 있듯, 세속적인 것의 질서도 메시아 나라의 도래를 촉진시킬 수 있다. 세속적인 것은 이 〔메시아〕 나라의 범주는 아니지만, 지극히 조용하게 메시아 나라가 다가옴의 한 범주, 그것도 가장 잘 들어맞는 범주이다. 모든 세속적인 것은 행복 속에서 자신의 몰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오직 행복 속에서만 몰락을 찾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21)

 

세속적인 것을 움직이는 동력은 신의 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의 이념에 정향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행복이란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을 기대하고 기다림으로써 생겨나는 설렘이나 희망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행복은 몰락과 관련되어 있다.

 

불멸성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영역에서의 원상복구(restitutio in integrum)에는 몰락의 영원성으로 나아가는 세속적 영역에서의 원상복구가 상응하며, 이 영원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총체성 속에서 스러져가는,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인 총체성 속에서 스러져가는 세속적인 것의 리듬, 이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 행복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것의 영원하고 총체적인 무상함으로 인해 메시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몰락을 추구하는 것, 자연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여러 단계들에서도 몰락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세계정치의 과제이며, 그 방법은 니힐리즘이라 불려야 한다.22)

 

행복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몰락해가는 세속적의 것의 리듬,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 속에 있다. 행복은 신의 왕국의 도래를 기다리고 그것을 위해 애쓰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기대감이 아니다.23) 그런 기대감은 세속적인 것, 세계 내적 과정과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으로 이어질 것이다. 행복이란 과거와 현재를 잊게 만드는 그런 기대나 기다림에서가 아니라, 결국 몰락을 향해 갈 세속적인 것의 리듬 속에서 그것이 붙들려 있는 운명과 빚짐의 연관들에 내재적으로 맞서는 것이다.24) “행복의 표상 속에 어찌할 수 없이 구원의 표상이 함께 울리고 있다”25)면 그것은, 구원이나 해방이라는 도달점을 미래에 투사하고 그를 기다리거나 그를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미래세대의 구원자 역할을 부여”하면서 “해방된 자손의 이상”을 위해 투쟁하라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의 태도는, 벤야민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줄을 잘라버리는”26)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삶의 시간을 ‘언젠가’의 미래를 위해 내어주는 것이며, 그 미래를 전유하려는 힘들에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실천전략을 벤야민은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이라 부르고, 그를 ‘세계정치의 과제’로 삼았다. 방법으로서의 니힐리즘은,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만 돌리는 희망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글에서 벤야민이 말한 “비관주의의 조직”(den Pessmismus zu organisieren)과 상통한다. “비관주의를 조직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도덕적 메타포를 쫓아내는 것이고 정치적 행동의 공간 속에서 100퍼센트의 이미지 공간을 발견”27)하려는 것이다. 이 문장은 벤야민이 1929년 발표한 논문 「초현실주의」28)에 등장한다. ‘유럽 지식인들의 최근 스냅사진’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글은 초현실주의자들을 문학/예술가가 아니라, 당대 유럽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정체성을 가장 치열하게 실천하는 집단으로 본다. 여기서 벤야민은 당시 부르주아의 정치활동을 지배하던 도덕주의를 비판하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탈 도덕적’ 태도를 소환한다. 이 태도는 “정치를 도덕화하는 딜레탕티즘으로부터 살균시키는 장치, 그로부터 단절시키는 장치(Desinfektionsapparat, Isolierungsapparat)”29)로 기능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당시 정당 활동을 벌이던 “좌파 시민계급”은, “아이나 손자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게 하고” “낙관주의라는 이미지만으로 ‘시를 지으’면서, 딜레탕트적 낙관주의에 기반해 정치를 도덕과 ‘바꿔치기하고’, 정치적 실천을 ‘이상주의적 도덕”30)과 결부시키고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탈도덕적 태도는 무엇보다 이러한 낙관과 이상주의적 희망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비관주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은 「양식론」(1928)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이제야말로 제대로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희망이란 없다는 것을, 기다릴 만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그들은 미봉정책(Vogel-Strauß-Politik)을 하고 있는, 기형들이고, 괴물이며, 수염 난 아기들, 히스테리에 걸린 원숭이들로, 상상적인 천상을 불러대면서도 그들의 농부유모의 젖을 탐욕스럽게 빨아대고 있다고.31)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은 희망만으로 살아간다고, 아무것도 희망할 것이 없다면 인간은 분명 세바퀴만 돌고는 자살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와는 달리 우리는 사람은 희망이 없이만 살아간다고, 모든 사람이 희망 없이 살고 있다고, 돈을 벌어다주는 생각을 갖고 있던, 푸른색의 토끼를 쫓는 첫번째 사냥개는 약아빠진 여우였다고 주장한다. 화약을 발명하는 건 아직 생각할 수 있지만, 희망이라고! 참으로 특이하시군!32)

 

희망은 미래의 지평을 향해 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아직 있지도 않은 미래로 눈을 돌린다는 것이다. 미래에 도래할 것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이러한 희망의 논리는 시간에 목적론적 성격을 부여한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을 향해 배열되도록 유도한다. 그 미래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해지면, 그 목적론은 ‘네가 희망하고 기대하는 미래의 시간을 위해 너의 현재 시간을 유예하고, 희생하며, 투자하기’를 요구하고 나선다. 현재의 고통이란 ‘성공적 미래’를 위해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라 말하면서, 뒤틀리고 착종된 현재를 용인하고 받아들이게 한다.33)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밝은 미래’를 이야기하는 정치가의 헛된 약속에 빠져들게 하고,34) 현실의 심연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며, 지금 이곳에서의 부당함을, 현재의 삶의 시간을 미래를 위해 유예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그것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경쟁의 트랙에 아이들을 몰아넣고(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대학생으로서의 삶의 시간을 학점과 자격증 취득에 ‘투자’하도록 부추기고(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성과에 따른 경쟁을 통해 한 인간의 모든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도록(노후의 안정을 위해!) 우릴 겁박한다. 현재를,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숨쉬고 있는 순간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투자되어야 하기에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시간으로, 상품생산 노동자가 미래에 이루어질 ‘교환가치’로의 전환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되는 상품을 생산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 의해 소비되어서는 안될 것으로 만든다.

철저한 비관주의의 조직이란 미래로 향하는 시선을 ‘현재성으로 가득 찬 지금의 세계’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구절을 우리는 벤야민의 블랑끼(A. Blanqui)에 대한 메모에서 찾을 수 있다.

 

『천체에 의한 영원』(Léternité par les astres) 중에서 블랑끼는 진보에 대한 믿음에 어떤 증오도 보이지 않았으나, 조용히 거기에 조소를 보내며 그를 건너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정치적 신조를 배신했다고는 할 수 없다. 블랑끼 같은 직업혁명가의 활동은 진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당대의 불의를 없애려는 단호한 결의만을 전제한다. 계급적 증오가 가진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치적 가치는 혁명적 계급을 진보에 관한 온갖 공론들에 대한 건강한 무관심으로 무장시키는 데 있다. 만연한 불의에 대한 분노로부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것은 미래세대의 삶을 개선하는 것만큼이나 인간 존엄성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어울리는 행동이다. 동시에 인간다운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때마다 다가오는 파국으로부터 인류를 끌어내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이러한 분노와 함께 간다. 블랑키가 그러했다. 그는 ‘나중에’ 올 것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늘 거부하였다.35)

 

“나중에” 올 것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대신, 당대의 불의를 없애려는 단호한 결의, 만연한 불의에 대한 분노, 그때마다 다가오는 파국으로부터 인류를 끌어내겠다는 단호한 결의,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현재 속에서 살아가면서 실천하게 만든다. 행복의 추구는, 더 나은 미래를 역사적 세계의 동력이자 이룩해야 할 목적으로 세우고 그를 향해 애쓰는 것과는 무관하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미래의 유토피아를 역사적 세계의 목표로 세움으로써, 지금의 시간을 미래로 유예시키는 대신, 그 시간 속에 함께 연루되어 있는 구원의 표상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미래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현재의 고통과 모욕, 억압과 강제를 참고 견디라고, 현재의 시간 따위는 미래를 위한 땔감으로 태워버리라 요구하는 희망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현재의 내재성36)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게 하는 목적론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철저히 현세의 몰락, 즉 ‘끝’을 향해 가면서도, 피안, 즉 ‘신의 왕국’을 ‘목표’로 삼을 수 없”37)는 종말론이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역사 속에서 살면서 그 역사의 종말을, 그 종말과 더불어 비로소 가능해지는 신의 왕국을 이야기하지만, 그 구원을 ‘역사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도래를 정치적 프로그램과 비전으로 삼을 때, 메시아의 도래를, 신적 폭력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속적 사건으로 사유하는 순간 메시아주의가 지니던 이 긴장감은 사라져버린다. 역사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으로 파악되어야 하지만 그 역사가 신학적 개념으로 묘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38) 역사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는 이 금지 사이의 긴장 속에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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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절은 한국비교문학회 학술대회 ‘고대의 신화들, 현대의 신화들: 비교 신화(이)론의 가능성’(2012.6.2)에서 발표한 졸고 「신화와 반신화: 발터 벤야민의 경우」를 보완한 것이다.

2) 여기 나오는 독일어 단어 “Schuld”는 ‘죄’로도, ‘빚/부채’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니체는 이를 죄와 도덕의 기원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죄’라는 도덕적 개념과 ‘부채’라는 물질적 개념이 같은 어원을 갖는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계보학적 연관성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죄’의 개념은 개인이 공동체에 끼친 ‘빚’에서 연원한 것이고, ‘죄의식’이란 그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의무의 감정이 개인에게 내면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죄의 감정과 개인적인 의무의 감정은 (…) 그 기원을 존재하는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개인 관계에, 즉 파는 자와 사는 자,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 두고 있는”(『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413면) 것이다.

3) 벤야민 전집(Gesammelte Schriften, 이하 GS로 약칭) II-1, 174면.

4) GS II-1, 153면.

5) GS II-1, 153면.

6) Benjamins Begriffe, Suhrkamp 2000, Bd. 2, 562면.

7) GS II-1, 174면.

8) GS II-1, 175면.

9) Andreas Greiert, Erlösung der Geschichte vom Darstellenden. Grundlagen des Geschichtsdenkens bei Walter Benjamin 1915-1925, Wilhelm Fink 2011, 150면.

10)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 소비에트공화국 법은 자신의 법질서를 보편적 이념이나 가치에 근거지으려는 부르주아 국가와는 구별되게, 법질서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법(Recht)이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상응하고 그 지배계급에 의해 조직된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적 관계의 체계(혹은 질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Petr I. Stučka, Die revolutionäre Rolle von Recht und Staat, Übers. u. Einl. von Norbert Reich, Suhrkamp 1969, 65면.

11) GS II-1, 202면.

12) GS II-1, 199면.

13) 예를 들어 박진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의 도래란 정치의 문제이다.” “파국과 종말, 그리고 메시아적인 힘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 속에는 어떤 정치적인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다.” 박진우 「파국의 시대와 ‘지금시간’(Jetztzeit): 발터 벤야민과 사도 바울의 새로운 역사적 시간의 패러다임」, 『인문학연구』 44호, 조선대 인문학연구소 2012, 87면.

14)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김희진·정일권·이현우 옮김, 난장이 2011, 278면.

15) GS II-1, 203면.

16) Jacob Taubes, 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Wilhelm Fink 1993, 98면.

17) Sigrid Weigel, Walter Benjamin. Die Kreatur, das Heilige, die Bilder, Fischer 2008, 12면. “벤야민의 개념들을 관통하는 매트릭스는 ‘창조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 사이의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구분이며, 그것은 벤야민의 글에서 근본적인 에피스테메적 역할을, 그의 사유의 근거를 이룬다.” 같은 책 12면.

18) G. Scholem, “Zum Verständnis der messianischen Idee im Judentum,” Über einige Grundbegriffe des Judentums, Shurkamp 1996.

19) G. Scholem, 앞의 글 133면.

20)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중 특히 2장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김덕영 옮김, 길 2010.

21) GS II-1, 203면.

22) GS II-1, 204면.

23) 야콥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이 구절과 바울의 로마서 8장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벤야민을 “자연과 자연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로마서(…)에 대한 주석가”로 보고 있다.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옮김, 그린비 2012, 174면. 하지만 그는 벤야민의 글과 로마서 사이의 결정적 차이, 곧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도래할 무엇인가에 대한 기다림이 벤야민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한다. 문학평론가 조효원은 타우베스의 논의를 확장시켜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벤야민이 ‘니힐리즘’이라 부른 것은 ‘마르키온-바울주의’와 오롯이 겹친다. (…) 〔벤야민의〕 천사는 이 지상에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러져가기를, 사라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만 이 세계에 머물 동안 그는 ‘인용’과 ‘지우기’를 통해 조용히 다가올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며 기다릴 따름이다. (…) 초월적 심판으로서의 기다림이 바로 메시아의 왕국으로 하여금 ‘지극히 조용히 다가오게 만드는 범주’, 즉 행복의 이념이다.”(조효원 『부서진 이름(들): 발터 벤야민의 글상자』, 문학동네 2013, 279면.) 하지만 해방과 구원을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 이 전형적인 목적론적 기다림이 벤야민에게는 없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정치적 담론이 아닌 신학적 사유로 받아들이는 타우베스의 논의를 이렇게 확장하는 것은 메시아주의를 ‘종말’과 ‘메시아’에의 기다림으로 속화시키고, 어렵게 도달한 니힐리즘을 다시 기다림의 목적론에 복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24) “행복은 행복한 자를 운명과 자기 자신의 망의 연쇄로부터 풀어내는 것이다. (…) 그렇기에 행복과 축복(Seligkeit)은 빚없음(Unschuld)과 마찬가지로 운명의 영역에서의 벗어남을 이끈다.” GS II-1, 174면.

25)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발터 벤야민 선집 5), 최성만 옮김, 길 2008, 331면. 번역은 수정함.

26) 같은 책 343~44면.

27) GS II, 309면.

28) 「초현실주의」는 1966년 다시 출간되어 독일의 1968년 청년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Karl Heinz Bohrer, “1968. Die Phantasie an die Macht? Studentenbewegung-Walter Benjamin-Surrealismus,” in Geschichte und Gesellschaft. Sonderheft, Vol. 17. (1998) 288~300면.

29) GS II, 304면.

30) GS II, 308면.

31) Louis Aragon, Abhandlung über den Still. Surrealistisches Traktat, tr. Jenny Graf-Bicher, Berlin: Ed. Tiamat 1987, 54면.

32) 같은 책 65면.

33) “미래에 대한 긍정은 현실에 대한 용인과 같은 것이겠지요. 현실과 미래는 긴장관계가 아니라, 연속적 과정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체계 속에는 지배적인 권력관계가 이미 성립되어 있습니다. 전체로서의 세계가 뒤틀려 있다면,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허구일 수밖에 없지요. ‘미래는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는 정언에는 ‘욕망을 훈육하고자 하는 불온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기보다는 체제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가자고 말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면, 오로지 그것은 자신의 잘못일 뿐이라는 겁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창은 「77호를 발간하며」, 『문화과학』 2014년 봄호(통권 77호) 5면.

34) “두물머리의 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이기면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패배했고, 국회에서 친수법 통과되는 걸 막아야 살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뛰었는데 날치기 통과됐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면 법을 바꿀 수 있다고 해서 열심히 했는데 안됐다고. 그런데 사람들이 말했다고 했다. 이제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고. 그때 문득 자신의 밭을 둘러봤다고 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잡초가 자란 밭을 보며, 또 자기 옆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과 외부에서 온 지킴이들을 보며 다짐했다고 한다. 내 밭을 가꾸면서 여기 동료들과 살아가고 또 싸워가겠다고… 희망이 덧없다는 것, 이는 절망한 이들의 말이 아니라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이들의 말이다. 자신이 사막에 있다는 사실에 압도된 사람들일수록 오아시스에 대한 희망을 빨리 만들어낸다. 그래서 얼마 가지 않고서도 수십번의 오아시스를 보지만 모두가 신기루다. 희망이란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 품는 것이지만, 미래로 갈수록 덧없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실질적인 것이 된다. 희망을 내일에 거느니 오늘에 걸고, 희망을 거기에 거느니 여기에 걸겠다. 희망은 지금 사막을 뚜벅뚜벅 걷는 내 다리에 있다.” 고병권 『살아가겠다: 고병권이 만난 삶, 사건, 사람』, 삶창 2014, 11면.

35) GS V-1, 428면.

36) 바로 이 점에서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블로흐의 유토피아적 메시아주의와는 구별된다. 블로흐가 내재적인 것들을 대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인식하고 ‘희망’할 수 있는 주체를 전제한다면, 벤야민에게 그런 내재성을 넘어서는 요구(꿈)는 신화적 질서에 의해 침윤되어 있다. 그런 꿈은 비판되고, 그로부터 깨어나야 하는 신화다. Andreas Greiert, 앞의 책 178면 이하.

37) 김항 「신의 폭력과 지상의 행복, 발터 벤야민의 탈정치신학」, 『안과밖』 2010년 하반기 (통권 29호), 124면.

38) “기억은 완결되지 않은 것(행복)을 완결된 것으로 만들고, 완결된 것(고통)을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신학이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우리는 역사를 근본적으로 비신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역사를 직접적으로 신학적 개념들로 서술하려고 시도해서도 안된다.” GS V-1, 5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