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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추이 즈위안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돌베개 2014
구상과 현실, 실험을 통한 진전
장영석 張暎碩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jys80@skhu.ac.kr
추이 즈위안(崔之元)의 두번째 ‘한국어판 저서’가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김진공 옮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첫번째 ‘한국어판 저서’인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장영석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3) 이후 11년 만이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이라면 ‘한국어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왜 굳이 ‘한국어판 저서’라 하는가? 이는 저자 스스로가 고안하여 사용하고 있는 표현으로, 그가 발표한 여러 논문 가운데 일부를 선별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판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추이 즈위안은 이번 저서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첫번째 한국어판 저서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출간된 이후, 나는 줄곧 한국의 학술사상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던 차에 두번째 한국어판 저서를 편집하여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의 진보적 학계에 더욱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번역 당시 평자는 나중에 두번째 한국어판 저서의 표제작이 될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 자유사회주의와 중국의 미래」라는 글이 인터넷에서 유포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글은 번역하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의 관점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은 ‘대담’ 형식으로 수록되었다(추이 즈위안・백승욱 대담 「중국식 사회주의 길의 꿈」).
당시 평자는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체제 개혁 방향이 신자유주의로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장이 당시 중국의 현실과 다소 괴리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번 서평을 위해 그의 글을 다시 정독한 뒤 저자의 관점이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출판 당시보다 지금 시점에서 더욱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국 당국의 정책 변화가 추이 즈위안의 글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2003년에 출범한 후 진타오(胡錦濤) 정부는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정책으로 인해 누적된 사회적 모순을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 그 핵심은 지속 가능한 발전체제 구축,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의 경제체제 전환, 민생정책 강화로 요약된다. 이들 정책의 일부는 저자가 이번 책에서 구현하고자 한 ‘제도혁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은 농업・공업・금융산업 등 주로 경제 분야에서의 제도혁신으로 표현된다. 그는 그같은 제도혁신의 사상적 근원을 프루동(P. J. Proudhon),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제임스 미드( James E. Meade), 로베르토 웅거(Roberto M. Unger), 실비오 게젤(Silvio Gessel) 등 쁘띠부르주아의 사상적 계보로부터 찾는다.
우선 농업 분야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에게 토지 점유의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프루동의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프루동은 사적 소유제를 인정하는 가운데 점유방식의 변화를 통해 개량을 추구했다고 하여 맑스(K. Marx)로부터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신봉자로 비판받았다. 맑스가 비판했던 프루동을 추이 즈위안은 찬양하고 있는 셈이다.
추이 즈위안은 아직까지 집체소유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중국 농촌에 주목하여 프루동 이론의 장점을 말한다. 따라서 맑스가 프루동을 바라본 시좌(視座)와 추이 즈위안이 프루동을 바라본 시좌는 현저하게 다르다. 맑스가 대면한 것은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제도가 신속하게 구축되고 있던 유럽 국가들이었지만, 추이 즈위안이 대면한 것은 사회주의적 공유제도가 해체되고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제도가 점차 확대되어가는 중국이다.
아직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제도가 침투하지 못한 중국의 공업과 금융 분야에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제기하는 제도 혁신은 세가지다. 첫째, 제임스 미드가 주장한 ‘노동-자본 파트너십’ 제도이다. 이 제도를 채택한 기업에서는 노동과 자본이 이윤배당 방식을 함께 결정하게 된다. 둘째, 역시 제임스 미드가 주장한 ‘사회적 배당’ 제도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나이와 가정형편에 따라 사회적 배당을 받는다. 그에 필요한 재원은 정부가 보유한 국유기업 또는 공기업의 주식을 통해 조달된다. 셋째, 게젤이 주장한 ‘스탬프 화폐’ 제도이다. 일정한 기한 동안만 유효하게 유통되는 화폐를 발행하고 그 기한을 넘기면 보유세를 부여하는 이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현실적인 측면을 보자면 먼저 ‘노동-자본 파트너십’ 제도는 저자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현대 기업부문에서 중국의 일부 향진기업(鄕鎭企業, 촌민이 관리하는 기업)이 추진하고 있을 뿐 국가의 의지가 관철되는 국유기업에서조차 채택되지 않고 있다. 하물며 외자기업·합자기업·사영기업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1990년대 중후반기 국유기업의 구조조정 당시 노동자는 국유기업의 재산에 포함되어 있는 자신의 ‘노동재산권’(勞動産權)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저자는 정부가 국유기업의 소극적인 주주가 되는 중국의 정책과 ‘사회적 배당’ 제도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시 진핑(習近平) 정부하에서 진일보한 정책이 나온 바 있기도 하다. 2013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8기 삼중전회(三中全會)는 2020년까지 국유자본 이윤의 국가상납 비율을 30%로 제고하고, 더 많은 재원을 민생 보장과 개선에 사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국유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게젤의 ‘스탬프 화폐’ 구상은 아직까지 중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실험된 바 없다.
추이 즈위안은 중국의 대표적인 신좌파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이론적 뿌리를 맑스주의에 한정하지 않고 서구의 다양한 사상과 이념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의 이론에는 중국의 현실을 반영한 것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세가지 제도처럼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적 색채를 띤 것도 있다.
그밖에도 이 책은 그의 이론적 구상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제2부 ‘충칭은 중국의 미래가 될 수 있는가’ 수록문 참조). 추이 즈위안은 도・농 종합개혁을 추진하는 ‘충칭(重慶) 실험’에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이론적 구상을 현실 속에 반영하고자 한 적극적 지식인이다.
충칭 실험에서 나타났던 ‘지표거래’ 제도에는 프루동의 토지점유 방식을 통한 개량사상이, 국유자산 가치증대를 통한 민간 재부의 확대 실험에는 제임스 미드의 국유기업 활용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충칭 실험은 보 시라이(薄熙來) 사건으로 인해 더이상의 진전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에 빠졌다. 그가 구상한 제도혁신이 충칭에서 어느 방향으로 수렴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