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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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4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손유미 孫柔美

1991년 인천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w0thsdbal0w@hanmail.net

 

 

 

장마의 딸

장마는 당신

참 예쁜 당신의 이름

 

 

내가 낳았을 리 없는 장마의 딸.

너만 오면 예보에도 없던 장마가 시작이 돼.

이불이 마르질 않잖니.

축축한 불행 위에서 자는 건 이제 지겹구나.

 

흥건한 웅덩이를 보고 질색하는 나의 마미,

이 배꼽이 당신과 닮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장마는 내 의도가 아니에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나의 마미,

()을 하자면

나는 건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태생이 질척질척이지만 배꼽은 잊고

쩍쩍 갈라진 틈으로 살고 싶었어요.

발밑 사탕처럼

 

반짝,

밟히다

깨지고

부서져

알록달록한 설탕가루로 날아가는

 

그런 건조함을 매일 상상했습니다.

 

(오늘은 얼굴이 내일은 이름이

나의 마미, 마침내 당신은 처녀로 돌아가는 거예요.)

 

장맛비가 요란한 오늘, 우리

주니어의 역사를 새로 쓸까요?

 

이십년 전 번개가 내 배로 옮겨붙던

그날을 기억해요.

 

 

 

어항 속 지느러미는 여덟 금붕어는 하나

 

 

의 상자,

 

당, 신, 어, 디, 가, 요, 뻐끔뻐끔 태어나 딱딱하게 얼어붙는 말들. 남편의 엉덩이에 말줄임표가 돼 따라붙는다. 새삼스럽게, 남편은 엉덩이를 살짝 피해버리지. 비밀은 뱀의 혀처럼 가만있질 못하죠. 결말을 앞둔 여배우처럼 의미심장하게, 무너지는 와이프. 엄마, 엄마, 표정을 짓지 마세요, 꼭 살아 있는 사람 흉내 내듯. 찬 붓을 가슴에 대는 아들. 옆집 미시의 가슴을 똑같이 그린다. 엄마와 옆집 누나를 바꿔놓는 게 내 소원이에요. 뻐끔, 혓바닥을 내뱉는 순간 삽입되는 흰 , 저 긴 담배. 너는 담배 피우는 꼴도 네 아빠를 꼭 닮아가. (오래된 대본대로 뺨을 후려갈기곤) 엄마는 서럽게, 운다. 귀머거리 노인네는 지네, 지네, 디스크에 그렇게 좋다는데, 지네 타령을 한다, 머리칼에 물드는 하양의 꽁무니를 잡으며.

막다른 빙벽,

금붕어의 체위는 지느러미 뒤의 지느러미다.

 

의 경계 위로 튀어오르는

튤립 같은 금붕어의 입술

 

금붕어의 여덟번째 체위

 

 

 

쌍둥이

 

 

누나,

내 뒤통수엔 검은 새가 살아.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긴 부리의 비밀이 살아.

새는 나는 곳마다 검은 웅덩이,

긴 부리가 만든 시커먼 멍들.

나, 속내를 흘리고 다니나봐.

저기서 시작된 빗속에

내 비밀이 쏟아지면 어쩌지. 비실비실 오줌처럼.

누나,

이 비행은

새의 본능일까, 내 것일까,

헷갈려.

(창밖 가득 쏟아지는 새들과 함께 너, 떨어지며 지껄인다.

이동네는무서워육교가가까워추락이가까워

날낳은게엄마일까누나일까엄마가누나일까누나는처녀였을까

머리가 드디어 땅에 닿을 때, 너 웃는다.)

그리고 누나,

그거 알아?

엄마가 돌아왔어.

 

 

 

쌍둥이

 

 

얘,

나는 유령인가보다.

내 말에 대꾸 한번 하질 않잖니.

팔차선 도로 한가운데의 팔자라더니,

십팔평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메아리를 기다리는 꼴이야, 매일.

나물도 먹어라.

(질긴 시금치나물)

내일은 뭘 해줄까.

……

실뱀 같은 화를 내는 우리 엄마

십팔평짜리 소꿉놀이를 한다.

지폐보다 영수증이 많은 날 바람은

적자적자적자, 불고

우리의 엄마는

너네까지 이러면 내 인생 모조리 핏빛 적자잖니, 하고

밥상을 엎는다.

칼이 어디 있더라, 찾는 사이

뒤통수에 구멍을 키우는 동생이 소리도 없이

내가 그랬지? 엄마가 돌아왔다고.

웃는다.

 

 

 

유전자 순환선

 

 

태몽

 

복숭아였지. 분명 하얗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크게 한입 베어물었는데 이상하게 비린내가 나지 뭐야. 다시 보니 그건, 엉덩이였어! 뒤룩뒤룩 살이 찐 돼지의 엉덩이, 엉덩이, 히프! 알겠니? 넌 태어나기 전부터 내게, 오류였어.

 

태초의 애인들

 

차라리 뺨을 때려. 넣어달란 말 좀 하지 마. 불행을 생산할까봐 그래. 네 유전자를 못 믿느냐고? 난 내 유전을 맹신해. 자신 있어? 자신 있어. 그래, 어디 들어와봐. 태초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모녀

 

넌 내 마지막 자위야.

당신은 내 어쩔 수 없는 자해고.

 

*

 

파란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오는 꼬마.

한 손엔 바닐라아이스크림이 질질.

분홍색 치마가 뒤집힌다.

애 다리가 너무 뚱뚱해, 생각하는 찰나

꼬마가 내 소매를 잡아끈다.

 

뭘 보고만 있어. 솜사탕이나 사오시지, 이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