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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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극 金南極

1968년 강원도 평창 출생. 2003년 『유심』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가 있음. namkeek@hanmail.net

 

 

 

쌀을 쏟고는

 

 

밥을 안치려다 쌀을 쏟고는 망연히 바라본다

 

급물살에 고무신 한짝을 잃고는 해가 지도록 개울물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도 그랬다

 

산감이 된 아버지 산소 근처에 핀 산벚나무꽃을 바라보는 봄밤도 그랬다

 

망연하다는 게 더 망연해지는 요즘

 

쌀을 쏟듯 갑자기 나도 모르게 마음을 어딘가에 쏟아놓고 멍하니 앉아 창밖 소나무나 건넛산 상고대를 보면서

 

나는 더 망연해진다

 

 

 

랜드로바 구두

 

 

랜드로바 구두 밑창이 갈라져 빗길을 걸으면 양말이 젖는다

그럴 때마다 그 구두를 신은 시간과 구두를 신고 걸은 길과 또 구두를 신고 함께 걸은 사랑하는 이의 상처가 생각나

갑자기 우울해진다

우울이 구두다

그러니까 나는 우울을 신고는

우울하지 않은 척 다니다가 끝내 내게 들킨 거다

 

구두 밑창을 갈러 가게에 들렀더니 새 구두를 사는 게 낫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또 우울을 숨기고 살 수밖에

광택으로 우울을 가리고 살다가 또 양말이 젖고서야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어느 구석진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