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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싸르트르의 소설론

소설과 전기 사이

 

 

윤정임 尹貞姙

불문학자. 공저로 『실존과 참여』 역서로 『상상계』 『시대의 초상』 『변증법적 이성비판』(전3권, 공역) 등이 있음. poulou58@hanmail.net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것의 소굴 속으로, 날파리나 연체동물 같은 기억 없는 삶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하기야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는 문학이 없어도 넉넉히 존속할 테니 말이다. 아니, 인간이 없으면 더욱 잘 존속할 테니까.1)

 

 

들어가는 말

 

장 뽈 싸르트르( Jean-Paul Sartre)에게 소설은 그의 모든 다른 활동처럼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그 인간은 그가 총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파악하려 했던 ‘개별적 보편자’(luniversel singulier), 자서전 『말』(1964)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 유명한 문장 속의 ‘진정한 인간’이다.2) 평생을 지속한 이 인간이해의 작업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문학작품이고 철학서이며 전설처럼 회자되는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일 것이다.

단편집 『벽』(1939)을 제외하면 싸르트르가 ‘소설’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은 『구토』(1938)와 미완의 『자유의 길』 연작(1945~49)이 전부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구토』에서 ‘소설’이라는 표제어를 삭제하기를 바랐으며, ‘자유로 나아가는 행보’를 보여주고자 했던 『자유의 길』은 끝내 그 길을 다 가지 못했다. 까다로운 그의 소설관을 적용시켜 본다면 싸르트르의 소설작품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설 이외의 그의 글에서 우리는 수많은 ‘소설적 요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문학은 철학처럼, 철학은 문학처럼” 써냈다는 비판은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이른바 ‘정통’ 문학계와 철학계의 은근한 따돌림을 용인해주었다. 장르와 영역을 뒤섞어버린 대담한 시도에 대한 의미부여는 뒤로하고, 우선은 그렇게 된 이유와 의도가 궁금하다.

싸르트르는 소설을 썼고 소설에 대한 비평을 했으나 체계적인 ‘소설론’을 내놓지는 않았다. 『문학론』에 소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드러나긴 하지만, 참여문학론을 주장하기 위해 작성된 그 글에서 자기강요적인 논지를 거두어내고 소설에 대한 그의 ‘진심’만을 가려내는 일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오독의 우려도 크다. 그렇다고 전기적 문학비평에서 발견되는 소설론과 ‘소설적 요소’들까지 모두 포함시켜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역량과 지면이 턱없이 모자란다.

그리하여 아주 소박하게 그가 왜 소설을 그만두고 ‘소설 같은’ 전기비평에 몰두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논의를 한정하기로 한다. 이를테면 소설가 싸르트르의 실패담이 될 터인데, 이것이 그가 늘 경계하던 ‘상공에서 조망하는 사유’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 안에 들어가 벌인 일이니 최소한 구체성의 미덕만큼은 전달되기를 바란다.

 

 

1. 전기의 환멸과 소설의 구원

 

첫 소설 『구토』에서 시작해보자. “철학적 확신이 낳은 효과로서의 문학적 아름다움”3)이라는 상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테제소설’이라는 딱지를 떼버리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소설의 외양과 윤곽을 간직하고 있고, 허구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상의 작품”4)이라는 싸르트르식 소설의 정의를 지키고는 있지만, 작품 전면에 두드러진 철학적 내용으로 인해 『존재와 무』(1943)의 ‘소설적 버전’이라는 평판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일기형식인 이 소설의 주인공 로깡땡은 역사 저술가이다. 그는 18세기의 정치 음모가인 롤르봉 후작(물론 가상의 인물이다)의 과거를 추적하여 그에 관한 역사전기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로깡땡이 부빌에 머물고 있는 이유도 롤르봉에 관한 사료가 그곳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료는 신통치 않았고, 되살려야 하는 롤르봉의 과거 행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이질적이고 모순된 몇몇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사실만으로 한 인간의 과거를 재구성하는 작업 앞에서 그는 차츰 무력감을 느끼고, 문득 자신이 ‘허구와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기란 이미 완결된 삶을 기록하는 일이기에 거꾸로 된 순서로, 즉 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깡땡은 ‘뒤집힌 시간성’을 취할 수밖에 없는 전기의 시각(時刻)이 뭔가 진실하지 못하다는 반성에 이른다. 결말에 따라 이전의 일들을 꿰어맞추거나 변형하고, 시간을 꼬리로부터 되밟아가는 일. 그것은 매순간의 무정형한 삶을 논리적 연계 속에 정돈하여 실제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꾸려내는 속임수이다.

이야기에 몰두한다는 것은 삶을 실존적으로 마주하지 않고 자기기만에 빠져 사는 것이다. 물컹한 현재만 즐비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모험과 완벽한 순간과 경험이라는 드라마틱한 형태로 재구성하는 일이 바로 이야기의 환상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야기’로 대체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 실존의 죄를 벗어났다는 착각을 얻는다.

이야기에 대한 환멸로 로깡땡은 전기작업을 포기한다. 그 무엇도 무정형한 의식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을 온전하게 구원해주지 못하며, 그 어떤 일을 해도 존재의 우연성과 근거 없음에 대한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그 순간 들려온 재즈음악. 그 완결된 우주 속에서 희한하게 잠재워지는 구토. 그리고 부러움. 나도 저 음악처럼 되고 싶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저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도…… 책을 쓰는 일, 그러나 전기는 절대 아니고 아마도 소설 같은 것. 그리하여 먼 훗날 어떤 사람이 나의 소설을 읽고 그것을 써낸 나를 생각하며 나의 삶을 되살려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전기를 포기한 로깡땡은 소설에서 구원을 꿈꾼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시금 전기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다. 누군가의 전기를 쓰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전기의 대상이 되는 일, 즉 전기작업의 주체에서 객체로 전환된 것이다. 전기적 환상은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2. “소설기법은 언제나 작가의 형이상학에 되돌려진다”

 

‘문학과 사회의 관계’라는 고색창연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문학론』은 그 의도적인 도발성으로 인해 오래도록 입에 오르내렸고, 저자에게 참여문학론이라는 갑갑한 투구를 안겨주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역설하기 위해 도입된 이분법적 사유(예컨대 시와 산문의 거친 구분)와 논리적 비약은 두고두고 거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5)

오늘날은 그 책에서 시대적이고 논쟁적인 부분을 거두어내면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글을 쓰며, 누구를 위해 쓰는가)은 곱씹어볼 만한 원론적인 것이라며 날선 비판의 칼을 거두고 책을 ‘선용’하려는 분위기다. 결과적으로 애초에 싸르트르가 강조하고자 했던 ‘참여’를 빼버리고 ‘문학’론으로 읽어냄으로써 『문학론』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자격을 부여받은 셈이다.

이 책의 3장인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에서 싸르트르는 작가와 독자 그리고 작품의 역사적 연루를 지적한다. 우리 모두는 “역사적 상황에 연루되어 있는 존재들”이며, 작가의 진정한 참여는 그러한 “자연적 연루상태를 반성적 연루로 이끌어 갈 때” 이루어진다.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작가라면 후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글을 쓰며, 그렇게 써낸 글은 당연히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 싸르트르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의 관계를 12세기 이래의 프랑스문학사를 통해 개관한다. 지배계급과의 관계로 짚어본 작가의 위치는 어디인가? 작품의 실제적인 독자는 누구인가? 그같은 역학관계가 변화시킨 사회와 문학은 어떤 모습인가? 싸르트르의 고백처럼 “편파적 시각”으로 작성된 이 ‘독자와 독서의 사회학’에 따르면 18세기 부르주아 출신의 작가들은 자기가 속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글을 썼고, 그 시대가 요구한 문제를 자기 문학의 구체적인 소재로 삼을 수 있었던,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이 행복한 작가들로 평가된다.

반면에 19세기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출신이면서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를 혐오하게 된다. 그들은 1848년 혁명의 실패와 좌절로 대부분 현실과 역사로부터 등을 돌리고 추상적 부정을 일삼는 ‘허무의 기사들’이 되어버렸다. 반항인이었을 뿐 혁명가는 아니었던 19세기의 작가들은 위고(V. Hugo)를 제외하고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 물러난 그들의 소설이 암암리에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킬 수 있는 모습”을 그려내 보여주는 데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기법을 통제하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못한” 탓에 그들의 소설은 “기법이 작가를 배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싸르트르가 늘 주장해왔듯이 “기법이란 더욱 근본적이고 더욱 진실한 선택을, 은연한 형이상학을, 그리고 동시대 사회와의 진정한 관계를 드러내는”6) 것이므로.

‘작가를 배반한 기법’의 대표적인 예로 그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빠쌍(G. de Maupassant)의 소설을 거론한다. 그의 소설들에서 전지적 화자가 들려주는 과거시제의 ‘추억담’ 은 ‘생성 중인 미결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역사를 반복한다. ‘마술사’ 같은 화자들은 ‘상공에서 조망하는 귀족의 모습’처럼 비치고, 더이상의 변화가 불가능한, 안정된 체계의 고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모빠쌍 자신의 세대와 직전의 세대와 그후 여러 세대의 프랑스 소설가의 기본적 기법”이 되었다는 것이다.7)

소설기법에 대한 싸르트르의 관심은 『구토』를 구상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르아브르의 교사이던 그는 그곳 문화센터의 월례 문학강연을 맡게 되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소설의 기법과 현대사상의 주요 동향’이란 주제로 동시대의 프랑스 작가와 외국 작가의 소설기법을 분석한다.8)

싸르트르에게 소설(roman)은 이야기(récit)와 달리 현재형과 자유라는 특징을 가진다.9) 이야기는 과거형이며 이미 완결된 것인 반면, 소설은 미래적 전망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소설은 무조건 ‘현재시제’로 쓰여야 한다는 기계적인 주문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시제의 변화가 아니라 “이야기 기법의 혁명”이기 때문이다.10)

“소설의 기법은 언제나 소설가의 형이상학으로 되돌려진다”11)라고 단언한 당시의 싸르트르에게 비평가의 임무는 무엇보다 “작가의 방법, 규칙, 기법을 설명하고, 그 기법에 관련된 형이상학을 드러내주는 일”12)이었다. 형이상학이란 “체험을 무시한 추상적 관념에 관한 무익한 논의가 아니라, 인간조건의 전체를 내부로부터 껴안으려는 생생한 노력”이었고, 문학은 그러한 “형이상학적 절대와 역사적 사실의 상대성을 접합하고 융합하는” 활동이었다.13) 기법과 형이상학의 관계는 훗날 “문체와 세계관”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다시 한번 강조된다.14)

그가 중요한 소설기법으로 주목한 것은 소설의 시간성이다. “현대의 위대한 작가들 대부분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절단”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시간성에 관련된 작가의 형이상학을 드러낸다. “포크너(W. Faulkner)는 과거에 집착하며 미래적 차원을 제거”했고, 더스패서스(J. Dos Passos)는 “죽어버리고 닫힌 기억으로 시간을 환원시켜 현재와 미래를 모두 삭제”했다. 그런가 하면 조이스(J. Joyce)는 “오직 순간에 대한 순수한 직관”을 간직하기 위해 미래와 과거를 추방해버린다.15) 소설 인물의 자유를 제한한 모리악(F. Mauriac) 소설의 전지적 화자에 대한 비판도 그것이 “지속의 흐름을 끊고” 이야기에 “시간을 초월한 절대성”16)을 부여한다는 시간성의 형이상학에 연결된다.

싸르트르의 철학에서 시간성은 대자존재(對自存在)인 의식의 내부구조로서 존재론의 중요한 전 단계를 구성한다. 의식이 자기 고유의 가능성들로 실존하는 것은 ‘시간 안에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대자(對自, pour-soi)가 대상을 향해 스스로를 실현해가는 방향이다. 이 방향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차원으로 분산된다. 시간은 그 자체로는 순수한 무(, néant)이며 대자의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자 역시 시간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실존을 구체화시킨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을 관찰할 때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며 대자의 존재 양태를 드러내는 중요한 내부구조이다.

 

시간성은 대자의 내부구조로서만 존재한다. 시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자가 실존함으로써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것이다. (…) 시간성은 모든 존재들, 특히 인간실재들을 담아내는 보편적 시간이 아니다. 시간성은 바깥에서부터 존재에게 강제될 법한 전개의 법칙이 더이상 아니다. 시간성은 더이상 존재가 아니다. 시간성은 그 자신의 고유한 무화(無化, néantisation)인 존재의 내부구조다. 즉 대자존재에게 고유한 존재방식이다. 대자는 시간성의 디아스포라적인 형식하에서 자신의 존재여야 하는 존재이다.17)

 

시간성이란 그 자체로는 파악되지 않는 개념이며 오직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그 방향성을 드러낼 뿐이다. 싸르트르가 ‘원초적 선택’(choix originel)과 ‘기투’(企投, projet)라는 개념으로 실존적 정신분석을 제안하면서 “특별히 성공적으로 쓰인 몇몇 전기들에서” 그 모형을 예감한 것도 인간의식이 발현되는 내부구조로서의 시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18)

시간성의 형이상학에 주목한 싸르트르의 비평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세 차원이 소설가에 따라 ‘삭제 혹은 강조’되고 있는 모습을 구별해낸다. 시간성은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 보이면서 독특한 서술방식을 구현해내기 때문이다. 『구토』의 로깡땡이 실존의 ‘우연성’과 ‘잉여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도 시간에 대한 사색을 통해서이다. 시간성은 싸르트르의 문학비평에서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준거로 줄곧 등장한다. 『성자 주네』(1952)에서는 주네( J. Genet)를 ‘회고주의자’로 명명하고 시간의 흐름을 고의적으로 역행하면서 늘 같은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그의 삶과 작품을 ‘참수(斬首)된 변증법’(dialectique décapitée)의 운동으로 읽어낸다. 싸르트르에 따르면 주네는 자기 삶의 원초적 위기의 순간에 축을 고정한 뒤 항상 그것을 중심으로 순환하며 같은 지점을 맴돈다. 갈등과 모순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 갈등과 긴장상태를 팽팽하게 유지해가는 모습에서 변증법 운동의 특이한 변종을 본 것이다.

싸르트르가 시간성 표현을 예로 들어 소설기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그것이 한 작가의 사회의식과 그 대응방식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었다. “문학은 시대가 그 자체를 밝히기 위해 생산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의 종합적이고 흔히 모순된 총체”19)이며 “각각의 책은 특별한 소외로부터 출발하여 구체적인 해방을 제안한다.”20) 문장 하나에서부터 사회의 총체적 모순이 드러날 수 있을 정도로21)  ‘기법의 완벽한 통제’를 바랐던 그의 준엄한 소설관은 곧이어 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와 소설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3. 소설의 중단과 포기

 

『자유의 길』의 첫째권인 『철들 무렵』을 한창 집필 중이던 1940년에 싸르트르는 자신의 소설적 상상력 부족을 한탄하며 ‘소설에 자질이 없음’을 고백한다.22) 소설이란 무엇보다 허구의 이야기인데 자신의 소설은 허구에만 의존하지 못하고 철학적인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자각이 들었던 것이다. ‘우연성’의 개념에서 비롯한 『구토』가 그렇고 ‘자유’의 개념을 풀어내는 『자유의 길』이 그러했다. 그에게 소설이란 “허구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 사상을 활성화하는 일”23)이었다.

소설적 재능 부족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소설쓰기는 그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된다. 1945년에 『자유의 길』 연작의 첫 두권인 『철들 무렵』과 『유예』가 동시에 출간되고 셋째권인 『상심』이 1949년에 완성된다. 그런데 1952년 무렵, 싸르트르는 이 연작의 마지막 권을 미완으로 남겨둔 채 소설의 포기를 선언한다. 이 중단은 당시 그가 처해 있던 복잡한 정세와 『자유의 길』의 기획 자체에서 비롯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싸르트르는 2차대전을 계기로 ‘개종(改宗)’이라 불릴 만한 사유의 전환을 맞이한다. 전쟁을 통해 집단과 사회를 체험하고 역사의 무게를 실감한 그는 보부아르(S. de Beauvoir)조차 놀랄 정도로 달라진 모습으로 포로수용소에서 귀환했다. 전쟁 전의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를 청산한 그는 이제 레지스땅스 활동을 하고 월간지 『현대』를 창간하고 참여문학론을 주장하며 ‘행동하는 지성’을 실천한다. 그의 개종은 이후 두차례의 변모를 더 겪어낸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의혹과 불신이 드리우기 시작한 1952년 무렵, 그는 ‘공산주의의 동반자’가 되겠다는 두번째 개종을 공표한다.24) 그리고 바로 이 무렵에 더이상 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소설을 포기하게 된 이유에 대해 싸르트르는 두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설명하는데, 우선 1959년에는 “지금의 세상은 소설로 담기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소설에 더이상 관심이 없다”라고 말한다. 뒤이어 1970년의 인터뷰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의 인간학을 수용하는 소설적 기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라는 구체적 설명을 제시한다. 적절한 기법으로 승화되지 않은 인간학의 방법을 소설에 이용하려 들면 소설이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렇다고 새로운 방법들을 무시한 채 인물을 그려내면 “충동적이고 순박한” 유형의 소설만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25)

이 두차례의 해명을 종합해보면 싸르트르의 소설 포기는 무엇보다 기법 발견의 실패에서 비롯한 듯하다. 『자유의 길』의 경우는 소설이 기획했던 ‘주제’ 자체가 그 기법의 난항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연작에서 그는 여러명의 등장인물이 역사적 상황 안에서 펼쳐내는 자유의 실존적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전의 문학평론에서 발견했던 외국작가들(특히 더스패서스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기법과 영화의 몽따주 수법 등을 동원하여 소설 속의 시간을 실제 집필시기와 일치시켜놓으면서, 시대적 상황과 같은 속도로,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유를 실현해가는 여러 인물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작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4권에 이르자 실제 집필시기와 소설 속의 시간(사건의 시간) 사이의 간격이 십년 이상 벌어지면서 소설 자체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문학론』에서 싸르트르는 “사건이 중개되는” 의식을 표현해내는 세가지의 리얼리즘을 이야기한다. 첫째는 “문학의 절대적 주관주의에서 비롯한 독단적 리얼리즘”이다. 참여문학론의 입장에서 이런 리얼리즘은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다. 이제는 사건의 다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의식의 합주”를 만들어내는 수법을 찾아내야 한다. 전지적 화자에 의한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독자와 작중인물의 주관성 사이의 매개자를 없애고, 독자가 인물의 의식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 각 인물의 의식과 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매개도 거리도 없는 “주관성의 생생한 리얼리즘”26)을 제2의 리얼리즘으로 구별하고 이것의 원조로 조이스를 지목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시간을 축약하지 않고 그대로 독자에게 떠안기는 “시간성의 리얼리즘”을 제3의 리얼리즘이라 칭한다. 물론 “모든 소설을 단 하루의 이야기로 제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일이므로 여기에는 작가의 개입과 선험적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미학적 수법”으로 위장하고 독자가 착각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일이 관건이라며 “진실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예술의 생리를 언명한다.27)

‘독단적 리얼리즘’과 ‘시간성의 리얼리즘’의 차이, 즉 ‘절대적 주관주의’와 ‘작가의 선택과 개입’의 차이가 애매하게 드러나는 주장이긴 한데, 이것이 참여문학론의 맥락임을 감안하고 선택과 개입에 깔린 기본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튼 이 제3의 리얼리즘은 아직은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자유의 길』의 마지막 권에서 그가 실행하려던 것이 ‘시간성의 리얼리즘’이었을 것이다.

싸르트르의 철학에서 자유의 개념은 끊임없는 초월과 부정을 이어나가는, 실체나 본질에 결코 이르지 못하는 실존적 인간에 대한 함축적 표현이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영원히 도달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비극적인 인간의 모습 자체이다. 앞서 탈고한 세권의 『자유의 길』에서 그는 각각의 인물이 자기기만으로, 유예로, 도피로 더듬거리며 상황을 겪어내는 자유의 실존적 형상화에 어느정도 성공했다.

마지막 권에서는 ‘자유’의 최종적인 모습을, 자유를 향한 ‘마지막 기회’를 그려내야 하는데, 이는 싸르트르의 자유의 철학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자유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강요적인 조건임을 확언하려면 소설은 영원히 미완성인 채로, 열려진 채로 있어야 했다. 요컨대 자유의 형이상학 자체가 그것을 표현해낼 기법을 찾아내지 못하게 하고 소설의 결말을 무한히 늦추며 결국 소설 자체를 중단시켜버린다.

소설을 포기한 싸르트르는 이후 몇편의 희곡 이외에 순수한 허구의 창작물은 더이상 발표하지 않는다. 포로수용소 시절 처음 쓰기 시작한 희곡은 싸르트르에게 무엇보다 대중과의 직접적인 교감과 전달의 수단으로 다가왔다. 전후 레지스땅스 시절에 집중적으로 발표한 일련의 희곡작품은 검열을 피하면서 저항정신을 은근하게 고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장르로 활용되었다. 어떻게 보면, 『문학론』의 참여문학론에 가장 근접한 모습으로 실현된 장르는 희곡인 듯한데 정작 『문학론』에서는 희곡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희곡은 무엇보다 상연을 전제한 것이었고, 연극은 그에게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있었기에 “예술이라기보다 도구”28)였다는 지적까지 가능하게 했다.29) 『자유의 길』을 포기하게 된 이유에는 당시 그의 형이상학적 기획을 실현하는 데 소설보다는 희곡이 좀더 효과적이라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4. 전기적 환상에서 전기적 방법론으로

 

이제 그는 문학비평과 자서전 속에 소설적 요소를 부려놓음으로써 소설(적 욕구)을 대신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보들레르론』(1946) 『성자 주네』(1952) 『집안의 천치』(1971~72)와 자서전 『말』은 모두 ‘전기의 틀’을 가지고 있다. 『구토』의 마지막에 잠복하고 있던 ‘전기적 환상’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전기물에 대한 싸르트르의 집착은 그 역사가 꽤 길고 깊다. 그것은 ‘위인전과 삶의 모델’이라는 유년기의 통과의례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스무살에도 위인들의 생애에 사로잡혀 있었고, 삼십대에도 전기물을 즐겨 읽었다. 더구나 그 이야기들 속에서 여전히 자기 삶의 예언적 징후 같은 것을 발견하고 싶어했다. 『구토』에서 전기적 환상의 파괴에 그토록 몰두했던 것도 그만큼 그가 그 환각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환상을 자기 문제화하는 작업이 전쟁 중에 기록한 『기묘한 전쟁수첩』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의 사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반성을 계기로 자기 안에 자리한 전기적 환상을 해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전기적 환상으로부터 의미있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과정이 된다.

 

나는 현재의 매 순간을 이미 이루어진 삶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기적 관점으로…… 나는 인생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게는 전기적 환상이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체험된 삶은 이야기된 삶과 닮을 수 있다고 믿는 환상이……30)

 

삶을 방향성 있는 전체로 구성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전기적 환상은 역사성을 전제한다. 전기적 환상에 대한 반성은 마침 역사의 영향력을 절감하고 있던 싸르트르에게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으로 다시 나타난다. “역사적 사건의 이해와 설명에 나타나는 여러 의미층의 공존”에 대한 해석 문제로 떠오른 이 골치 아픈 질문은 우연히 읽은 에밀 루드빅(Emil Ludwig)의 『기욤 2세』(Guillaume II)라는 전기물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낸다.

대중소설 수준의 전기물이 싸르트르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일화를 다루는 작가의 방식 때문이었다. 루드빅은 한 인간의 실존에서 뼈대를 이루는 상징적 형태를 끌어내어 ‘소설처럼 그럴듯한 흐름’으로 삶을 재구성하는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방식의 전기를 작성했다. 싸르트르는 그의 책에서 “사실들에 대한 자유롭고 거침없는 해석”을 발견하고, 삶의 단순한 일대기가 아니라 ‘원초적 기획의 총체화 운동’을 그려낼 수 있는 전기를 구상한다.

하나의 사건은 다양한 각도로, 즉 경제적·사회적·문화적·심리적 등의 여러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양한 의미층이 맞물리지 않은 채 서로 길항하며 제가끔 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싸르트르는 그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 조건을 인간현실이라는 지점에서 발견한다. 설명을 위해 제시된 각각의 의미층은 인간현실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란 인간이 그 상황 너머로, 그 상황을 향해 뛰어들어야 인간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앞서 인간(현실)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들어선다. 고전적 역사가의 방식대로 하나의 사건 아래에서 추론되는 여러가지 사실을 열거하되, 그 사실들을 각각의 고립된 의미로 고찰하지 않고 ‘위계’를 설정하고자 했고, 그 위계화의 축을 ‘원초적 기획’과 ‘자유로운 선택’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싸르트르의 전기적 방법론은 상황으로부터 인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으로부터 상황을 설명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외부적이고 우연적인 사실처럼 상황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만을 설명한다. 그러나 싸르트르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한 개인이 자신의 전()존재 속에서 전적으로 깊숙이 책임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적 조건만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에 주체적으로 관여하는 것임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이성비판』31)과 일련의 작가연구에서 역사와 개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될 ‘전진-후진의 방법론’의 최초 형태이다.

싸르트르는 역사의 실체를 개인과 집단의 왕복운동을 통해 파악하고자 했고 이 왕복운동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연구인 전기가 유용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맑시즘과 정신분석의 한계를 실존주의로 돌파하려 했을 때, 개인의 삶, 특히 ‘최초의 역사성이 기입되는’ 유년기를 개인과 사회의 ‘매개’로 중요하게 부각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싸르트르에게 문학은 “시대가 그 자체를 밝히기 위해서 생산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의 종합적이고 흔히 모순된 총체”였다. ‘모순된’이란 표현을 덧붙인 이유는 문학은 정신과 마찬가지로 “탈총체화된 총체”(totalité détotalisée)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설가는 “여러 국부적인 체계와 그것을 포괄하는 전체적 체계와의 관계를”,32) 즉 부분적인 체계들과 전체적 체계가 다같이 움직이고, 그 움직임들이 서로 영향을 주는 양상을 파악하면서 설명해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미 전기적 방법론이 움틀 수 있는 바탕을 예감할 수 있다.

상상력과 허구라는 소설적 요소를 사용하여 과감한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전기적 방법론은 삶과 작품의 단순한 등치나 대입이 아니라, 일탈적인 선택으로서의 문학적 기도(企圖, entreprise)를 읽어낸다. “작가란 언제나 다소간의 상상적인 것을 선택”33)하는 사람이다. “상상이란 실재하는 것을 무화하고 초월하는 의식활동”34)이므로 현실에 구멍을 내고 현실을 무력화시키려 든다. 그러므로 ‘왜 그런 이상한 선택을 했는지, 왜 굳이 상상적인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로 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글을 쓰기로 결심한 작가의 기도는 현실에 대한 상상적 기투, 실재 세계의 잠재적 파괴를 목표하는 기투이므로.

 

 

글을 맺으며

 

소설이 제아무리 무질서를 이야기해도 그것은 무질서를 드러내는 ‘질서’로 보인다. 이야기를 거부하는 이야기 또한 이야기이다. 싸르트르가 ‘닫히고 완결된’ 이야기를 거부하고 ‘미래적 전망과 자유’를 보여주는 소설을 희망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서사의 틀 안에서 ‘배열’(configuration)된 세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이야기를 거부했지만, 실제로는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싸르트르는 인식했던 듯하다.

『구토』의 로깡땡은 마로니에 나무뿌리의 ‘묘사’에도, 롤르봉의 삶을 ‘서술’하는 일에도 모두 실패한다. 실존은 묘사와 서술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묘사와 서술은 소설이란 장르가 오래도록 묶여 있던 관습이다. 문학 또한 정신과 같은 “탈총체화된 총체성”이라고 했듯이, 『구토』는 ‘실존’의 불가능성에 빗대어 소설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싸르트르가 소설을 쓸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첫 소설 『구토』에서부터 예견된 ‘오래된 미래’였는지 모른다. 참여문학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나오는 한 구절에는 소설에 대한 그의 모순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플로베르(G. Flaubert)의 ‘무의 미학’35)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가 바란 것은 우리의 책들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허공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말들이 그것을 적은 작가를 향해서 뒤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작가로부터 잊혀지고 고립되고 인지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증인 없는 세계의 한가운데로 독자를 내모는 썰매처럼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책이 우선 인간의 산물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처럼 나무처럼 사건처럼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었다.36)

 

『집안의 천치』를 출간하면서 싸르트르는 그것을 ‘진짜 소설’(le vrai roman, 나중에는 이 표현의 의미를 수정하고 약화시키긴 했지만)로 읽어달라고 했다.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이야기가 소설이라면, 싸르트르가 말하는 ‘진짜 소설’이란 실제 삶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말한다. 『집안의 천치』는 플로베르의 삶과 작품을 바탕으로 쓴 책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플로베르의 실제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책에 쏟아진 대부분의 비난도 ‘실제의 플로베르와 다르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싸르트르는 그것은 “내가 바라본 플로베르의 진실”이라는 말로 응수한다.37) 이제 『집안의 천치』는 플로베르 연구자가 아니라 싸르트르 연구자의 관심 대상이 된다.

‘실제 삶에서와 전혀 다른 방식’의 소설, 허구나 공상의 소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서 출발하되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이야기하는 일. 플로베르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마담 보바리』를 써냈다는 불변의 ‘객관적 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로부터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가 본 진실’로 써내는 일. 변할 수 없는 어떤 조건들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삶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일……

싸르트르에게 상상력의 토대는 언제나 현실 혹은 실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절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상상이란 현실의 한조각, 실재의 한 귀퉁이로부터 그것을 도약대로 삼아 그것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부정과 초월의 의식활동이기 때문이다.38) 현실에 대한 불만, 결핍, 부족감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는 예술가들은 그 현실의 부정과 초월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그러므로 “도덕과 미학을 혼동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39)이며, “문학과 도덕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미적 요청의 밑바닥에는 도덕적 요청”40)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한 작가의 상상적 산물을 시대와 역사의 지평 속에 던져놓고 개인의 원초적 기획이 시간성 속에서 발화(發花)되어가는 모습을 재구성해가는 싸르트르의 전기비평은 역사와 철학과 도덕을 아우르는 인간학이 되어간다. 『성자 주네』가 ‘악의 문제에 바쳐진 철학적 담론’으로, 『집안의 천치』가 ‘19세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탁월한 묘사’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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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388면. 앞으로 이 책은 『문학론』으로 약기한다.

2)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 싸르트르 『말』, 정명환 옮김, 민음사 2008, 272면.

3) 베르나르 앙리 레비 『사르트르 평전』, 변광배 옮김, 을유문화사 2009, 111면.

4) J.-P. Sartre, Situations IV, Gallimard 1964, 9면.

5) 시와 산문의 도식적 구분과 함께 주된 비판의 표적은 싸르트르가 세대를 초월한 문학의 의미와 가치를 약화시키고 구체적 역사와 사회의 문제에 치중한 시대적 문학만을 치켜세운 사실에 맞춰졌다. “갓 딴 바나나가 가장 맛있다”라는 표현에 드러나는 작품의 동시대적 의미의 강조는 ‘구체성’에 대한 집착이며, “문학의 초수신인(surdestinataire)을 망각”한 태도로 비난받는다(Z. Todorov, Critique de la critique, Editions du Seuil 1984, 61면). 싸르트르가 19세기의 작가들, 특히 말라르메와 플로베르 같은 작가들의 ‘무상성의 문학’의 의미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절대 아니다. ‘허무의 기사들’로 명명된 이들의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지켰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들어온 허위적인 질서와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부정한 근본적 성찰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완전히 소외된 문학은 아니지만, 형식적 자율성과 신화파괴에만 몰두하고 역사적 현실에 무관심했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문학론』에 대한 국내의 대표적인 연구로는 정명환 「사르트르의 문학참여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문학을 찾아서』, 민음사 1994)과 변광배 『사르트르 참여문학론』(살림 2006)이 있다.

6) 『문학론』 186면.

7) 같은 책 190~93면. 모빠쌍을 문학적 구습의 원형으로 지목한 데는 프랑스 학제의 문학교육에 대한 그의 반발도 작용했다. Préface de G. Idt, Sartre Oeuvres Romanesques, Gallimard 1981, xxiii면.

8) 싸르트르는 앙드레 지드, 쥘 로맹, 장 지로두 같은 동시대 프랑스 작가와 윌리엄 포크너, 존 더스패서스, 올더스 헉슬리,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등의 소설을 다루고 있다. 강연 내용의 일부는 Situations I (Gallimard 1947)에 실렸으며 나머지 원고는 최근에 부분적으로 복원되었다. J.-P. Sartre, “La technique du roman et les grands courants de la pensée contemporaine, Conférences de la Lyre harvaise, novembre 1932-mars 1933,” Etudes sartriennes, n16, 2012, 35~162면.

9) 소설과 이야기의 구별에 관하여 싸르트르는 앙드레 지드의 『사전꾼들』(1925)의 분석에서 많은 시사를 받은 듯하다. 『사전꾼들』이 ‘소설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안에서 제기되고 있는 ‘순수소설’에 대한 지드의 강박은 소설장르를 사유하던 싸르트르에게 유용한 지침이 되었다. 지드에 따르면 시나 희곡과 달리 엄격한 외적 규칙이 없었던 소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모방하기 시작했으며, ‘오직 소설을 통해서만 소설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Etudes sartriennes, n16, 2012, 41면.

10) 『문학론』 221면.

11) Situations I, 66면.

12) S. de Beauvoir, La cérémonie des adieux, Gallimard 1981, 269면.

13) 『문학론』 295~96면.

14) “한 작가의 문체는 세계에 대한 개념에 직접 연결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장의 구조, 문단, 명사와 동사의 위치 등등은 차별화시켜 규정할 수 있는 은밀한 전제들을 표출한다.” J.-P. Sartre, “Questions de méthode”, in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t. I, Gallimard 1960, 108면.

15) Situations I, 66면.

16) 같은 책 43면.

17) Sartre, LEtre et le Néant, Gallimard 1943, 172~78면.

18) 같은 책 635면.

19) 『문학론』 381면.

20) 같은 책 99면.

21) “만일 문학이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한시간도 읽을 가치가 없다. (…) 하나하나의 문장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층위들을 반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Sartre, Situations IX, Gallimard 1972, 15면.

22) Sartre, Lettres au Castor et à quelques autres, t. II, Gallimard 1983, 58면.

23) 『문학론』 297면.

24)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입하자 다시 공산주의 및 소련과 거리를 두면서 세번째 개종을 선언한다. 이후 그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혁명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변증법적 이성비판』(1권 1960, 2권 1985)은 바로 이 20년에 걸친 정치적 실천을 집대성한 ‘사회의 존재론’이다.

25) Situations IX, 123면.

26)réalisme brut de la subjectivité’를 옮긴 말인데 ‘brut’에는 ‘가공하지 않은’ ‘천연의’ ‘원형의’라는 뜻이 있다.

27) 『문학론』 408~10면.

28) 베르나르 앙리 레비 『사르트르의 세기』, 변광배 옮김, 을유문화사 2009, 137~38면.

29) 그러나 『상상계』에서 연극은 싸르트르 예술론의 중심 개념인 아날로공(analogon)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로 설명되고 있다. 아날로공은 ‘부재하는 어떤 세계를 표현해내는 물질적 매체’를 지칭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이라고 일컫는 것을 싸르트르는 아날로공이라고 규정한다. 작품이라는 물적 대상(아날로공)을 통해 예술가가 표현해내려 했던 어떤 것, 그리고 감상자가 그것을 통해 감지하는 어떤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싸르트르에게 예술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가 배우를 탁월한 아날로공으로 설명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싸르트르의 연극관에는 분명 모순된 측면이 있다. 싸르트르 『상상계』(1940), 윤정임 옮김, 기파랑 2010, 334~39면.

30) Sartre, Carnets de la drôle de guerre, Gallimard 1983, 277~79면.

31) “맑스는 대체로 가능한 두 약호 중 후자, 즉 경제적 약호를 택한 데 반해, 싸르트르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물화된 관계의 복합체를 인간행위와 인간관계라는 최초의 기본적 현실의 측면에서 다시 진술하려고 결심했다.” 프레드릭 제임슨 『맑스주의와 형식』, 여홍상·김영희 옮김, 창비 2014, 346면.

32) 『문학론』 381면.

33) Situations IX, 123면.

34) 『상상계』 331~32면.

35)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집필하는 중에 루이즈 꼴레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유명한 말로 플로베르의 미학과 현대소설의 변모를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된다. “내가 볼 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것은 바로 무()에 관한 한권의 책, 외부세계와의 접착점이 없는 한권의 책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문체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권의 책 말이다.”

36) 『문학론』 303면.

37) ‘진짜 소설’과 ‘싸르트르가 본 플로베르의 진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지영래 『집안의 천치, 사르트르의 플로베르론』, 고려대출판부 2009, 163~70면 참조.

38) 『상상계』 327~30면.

39) 같은 책 343면.

40) 『문학론』 8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