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 제21회 창비신인상 수상작

 

징후적 소설과 그 너머

이기호의 『김 박사는 누구인가?』가 맴도는 것들

 

 

이은지 李垠知

1986년 부산 출생. 중앙대 독문과 석사과정 졸업. zzellystick@naver.com

 

 

1. 서사의 ‘이기’와 ‘이타’

 

나는 매일같이, 소설 외의 다른 곳에서는 어디서건

진실성에 이른다는 것은 욕심일 뿐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스땅달(Stendhal)

 

인간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거울을 만들었다.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이 모순의 실천은 의식화의 중요한 계기임이 자명해 보인다. 인간은 자신을 상상적 타자로 떼어내어 그에 대한 이타(利)를 통해 자의식을 완성하는 이기(利)에 도달한다. 즉 인간의 의식은 이타 없는 이기도, 이기 없는 이타도 불가능하도록 타고났다.

스땅달이 ‘소설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을 때, 여기에는 인간의 자의식을 사회화하는 탁월한 굴절이 존재한다. 사회가 스스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거울인 소설은 동시에 그 사회의 일부인 인간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사회에 대한 의식이면서 사회로부터 분리된 의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식의 두 차원이 서로를 반영할 때, 소설은 사회로 환원 가능한 허구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소설이 자신의 의식에 고무되어 사회를 등질 때, 그 의식의 내부에서 전개되는 모든 운동은 아무리 이상적일지라도 공허하다. 거기에는 소설의 자기애, 소설의 이기(利)만이 자리한다.

흔히 이기호(李起昊)의 문학은 ‘시봉의 서사’와 ‘형식의 파격’으로 요약된다. 류보선(柳潽善)이 “비루한 존재”로 규명한 바 있는 ‘시봉’은 이기호 자신의 문학적 화신이자 현대사회를 대변하는 인물로, 작가의 작품 곳곳에 편재하며 시대적 서사와 개인적 서사를 길항하는 중요한 매개로 기능한다. 시봉이라는 문학적 매개는 1980년대를 진원으로 삼는 역사적 소재를 채택하면서도 백수, 불량배, 취업준비생, 바바리맨 등 우리 시대 하위주체의 문법으로 그것을 독해함으로써 근대와 탈근대를 이접한다. 이 기묘한 동침은 우리 시대의 큰 타자로 잠재하는 과거를 현재의 하위텍스트로 읽는 ‘역사의 탈역사화’에 닿아 있다.

한편 작가가 더 근본적으로 추구해온 것은 형식의 실험을 통해 ‘서사’라는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이때 서사란 문학이라는 제도 안에 운신하는 공통의 꿈, 공통의 환상이다. 제도로서의 서사는 세계를 예측 가능하고 구조화할 수 있는 한줌의 반듯한 체제로 가공한다. 그러나 그 체제에 안주하는 동안 정작 실제 사회는 ‘세계 없음’(worldless, 바디우)의 공간으로 빠르게 사막화된다. 체제로서의 문학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홀연히 사회를 비추고 있으나, 이는 해소할 길 없는 갈증을 속이는 신기루 같은 반영일 따름이다.

이기호는 랩(「버니」), 성경(「최순덕 성령충만기」), 최면술(「나쁜 소설」), 조리법(「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등 다양한 비문학적 양식을 서사의 울타리로 끌어들임으로써, 현실의 자리를 지우고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하는 매끈한 서사에 반기를 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이 서사라는 이념을 내파하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는 이 작품들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텍스트로 치환하면서 사회 제반의 ‘소설화’로 귀결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전술에 자신이 함락되는 오류에 봉착한 것이다. 스땅달이 소설을 거울에 비유했을 때, 이 거울이 현실과 유리되어 자홀(自惚)에 빠질 가능성은 간과했듯이 말이다.

근작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이기호는 이때까지 추구했던 형식의 파격 대신에, 서사의 ‘부재’를 서사하는 전략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작가는 문학이 의식화할 수 없는 것을 의식하려는 노력, 즉 소설이라는 거울이 반영할 수 없는 거울 바깥의 세계를 천착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왜냐하면 문제는 소설과 비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이기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곧 소설의 이기라면, 그것은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하는’ 노력을 통해 극복될 수 있으리라.

하여 이기호의 소설은 더이상 1980년대라는 소재주의에 매몰되지도, 하위주체라는 특수한 이름에 결박되지도, 부단한 형식실험이라는 아방가르드에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문제는 서사의 그림자, 즉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딜레마이므로. “이제 겨우 타인에게로 눈을 돌리기 시작”(‘작가의 말’)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 그는 자신의 이야기보다 타인의 이야기에 골몰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타인’은 한편으로는 작가의 분신이었던 시봉 이외의 인물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사라는 체제가 결코 서사화할 수 없는 현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되어야 할까?

 

 

2. 추정상의 서사

 

불후의 말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있다.

—말라르메(S. Mallarmé)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뒤 살림에 전념하고 있는 ‘나’는 누군가가 실종신고했던 사람을 찾았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는다(「화라지송침」). 5년 전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신고한, 아내의 재종동생이라는 김기종이 교외의 한 양돈축사에서 노예처럼 생활하다 구조된 것이다. 아내가 회고하기로 어릴 적 피아노도 잘 치고 수학영재 소리도 들었다는 재종동생은 정신지체를 앓고 허리도 굽은 추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가 몇개 남지도 않은 치아 너머로 연신 내뱉는 소리는 “아닌데요. 아니, 잘 모르겠는데요. 전, 괜찮은데요.”(278면)

사설 복지단체에 인계되기 전까지 한달간 ‘기종씨’를 돌보기로 한 ‘나’는 그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아닌데요. 전, 괜찮은데요”만 반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는 공허한 발화로 들리기에, ‘나’는 처음에는 기종씨의 말에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 뒤에 갇혀 표현되지 않는 무언의 서사를 서서히 짐작하게 된다. 예컨대 전자담배를 피우는 ‘나’를 힐끔거리는 기종씨에게 담배를 내밀었을 때 “담배인가요? 전, 괜찮은데요” 하는 말은 양돈축사 주인에게 받은 푼돈으로 그가 무엇을 했을지 짐작하게 하고, 진공청소기를 반사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기종씨의 “이게요, 전 괜찮은데요, 줄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하는 말은 축사에서 겪었을 노역에 대해 나름으로 짐작하게 하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기종씨가 연거푸 일관하는 ‘괜찮다’는 대사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안하는 것도 아니다. 분명 말이지만 말이 아닌 말이다. ‘괜찮다’는 안위를 말하는 주체인 기종씨가 전혀 괜찮지 않다는 사실이 그 말의 고립성을 입증한다. 입술의 주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말, 껍질째 바닥에 나뒹구는 침묵의 말이다. 침묵하는 말의 껍질을 벗기는 것은 오로지 ‘나’의 짐작과 추측뿐이다. “짐작과 진실 사이엔 그리 큰 강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263면)이 ‘나’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듬어 쓰도록 부추긴다. 이야기의 운명이란,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대신 바라보는 ‘짐작’이라는 그림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종씨의 이야기를 짐작해가는 ‘나’의 이야기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그 속내를 들을 길 없는 아내의 이야기를 짐작하면서 조금씩 나아간다. 기종씨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내가 내게 미주알고주알 들려준 것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도망가고 여인숙을 전전하던 아내 부녀를 거둬들인 종조부의 대궐 같은 집에서 비슷하게 거둬들여진 열명가량의 학생들과 함께 살던 이야기, 종조부의 아들인 삼촌이 술에 취해 “이 종놈의 새끼들아! 너희 집으로 다들 꺼져버리라구!” 하며 그들에게 윽박지른 이야기, 종조부가 돌아가시고 삼촌이 쫄딱 망해 삼촌과 그의 아들인 재종동생이 거리에 나앉은 이야기, 자기보다 네살 어린 재종동생은 가끔 보고 싶다는 이야기.

이런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바 있기에 ‘나’는 경찰서에서 기종씨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가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내가 퇴근한 아내에게 조금 흥분된 말투로 경찰이 했던 말을 고스란히 전했을 때, 그때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276면) 아내는 그 반문을 도돌이표 삼아 이제껏 ‘나’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단숨에 역주행하여 평화로운 듯 보이던 서사의 흐름에 제동을 건다. ‘그래서’라는 접속사는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의 위선을 폭로한다. 아내는 갑자기 나타난 재종동생을 반가워하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의 짐작은 곧 “그동안 아내의 모든 행동들이, 기부나 나에 대한 태도나 가정에 대한 희생 같은 것들이, 어쩌면 그저 안간힘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을 티 나지 않게 애써 감추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종 씨의 등장으로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버렸다는 것”(309면)에 닿는다. 그러나 그러한 짐작도 잠시, 기종씨를 집에 들이고 얼마 뒤 술에 취해 들어온 아내는 잠든 기종씨의 머리맡에서 “가라고, 이 종놈의 새끼야……”(311면) 하고 웅얼거린다. ‘나’는 이를 바라보며 또다른 짐작을 떠올린다. 짐작과 짐작이 널뛰며 이야기의 이면을 폭로하는 문장들의 치정극이 벌어진다.

‘그래서’라는 접속사가 서사의 허리를 끊으면서, 이야기는 ‘진실’이 아닌 ‘짐작’에 의지해 강을 건널 수밖에 없는 불구의 처지에 놓인다. “의미가 있으면서도 없고, 무언가를 행하면서도 행하지 않는”(데리다) 아내의 ‘그래서’는 서술과 해체를 이중으로 수행한다. ‘그래서’로 인하여 서사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영원히 감춰져 있었을 “또 하나의 눈금”(322면)을 읽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 눈금은 진실이라는 이념에 맞게 이야기를 재단하기 위해 감출 수밖에 없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눈금이다. 불가피한 것을 부러 들춰보는 것은 당혹스럽다.

 

어쩌면 애초부터 우리 집에 오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그런 사람을 내가 즉흥적으로, 선의라는 이름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들…… 그런 낭패감들…… 물론 그 모든 것은 나의 짐작일 뿐이었지만, 짐작이었기에 내 침묵과 당혹감은 더 커져만 갔다. 그건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아내나 기종 씨에게, 물어보거나 확인해볼 수도 없는, 그런 문제였다.(320면)

 

기종씨의 이야기가 ‘나’와 아내의 잠잠한 관계에 도전하는 불편한 것임에도, ‘나’는 이끌리듯 그 이야기의 주변을 더듬는다. 여기서 우리는 서사화를 향한 ‘이기’가 아닌 기종씨를 향한 ‘이타’가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진풍경을 보게 된다. 복지단체로 인계된 기종씨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나’는 차를 몰고 무의식 중에 양돈축사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는 어떤 ‘가려졌던 짐작들’이 펼쳐지는 것을 가만가만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다. 그 짐작들이란 기종씨와 그의 아버지가 아내와 장인어른을 몇번이고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또 거절당했으리라는 것, 그런 끝에 집에서 가까운 축사에 버려지듯 들어갔으리라는 것이다. 짐작과 진실은 결코 온전히 이야기되지 않는다. 추정에 근거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나’의 침묵과 당혹감은 짐작과 진실이 일치하는 ‘우연’을 상상함으로써만 잠재울 수 있다. 달리 말해 이는 ‘서사적 진실’과 ‘경험적 진실’이 일치하는, 문학이라는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우연이다.

 

 

3. 조리개를 푸는 역사

 

진실과 가치는 원근 속에서만 포착될 수 있다.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

 

진실의 서로 다른 층위들이 교묘하게 맞물리는 우연은, 그것이 사실상 문학의 미적 본질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새롭지 않다. 소설이라는 거울에 상이 맺히는 순간이 바로 그 우연의 순간이지 않은가. 정작 새로운 것은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기종씨를 집으로 들인다’는 제1의 서사가 주어지면, 거기에 기종씨의 말이나 아내의 행동과 같은 전환의 매개가 개입하여 제2, 제3의 서사가 격차를 두고 동참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그중 어느 하나의 서사에도 환원되지 않는, 초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야기 전체는 나의 이야기도, 기종씨의 이야기도, 그렇다고 아내의 이야기도 아닌 비균질적인 상태가 된다.

여러개의 둔덕이 서로 맞대고 끝없이 이어져 있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아무리 요령을 피워도 카메라에 죄 담을 수 없어 실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보고만 마는 그런 풍경 말이다. 그러한 풍경을 닮은 이야기는 어디에도 초점을 둘 수 없다. 오히려 조리개를 한껏 풀어 낮은 해상도를 얻게 되었을 때, 이야기는 흐릿하지만 하나의 풍경으로서 나름의 개연성을 얻는다. 즉 진실은 조리개를 풀었을 때만 포착되므로, ‘짐작’이라는 형식의 낮은 해상도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련의 짐작들에 진실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조리개’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 등장하는 87년형 프라이드가 이 조리개의 전형으로 적합할 듯하다. 할머니는 총각딱지 좀 떼라고 삼촌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푼돈을 털어 하얀색 프라이드를 덜컥 사준다. 그러나 삼촌은 여자를 데려오기는커녕 프라이드와 20년간 사랑에 빠졌다가, 어느날 집 앞에 차를 주차해놓고는 사라져버린다. 보름이 지나도록 삼촌이 오지 않자 ‘나’는 호시탐탐 노리던 프라이드를 더이상 방치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막상 차를 타고 보니 후진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삼촌이 폐차를 대신 부탁한 것이리라고 결론내리고 부지런히 액셀을 밟아준다.

그로부터 반년 정도 지나 트렁크에서 우연히 발견한 삼촌의 노트에는 87년 첫 시승 때부터 매일의 출발지와 도착지, 총 운행거리와 주유량 등이 반듯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이 노트를 본 뒤로는 삼촌이 프라이드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돌려주고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나’는 그 기록의 이면에 자리한 삼촌의 이야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당시 삼촌과 함께 자취했던 고모의 증언에 따르면, 공장에서 일하던 삼촌은 매일 ‘구로동 일꾼노동자회’에 나가곤 했는데, 그 모임에서 항상 되바라지게 말을 하는 한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여자를 매번 밤늦게 바래다주고 공장에서 졸다가 혼나는 삼촌이 안쓰러워 고모가 생각해낸 것이 자동차였다는 것. 그런가 하면 당시 그 모임을 감시하는 형사였던 고모부에 따르면, 고모에게 접근하여 모임에 대한 정보를 얻어가며 구성원 전부를 검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박봉을 받는 삼촌이 프라이드를 몰고 나타나자 웬 자동차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가 여자 태워주라고 사준 거예요’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삼촌을 프락치로 의심해 폭행사건이 일어났고, 그 바람에 모두 검거되었다는 말씀.

여기에서 역사적 소재를 기발하게 이야기하는 이기호 특유의 입담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자 의식교육에 뛰어들었던 시대적 서사와, 그런 학생 중 하나였을 한 여자를 짝사랑한 삼촌의 개인적 서사가 길항한다. 실제와 허구가 그 경계를 범하지 않고도 서로를 무던히 얽어매는 그 뻔뻔한 자연스러움이 이기호식 서사의 매력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 입담은 불변해도 역사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에는 분명 변화가 있다. 예컨대 학생운동을 소재로 한 「백미러 사나이」(『최순덕 성령충만기』, 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주인공은 머리에 난 상처가 ‘박통의 눈’으로 분해 뒤를 보는 시야와 앞을 보는 본래의 시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엉겁결에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주인공은 박정희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사람들과, 한때 운동권이었으되 너무나 허망하게 그 열정을 놓아버린 사람들을 풍자하기 위한 알레고리적 도구다. 그는 작가에 의해 두개의 카메라를 달고 과거의 시공으로 보내진 화성탐사선과 같다. 그는 역사의 참여자인 동시에 관찰자이지만,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자발적이지 않다. 다만 역사를 ‘찢는’ 탈역사적 작업에 도구적으로 복무할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역사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어 역사 자체를 유희적으로 전유하던 기존의 태도를 철회하고 있다.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서 역사는 가까운 듯 멀고 먼 듯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간신히 이야기된다. 노동자 의식교육이라는 역사적 소재는 한 여자를 향한 삼촌의 지난한 사랑에 비하면 퍽 주변적인 것이다. 역사는 개인의 이야기에 고구마줄기처럼 가만가만 딸려온다. 그럼에도 그 시대적 계기 없이는 개인의 서사가 일어날 수 없는 절묘한 필연성을 갖는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개인들의 서사 없이 역사는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의 조리개를 최대한으로 풀게 하는 중요한 근거다.

그런 의미에서 삼촌의 프라이드는 훌륭한 조리개다. 프라이드를 몰고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삼촌의 이야기를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혹은 후면에서 바라볼 여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삼촌은 영원히 ‘프라이드와 20년간 사랑에 빠진 팔불출’ 정도로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삼촌의 연애대상이라는 누명을 벗은 프라이드의 정체는 ‘트래킹 샷’(tracking shot)만 잡을 줄 아는 무식한 카메라로 밝혀진다. 카메라는 피사체와 거리를 유지하며 앞, 뒤, 옆으로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피사체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그 거리는 진실과 가치를 포착할 수 있는 거리이므로 영원히 좁혀져서는 안된다. ‘후진이 되지 않는다’는 프라이드의 한계 설정은 바로 이 거리에 대한 설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차는 그래서 지금까지 굴러가게 된 거라우. 후진이 안되니까.(81면)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이야기는 도망친다. 이야기의 여백은 채워졌다가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그 이야기에 이끌려 경남 하동까지 프라이드를 끌고 간 ‘나’는 삼촌이 좋아한 여자가 살고 있다는 한옥집 근처에서 여중생 둘을 만난다. “이거 뒤로 못 가는 차 맞죠?” 하고 묻는 한 소녀는, 프라이드의 전 주인인 아저씨가 친구와 자기를 집까지 태워준 적이 있노라고, 그 친구 집이 저기 저 한옥집이라고, 삼촌의 다음 이야기를 채우고 또 비워준다.

 

그때까지 나는 삼촌에 대해서, 또한 프라이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모든 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삼촌은 다시 저만큼 달아났고, 무언가 흩어진 퍼즐을 거의 다 맞췄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모양의 조각이 튀어나와 그림을 한순간에 원점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삼촌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아닐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일이 아닐까, 지레짐작 손쉽게 생각해버리기도 했다.(83면)

 

이는 코젤렉(R. Koselleck)이 생각하는 역사적 시간과 유사하다. 코젤렉에 따르면 역사는 경험과 기대, 즉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패턴을 만든다. 삼촌에 대한 이야기는 흩어진 조각을 맞추고 또 맞추며 매번 새로운 패턴으로 재구성된다. 번번이 다른 초점을 갖는 여럿의 패턴은 한데 모아놓더라도 어떤 구심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장의 사진에 풍경을 다 담을 수 없듯이, 역사는 무수한 여러겹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어 종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합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가장 근접하는 것이리라. 그러한 역사야말로 개인과 시대 모두에 눈길을 보내는 이타적 서사의 한 전형이다.

 

 

4.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은 부정(不)하는 것이다.

—스피노자(Spinoza)

 

그런데 여러 차원을 종합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아픔’ 또한 있지 않을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노력, 이를 통해 짐작과 진실이 서로를 침투하며 모순적인 종합에 이르려 할 때, 누군가는 상처를 얻지 않을까? 아무리 조리개를 풀어도 삶과 이야기 사이에서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 말이다. 문장들의 연합이 상상적 일치나 상징적 불일치에 어느정도 도달했다고 자부할 때, 그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세계로부터 유래하는 아픔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탄원의 문장」에서 우리는 세 층위의 문장과 마주치게 된다. 법의 문장, 소설의 문장, 그리고 ‘최’가 쓴 ‘탄원의 문장’.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치는 ‘나’는 생활비를 버느라 전전하는 학생 P에게 학교 앞에 마련한 오피스텔 한켠을 내어준다. 행정학과에서 문예창작학과로 전과한 P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나’와 밤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사제지간치고는 꽤 막역한 사이가 된다. 군 제대 후 복학한 P는 동기들과 함께 후배들을 훈계한다며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게 하는데, 후배 중 한명인 박수희에게 소주를 거듭 먹여 의식을 잃게 만든다. 법원 1심 판결문에 따르면 “피해자 혼자 거주하는 **원룸 ***호로 옮기도록 한 후, 짧은 시간 동안만 피해자를 지켜보게 한 뒤, 사후 대처를 전혀 하지 않고 피해자를 방치한 과실로 (…)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179면)

함께 수감된 다른 동기들이 보호관찰 및 사회봉사로 풀려난 데 반해 P1년의 실형을 선고받는다. 검찰에 따르면 P가 술값을 계산했고, 주로 P가 박수희에게 술을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P가 군입대 전부터 사귀던 최와 제대 후 한달이 못되어 헤어진 것을 알고 있는 나는, ‘형용사 하나 없이’ 여하한 사연을 배제한 판결문에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답답했던 이유는, 그 안에는 P가 그즈음 겪었던 실연과, 그로 인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과, 치기와 분노와 우울의 기록들이 모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입증 불가능한 세계이니까, 법의 이름 아래 고려되지 않고 모두 배제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답답했다.(193면)

 

사실관계에만 근거하여 사건을 진술하는 법의 문장으로는 입증 불가능한 세계가, 소설의 문장으로는 입증이 될 것처럼 보인다. 실연당한 P가 힘들어하는 마음도 소설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지내는 것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소설의 문장은 진술 가능한 ‘사실’ 이외의 세계, 나와 P가 가까운 사이이기에 말할 수 있는 세계를 투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P의 탄원서를 써주기로 한 ‘나’는 “법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문장을”(199면) 써보리라 결의를 다진다. 그러나 탄원서는 형식이 따로 정해지지 않았을 뿐 결국 ‘제도로서의 글쓰기’일 뿐이라는 점이 나의 결의를 허물어뜨린다. 탄원서가 간혹 판사의 마음을 흔들어 승소율에 기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종의 소설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제도 자체에 위해를 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법보다 문학이 우위에 있다고 믿는 P와 나에게 법의 세계는 애초에 불가해한 것일 뿐이다.

 

행정이라는 게 항상 법 뒤에 오는 거래요. 거기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구요. 법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게 행정의 운명이라구요. 한데 문학은 안 그렇잖아요? 진짜 문학은 항상 법 앞에 있는 거잖아요? 안 그런가요, 선생님?

P는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술기운을 못 이기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고개만 몇 번 끄덕거려주고 말았다.(189면)

 

그러나 문학 또한 법의 세계와 그 층위만 달리할 뿐, 하나의 독립적인 제도임은 분명해 보인다. 법이 ‘입증 가능한 세계’를 관장한다면, 문학은 ‘서술 가능한 세계’를 관장한다. 법과 문학은 그 영토만 달리할 뿐 하나의 독자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서로 동일한 심급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입증’과 ‘서술’ 또한 서로 다른 영토에서 동일한 심급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 둘은 각기 상이한 방식의 마름질을 선보이지만 제도를 떠받치는 그 기능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몽떼뉴(Montaigne)가 법을 “적법한 허구”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면 이러한 이해가 한층 수월할 것이다. 변호사가 ‘나’에게 P의 탄원서를 부탁하며 “법도 어차피 문장으로 되어 있는 거니깐요”(171면)라고 한 것 또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법의 문장으로 입증 불가능한 것을 소설의 문장으로 서술 가능하리라고 호기롭게 덤벼들었지만, 이는 결국 하나의 벽에서 또다른 벽으로 건너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는 탄원서를 통해 입증과 서술이 모두 가능한 문장을 쓰려 했던 것이다. 탄원서는 오히려 입증도 서술도 불가능한, 두 벽 사이에 가로막힌 세계에 속해 있음을 당시의 ‘나’는 깨닫지 못한다. “법도, 치기도, 우울도, 분노도, 제자도, 입증 불가능한 세계들도, 그땐 모두 내 문장 속에 깃들어 있었”지만, 이는 머지않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 모든 것들은 곧 최의 탄원서로 인해 “문장 밖으로 빠져나가 침묵 속으로 사라져버”(174면)린다.

P를 구해보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나’는 P와 헤어진 최에게도 탄원서를 부탁하게 된다. ‘나’는 이별을 통보해 P를 힘들게 했던 최에게 모종의 원망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이번 사건에 최도 기여한 바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는 P2심 선고공판이 다 되어서야 후배 여학생 편으로 스무장도 넘는 분량의 탄원서를 ‘나’에게 전한다. P에 대해 “그 개자식이 종종 언니한테 손찌검한다는 것도 말하던가요?”(205면)라고 묻는 여학생의 말에, P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믿고 있던 ‘나’는 순간 아연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어쩌면 입증 가능한 사실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것은 ‘발견’의 영역이지, ‘발명’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 사실들과 사실들 틈 사이에서 불가능한 것들은 시작되고 피어난다는 것, 그래서 숙명적으로 사실들의 세계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최의 탄원서는 시작되었다.(205면)

 

A4용지로 스물일곱장이나 되는 최의 탄원서는 그 분량이나 내용이 “제대로 맞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씌어진 것이다. 최는 그 글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줄일 수 없는 것들”(206면)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최는 1심 판결문에 기록된 사실들 가운데 자꾸만 눈에 밟히는 한가지, 즉 박수희가 P를 향해 ‘이 선배가 왜 이렇게 자꾸 술만 따라주실까?’ 하고 말했을 때 ‘선배’ 앞에 붙은 ‘이’라는 특별한 지시관형사가 가리키는 추측과 가정으로부터 글을 풀어나간다. P의 연인이었던, 그래서 한때 바로 그 ‘이’라는 것에 붙들려 있었던 최에게는, 박수희에게 P가 그냥 선배가 아닌 ‘이’ 선배로 다가왔다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을 짐작게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최의 탄원서는 전부 이야기되지 않는다. 최의 문장은 탄원서의 형식을 빌렸으되 법의 영토에 속하지 않을뿐더러, 문학의 영토가 범할 수 있는 문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입증과 서술이라는 ‘적법한 허구’가 제 영토를 버리지 못하는 이기에 사로잡힐 때, 그 경계에 함몰된 심연은 침묵을 불러일으킨다. 즉 침묵은 입증도 서술도 불가능한 세계, 법과 문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세계에 속한다. 나는 최의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고 서랍 속에 묻어두기로 한다. 최의 글은 법의 입장에서 ‘대상 없는 탄원서’일 뿐이므로, “제도는 그녀의 문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213면)이기 때문에. 또한 그 문장을 소설로 쓰지 않고 덮어두는 것이야말로 내가 최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이타심이기 때문에.

 

 

5. 행간의 문학을 위하여

 

어떠한 해체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

해체의 가능성만 있고 해체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아마도 해방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경험일 것이다.

—데리다( J. Derrida)

 

이외에 함께 실린 다른 단편들에서도 유사한 주제의식이 반복된다. 각각의 단편마다 ‘제도’의 자리를 차지하는 대상은 조금씩 변주되고 있으나, 제도의 모순을 제도화된 형태로 보여준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작가의 노력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의식이기보다 거울을 ‘만드는’ 사람의 의식에 가깝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거울에 무엇이 비치는지,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골몰한다면, 거울을 만드는 사람은 거울이 무엇을 비춰야 하며 그것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거울에 맺힌 상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다면, 거울을 만드는 사람은 이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그 자유의 댓가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것, 즉 거울이 놓인 자리에 실재하는 현실을 향한 일말의 의무다. 거울에 사로잡힌 사람의 입장에서 현실의 풍경은 부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기호의 서사는 거울이 반영하지 못하는 자리, 즉 문학이 서사화하지 못하는 지점을 문학 속에 들임으로써, 문학이라는 제도를 제도로서 보이게 하는 ‘징후적 글쓰기’를 실천한다. 침묵하는 진실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추정의 서사와, 원근의 풍경 속에 초점 없이 도달하는 역사, 제도의 문장들 사이에 함몰된 실제의 문장에 이르기까지 앞서 서술한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징후’를 입증하는 단서들이다. 그 징후란 이제까지 기성의 서사를 통해서 표면화된 적은 없으나 언제나 그 서사의 배면에 웅크리고 있던 것들, 서사가 작동하는 구조 속에 ‘현재하면서 부재하는 것’(das Anwesend-Abwesende)의 일시적인 깨어남이다. 문학은 서사를 향한 이기(利)와 현실에 대한 이타(利)가 서로를 갈급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구조이나, 문학은 자신의 기원을 쉽게 망각한다. 문학이 자신의 기원과 이에 대한 망각까지도 제 것으로 삼으려 할 때, 문학은 이념이자 제도가 된다. 문학에 잠재한 이 선천적 모순을 징후로 일으켜 세우는 이기호의 서사는 단순한 스타일의 파격을 넘어서는 실천이자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분명 ‘타인’에 관심을 주려는 작가 스스로의 노력이 낳은 귀중한 결실이다.

작가가 예비하는 이러한 징후는 최종적으로는 극복되어야 한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소설은 「김 박사는 누구인가?」의 결말처럼 빈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빈칸으로 함구하는 김박사를 향해 의뢰인이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네 이야기”(130면)를 재촉하며 울부짖을 때,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답은 빈칸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는 이야기란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빈칸의 형태로 ‘부재’함으로써만 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요구하는 것도, 그 요구에 빈칸으로 답하는 것도 코미디다. 빈칸은 서사를 향한 이기도, 현실에 대한 이타도 모두 부정하는 위험한 공간이다. ‘부재’는 영원불변의 이야기를 약속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문학의 허구적 효과를 권력으로 삼아 모두를 기만하는 암울한 상황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문학은 결코 부재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문학이라는 제도가 보호하는 서사의 가치란, 인간의 경험적 삶으로부터 이해 불가능한 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구성해내는 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은 행간이 될지언정 결코 빈칸이 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을 떠도는 무수한 것들을 선별하여 형태를 부여하려 안간힘 쓰고, 무너뜨리고, 다시 그러모으기를 반복해온 인간의 역사야말로 문학이라는 두 음절에 가치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박사가 침묵하는 빈칸의 공간은 소설이 징후를 극복하지 못했을 때 자칫 전면화할 수 있는, 징후에 대한 징후다. 작가가 또다시 자신의 전술에 함락되지 않으려면 빈칸이 아닌 행간의 전면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과 고투하는 문장들 사이로 빛나는 진실의 순간을 어찌 사랑해 마지않겠는가. 이제 내가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예비한 소설의 징후를 보란 듯이 극복하는 이기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