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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199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실, 역사, 그리고 시」 「텅 빈 자리의 주위에서」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송종원(사회) 가을호 문학초점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작품선정 과정을 짧게 언급할까 합니다. 지난 계절에 나온 소설과 시집 가운데 작품의 성취와 완성도를 기준으로 하고 다양한 성향, 연배, 성차 등의 배분 역시 고려했습니다. 더불어 지면 제약도 어쩔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네요. 그 과정에서 아쉽게 좌담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책도 꽤 있었음을 밝혀둡니다. 이번호에는 1996년 등단하신 이래로 현재까지 문학비평 현장에서 꾸준히 활동해오신 평론가 백지연 선생님을 초대손님으로 모셨습니다.

 

백지연 초대손님이라고 하니 새삼 부담과 무게가 느껴지는데요.(웃음) 요즘 문학비평이 독자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지난 봄호부터 이렇게 좌담으로 서평의 형식을 개편한 것도 비평이 독자에게 좀더 친밀한 방식으로 닿아야겠다는 의미가 있겠지요. 오늘 이 자리에서도 작품에 대한 호평과 함께 아쉬운 점도 고루 짚으면서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종원 오늘 좌담에서 다룰 작품집은 다섯권입니다. 소설로 성석제(成碩濟) 장편 『투명인간』(창비 2014)과 박형서(朴馨瑞) 소설집 『끄라비』(문학과지성사 2014), 시집으로는 이시영(李時英) 시인의 『호야네 말』(창비 2014), 이수명 시집 『마치』(문학과지성사 2014) 그리고 이현호(李賢浩)의 『라이터 좀 빌립시다』(문학동네 2014)입니다.

먼저 다룰 작품은 『투명인간』입니다. 『투명인간』은 작가의 전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조동관 약전』(2003) 등의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작가가 워낙 ‘이 사람을 보라’ 식의 인물 형상화가 장기여서 그럴 텐데요. 이 작품 역시 제목을 좀 늘여보면 ‘투명인간 김만수전’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김만수 캐릭터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먼저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

 

165-문초-투명인간_fmt 백지연 『투명인간』은 성석제의 어떤 소설보다 많은 이야기가 빼곡히 담긴 작품이에요. 전쟁과 분단,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1980년대를 가로질러 현재까지, 이렇게 긴 연대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이전의 성석제 소설과 비교해보면 1980년대 이후의 시대 풍경까지 담고 있는 점이 특별하고요. 개인적으로는 몰입하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성석제 특유의 활달한 입담이 갖는 장악력도 대단하죠. 소설이 다루고 복원하는 시대풍속을 제가 모두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으로 와닿았어요. 학교 점심시간에 혼식 검사를 통과하려고 친구 도시락에서 보리를 몇알 빌려서 얹었던 거며, 연탄가스를 마시고 어지러웠던 일도 생각나고요.(웃음)

주인공인 김만수는 이름만으로도 이전 작품의 유명한 캐릭터인 ‘황만근’을 연상시키는 면이 많죠. 순수하고 선량한 품성도 그렇고요. 황만근이 애도의 기억 속에 간직되는 초월적 인물이라면 김만수는 우리의 현재적 분신처럼 느껴지는 좀더 밀착적인 인물이에요. 김만수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며 분투하는 삶 자체가 분단 이후의 근대화 과정과 고스란히 맞물리지요.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어도 정작 뚜렷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투명인간’이 되고 마는 가파른 삶이 비극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다가와요.

 

송종원 ‘투명인간’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가 크죠. 우선 경제 중심의 근대화에서 주변부적 삶을 강요받은 인물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김만수의 성격을 보자면, 말 그대로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인간형이기도 하죠. 경제적 근대화가 요구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적 가면을 쓴 인간형일 텐데 김만수는 그와는 동떨어진 아닌가 싶었습니다. 가면이 없는 우직한 인물로 볼 수 있죠.

 

강경석 좀더 거시적으로 볼 필요도 있어요.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삼대 서사입니다. 지식인 조부로부터 무지렁이 농사꾼 아버지, 그리고 김만수를 비롯한 육남매 이야기로 되어 있죠. 이 삼대가 통과해온 현대사의 굴곡진 여정을 김만수 중심으로 전개한 것이 특별합니다. 김만수의 형 김백수가 부잣집 여대생을 만나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 렐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쥘리 렐은 추락할 때까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이잖아요. 김백수는 그러지 못하고 베트남전에서 병사하죠. 재능있고 출세욕이 강한 김백수는 중도하차하고, 한 시대의 집단초상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인 김만수는 끝까지 남는 겁니다. 김백수나 동생인 김석수처럼 욕망하는 인물들을 상대화하는 대신 황만근 류의 우직한 바보 캐릭터를 선택함으로써 흔히 말하듯 압축되고 왜곡된 우리 근대의 면모가 유연하고 폭넓게 드러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백지연 소설 속에서 여러번 강조되는 ‘산업역군’ 세대라는 말이 있어요. 산업화 과정에서 가족공동체를 뒷받침하는 물질적·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김만수 같은 인물이 해준 거죠. 김만수는 가족 가운데는 가장이고, 회사에 나와서는 또 구성원을 이끌고 보듬는 역할을 맡게 돼요. 읽다보면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있는지 의아하다가도 만수의 삶에 얽혀드는 구체적 관계들을 보면 이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어요. 만수네 형제가 성장하는 과정이 전혀 순조롭지 않죠. 한 예로 연탄가스에 중독된 두 누나 중 한명만 산소탱크에 넣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 나와요. 만수가 울면서 큰누나를 고르는 순간, 이미 그는 더이상 아늑하고 평화로웠던 공동체 속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거지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도시로 와서 집안의 가장이 되지 못하고 만수가 그 몫을 떠안죠. 만수가 지닐 수밖에 없는 책임감이나 죄의식은 한국 근대의 가족표상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에요. 모두가 다 교육받고 잘살 수 없었고,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인생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죠.

 

송종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만수의 태도가 인상적이긴 한데요. 이 태도를 숭고한 희생으로만 읽을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여기에는 책임을 져야 할 국가나 사회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책임이 온전히 가족과 개인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점을 같이 읽을 필요가 있어요. 국가는 경제 영역에서만 출현했을 뿐 복지 같은 공적 영역의 문제를 온전히 가족공동체나 개인이 해결하게 만든 경향이 있죠. 자조(自助)하는 인간형을 요구한 거죠. 저는 김만수의 입에서 ‘이 책임모두 내 것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말이 끝내 나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더라고요.

 

강경석 김만수라는 인물이 그를 둘러싼 여러 다른 인물들의 회고와 논평, 체험 속에서 점차로 조형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거꾸로 가족공동체의 모습 또한 다초점으로 형상화됩니다. 풍부한 삽화들이 동원되는 이유죠.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삽화가 어느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반적인 기억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야기를 공유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이기 때문에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순환이 일어나는데, 이 순환에 대한 튼튼한 신뢰가 작가에게 있는 것 같아요. 가족주의는 그에 비하면 부차적이죠. 도입부이자 결말인 다리 위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삶을 지탱해왔던 그 이야기 공동체가 다 붕괴되어서 좌절과 비관으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도 작품 속에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순환의 힘이 손쉬운 비관으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해주는 듯해요. 말하자면 내용으론 비관적인데 형식이나 작품에 담긴 세계관으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곧 비전이기도 한 거죠.

 

송종원 파국으로 가는 이야기 중간중간 인물들이 겪는 경험에 미세한 밝음과 따뜻함을 환기시키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게 비전의 제시로 기능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한 상황으로 연결되어 있죠. 한 생명이 다리 위에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하는데, 생명관리 시스템으로서의 국가가 거기에 친밀을 가장한 언어로 다가오는 장면은 상당히 황폐하게 읽혔어요. 더불어 후반부에 환각처럼 다가오는 친밀함의 기억이 결국 죽음으로 뚝 끊기는 점도 출구 없는 비극처럼 읽혔고요.

 

왼쪽부터 백지연, 송종원, 강경석 © 송곳

왼쪽부터 백지연, 송종원, 강경석 © 송곳

 

백지연 도입부의 다리 난간과 추락의 상징 자체가 워낙 뚜렷해서 비관적으로 다가와요. 그런데 이 죽음의 구조가 몰락과 황폐로만 읽히지는 않아요. 그 누군가 ‘투명인간’이 되는 슬픈 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투명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현재진행의 이야기로요. 그래서 결말 부분도 좀더 열어놓을 수 있죠.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화자 ‘이재성’을 만수의 동생 석수라고 추측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무수한 ‘투명인간’ 중의 한명으로 볼 수도 있는 거죠.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는 아까 강선생님의 공동체 이야기를 이어보고 싶네요. 그동안 성석제 소설이 되살리는 ‘이야기의 공동체’는 가족이나 어떤 마을, 친밀한 이웃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요. 이 소설에서는 가족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이 국가 혹은 사회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자리하는가를 묻고 있어요. 소설 후반부에서 만수가 공장을 사수하기 위해 무모할 만큼 맞서는 장면을 보죠. 만수는 자신의 행동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해요. “내가 우리 일곱명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책임을 질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라고요. 아주 소박한 대답이라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물음이 들어 있어요.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추는 말이기도 하지요. 개인이나 가족이 추구하는 소중한 가치가 왜 사회적인 윤리로 연결되거나 전환되지 않는 걸까, 소설의 결말은 좌절과 몰락으로 읽히지만 그 안에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절박한 물음을 담고 있어요.

 

송종원 만수가 가족을 넘어서 한 차원 높은 공동체를 의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백지연 물론 만수가 공장에서 그렇게 저항했다고 해서 갑자기 사회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간으로 변화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만수는 선량하지만 나름대로 잇속을 아는 현실적인 소시민이에요. 교통의경 업무를 하며 소소한 뇌물을 챙겨 생계를 도모하기도 하고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입사해 노사 양쪽을 오가며 이해관계에 맞게 삶을 꾸려가기도 해요. 내부적인 모순과 균열이 없지 않은 인물이에요. 만수가 공동체에 대한 숭고한 이상을 드러냈다기보다는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과 윤리가 통용되지 않는 가혹한 사회현실에 대 기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다가와요.

 

강경석 등장인물의 윤리가 곧바로 작품의 윤리가 되는 건 아니겠죠. 김만수가 가족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 작품 전체가 가족주의에 머무는 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비전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이 작품이 몰락의 서사인 것은 맞지만 그 몰락을 지켜보는 작가의 눈은 몰락을 승인하고 있지 않거나 적어도 의심하고 있다는 의미였어요. 이 작품은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답은 없죠. 그건 소설이 하는 일 아닐 수 있고요. 하지만 몰락했으니 이제 끝이다, 하고 단언하는 태도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송종원 저는 이 소설에서 가족주의가 좀 애매하게 쓰인 것 같아요. 사회의 기능 대신하는 사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너무 긍정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김만수가 여섯명의 동료와 더불어 사측의 부당함에 맞서는 싸움의 배후에도 가족주의가 어른거리죠. 동료들이 그를 부르는 명칭이 ‘형님’이에요. 그들의 모임은 사실 ‘또 하나의 가족’ 같은 거죠. 만수의 행동에는 노사관계의 합리성이나 노동조건과 복지에 대한 의식보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비슷한 것이 유독 강하게 작용하는 모습도 그렇고요.

또 이 소설에서 가족주의가 애매하게 쓰인 것은 소설의 서사에서 다소 결락된 것처럼 느껴지는 특정 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봐요. 1960년대와 70년대가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있는 데 반해, 8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약간 흐릿하고 뭔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에요.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이나 시민사회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그전에도 있었지만 폭발적으로 표출된 것은 아무래도 80년대일 거예요. 그중에서도 87년 민주화항쟁과 노동자투쟁은 가족을 넘어선 공동체의 실감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사건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사건을 둘러싼 시대의 분위기가 이 소설에는 별로 보이지 않아요.

 

백지연 말씀대로 이 소설이 담고 있는 80년대 이후의 현실은 소설 앞부분의 내용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압축되어 있어요. 만수 한명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한 정치한 문학적 해석이 이후의 과제로 남겨진 거라고도 할 수 있지요. 시점교차와 무수한 삽화의 병렬적 나열도 후반부에서는 제한적 형식으로 작동한 것 같아요. 이 소설 자체는 특정한 사건에 무게를 두지 않고 수많은 삽화와 인물을 얽어서 한편의 거대한 풍속화를 완성하는 방식인데요. 이러한 형식이 유년 성장기를 다룰 때는 활력있게 작동하다가 80년대 이후의 시대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압축되면서 숨가쁘게 읽히는 느낌입니다. 삽화의 병렬구성이 갖는 약점일 수도 있고요. 그런 점에서 최근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장편소설들이 활용하고 있는 연대기적 서술이라든가, 시점의 교차, 기록의 압축 및 발췌 방식을 비교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강경석 잦은 시점교차를 통한 서술방식은 대개 포스트모던한 발상에 입각해서 의미의 불확정성을 부각하는 데 목적을 두지만 성석제의 방식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복잡다단한 시대상에 좌표를 부여한달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김만수라는 인물을 놓고 거기에 시대를 비춰보려는 목적으로 채택된 것 같습니다. 『강남몽』(황석영)이나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소년이 온다』(한강) 등 근자에 주목받았던 장편들 중에 시점교차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투명인간』은 그런 작품들과 비교해도 시점교차가 잦고 화자도 많지요. 지식인 주인공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실 우리 현대사 전체를 꿰기가 무척 어려운데, 김만수 같은 인물을 통해 전체를 다루려다보니 다초점을 통해서 보조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론 어려운 과제를 잘 풀어나간 것 같아요. 아래로부터 우리 시대를 건설해왔지만 자칫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집합적 초상을 상호토론의 방식으로 입체화하면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입니다. 그것이 대중적 공감대를 넓혀주는 요소이기도 하지요. 다만 마지막에 가서 김만수가 교통사고로 추락사하는 장면은 좀 뜬금없어요. 물론 현재에 가까워올수록 호흡이 가진다는 지적에도 동의하고요.

 

송종원 입담이 특장인 작가에게 다초점 형식은 자신의 장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거 같아요. 가족주의의 쓰임에 의문을 제기하기는 했지만, 입답으로 이루어진 장면 하나하나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재미와 더불어 애잔함과 따스함과 눈물겨움 같은 정서가 자연스럽게 따라붙기도 했고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강경석 형의 말대로 정보화된 말들의 유통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정보중심의 소통을 넘어선 어떤 교감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이 소설에 작용하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박형서 소설집 『끄라비』

 

165-문초-끄라비_fmt 강경석 다음 작품은 박형서의 단편집 『끄라비』입니다. 일곱편이 실려 있는데요, 성석제가 공동체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면 박형서는 그런 공동체 서사의 종언 이후를 사는 이야기꾼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작품들이 대체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즉 소설장르 자체에 대한 성찰을 담은 메타픽션의 성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SF에서 자전소설에 이르기까지 유형적으로도 다양하고요. 어떻게들 읽으셨는지요?

 

백지연 개인적으로는 두번째 단편집 『자정의 픽션』(2006)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유쾌하고도 세련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형서 소설에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가 가지는 허구 직조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동시에 그 힘을 거꾸로 해체하려는 지식인적 성찰이 동시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작품 사이에 편차가 있긴 하지만 이 소설집에도 크게 두가지 계열이 있어요. 하나는 관념적이면서 정보조합식 서술이 강한 「티마이오스」나 「Q.E.D.」 같은 계열이고, 또 하나는 「맥락의 유령」과 「어떤 고요」처럼 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소설쓰기에 대한 자의식적인 성찰을 보여주는 것이죠. 표제작인 「끄라비」는 이 두가지 경향의 종합인 것 같아요. 허구와 성찰이 교묘하게 섞이면서 매끄럽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매력이 있어요. 제목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송종원 이 작가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계열의 작품을 쓰는 건 분명해 보여요. 「아르판」 「Q.E.D.」 「티마이오스」 등이 그 계열의 작품이죠. 또다른 계열로는 삶의 세속성과 우연성에 대해 논리적 해석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있어요. 흥미로운 건 두 계열 모두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건 상징주의 시에서 발견되는 구조와 사한데요, 절대적인 상징체계가 확립되어 있는 초월적 혹은 유토피아적 공간과 총체적인 질서를 파악하기 힘들어 파편적 인식과 갈등만 넘쳐나는 세속적 세계의 대립구조가 바로 그거예요.

책으로 묶이기 전에 먼저 문예지에서 「무한의 흰벽」을 읽었습니다. 기차를 타는 인물이 좌석 중간에 놓인 팔걸이의 소유권한을 두고 옆자리 승객과 갈등을 빚는 작품이죠.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소심한 인물이 짜내는 세부전략이 우습기도 했지만 대체로 과도하게 쇄말적인 것에 집착하는 이야기처럼 읽혀 그다지 좋은 작품이 아니라고 판단했는데요. 그것이 이 작품집에 묶이다보니 오히려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상을 분명하게 환기하는 면이 있습니다. 동경하는 절대적 상징의 세계와는 다른 철저한 현실의 세계, 소유를 위해 뺏고 빼앗기는 세속성이 극대화된 세계를 환기한다고 할까요.

 

강경석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아르판」과 「맥락의 유령」 두편이었는데, 둘 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봤어요. 특히 「맥락의 유령」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인 이야기를 두고, 어떤 이야기가 사람을 살게 하고 어떤 이야기가 죽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 것 같아요. 「끄라비」는 말씀하신 대로 「Q.E.D.」나 「티마이오스」 같은 계열의 한 축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비교적 넓은 의미에서 사실적인 어떤 설득력을 갖추는 이야기인 것 같고, 그래서 저 역시 「끄라비」가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평화로웠던 도시가 파국으로 치달을 때의 전환이 너무 급작스럽다는 느낌이었어요. 그 사이를 연결하는 장치가 좀더 있으면 어땠을까 아쉬웠습니다.

 

송종원 저는 그 전환이 흥미로웠는데, 거기에 뭔가 숨어 있는, 안 쓰인 이야기가 있다고 보았어요. 끄라비(Krabi)가 실제 지명일까 찾아봤는데 정말 태국에 있는 섬 지역이더군요. 추측대 평화롭던 끄라비의 돌변은 그 공간의 근대적 개발과 관련이 있을 거 같아요. 작품에서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꽤 있어요. 앞부분에서 주인공이 평화로운 끄라비와 환상적인 교감의 상태였을 때 어떤 아이를 만나는데, 그 아이가 주인공에게 먹을 것을 건네지요.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원래 당신 거예요”라고 해요. 자본주의적 교환체계에 물들지 않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죠. 또 끄라비의 평화를 그리며 그 공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 주민들의 모습에서 돈맛을 본 장사꾼의 면모를 읽을 수 있고요. 끄라비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설명적 제시를 철저히 지우고 있는 이 부분은 생각할 여지가 꽤 많은 것 같아요.

 

백지연 「끄라비」에서 화자가 의식하는 ‘파괴되는 삶’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몽상 속에서 처음부터 추상화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포함해서 박형서 소설은 허구적인 세계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벌이는 유희의 자유로움을 강조해요. 그런 점에서 「티마이오스」와 「Q.E.D.」의 세계가 극단적인 한 경향을 보여주죠. 이 계열의 작품을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박형서 소설에 대한 입장을 가르는 듯합니다. 이 소설들은 천문학, 물리학, 수학의 지식을 한껏 펼쳐 보이면서 허구적 상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독자에게 보여주려 해요. 작가가 벌이는 유희적 상상에 동참하려면 독자가 즐겁게 좇아가야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두 작품이 읽기 힘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이것을 읽어야 하나 의문이 계속 들었어요. 정확하게는 작품이 너무 명료하게 강조하는 주제나 서술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힘든 거겠지요. ‘모든 서사가 해체될 때, 너는 비로소 알게 될 거야’라는 식으로 작가가 자꾸 주입하고 설명하려는 순간 이야기는 상당히 권위적인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와요.

 

송종원 저 역시 「티마이오스」나 「Q.E.D.」를 읽으면서 힘든 면이 있었어요. 서사를 위해 동반된 지식이 다소 과잉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과잉된 지식의 동반이 박형서의 어떤 특별함이고 그런 작품을 박형서의 대표작으로 봐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파괴당하는 삶, 돌발적인 폭력을 행하는 생을 작가로서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느꼈고, 이것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지점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끄라비」 이야기를 이어가보자면, 작품에서 끄라비의 자본주의적 전환이 지워져 있는 건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해서 그렇죠. 자본의 유입과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어디에서나 늘 진행 중인 현실이라는 말이죠.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는 건 이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삶을 어떻게 치유하고 유지할 것인가, 그리고 그를 위해 이야기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보여요. 가령 「맥락의 유령」 같은 작품에서도 운명 혹은 삶에서 맞닥뜨린 폭력적 우연을 인간이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서사화하여 극복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잖아요.

 

백지연 좀 과한 해석으로도 다가오네요. 「끄라비」의 경우는 그런 문명사적 주제에 대한 깊은 천착보다는 고독한 자아가 상념이나 환상을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떠올리는 면이 강조되는 것 같아요. 이국적 공간을 무대로 하긴 했지만 사실 그와는 크게 상관없이 오히려 외로움이랄까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의 호소가 핵심 아닐까요.

 

강경석 박형서의 특징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Q.E.D.」나 「티마이오스」의 서술방식이 권위적으로 보인다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예컨대 「아르판」을 보면 소설가의 조상 혹은 원형으로 호메로스 이야기를 꺼내는 대목이 있어요. 지금까지 인류가 생산해낸 서사문학의 전통을 하나의 원형으로 단순화한 뒤 해체하는 겁니다. 기존의 이야기들은 다 낡았다는 식의 전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듯하다는 거지요. 그런 맥락에서 「끄라비」를 읽어보면, 전반부는 주인공과 세계 사이가 신화적 감각 속에서 아주 조화로운데 송종원 형이 잘 지적해준 것처럼 자본의 물결이 개입하면서 파국으로 전락하지요. 이런 구도는 사실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실감에서는 멀고 일종의 지적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조화로운 황금시대 과거와 분열되고 타락한 현재라는 틀을 기정사실화한 뒤 거기에 속한 이야기들을 해체함으로써 자기의 지평을 펼쳐나다는 느낌이에요.

 

백지연 고정적이고 진부한 형식의 관습적 서사를 전제한 후 그것을 대상으로 해체를 꿈꾼다면 그 해체라는 것도 매우 일면적이 되지요. 「맥락의 유령」이라든지 「어떤 고요」 같은 경우는 일부러 권위를 내려놓는 방식으로 쓴 작품인데 이것은 기존의 ‘소설가 소설’에 대한 손쉬운 방식의 비틀기로 다가와요.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박형서의 이전 소설보다 담담하고 편해진 점은 있지만, 방법론적인 서술전략을 다시금 새롭고 정교하게 설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Q.E.D.」나 「티마이오스」가 극단의 서술방식이긴 한데 저는 이것과 일상의 실존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결합할 때 박형서 소설의 장점이 탄생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서 박형서 소설이 보여주는 특징과 개성은 최근 젊은 소설의 주류적인 특징을 압축한 것 같기도 해요. 관습적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나 허구적인 이야기 축조에 대한 관심, 일상을 날아오르는 초월적인 각성의 순간 같은 주제들을 종합해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고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의 흐름인 동시에 새로운 방법적 모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강경석 「어떤 고요」를 읽어보면, 자기 소설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이 ‘다른 소설’이기 때문이라는 대목이 나와요. 위대한 소설이 아니라 다른 소설이죠. 이런 감각이 지금의 창작자 혹은 창작 지망생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 작가로서 성장하는 방식에 일정한 패턴이 생겨버린 상황과도 무관치 않을 겁니다. 최근의 작가들은 교육제도에 발이 묶인 채 성장하는 편이지요. 따라서 성석제 소설에 나오는 책임감 같은 건 내려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야기에 훨씬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보니 담론 차원에서도 기성의 서사들에 부여된 권위를 해체하는 부류가 득세하는 거지요. 이런 방식의 확대재생산이 우리 시대 독자들과의 괴리를 가속화하는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송종원 관습적 글쓰기에 대한 대타의식, 유희, 지식조합 같은 요소가 박형서 소설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옳지만 그것이 마치 삶의 감각이나 역사 등을 초월해서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건 무리 아닐까요?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삶에 대한 초월적 기대나 매끈한 관념으로 정리하는 작업 같은 데서 실패하고 있어요. 「Q.E.D.」가 이를 잘 보여주죠. 완벽한 수학의 세계를 꿈꾸던 인물의 열망이 결국에는 깨지면서 그가 삶의 미세한 감각들을 자신의 노트에 받아쓰기 시작하잖아요. 저는 이 서사가 박형서 소설이 씌어지는 과정을 암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이 논리나 해석으로 포획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소설이 유희나 지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작가 또한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현호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165-문초-라이터 좀 빌립시다_fmt 송종원 이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인 『라이터 좀 빌립시다』로 넘어가겠습니다. 첫 시집인 만큼 성과와 한계가 더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인상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여러모로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시집입니다. 한편으로는 불균형적인 것에 탐닉하는 청춘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는 뜻이고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그리는 방식의 개성이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백지연 이현호의 시는 제가 20대일 때 즐겨 읽었던 시집들의 정서와 표현을 떠올리게 해요. 주로 청춘과 고독, 사랑을 다룬 시집들이었는데요. 기형도(奇亨度)라든지, 허수경(許秀卿), 이진명(李珍明)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많았어요. 어떤 연시(戀)의 대목은 정희성(鄭喜成) 시를 연상시키기도 했고요. 첫 시집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시인이 학창시절과 습작기에 읽은 여러 성향의 시들이 자유롭게 노출되어 있어요. 특정 시인에 대한 경배로 보기에는 흔적이 약하고 단순한 차용으로 폄하하기에는 자기 목소리가 분명하달까요. 고백적인 산문의 느낌을 많이 주는 시라서 몰입이 되는 측면도 있고요. 불안한 청춘의 욕망과 상념이 일기를 적듯이 자유롭게 펼쳐져 있고 또 흥미로운 경향도 흩어져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읽었습니다.

 

강경석 주로 실연의 상처와 결핍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작품들입니다. 전체적인 정서는 무척 우울하죠. “우울의 가내수공업자”라는 자칭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말씀하신 시인들뿐 아니라 진이정이나 매음녀 모티프의 이연주 같은 요절시인의 작품도 연상되고요. 황지우(黃芝雨) 느낌도 많이 들어 있는데 말 그대로 온갖 수사가 쇄도하고 있어요. 작품들의 호흡이나 리듬도 대체로 거칠고요. 거친 게 무조건 단점은 아니죠. 자신의 고유한 리듬이나 호흡에 차분히 몰입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직정(直情)적으로 토로한다는 건데 요즘 시에서는 사실 보기 힘듭니다. 거친 리듬 때문에 수사가 난무함에도 아주 직설적이라는 느낌을 줘요. 그런 지점이 개성의 하나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요. 아직은 수사 과잉에 머문다는 느낌입니다만, 갈피를 잡을 길 없는 불안정한 청춘의 상이 또렷이 맺히는 건 사실이에요. 첫 시집이 아니라면 사실 이렇게 거침없기도 쉽지 않지요.

 

송종원 선배 시인들의 언어를 자신의 시에 끌어들여오는 양상과 불우한 정서에 대한 두 선생님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백지연 선생님이 기형도와 허수경을 떠올렸던 이유그런 정서와 관련이 있을 거 같아요. 기형도의 시에서 발견되는 신산한 가족사, 허수경 시에서 발견되는 어두운 연애의 그림자가 이현호에게도 있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연애 이야기가 전면화되어 있는 데 반해, 가족의 그림자는 어머니와 나의 증오적 관계를 그린 금수의 왕을 제외하고는 숨겨져 있다는 인상이에요.

강경석 형이 지적한 선배 시인들의 시구(詩句)를 활용해 시를 쓰는 방식에 대한 분석도 동의합니다. 가령 김수영(金洙暎)의 「생활」에 나오는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라는 구절을 활용해 13월의 예감에서 사랑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어떤 광기 같은 것으로 표출하고 있는데, 김수영 시에는 생활인으로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느끼는 광기가 포괄적으로 들어가 있었다면, 13월의 예감에서의 이 구절은 내포하는 감정의 맥락이 좀 얇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이 시집에 대해 말하려면 ‘너’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없어요. 서시 「붙박이창」에 “널 종교로 삼고 싶어”라는 구절이 있죠. 그 구절과 시집 전반의 연시 분위기에 비춰볼 때,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종교 대신에 ‘너’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여요. 사랑을 매개로 자신의 삶의 감각을 고양시키려는 태도가 상당히 낭만적이죠. 새롭다는 느낌도 덜하고요.

마지막으로 화농, 볕뉘, 사행, 마유주 같은 이국적이고 낯선 단어를 일부러 골라 쓰는데, 낯선 단어의 힘으로 시를 밀고 나가려는 태도는 시적 인식을 날카롭게 벼리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백지연 “새로 쓰는 모든 서정시의 서문은 너다”(「새로 쓰는 서정시」) 같은 구절도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죠. 노골적인 만큼 대상에 대한 몰입과 막 터질 것 같은 열병의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아요. 특정한 시의 영향을 내면화하기보다는 수사나 정서의 차원에서 이것저것 많이 들여온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면에서는 아슬아슬한 불균형이지요. 심하게 보면 조립식 글쓰기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여러가지 표현방식이 뒤섞여 있다보니 매우 다른 경향의 시들이 함께 있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예컨대 「새로 쓰는 서정시」하고 그뒤의 「봉쇄수도원」은 같은 시인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요.

읽으면서 이 시인만의 독특한 정서와 형식은 뭘까 이런 생각도 했는데요. 표제작에서 반복되는 “라이터…… 좀 빌립시다……” 같은 구절이 그래도 청춘의 목소리를 관통하는 일관성이 있어 보였어요. 대상에게 끝없이 호소하고 말을 거는 화법이 특징적이에요. 뭘 하자, 뭘 해줘, 이렇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데 사실 상대방의 응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남루하고 누추한 화자의 독백들이 흘러내려요. 어떻게 이렇게 자기를 부끄러움 없이 드러낼 수 있을까,(웃음) 솔직하다고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어요. 방법적인 경향의 혼란스러움을 가능성으로 봐야 하는지도 고민스럽고요.

 

송종원 제가 부정적인 판단을 먼저 내놓긴 했는데, 저로서는 약간 유보적인 면이 없지 않아요. 가령 단어의 선택이나 수사의 과잉이 걸리긴 하지만, 그걸 시인이 전혀 의식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당신의 고독은」이라는 시의 “우리가 검은 단어들로 수의를 짓고 있는 이곳은 낯익지 않을 오지의 시간”이라는 구절을 보면, 자기가 쓰고 있는 단어들이 예의 우울 연민의 빛을 깔고 있고 다소간 이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 같아요. 이런 대목을 보고 있으면 이 시인이 어쩌면 낭만성을 끝까지 밀어붙어보려는 시도 한다 싶기도 하고요.

 

강경석 그런 방식의 직정적 토로와 수사적 발산은, 아마도 자기 삶의 질곡과 연루된 작품들을 읽고 거기에 빠져들었던 시간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숭배가 진짜 숭배가 되려면 오히려 그것을 넘어가야 할 텐데 아직 그 단계까지 시원스레 도달한 것 같진 않습니다. 「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로」 같은 시도 보면, 제목은 황지우의 시에서 온 건데 “생활이 생활을 반성하지 않듯이”라는 구절은 김수영에게서 온 거란 말이죠. 조금씩 비틀긴 했지만 어떤 뚜렷한 의식의 소산이 아니라 그냥 나온 것 같아요. 자신만의 서고에서 정제되지 않은 채로 막 튀어나온 거죠.

 

백지연 어쨌건 많은 시인의 영향이 느껴진다는 것은 신인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 되지 않을까요? 자칫하면 오해를 살지 모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방식이기도 하고요.

 

송종원 긍정적으로 보자면 자기 안에 있는 걸 지워내는 방식인 것 같기도 해요. 익숙한 어떤 언어와 정서를 그냥 다 솔직하게 쏟아내고 털어버리고 싶은 욕망의 태도이지 않을까요? 많은 시인들이 첫번째 시집은 무언가를 털어버리기 위해 쓰는 면도 있더라고요.

 

강경석 그렇죠. 하지만 문청다운 순정을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통속적인 나르시시즘이나 감상주의로 떨어질 위험도 있으니 위태로워 보이는 건 사실이죠.

 

백지연 도달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고백의 서사라는 틀이 어떤 순수함과 간절함으로 다가와요. 가령 “너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구절이다”(「매음녀를 기억하는 밤」)에서는 치기어리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느껴져요. 청춘의 문학이 탐닉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아름다움’인데, 그런 것을 직접 말하는 시를 오랜만에 읽은 느낌이에요. 아쉬움이 많은 시집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 여기에 깃든 과잉된 정서는 가까운 친구가 들려주는 솔직한 고백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도 후련하게 하는 면이 분명 있어요.

 

송종원 사적인 연애의 단편을 통해서도 시대성을 읽어내고 싶어하는 게 평론가의 욕망이기도 하잖아요. 같은 맥락에서 작가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시적 형상에 자기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 같고요. 이 시집의 키워드를 사랑이라고 읽는다면 그것이 ‘이 시대의 사랑’의 맥락에까지 도달하고 있는지는 질문해볼 문제인 듯합니다. 오늘 좌담의 내용이 다음 시집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맞닿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수명 시집 『마치』

 

165-문초-마치_fmt 송종원 다음으로 토론할 대상은 이수명의 새 시집 『마치』입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언어를 참 독특하게 다루는 시인이죠.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게 우리가 쓰는 한국어가 맞나 의심스러울 수도 있습니다.(웃음) 달리 말하자면 한국어의 문법에 숨어 있는 표현의 한계를 드러내고 한국시에 스며 있는 시적인 것의 합의에 대해 의심을 가하는 텍스트라고도 볼 수 있죠. 읽기에 수월하지는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는 텍스트임이 분명합니다.

 

강경석 ‘마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여기에 보이지 않는 부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해석에 반대한다.’(웃음) 구태의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시는 비의(秘意)를 담는 예술형식이어서 어떻게 해석해도 어딘가는 빈자리가 생기고 닿지 않는 부분이 남기 마련이죠. 시의 그런 자질을 아주 극단화하면 『마치』 같은 시집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제가 볼 때 이 시집은 ‘시인의 말’이 열쇠인 것 같아요. 거기에 “3월, 행진, 망치, // 그리고 / Als Ob” 이렇게 되어 있는데, 3월을 영어로 하면 March고 그걸 번역하면 행진이죠. 또 못 박는 마치와 망치는 유의어잖아요? Als Ob은 독일어의 가정법 ‘마치 ~’이고요. 이런 식의 언어연상 놀이는 첫 구절부터 달라붙게 마련인 독자의 해석욕망으로부터 계속 도망치려는 의도를 품은 것이죠.

 

송종원 이수명의 시집에서 해석을 거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건 아마도 축적된 의미와 기억을 통해 시의 언어가 익숙한 상태의 전언으로 정리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 때문이겠죠. 가령 서시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에는 들판에서 배추를 뽑는 어떤 남자와 그런 행위의 결과로 들판에 구멍이 생기고 쥐가 들끓고, 남자의 삶을 덮치는 들판의 시대가 열리는 이미지가 그려져 있어요. 그 모습을 마주할 때, 우리의 기억과 의미지향적 태도는 농촌의 황폐한 모습을 연상할 수 있어요. 이같은 해석의 여지가 전혀 없진 않죠. 그런데 이런 해석공간이 열렸을 때 기대하게 되는 도덕적 연민과 합리적 비판의 시선으로 시의 언어가 수렴되지 않아요. 황폐함 생산하는 언어가 계속 황폐함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달려갈 뿐이죠. 이수명의 시는 자주 인간과 인간의 해석이 주인공인 시가 아니라 인간적 해석을 넘어선 무엇 자체를, 저 시의 경우라면 황폐함의 운동성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해요.

저 시도를 증명하는 게 문법적 구조를 비트는 문장이기도 해요. 가령 「체조하는 사람」에서 시인은 ‘나는 체조를 한다’ 대신에 “나에게 체조가 있다”라고 말해요. ‘나’의 주체성 내지 ‘나’의 능력이 삭감되는 쪽으로 언어를 사용하죠. 달리 말하면 인간중심적 언어 사용이 자제된다는 뜻일 텐데, 이게 묘한 실감을 줍니다. 내가 체조를 한다고 말하지만 체조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실제로 체조에 맞춰 내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백지연 이수명의 시는 건조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고 치밀한 언어로 씌어 있어요. 뚜렷한 방법적 태도가 있고 상당히 논리적으로 시를 펼쳐나가요. 앞선 이현호 시와 비교하면 정반대의 경향으로 느껴져요. 저는 표제작인 「마치」가 좋았는데요. ‘마치’로 반복되는 경쾌한 울림 속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는 이미지의 몽상이 인상적이었어요. 흥미로운 것은 시어 자체는 절제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적인 단어들이에요. 뒤집어쓰고, 돌아다니고, 부풀어오르고, 보러 가고 등등 계속 움직이고 있지요. 건조하고 황폐한 사물의 세계를 연결하러 바쁘게 돌아다니는 시인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난해시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시적 주체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명료한 시들이에요. 이토록 시적 주체에 대한 강한 신뢰가 있나 싶을 정도예요. 단독자로서의 주체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랄까요. 자기성찰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측면이 고전적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대신 이 주체가 드러나는 언어적 방식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고민하는 게 느껴져요. 시에서 ‘나’ ‘너’ ‘우리’ 같은 대명사를 관습적으로 쓰는 것을 상당히 경계하고 끊임없이 그 이유를 살피려고 하잖아요. 그런 점이 긴장을 주면서도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송종원 ‘나’ ‘너’ ‘우리’ 같은 대명사 사용에 대한 관찰이 흥미롭게 들리네요. 한국시에 여전히 공동체주의적 감수성이 대세인 거 같아요. 나를 말하기보다 우리를 말할 때 확보되는 도덕적 선의가 시의 윤리처럼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다고 봐요. 그에 반해 이수명의 나는 확실히 공동체주의로 회수되지 않는 감각의 자유를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죠.

 

백지연 “나를 나른다. 잠시 여기로 나른다. 여기를 보여라. 내가 여기로 들어서도 여기는 나에게 오지 않는다”(「나를 나른다」)에서도 ‘여기’와 관련된 단독자로서의 ‘나’의 위치나 존재의미를 여러가지로 상상하게 만들어요. 이와 관련해서 보면 이수명의 시는 단독자로서의 주체를 명료하게 의식하지만 그 주체를 늘 입체적인 공간의 이미지 속에서 사유하려는 건축설계자의 느낌을 줘요. 1부가 특히 공간학적 상상력이 두드러졌어요.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첫 시집인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1995)에서도 공간적 상상력과 돌발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신선하게 읽었던 느낌이 있어요.

 

송종원 ‘건축설계자’라는 표현은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건물’이라는 시어나 ‘서 있다’라는 시구도 많이 나오긴 하는데, 그 어휘들이 발산하는 느낌에 동조하기보다는 거부하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이수명에게는 축적되거나 정지해서 똑바로 서 있는 것들을 파괴하려는 태도가 있요.

조금은 방향을 달리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한국시인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주라는 단어를 쓰는 시인과 쓰지 않는 시인.(웃음) 감정의 고양과 도덕적 판단의 축적을 통해 인간이 자신보다 더 큰 질서의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시인이 있다면, 반대편에는 그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제거한 시인이 있죠. 이수명은 명백한 후자예요.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유기적인 전체의 조화보다는 부러진 토막들의 번쩍거리는 반란이 가득한 느낌입니다.

 

강경석 이수명 시가 이른바 미래파 방식과 결이 다른 것은 백지연 선생님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셨지만 주체가 튼튼하게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가 입체파 회화를 보면서 거기에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을 하진 않거든요. 삐까소(P. Picasso)의 <꿈> 같은 작품을 보면 거기에 어떤 구상(具象)도 없이 오로지 추상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를테면 사람이 앉아서 꿈꾸고 있는 형태는 드러나 있단 말이죠. 그것처럼 이수명 시도 구체적인 상황이나 정황이 포착돼요. 「밤의 편대」는 심부름 다녀오는 사람이 싸우는 연인이나 행인을 두루 목격하고 올라가는 장면을 포착한 경우인데, 자기가 무엇을 보고 이 시를 쓰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하는 의미를 기성의 방식으로 확정짓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정황 자체는 오히려 뚜렷하게 있는 거죠. 「소년의 형태」에서도 소년의 단체복이 땅에 끌리는 상황을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고 독자의 이해를 계속 깨뜨려가는 흥미로운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맥락이나 함의로부터 지속적으로 벗어나려는 언어가 독자에게 어떤 감각을 제공하는가 하는 거죠. 단순히 생각하면 기성의 질서나 고리타분한 사고로부터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줄 수 있겠다 싶어요. 아니면 의미가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어떤 불안감 같은 것을 조성하거나요. 둘 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대체로는 해방감과 불안감 사이를 진동하다가 결국은 그 둘의 간극을 메우고 어떤 위안을 준다고 할까요. 예컨대 시구들의 형태를 보면, 대체로 평서형 종결어미가 쓰였어요. 그런 종결어미가 표면적으론 딱딱하고 건조하거나 냉정해 보일 순 있어도 사실은 읽는 사람에게 무언가 분명하다는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그래서 불확실한 의미 때문에 불안하다가도 따듯한 안도감 같은 데 이르게 되지요.

 

백지연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이수명 시의 언어는 그것이 현실의 어떤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계속 지우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인과관계로 추론할 수 있는 각종 연상작용을 깨는 돌발적 표현을 가져다 놓죠. 가령 식탁 위에 갑자기 나타나 기어다니는 나뭇가지(「우리는 조용히 생각한다」)가 있어요. 그 나뭇가지는 식탁 위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상념일 수도 있고 밥 먹으러 모여든 사람들의 손가락에서 온 이미지일 수도 있지요. 그런 연상적 흐름을 뒤틀기 위해 시인은 ‘부러진 나뭇가지가 좋아’라는 구절을 처음에 배치해요.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차단의 방식이 때때로 부담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저는 상대적으로 이 시집의 2부에 실린 시들이 읽기 편했는데요. 시와 현실을 상관지으려는 독자의 욕망을 담백한 방식으로 흡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러 차례」라든가 「운동장」 「소수의 사람들」 「천천히」 같은 경우에는 좀더 몰입하고 읽을 수 있었어요. 아까 박형서 소설을 논의할 때도 한 이야긴데요, 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기성의 문학형식을 관습적인 것으로 가두게 되면 그에 대항하는 새로움의 의미도 제한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아주 진부하다고 여기는 기존의 언어형식이 사실은 매우 복잡한 맥락을 지니는 것일 수 있어요. 창작자가 상상하는 독자 역시 쉽고 단순한 존재가 아니지요. 독자는 그렇게까지 관습적으로 읽지 않거든요.

 

강경석 그 점은 동감입니다. 예를 들면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은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좋은 작품으로 여겨지잖아요. 계속해서 향수를 하는데도 작품의 시적 비의라는 게 완전히 소진되지 않고 남는단 말이죠. 그처럼 고유한 세계가 있을 거예요. 새로우냐 낡았느냐가 아니라 고유한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 하는 구도로 보면 분명 낯익은 스타일인데도 나름의 고유한 성취를 이룬 작품들이 많지요. 이수명 같은 시인의 시세계를 옹호한답시고 기존의 서정시는 무조건 낡았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청산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죠. 어느 일면으론 『마치』처럼 시보다 시에 대한 사유가 승한 시집들이 음으로든 양으로든 청산주의를 부추기는 면도 없다곤 할 수 없고요.

 

송종원 사실 많이들 시를 독창성이 강조된 장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의 시들은 좀 모양새가 다르죠. 영향관계가 확연한 비슷한 어법과 정서를 지닌 시가 꽤 많이 있다는 말이에요. 저는 이수명 시의 새로움이 이전의 시들을 청산한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수명의 새로움은 오히려 이전 시들의 고유함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고 봐요. 누구와도 닮지 않은 시를 쓰려는 강력한 자기검열은 자신의 고유함을 지킴은 물론 상대의 고유함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작가들이 독자를 너무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란 의심은 사실 증명할 수 없지 않나요. 작가가 관습적이라고 여기는 게 독자일지, 언어일지, 자신의 의식일지 알 수 없는 거지요. 더욱이 시라는 장르에서는 전하려는 메시지와 의도가 강한 작품이 아닌 이상 독자 일반을 가상으로 둘 수 있는 여지가 적다고 봅니다.

이야기의 방향을 좀 바꿔보는 게 어떨까 싶네요. 이수명 시가 엇비슷하게 반복된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전 시집에 비해 어떻게 달라졌다고 읽으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백지연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집중적으로 펼쳐진 시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쓰기의 실존적인 고민이 더 짙게 드러난달까요. 그러나 시어 자체의 절제와 축약 속에 관념화되고 추상화된 지점이 제게는 여전히 어렵게 다가와요. 때로는 시보다 점점 시론에 가까운 형태로 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은 ‘시를 어떻게 제작하는가’에 대한 과정으로도 읽혀요. 그래도 제가 상대적으로 편하게 읽은 2부에서는 사회현실의 문제와 연결해서 상상할 수 있는 지점이 꽤 있었어요.

 

송종원 사회현실을 연상시키는 언어가 좀더 풍부해진 느낌은 저도 받았어요. 가령 「4차선 도로」는 즉물적으로 도로의 풍경과 물질감이 엄습하는 어떤 감각이 쭉 나열되는데, 이것이 토목이나 건설에 의해 파괴되는 근대화된 삶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면도 있어요. 이수명의 이전 작품들이 심리적 현실 속에 스며든 사회성을 인식하게 했다면, 이번 시집에는 사회적 현실 속에 스며든 개인적 감각의 고통을 툭툭 던져낸 시도가 돋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강경석 현실의 제시나 사회적 접근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태적이고 파편적이지 않나 싶어요. 앞서 말씀하신 ‘4차선 도로’든 아파트 입주자모임에서 일어난 분란이든(「거주자들」) 아니면 종이박스를 깔고 자는 노숙자의 생활이든(「박스를 덮고」) 탁자에 놓인 하나의 정물인 듯 다뤄지고 있지 않나요? 만약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담는다고 한다면 사실 이 시인이 추구하는 방법론하고는 배치되고 모순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건 맥락이나 함의의 세계를 승인하고 거기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의미부여된 것에서 거품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지……

  

이시영 시집 『호야네 말』

 

165-문초-호야네 말_fmt 송종원 마지막으로 다룰 대상은 이시영 시집 『호야네 말』입니다. 2012년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후 이년 만에 새 시집이 나왔네요. 두 시집은 형식적으로 연작시집의 느낌이 있습니다. 단정한 어조로 짧은 이야기를 건넨다는 느낌이 우선 닮았요.

 

백지연 친숙하게 읽은 시집이에요. 이시영 시의 가장 큰 장점은 굳이 어떤 통로를 설정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내면적인 감정과 일치시키면서 다가갈 수 있다는 것 같아요. 대중적인 소통의 측면에서 아주 강한 친화력을 지녔어요. 이 시집 역시 이시영 시 특유의 함축적인 짧은 시를 잘 보여주지요. 이전의 시에서도 줄곧 유지했던 경향이지만 이번 시집에서도 시가 품고 있는 설화적 요소라든지 이야기성 같은 게 재미있게 다가왔어요. 소설로 따지면 발단 부분이 제시된 후에 갑자기 이야기가 사라지는 형상인데요. 시에서 이러한 이야기의 생략과 압축을 보니까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시라고 할까요. 짧지만 그 안에 무한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어요. 특히 「BYC」라든지 「여우골짜기」처럼 이 이야기성이 개인의 내밀한 기억이나 비극과 관련될 때는 그 정서적 파동이 상당했어요. 시집의 또다른 축은 문인들과의 일상적 교류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점인데요. 인물 시편도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면서 담백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번에 이시영 시를 읽으면서 새삼 시와 소설의 상관성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말 좋은 소설은 어떤 구체적인 이야기로 다 흡수되지 않는, 샅샅이 해명되지 않는 시적인 순간을 품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좋은 시는 그 안에 무한한 이야기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가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궁금해지고, 그 매력에 끌리게 됐어요.

 

강경석 마치 한권의 사진첩 같았어요. 대부분 한연으로 이뤄진 시들이기 때문에 넘길 때마다 한장의 사진이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을 환기하는 거죠. 식민지시대에 임화(林和)가 문학의 대중화를 고민하면서 단편서사시를 고안한 적이 있는데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죠. 이시영 시인의 작품들이 그런 취지를 성공적으로 살린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 전통시가 대체로 단시가 많은데 그와도 맥이 통할 뿐더러 일본의 하이꾸(俳句)를 연상시키기도 해요. 그중에서도 하층민의 고락을 자주 다뤘던 코바야시 잇사(小林一茶)와 통하는 것 같아요. 가난한 시골의 모습이라든지, 미물(微物)에 대한 연민이라든지 여러 면에서요.

 

송종원 저는 이번 시집에 실린 작품들이 단편서사시 형식이라든가 이야기를 담는다라는 의식과 무관하게, 심지어 시를 쓴다는 생각도 버려둔 채로 자연스럽게 어깨의 힘을 빼고 쓴 결과로 보았어요. 형식적 긴장을 느슨하게 가져가니 오히려 시 속에 가치중심적 발언이 편안하게 들어앉을 수 있었을 거예요. 굳이 내용이라고 말한다면 시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동시에 사라져가는 것들이기에 기억하고 지켜내야 할 목록을 적어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시영 시 가운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게 『바다 호수』(2004)에 포함된 「아버지의 모자」인데요. 아버지가 죽었더니 오촌당숙이 ‘이제부터 내가 아버지의 모자를 쓰겠다’며 모자를 쓰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그리거든요. 거기에는 옳다고 믿는 가치 책임지고 지켜내려는 당당함에 매혹된 시선이 있고, 그 시선에는 인간의 역사가 산출해낸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는 자로서의 시인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도 마찬가지로 자연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인정, 이런 것을 기억하고 지켜내려는 시인의 의식이 시에 작용하고 있어요.

 

백지연 이야기성의 형식에 대한 의도적 고려는 선명하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정자나무」의 “많은 사람이 그 옆을 스치며 떠나갔다 / 아니,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구절에서 “떠나갔다”와 “돌아오지 않았다” 사이에는 많은 서사가 들어가 있고, 그후에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는 상상의 이야기로 남기는 거잖아요. 서사적 상상을 의도한 형식적 장치가 분명해 보여요.

 

송종원 시력(詩歷)50년에 가까데 편안하게 쓴다고 했을 때 그 정도 형식은 자연스럽게 시에 얹힐 수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자연스럽다고 했던 건 억지스럽지 않게 썼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좋은 작품도 있고 아쉬운 작품도 있었어요. 「아버지의 모자」처럼 책임감을 동반한 도덕적 품위라든가 인정으로 물든 타인과의 교감을 성공적으로 그려낼 때, 또는 여린 생명을 바라보는 순한 감각이 빛날 때 좋다고 느꼈습니다. 반면에 약간은 경직된 도덕성 같은 게 느껴지는 순간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촐함이나 겸손함 등을 강조할 때는 너무 계몽적이진 않은지, 균형과 조화를 강조할 때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나 균형 같은 것이 다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강경석 「숲」이나 「절」 「‘나라’ 없는 나라」 「조춘(早春)」 「작별」 같은 계열의 작품이 지금 말씀하신 계몽적 성향을 노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시인이 한권의 시집을 묶으면서 그냥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도 몇편쯤 놓을 수 있겠지만, 다른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더 성공적이어서 이쪽을 좋은 시라고 하기 어렵겠네요. 「석양 무렵」 단 두줄이지만 아주 좋았어요. “가을 산길에 놓인 밤톨 하나 / 설치류의 작은 이빨이 단단히 박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시집에서 눈여겨본 부분은 북에 다녀온 이야기, 혹은 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작품들이에요. 「삼지연려관」 「요동호텔에서」 「안변평야를 지나며」 같은 작품은 짧으면서도 여러 생각을 줘요. 「요동호텔에서」를 보면 황모()라는 북쪽 사람을 만나서 반쯤은 장난으로, “황 동지, 안녕하십네까?” 하니까 답으로 “리시영 동무, 거 앞에다가 ‘경애하는’이란 말 좀 붙이면 안되겠습나?” 하는 말이 돌아오는데, 이념 혹은 체제 사이의 거리감을 포용력있는 장난스러움으로 해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삼지연려관」의 찬물세례 장면은 이런 아주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감정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주목할 만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이런 장면에서 정치적 수사로 빠지기가 십상인데도 말이죠.

 

송종원 작중 인물이나 사물을 살펴보면, 연륜이 느껴지는 장년이거나 노인 혹은 순진무구한 아이, 그 아이 같은 동물, 세월을 견뎌낸 사물 따위가 많죠. 시인에게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이 시집의 세계에는 공격적인 성질의 감각이나 인간의 불균형, 사물의 망가짐 등이 외면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시영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아까 말했듯 쓰러지는 것들을 지키고 붙잡는 수호자의 모습인데, 거기에 때로 강력한 도덕적 강박이 작용해서 시의 세계를 다소 축소하는 면이 지 않나 싶어요. 익히 말해지듯 시는 도덕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시가 드러내 보인 인간의 바닥과 세계의 참상이 새로운 성찰의 계기로 작동할 수도 있고요.

 

백지연 도덕적 강박이라는 말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은데요. 이 시집에서 화자가 꿈꾸는 드높은 이상향이나 가치는 강박이라기보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상당히 낙관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신념으로 다가왔어요. 그것이 시 속의 인물 시편에서 생생한 일상성으로 구현되는 중요한 힘인 것 같고요. 아까 논의한 성석제 소설의 만수가 지닌 선량한 품성과도 연결되는데요. 작품에 깔린 낙관적인 비전이나 도덕성은 미리 제시되는 어떤 고정관념이라기보다 실제적인 삶 속에서 체득되어온 일상적인 감각일 수 있다는 점이죠. 아까 강선생님이 좋았다는 북한 관련 시편도 그런 선량한 인간으로서 교류하는 와중에 일상의 감각을 붙든 것이고요. 문제는 시인이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느냐는 것일 텐데요. 두분이 지적한 것처럼 이시영 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성이 직설적인 토로로 분출될 때 계몽적인 전언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지요. 「‘나라’ 없는 나라」라든지 「상행(上行)」에서는 시적인 긴장이 매우 느슨해져요.

 

강경석 스스로를 절제하는 어떤 문사(文士)적인 고고함이 있는 건 사실이죠. 문사적인 태도나 선비적 기질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과 설치류의 이빨자국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눈매 사이엔 모순이랄 게 없죠. 자연과 사람, 특히 힘없고 순박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없인 사회나 세상에 대한 거침없는 발언도 나오기 힘든 법이니 그건 자연스러운 거죠. 작품이 아주 간결하고 잘 조형되었다는 것도 시인이 지닌 문사적 기질의 소산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도덕적 강박이라는 말보다는 문사적 책임감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네요. 강박과 책임감은 엄연히 다른 거니까요. 앞에서 두권의 소설을 검토할 때도 책임감 얘기가 나왔지만 어떤 의미에서 요즘은 책임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문학을 억누르고 있는 것도 같아요.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도 벗어나야 진짜 자유로운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직접적인 사회적 발언이나 심지어 「1894년, 뻬쩨르부르그에서 옴스끄까지」에서처럼 어느 러시아작가의 연보조차 한편의 시로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호야네 말』이야말로 강박에서 오히려 더 멀리 벗어난 것 아닐까요?

 

송종원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았겠지만 오늘의 토론은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두분 각자 짧게 마무리 말씀 부탁드려요.

 

백지연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으면서도 아쉬움 남네요.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새롭게 가지고 돌아가는 느낌인데요. 비평가들이 모여 작품을 두고 깊게 파고들며 서로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하고 좋은 시간이었어요.

 

강경석 회를 거듭할수록 크게 느끼는 거지만 다양한 작품경향을 섭렵하느라 벅차면서도 이만큼 즐거운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독자에게도 좋은 시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고요.

 

송종원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든 소설이든 쓰인 이야기보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가 중요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흔히들 행간을 읽는다고 하지요. 이게 실은 덜 쓰인 것을 채워 읽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덜 쓴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기분입니다. 두분 모두 긴 시간 고생하셨습니다.(2014.7.30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