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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행숙 金杏淑
1970년 서울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사춘기』 『이별의 능력』이 있음. fromtomu@hanmail.net
주택가
가정집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은 무엇일까
나는 20세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당신은 21세기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오늘날 주택가는 그런 곳
너희 엄마 집과 아빠 집의 규칙이 다르듯
누구나 다르게 살아가는 거야
똑같이 보이고 싶어하면서
큰 개를 키우는 사람은 큰 개에게 의지하고
작은 개를 키우는 사람은 작은 개에게 의지한다
자기 머리통보다 작은 개를 꼬옥 껴안고 우는 사람이 있겠지, 오늘밤에도 주택가는 그런 곳
버둥거리는 개가 있어
그것은 좋다는 뜻일까, 괴롭다는 뜻일까
말하는 개라면 사실대로 짖을까
말하는 창문이라면 수다쟁이 할멈일 거야, 그녀가 마음씨 좋은 할머니래도 당신은 창가에서 더이상의 독백을 잇지 못하리
밤에 주택가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밤의 주유소로
환하게 달려오는 차의 속도가 부러워, 당신은 골목에서 걸어나와 골목이 없는 세계로 뛰어간다
착각처럼 무엇이 바뀔까
완전한 착각처럼 무엇을 굳게 믿을까
밤공기가 차가워, 나는 창문을 닫는다
투명한 유리창을 닫고
불투명한 유리창을 닫고 커튼을 쳐버렸다, 화가 난 듯했다
나는 보이지 않았다
계단의 존재
건물 모서리 안쪽에 계단이 자라고 있다. 아무도 계단의 숨소리를 듣지 못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언제나 더 컸다. 올라간다는 것, 내려간다는 것, 그 사실은 우리의 심장을 키운다. 3층 치과에 가려는 것뿐인데……
4층 치과에도 손님이 입을 벌리고 있다. “조금 더 크게 벌리세요.” “더이상 벌어지지 않아요. 내 입은 원래 조그맣단 말이오. 입이 작다고 사람을 무시하는 거요. 제기랄.” 만약 꿈이었다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같은 건물에 치과가 두개라는 것, 세개라는 것, 아니 이런, 온통 치과뿐이라는 것,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당신은 치아의 중요성을 모르십니까? 소리 나지 않게 음식을 씹었으니,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싸움을 끝냈으니, 당신은 전쟁터의 검은 연기에 휩싸인 이빨의 존재를 망각했습니다. 큰 코 다칠 일입니다. 혹시 당신은 코도 작습니까?
코도 작은 당신은 벽을 짚으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갑자기 계단이 멈추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심장을 꺼낼 듯이 가슴을 쥐어뜯고 있다. 당신은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계단의 숨소리가 들린 것 같다. 숨과 숨 사이가 한없이 길어졌다고 느낀 순간, 계단이 들썩였다. 한겹이 아니라 두겹, 세겹이라는 것, 네겹이라는 것, 당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는가.
만약 꿈이었다면 나는 보았을 것이다. 이 건물 안에 거대한 나무가 한 계단 한 계단 자라고 있다. 건물이 뚫리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죽은 나뭇가지에도 산 나뭇가지에도 치과가 둥지를 틀고 있다. 사람들이 이빨을 빼고 있다. 만약 꿈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원히 믿지 않았을 것이다.